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75)
카인의 심기가 단단히 뒤틀렸다. 무릎 꿇고 빌지 않는 이상 그가 6번 자리 가까이 올 일은 없어 보였다. 마리엔의 속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밀려 나왔다.
‘흰 예복 입은 남자들을 다 앞쪽에 몰았나. 왜 이렇게 많아…….’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도 흰옷 입은 남자, 오른쪽으로 돌려도 흰옷 입은 남자가 보인다.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쳤다. 오데트는 출처를 밝힐 수 없는 정보 때문에 자리 배치를 바꾼다고 했다. 그 결과 마리엔은 바일레온보다도 오데트와 더 가까이 서게 됐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면 오데트는 자연히 몸을 돌려 뒤쪽을 볼 것이다. 이 상태로 습격자가 오데트의 오른 방향에서 뛰어들면, 마리엔은 꼼짝없이 방패 역할을 하게 생겼다.
‘이거 혹시 오늘 습격을 역이용해 날 제거하려는 오데트의 큰 그림이 아닐까.’
그러나 마리엔은 쓸데없는 생각을 즉시 집어치웠다.
오데트에게 제가 얼마나 하찮은 존잰데. 고작 마리엔 따위를 치우려고 오데트가 큰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다. 먹보 측근의 음식에 독 한 방울만 타면 된다.
게다가 좀 모순적이긴 하지만 마리엔은 ‘쓸모가 많은’ 존재다. 이는 오데트도 말한 적 있지 않은가. 마리엔을 손에 쥐고 있는 이상 바일레온과 카인, 그리고 레슬리의 호의까지 잡아둘 수 있다고.
‘하찮은데 쓸모가 있어. 심지어 난 말도 잘 듣지. 저기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잖아. 오데트에게 난 하늘이 내린 복덩이야. 날 왜 죽이겠어?’
마리엔은 핏빛 가넷과 진주 장식을 드리운 오데트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지금이라도 조심스레 불러볼까. 근데 부른 다음엔 뭐라고 말하나.
곧 흰옷 입은 남자가 전하를 습격할 텐데 자신은 방패막이 역할 하기 싫다고?
마리엔은 고작 몇 발짝 거리의 2황자를 슬쩍 봤다. 아무리 목소리를 낮춘다고 해도 2황자 귀에 들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방향을 틀어서 2황자 귀에 속삭이고 싶다.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오데트 못 이겨.”
잔인한 놈이 욕심만 많아서는 황태자 끌어내린 지 얼마 됐다고 바로 여동생한테 손쓰는 거 봐라.
그래도 황후와 황태자가 있을 땐 일을 꾸며도 꼬리 안 밟히려는 시늉 정도는 했었다. 한데 이제 가장 큰 방해물을 치우고 나니까, 속도 조절이 안 되나 보다.
‘지금 이 기분을 실컷 즐겨. 어차피 넌 내년에 죽어. 네겐 단두대도 사치라서 이름과 신분 다 뺏긴 채 노역장에서 구르다 죽을 예정이니까.’
마리엔은 꼴 좋다는 듯이 비웃다가 서둘러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다. 2황자는 내년 초겨울에 죽는다. 문제는 그렇게 비웃은 2황자 놈보다 마리엔 자신이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것도 오늘 저녁에.
삼십 분 안에 죽을지도 모르는 저와 비교하면, 살날이 1년 수개월이나 남은 2황자는 장수촌 주민처럼 느껴졌다.
‘내가 매달릴 곳은 또 한 군데뿐인가…….’
눈꼬리에 유리구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 마리엔은 최대한 가련한 얼굴로 건너편에 서 있는 바일레온을 쳐다봤다.
첫사랑을 보호하려고 본능적으로 몸을 던지는 내 남자, 에 대한 씁쓸함 따위 창공으로 날려 보낸 지 오래다.
‘바일레온! 여기 좀 봐요. 나 죽게 생겼다고……!’
결정적인 순간에 바일레온의 움직임이 굼뜨다 싶으면 등을 세게 떠밀 준비마저 됐다.
