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68)
“자매님도 아실 테지만 아나이스 가문은 황후파입니다. 황후 폐하께서 황태자비일 때부터 제 고모님은 그분을 모셨죠. 저의 부친 또한 정궁인 황후를 지지하십니다.”
레슬리는 갑자기 본인의 가문 이야기를 꺼냈다.
“디디 자매님은 아직 황태자 전하를 뵌 적이 없죠? 하아……. 어디서부터 입을 대야 할까요. 그 총체적 난관인 생명체를 보면 신이 로즈 황가를 저버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답니다.”
그가 황태자를 얼마나 경멸하고 있는지가 표정과 말투와 눈빛에서 선명히 묻어났다.
“성미는 급하지요. 폭력적인 성향을 타고났지요. 그럼 어릴 때부터 바로잡아야 하건만, 적자를 낳은 기쁨에 취한 황후께선 외아들을 싸고도셨습니다. 부군이신 황제 폐하께선…….”
레슬리는 적절한 표현을 고르느라 잠시 말을 멈췄다.
“이런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그분은 자신의 적자가 너무 뛰어나길 바라지 않았어요. 그래서 황후의 행동을 묵인하셨고요. 황비들은 내심 기뻐하며 동조했죠.”
“왜 총체적 난관이라고 했는지 대강 이해가 되네요.”
평범한 집 아이가 아니다. 나중에 제위를 물려받을 수도 있는 아이를 저마다의 이유로 망쳤다. 지금의 황태자는 어리석은 황실 사람들의 합작품이다.
‘알면 알수록 별로인 인간들.’
마리엔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제국이 멍청한 폭군 손에 떨어졌을 시 평범한 사람들이 받을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거지?’
마리엔은 오데트가 제위에 올라야만 하는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레슬리의 말대로 로즈 황가는 답이 없다.
“당장 자매님이 황태자 자릴 넘겨받아도 그자보다는 잘할 겁니다. 게다가 미감은 얼마나 형편없는지…….”
레슬리가 그토록 치 떨리는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다. 실제로 붉고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마리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길 좋아하는 레슬리와 비열한 기질의 황태자가 마주하는 상황을 떠올려봤다.
원작에 없는 내용이지만 그냥 쉽게 상상이 갔다. 두 사람은 천적이다.
“말이 엇나갔군요. 아무튼 23여 년 전, 저는 이브와 오페라 하우스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렸습니다.”
세이브릴은 아주 수수한 차림새였단다. 목소리는 얼마나 가냘픈지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가까이 다가서야만 했다고.
그 모든 것이 훈련받은 스파이로서 의도한 바인 줄 몰랐던 레슬리 아나이스는 머지않아 그녀가 하는 말을 전부 믿게 됐다.
“제가 순진한 게 아니라 이브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났던 거예요.”
그리고 뛰어난 스파이 세이브릴은 레슬리를 징검다리 삼아 당시 황태자에게 접근했다.
마리엔은 여기서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질문의 답은 레슬리에게서만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이건 개인적인 궁금증인데요. 하나만 물을게요.”
“네, 뭐죠?”
“23년 전 황태자의 매력이 뭐였나요?”
마리엔은 진지했다.
“하룬 같은 일급 스파이가 조국을 등지겠다 결심할 만큼 매력적이어야 하잖아요, 상식적으로.”
“폐하의 매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고 하면 성을 낼 기세군요.”
“당연하죠.”
마리엔이 이제껏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현 황제는 권력욕 가득한 인간 불신자였다. 더도 덜도 않고 딱 거기까지인 놈이다. 나중에 오데트 앞에 무릎 꿇고 빌빌거릴 장면만 기대되는 놈.
그런데 세이브릴은 일급 기밀을 들고 조국에 돌아가 포상받을 기회를 목전에 뒀으면서 현 황제의 곁에 남기를 택했다.
몇몇 독자는 그녀가 남자 보는 눈이 없다고 말했다. 설령 그들이 안타까운 마음에서 한 말이라도, 마리엔 자신은 세이브릴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판단 실수? 할 수도 있지.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어. 하지만 그러려면 최소한 저 황제 놈이 바일레온과 카인과 레슬리를 합친 것만큼 잘생기기라도 해야 돼!’
