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67)
안에 있던 사람은 떠나도 그 사람이 머무른 자리엔 체취가 남는다. 특히 고해성사실처럼 좁은 장소라면 말이다.
짙은 빛깔의 나무로 만들어진 고해성사실에 엷은 향수 냄새가 떠돌았다.
톡 쏘듯 한 후추 냄새와 궐련의 잔향, 만개한 백합 향이 어우러진 신기한 향기였다. 왠지 어린 아가씨보다는 성숙한 귀부인이 쓸 것 같은 향이다.
‘내가 초기 방향을 잘못 잡았나 봐.’
마리엔은 조용히 눈을 굴리며 방석 위에 무릎을 꿇었다.
‘겨울 설원 냄새에 이어 온갖 향기를 다 맡을 수 있잖아. 부업으로 향수 사업이나 할걸. 그랬으면 지금쯤 제국의 개코로 유명인사가 돼서 떼돈을 벌었을 텐데.’
오로지 바일레온 하나만 보고 올인한 까닭에 자신은 지금 다른 여자 향수 냄새가 남아 있는 곳에 미인계를 쓰러 오게 됐다.
‘바일레온 주식에 올인한 과거를 절대 후회하진 않지만…….’
마리엔은 격자 칸막이 너머를 쳐다봤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일이 꼬여버린 걸까. 직접 엮이지는 않겠다고 다짐한 오데트의 지령으로 레슬리를 떠보러 오질 않나.
이러다 정신 차려보면 황제의 관을 쓴 오데트 옆에서 배시시 웃으며 파리처럼 손을 비비고 있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황제 오데트 로즈의 옆에는 언제나 충실하고 헌신적인 재상 바일레온 비어스와 어릿광대 마리엔 디디가 있더라.
갑자기 머릿속에 음유시인의 노래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마음의 준비가 끝나면 말씀하세요, 자매님.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칸막이 너머로 옆모습만 보이는 레슬리가 말했다. 방금 문장은 제법 사제 같이 들렸다. 아직 고해성사실에 들어온 사람이 마리엔인 줄 모르니까 저렇게 태연히 연기할 수 있을 터다.
그러나 죽은 첫사랑 얘기에도 태연할 수 있을까?
“저의 죄를 고백합니다.”
오래전, 오데트의 어머니는 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어린 딸에게 들려줬고, 장성한 오데트는 그것을 다시 마리엔에게 전달했다.
“아나이스 사제에게도 진심이란 게 있는지 어디 한번 시험해보자꾸나.”
“그럼 방금 전하께서 해주신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고…….”
“아니. 처음엔 아나이스 시점에서 이야길 풀어놓으렴. 그게 더 좋을 것 같아.”
마리엔은 준비해 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가족이 섬기는 주인이 있습니다. 주인은 지위가 높고 아주 엄격합니다. 한데 제가 주인이 벌하려고 가둔 죄인을 사람들 몰래 탈출시켜주었습니다.”
마리엔은 이쯤에서 레슬리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제가 입을 연 순간, 레슬리는 창문 너머의 신도가 마리엔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마리엔 입에서 나온 주인이 실은 누구인지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결과만 말하자면 레슬리의 표정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간수 몇 명을 해치기도 했습니다. 죄인은 제 비호 아래 멀리 달아났고, 안전한 곳에 다다라 가짜 신분으로 살기 시작했어요. 한편 주인과 가족들은 제가 탈출을 도운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죄인을 욕하기 바빴습니다.”
마리엔은 또다시 말을 멈추고 레슬리를 빤히 봤다. 그가 입을 열었다.
“듣고 있습니다, 자매님.”
“죄인과 헤어지기 직전, 그이가 제 팔을 잡고 질문한 순간이 자꾸 떠오릅니다.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해 갇혔기 때문에 그이의 눈은 흡사 상처 입은 야수 같았죠. 죄인이 제게 물었답니다. 왜 절 도와주냐고요.”
“…….”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마리엔은 떠보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 역시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네. 마리엔의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태어나서 처음 좋아한 사람이 하필 죄인이었던 것뿐이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상대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제 안목이 형편없다고 하고는 어둠 속으로 비틀비틀 사라졌어요.”