마리엔은 바일레온의 시선을 잡아끌려 애썼다. 습격대가 언제 움직일지 몰라서 오데트 주변을 떠나지도 못하는 게 원통했다.
‘내가 이렇게 애국한다……. 아니야. 헛소리할 때가 아니지. 아, 급하니까 자꾸 주의가 산만해져.’
이럴 줄 알았으면 철판 덧댄 복대를 자신이 차고 올 걸 그랬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마리엔은 급한 대로 호신용으로 삼을 만한 물건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시종들이 들고 다니는 은쟁반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라도 갖고 있어야겠어.’
마리엔은 샴페인 쟁반을 든 시종에게 눈짓했다.
사건 발생 예정 시각이 가까울수록 마리엔 쪽으로 눈길 주지 않는 바일레온과 달리, 멀리 벽 쪽에 서 있던 시종은 마리엔의 부름을 단번에 캐치했다.
‘좋아.’
한편 황제의 치하가 끝나자 해군 소령이 감사인사를 했다. 농담조의 말을 곁들였는지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샴페인 쟁반을 든 시종은 순조롭게 마리엔에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조금 더 빨리 오면 좋겠지만 그는 손님들 사이로 지나다녀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샴페인 잔은 옆 사람들에게 반강제로 들려주고, 난 쟁반만 끌어안으면…….’
그때 한 남자 손님이 시종을 멈춰 세웠다. 손님은 본인이 다 마신 잔을 쟁반에 내려놓고는 새 샴페인 잔을 들었다. 마리엔의 눈초리가 대번에 매서워졌다.
‘어디서 굴러온 주정뱅이야?’
다음 순간, 남자 손님과 시종 사이의 공간에서 웬 팔이 쑥 나타나더니 은쟁반을 세게 쳐올렸다.
허공으로 떠오른 크리스털 잔이 이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잔보다 무거운 은쟁반은 미끄러운 바닥 위를 몇 번이나 회전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모두의 시선이 뒤로 쏠렸다. 누군가가 잔뜩 겁에 질려 뒤집힌 목소리로 외쳤다.
“피…… 피다!”
놀란 손님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러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저쪽에서 누군가 소리 질렀다.
“다들 도망쳐요! 폭약이 있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굉음이 울리며 테라스와 연결된 창문 하나가 박살 났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피가 있다고 할 때만 해도 웅성대는 수준이던 손님들은 폭발음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시작됐어.’
마리엔은 황급히 오데트의 팔을 잡았다. 어찌 됐건 오데트를 두고 튈 순 없는 노릇이다. 한데 내뻗은 손에 잡힌 건 오데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이거 놔!”
“죄, 죄송합니다.”
마리엔은 얼른 손을 놓았다. 근처에 있던 황족으로 보이는 여자는 자기 경호원을 찾으며 비명을 지르기에 바빴다.
‘오데트는 어디 있지?’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오데트가 사라졌다. 마리엔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데트를 찾아 헤맸다.
“근위대는 어디 있나!”
“아아악!”
“추, 추, 출입구……! 비켜! 앞길 가로막지 말라고!”
폭발보다도 정신없는 와중에 넘어져서 다치는 이가 많게 생겼다. 마리엔 또한 그중 한 명이 될지도 모른다. 곰 같은 체구의 남자가 마리엔을 거칠게 밀쳤다.
“죽고 싶나? 비켜!”
“너나 죽어!”
절대 가만히 참아줄 마리엔 디디가 아니다. 마리엔은 소리를 빽 질렀다. 도망치면서도 황당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보긴 뭘 봐, 나쁜 놈아! 꼭 너 같은 놈이 제일 먼저 죽더라!”
하마터면 바닥에 고꾸라져 크게 다칠 뻔했다. 분이 가라앉질 않는다. 마리엔은 남자를 향해 주먹까지 흔들어 보였다.
그나저나 오데트는 어디 있을까. 바일레온은 또 어디 있으며, 힘으로만 따지면 사람들 다 내보내고 자기 혼자 상황을 정리해야 마땅한 카인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망할 드레스!’