그래야만 이 답답하고도 억울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달래지겠다.
“지금 저래 봬도.”
레슬리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선 왕년에 대단하셨습니다. 신년 행사 때면 황태자의 존안을 한번 보려고 저 멀리 외국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든걸요. 게다가 이브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그분도 꽤 진심이었답니다. 이제 좀 위안이 되십니까?”
마리엔은 새침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런 다음 레슬리와 세이브릴, 두 사람이 헤어지던 마지막 순간으로 돌아갔다.
“안목이 형편없다는 말 말고 하룬이 원래 하려던 말이 뭔지는 모르죠?”
“비하인드 스토리인가요.”
“두 번째 사랑은 나보다 덜 위험한 여자로 찾길 바라요.”
오데트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세이브릴은 어린 딸에게 그 말을 한 후에 살짝 웃었다고 했다.
아직 어리지만 정말 소름 끼치게 잘생긴 소년이었다고.
아나이스 가의 영식이 예사 인물이 아닌 것쯤은 첫 만남에 바로 알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런 이가 사형수를 구하겠다고 손에 피를 묻혔는데 별로 떨지도 않더라. 그래서 소년의 도움을 받고도 안목이 형편없다고 힐난했어. 적어도 내 경우와 비슷한 일이 두 번은 없어야지 않겠니. 왜냐면, 오데트. 내가 원래 하려던 말을 하면 남자는 엄마를 따라나설 게 틀림없거든. 어떻게 그런 말을 남기고 뒤돌아서는 이브를 그대로 보내겠니. 아, 그건 남자도 아니지.”
마리엔은 오데트에게 들은 그대로를 전달했다. 사실 한 번 듣고 외웠다면 참으로 좋았겠지만, 마리엔은 오데트 같은 천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면 수첩에 또박또박 받아 적어서는 열심히 외웠다.
연습이 헛되진 않았는지 방금 레슬리 앞에서 말할 땐 당시 세이브릴의 담담한 말투가 잘 재현된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잘했다며 마리엔은 스스로 칭찬했다.
“하만의 정보국이 대단한 인재를 잃었습니다. 그렇죠?”
레슬리 입에서 나온 첫 소감이었다. 첨탑의 감시병들을 죽일 때도 별로 떨지 않았다는 그는 첫사랑의 뒷얘기를 듣고도 태연했다.
속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마리엔 눈엔 태연한 것처럼 보였다.
“대단한 이브. 저와 헤어진 후로도 몇 년이나 황실의 추격을 피해 다녔어요. 그녀의 능력이면 제3국으로 떠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 4황녀 전하께서도 여쭤봤대요. 엄마는 그들에게 복수하려고 계속 제국령에 사는 거냐고.”
레슬리가 웃었다. 그는 참 4황녀다운 질문이지 않으냐고 동의를 구했다. 고작 예닐곱 살인 아이가 복수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알고는 어머니와 뜻을 함께하려는 것이 아니냐며.
“그래서 이브는 뭐라고 대답했답니까?”
“내 복수는 오데트 네가 무사히 태어난 순간 이미 끝났다고 했다네요. 소중한 딸 앞에선 황실에 대한 적의든 뭐든 죄다 빛을 잃어버려서 무의미하게 느껴진다고.”
세이브릴 하룬의 실력은 여전하다. 적의 추격을 피하는 데엔 자신 있다. 그러니 가능한 한 오래도록 들판이 아름다운 제국령에서 우리 모녀끼리 잘 살자고 했댔다.
세이브릴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스파이란 신분에도 남은 생을 걸 만큼 적국의 황태자를 사랑했던 그녀는 똑같이 온 마음을 다 바쳐 딸을 사랑했다.
“하나 4황녀께선 내심 스스로를 탓하셨겠군요.”
레슬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세이브릴은 순수한 애정에서 한 말이었어도, 오데트는 본인의 병약한 몸이 어머니의 자유로운 운신을 막는다고 생각했단다.
상대에게 숨길 수밖에 없었던 마음들. 이해는 가지만 역시 안타깝다. 마리엔의 입안이 써졌다.
돌연 레슬리가 그나저나 바일레온과의 교제가 불편하지는 않냐며 화제를 전환했다.