“그러셨군요.”
“사제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께서 제 죄를 용서해주실 것 같나요?”
이번에야말로 반문할 수 없겠지. 뭐라도 자기 생각을 얘기해야 한다. 마리엔은 레슬리의 답을 기다렸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데에 제 생각은 중요치 않지요. 전 그저 신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전하는 자일뿐. 하나 자매님께서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자애로우신 그분께선 자매님을 기꺼이 용서하실 겁니다.”
마리엔은 흐음, 하고 못마땅해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꼭 다물었다.
오늘따라 레슬리가 제법 종교인 시늉을 잘 낸다. 진짜 신도를 위안하는 진짜 사제처럼 그럴듯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저렇게 엄청나게 달라붙는 사제복을 입은 주제에.’
옆에서 보니까 일렬로 촘촘히 달린 단추가 특히 가슴 쪽에서 애를 쓰고 있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려는 옷감을 전력으로 막고 있다.
예상은 했지만 신전에서마저 저런 옷차림이라니.
아까 마주친 중년의 여성 사제를 떠올리면 더욱 한숨이 나왔다. 사제복을 멋대로 개조해 입고 다니고, 불미스러운 소문이 따라붙는 인간을 동료로 대우해주어야 한다니.
그분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신의 뜻은 그렇다 치고…… 사제님이 만일 제 경우였다면 어떻게 하셨겠어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상대는 재판에 넘겼다면 사형을 언도받았을 중죄인이었거든요. 그런 이를 위해서 주인과 가족을 저버릴 수…… 있으시겠어요?”
레슬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리엔은 격자 칸막이 너머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그를 응시했다. 침묵 속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레슬리가 천천히 상체를 틀어 마리엔을 마주 봤다.
“아아, 졌습니다.”
그가 말했다.
“어쨌든 4황녀 전하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지는군요. 한낱 사제인 절 위해서 이토록 귀여운 자매님을 보내시다니.”
레슬리가 눈을 휘며 웃었다.
“이 안에서 제게 무슨 일을 당할 줄 아시고.”
이제야 자신이 알던 교활하고 음란한 사이비 종교인 레슬리 아나이스가 돌아온 것 같다.
분명 웃는 얼굴로 위협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마리엔은 묘하게 안심이 됐다.
“게다가 오늘은 특별히 제 취향으로 꾸미셨네요. 동그란 안경이라니 정말 귀엽습니다.”
“이런 취향이었어요? 네크라인 위로 가슴을 한껏 올린 외로운 귀부인만 상대하는 줄 알았더니.”
“그분들을 너무 안 좋게 말하지 마세요. 늪지 같은 외로움에 잠겨 눈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분들이랍니다. 저는 신의 종으로서 고통받는 분들을 달래드릴 뿐.”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옴에 대한 반가움은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능청스러운 대답을 듣자 어이가 없었다.
정말이지 뻔뻔함도 정도껏 해야 들어주든가 하지.
“귀부인들을 안 좋게 말하는 거 아니거든요? 전 아나이스 사제 당신에 대해 말하는 중이거든요?”
“사랑스러운 자매님.”
레슬리가 시야 안 닿는 아래쪽에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두꺼운 격자 칸막이가 스르륵, 밑으로 내려갔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이 깍지 낀 손을 올리고 있는 절반의 칸막이뿐이다. 마리엔의 눈이 동그래졌다.
“첫 만남 때의 그녀와 같은 머리, 같은 안경을 쓰고 있지만 발끈하는 성격만은 디디 자매님 그대로군요.”
“뭐……를 어떻게 한 거예요?”
“이것 말입니까?”
레슬리가 뭐 대수냐는 듯이 격자 칸막이가 사라진 쪽을 내려다봤다.
“신전이 익숙지 않으신가 봅니다. 물론 일이 바쁘시겠지만 조금 더 자주 신전에 오도록 하세요. 그랬다면 더 일찍 아셨을 겁니다.”
고해성사실 내부에 이런 장치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자신의 상식 부족일까?
아니다. 아마 레슬리 소속 신전에만 있는 것일 터다. 어쩌면 여기가 레슬리 아나이스 전용 고해성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마리엔은 아래쪽 공간으로 쏙 들어간 격자 칸막이를 하염없이 내려다봤다. 사라지고 나니까 비로소 물건의 가치가 제대로 느껴졌다.