마리엔은 욕을 삼켰다. 스커트 무게 때문에 날래게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상체를 조금만 비틀려고 해도 회전력이 실려서 180도 돌게 된다.
말 그대로 과시용이다. 남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최적화된 의상. 이후엔 바일레온이 중심축 역할을 해주면 거기에 몸을 맡겨서 춤 한두 곡 추는 게 전부일 옷이다.
마리엔은 치미는 역정을 누르고 주변을 살폈다.
‘일단 호신용품이 될 만한 것부터 확보하자.’
꽃병? 적에게 던졌다가 빗나가면 산산조각이 난다. 날카로운 파편이 바닥에 흩어질 것이다. 애꿎은 부상자만 늘기 딱 좋다.
희고 두꺼운 테이블보? 펄럭 휘둘러서 습격자의 시야를 차단하기에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상대가 칼로 테이블보를 갈기갈기 찢는 순간 게임 끝. 일회용에 그칠 듯하다.
‘역시 은쟁반이 휘두르기도 가능하고 방패로 쓰기 좋은데!’
아까는 고개만 돌려도 시종들이 보이더니, 정작 필요한 타이밍이 되니까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쟁반 들고 벌써 튄 걸까. 빠르기도 하다.
다음 순간,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신사용 지팡이가 눈에 들어왔다. 마리엔은 반색하며 지팡이를 주워 들었다.
멋을 부린답시고 손잡이에 백금으로 된 독수리 머리 모형을 끼우고, 바닥 짚는 부분을 뾰족하게 처리한 게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짙은 나무색 몸체 또한 여간해선 안 부러지게 생겼다.
좋다. 이거다. 이 지팡이라면 역으로 다칠 위험 없이 몇 번은 휘두를 수 있겠다.
‘오데트……!’
일이 풀리려고 그러나. 쓸 만한 호신용품을 얻자마자 인파 속에서 오데트를 발견했다. 마리엔은 지팡이를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전하!”
신원이 특정되면 안 되니까 일부러 4황녀라는 말은 생략했다. 오데트는 마리엔의 목소리를 안다. 황녀가 고개를 돌려 마리엔을 쳐다봤다.
“거기 계세요!”
마리엔은 오데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였다. 둘 사이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바일레온과 카인을 불러 경호를 맡기면 되겠다 싶을 즈음이었다.
“바일…….”
목소리가 갑자기 기어들어갔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기운 때문이다. 마리엔은 힐끔 곁눈질했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저절로 고개가 그 남자를 향해 돌아갔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다들 출입구로 달려가는데, 남자는 혼자 역방향으로 오던 중이다. 게다가 남자는 눈부시게 하얀 예복 차림이고.
‘피하는 게 좋겠어…….’
마리엔이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남자가 품속에서 단검 두 자루를 꺼내 들었다.
“망할.”
저 새끼다. 오늘 습격대의 행동대장.
“근데 왜 나한테 와?”
남자의 걸음이 빨라지며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어어, 하는 새에 놈은 벌써 마리엔의 코앞에 있었다.
바로 첫 번째 공격이 들어왔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놈은 마리엔의 목을 노리고 단검을 휘둘렀다.
바야흐로 휴고와의 호신술 연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마리엔은 재빨리 상체를 뒤로 빼며 공격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지팡이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불안하더라도 공격하는 적의 손 대신 적의 눈을 응시할 것. 팔다리로 하는 공격은 주변시(周邊視)로도 방어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니 반응속도를 높이는 데에 집중하자.
귀찮았을 텐데도 차근차근 눈높이 수업을 해주던 휴고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이 미친! 놈이! 이렇게! 연약하고! 귀여운! 나를!”
마리엔은 힘껏 지팡이를 휘둘러 적의 단검을 쳐냈다. 설마 공격대상이 역공할 줄은 몰랐는지, 남자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어!”
이 순간만은 내가 세이브릴 하룬이다! 마리엔은 미친 토끼의 안광으로 기선 제압을 시도했다.
내 어머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