아까도 바일레온을 가여워하는 척하며 괜히 연인 사이를 들쑤시더니 또 이런다.
“몸이 깨끗하면 뭐 합니까. 비어스 경은 마음이 한 번 다녀왔는데. 그렇지 않나요? 자매님과 만나기 전 10여 년의 세월을, 그동안 재상이 전하와 쌓은 추억을 아무렇지 않아 하기란 힘들 거랍니다.”
본인 첫사랑이 망했다고 잘 사귀고 있는 남까지 걸고넘어지는 건가. 마리엔은 인상을 북 썼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소한 부분까지도 옛사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겠죠.”
“첫사랑 말아먹고 사제가 된 분한테서 듣고 싶은 말은 아니네요.”
마리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다 보니 여태 방석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중간부터는 서서 얘기할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전할 말은 다 전달했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
카인이 본인 뜻을 밀어붙여서 사람을 열 받게 한다면, 레슬리는 마음의 틈새를 교묘히 후벼 파는 유형이다.
이런 인간과 말을 오래 섞어봤자 듣는 사람 속만 뒤집힌다. 용무가 끝났으니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언제나 신의 가호가 자매님과 함께하시길.”
마리엔은 인사에 따로 대답하지 않고 고해성사실을 나갔다.
방문객이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날 때까지, 레슬리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무려 23여 년이 흐른 후에야 듣게 된 이야기.
“그건 남자도 아니지……라고 딸에게 말하다뇨.”
그의 입가가 경련처럼 떨렸다. 생각할수록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레슬리는 방문객이 떠나간 빈자리를 보았다.
“잠시라도 망설였다간 남자도 아닌 게 될 뻔했군요.”
세이브릴의 딸은 커갈수록 점점 어머니의 이목구비를 닮아갔다.
장밋빛 눈동자만 로즈 황가의 그것이지, 오데트의 재능과 말투는 영락없이 세이브릴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귀여운 측근을 당시 제 어머니처럼 꾸며서 레슬리에게 보내다니. 그런 발상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죽은 어머니가 꿈에 나와서 알려주기라도 했나?
표면적으로 자신은 어쨌든 2황자가 신뢰하는 2황자의 사람인데 말이다.
“재밌어…….”
오데트가 시킨다고 맨몸으로 털레털레 찾아온 마리엔 디디는 또 어떻고.
본인이 오늘 여기로 보내진 목적이 진짜 말을 ‘전달’하는 전령인 줄만 아는 눈치였다.
회유까지는 생각도 못 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고해성사실에 들어온 후로 한 번을 안 웃었지.
인상만 북북 쓰다가 나간, 요령 없는 마리엔을 떠올리자 발작적인 웃음이 나오려 했다. 설득당하는 순간을 자각 못 하게 하는 세이브릴과 정반대다.
하여튼 4황녀궁에 웃긴 인간들이 몰려 있는 건 사실이라며, 레슬리는 결국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 ◆ ◇
“살아 돌아왔구나.”
마리엔이 4황녀궁 응접실로 들어서는 것을 본 오데트가 한 말이었다. 도저히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발언이다. 마리엔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죽을 수도 있는 곳에 절 보내신 건가요?”
“네가 일대일로 만난 인물은 아나이스 사제야. 당연한 거 아니니?”
오데트는 외려 마리엔이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만한 각오도 없이 팔랑팔랑 신전으로 들어간 거냐며. 그렇게 위기의식 없이 사는 건 어떤 느낌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이분이 또 나를 자연스럽게 엿 먹이시네.’
눈 돌아간 반라의 카인 블랙우드에게 쫓길 때. 그때를 제외하면 목숨을 위협당하는 경험은 죄다 오데트를 통해서 했다.
전장의 검은 사신으로 군림하는 카인이 어때서? 레슬리가 소년 시절부터 경비병을 푹, 찍, 한 게 뭐 어떻다고?
“저는 전하가 제일 무섭거든요.”
“그것도 참 희한한 얘기야. 날 정말 무서워하면 내 앞에서 온갖 말을 늘어놓을 순 없거든. 디디 너처럼.”
“……어쨌든 살아 돌아왔고요. 보고하겠습니다.”
마리엔은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