‘이게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네.’
좁은 고해성사실 안. 이제 레슬리가 손을 뻗으면 마리엔 자신을 만질 수 있다.
이는 당연히 반대로도 작용하므로 마리엔이 주먹을 날리면 레슬리의 눈두덩엔 시퍼런 멍이 생길 것이다.
“하여튼 4황녀 전하께선 로즈 황가의 자손답게 매정하십니다. 비어스 경이 얼마나 전하를 위해 애쓰고 있나요. 그런데도 자매님을 이토록 귀엽게 꾸며서 제게 보내셨지 않습니까.”
“자꾸 보냈다, 보냈다 하시는데 이게 어감이 이상하거든요?”
마리엔은 말을 똑바로 하라며 레슬리를 쳐다봤다.
“전하께서 절 하사품으로 내린 게 아니고요. 당신한테 뭘 좀 물어보라고 절 파견하신 거예요. 그리고…… 비어스 경도 이미 아는 사실이고요.”
“가엾게도.”
레슬리가 당치도 않게 성호를 그었다.
“신께서 우리 비어스 재상의 상처 입은 영혼을 어루만져주시길.”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무슨 유난이에요?”
다른 사제가 했으면 위로와 축복이겠지만 상대가 레슬리인만큼 장난 같은 저주처럼 들렸다.
“아, 비어스 경의 마음은 이미 한 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을 겁니다. 자매님이 이 좁은 공간에 저와 단둘이 있지 않습니까. 4황녀 전하의 명이라 괜찮은 척할 뿐이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더 짜증 났다.
마리엔은 이 자리에 없는 바일레온은 그만 들먹이라고 말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빨리하라고 닦달하자, 레슬리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간 많은 심문 현장에 있어봤지만 이렇게 막무가내인 상대는 처음이네요.”
순전히 자신을 놀릴 목적임이 틀림없었다. 뱀 같은 사제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는 시늉까지 했다.
“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이 사이비가.
“그저 토끼풀처럼 말갛게 예쁘기만 해서는.”
지금 나 머리 안 좋다고 욕하는 거지, 이 인간이?
“왕국 최고의 스파이였던 사람의 딸이 보냈다기엔 뭐랄까. 너무 안 어울리는데 이상하게 제 마음을 흔드는군요.”
마리엔은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풀었다. 레슬리의 이 말은 오데트의 친모, 세이브릴 하룬과의 인연을 인정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방금.”
“아마도 4황녀 전하께선 이 점까지 파악하신 거겠지요. 명석한 분입니다.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다들 멍청해서 나라를 말아먹었을 로즈 황가에 그녀가 가당찮은 선물을 남겨주었어요.”
레슬리는 미소 띤 얼굴로 신랄하게 황실을 깎아내렸다. 밖에서 누가 듣고는 당장 황실 모독죄를 적용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한 발언이었다.
지긋지긋한 소식통이 도처에 널린 세상이라, 마리엔은 저도 모르게 방음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티가 났나 보다. 레슬리가 안심하라는 양 고해성사실 벽면을 두드려 보였다.
퉁퉁, 나무가 울리는 소리 대신 단단하게 채워져 있는 소리가 났다.
“걱정 마세요. 여기선 사람이 죽을힘을 다해 비명을 질러도 밖에선 아무것도 안 들리니까.”
“대체 여긴…….”
뭐 이런 고해성사실이 다 있담. 마리엔은 손깍지를 풀고는, 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절반의 칸막이를 가볍게 건드려봤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건드려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지금 무릎 꿇고 있는 바닥이 꺼질 수도 있어요.”
뭐라고? 그런 건 빨리 알려줘야지. 마리엔이 얼른 손을 거뒀다. 레슬리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정말 심장에 해로운 분이네요.”
“실없는 소린 그만하고요.”
마리엔이 말했다.
“23여 년 전 그날 밤, 만삭의 세이브릴 하룬을 첨탑에서 빼낸 게 당신이 확실한가요?”
“이브.”
레슬리가 아련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자길 이브라고 소개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