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78)
마리엔은 오데트 뒤에 찰싹 달라붙은 채 간신배처럼 웃었다.
‘오데트의 이성에 호소하려 했겠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북부 놈.’
많고 많은 예시 중에 하필 하만 왕국을 들먹이다니. 거긴 오데트의 어머니가 나고 자란 나라다.
세이브릴은 딸을 혼자 키우며 고향 이야기를 많이 했을 거다. 어릴 때 먹었던 간식, 이웃집 사람들, 거리의 풍경 같은 것들. 그 이야기를 할 때 묻어나는 그리움이 어린 오데트에게도 스며들었을 터다.
오데트 역시 카인과 마찬가지로 미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어머니의 나라를 폄하하는 걸 가만두고 볼 리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잘라라, 짝! 잘라라, 짝!’
마리엔은 속으로 구호와 함께 손뼉을 쳤다. 머리카락이든 아랫도리든 카인의 것이면 뭐든 자르고픈 심정이었다.
물론 카인은 제 손으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조세야 계약이 아니었으면 어차피 내야 하는 돈이다. 그 돈을 낸다고 해서 블랙우드 가문이 휘청하지는 않는다.
하나 카인의 머리카락은 다르다.
아무리 마리엔 디디가 욕심난다고 해도 대체 불가능한 힘의 원천을 카인 스스로 자를 리 없다. 그것도 이 자리에서, 약혼녀에게 떠밀리듯이는 더더욱!
‘제멋대로인 북부 놈이 드디어 궁지에 몰린 꼴을 보니까 고소하긴 한데.’
마리엔은 카인의 얼굴을 주시했다.
‘설마…… 아니겠지?’
묘하게 불안했다.
‘네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머리카락을 뎅겅 자르지는…….’
그때 카인이 입을 열었다.
“자르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머리카락을 자름으로써 달라진 힘의 세기를 어떻게 확인하실 거냐는 점이죠.”
일단 허세를 부려보는 카인이다. 이 정도야 예상범위 안이다만은.
“맨손으로 아름드리 통나무 쪼개기가 가능한 사람은 이 나라에서 공작뿐이겠죠. 한데 공작의 질문을 듣고 나니 나도 궁금하군요. 어깨 길이로 자르면 힘이 어느 정도 남으려나.”
“4황녀께선 이미 정답을 알고 계십니다.”
카인이 목소리를 깔았다.
“제 힘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애초에 머리카락과 힘은 관련이 없거든요.”
“관련 없기는 개뿔…….”
마리엔이 구시렁거렸다. 그러자 카인이 시퍼런 살기가 담긴 눈빛을 쏘아 보냈다. 저렇게 잡아 죽일 듯이 쳐다보는 상대를 정부로 삼겠다는 것도 우습다.
‘이거 나만 웃겨?’
레슬리 때도 느꼈지만 이 나라 남자들은 뭐가 문제일까. 하여튼 마리엔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이어지는 카인의 말을 들었다.
“4황녀, 전 이미 100년 치 조세 면제권을 포기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추가로 머리카락까지 자르라고 하시니.”
어째 이야기가 흘러가는 분위기가 불길하다.
“자르겠습니다.”
“야.”
네놈이 언제 그렇게 말을 잘 들었다고.
“자른 후에 통나무 쪼개기까지 보여드리죠. 됐습니까? 그렇게 하고 나면 감히 공작에 관한 허위사실을 나불거린 저 보좌관을, 제 손에 넘겨주실는지.”
저 발언은 허세가 아닌 것 같다. 놈은 실제로 저지를 마음을 먹은 것이다. 마리엔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바일레온이 제 연인이 되고, 오데트가 제 명줄을 쥔 직속 상관이 된 지금, 솔직히 카인의 머리카락 따윈 상관없었다.
민머리가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다. 그냥 깐 달걀 된 꼴을 보면 재밌겠다 싶을 뿐. 마리엔에게 진짜로 중요한 건 오데트의 뜻이다.
저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입을 싹 닦을 순 없지 않겠냐. 오데트가 그렇게 말하며 공작의 손을 들어주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야, 야, 야, 잠깐만!”
너무 급한 나머지 공작을 ‘야’라고 부르는 평민 출신 보좌관이 여기 있다.
“너, 잠깐 조용히 하고 있어.”
마리엔은 황급히 오데트의 심기를 살폈다. 불안한 티가 나지 않는 웃음을 지으려니 얼굴에 약한 경련이 왔다.
“전하,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드디어?”
마리엔은 입을 토끼처럼 오므리고 원망의 눈으로 오데트를 쳐다봤다. 마냥 귀여운 미모로 승부하는 것 같아 봬도 자신은 생각을 정말 오래 하는 타입이다.
“블랙우드 공작은 제국의 소중한 인재잖아요. 전 제국 땅에 발 딛고 사는 공무원으로서 공작의 힘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건 국가적 손실이죠.”
마리엔은 진심이라곤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소릴 줄줄 읊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냈다.
‘과연 내가 블랙우드 영지의 100년 치 조세를 능가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오데트를 설득할 수 있을까.’
마리엔은 종이에다 글귀를 급히 휘갈겼다. 그러고는 오데트를 향해 수첩을 내밀었다. 이를 본 황녀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마리엔의 가슴이 졸아붙었다. 설득이 통했을까? 아니면 망했나?
“……내 장난이 지나쳤군요. 공작에게 사과드리죠. 부디 머리카락을 자르지 마세요.”
통했구나!
마리엔은 수첩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입가에 스멀스멀 번져나가는 웃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바일레온이 정확히 봤다. 자신은 뭔가를 감추는 데에 영 소질이 없다.
“아뇨, 전 자를 겁니다. 막지 마십시오.”
“그래요? 자른다고 해서 공작에게 득이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데도? 난 이 자리에서 디디 보좌관의 거취를 정하지 않을 거예요.”
갑작스러운 상대의 변심에 카인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왜냐면.”
오데트는 자기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검지를 들어올렸다.
“오늘 공작의 방문은 예정에 없었거든요. 공작도 이미 알다시피 난 몸 상태 때문에 하루에 둘 이상의 손님을 맞을 수 없어요. 우리의 계약과 관련한 중요한 문제를 이렇게 농담 따먹기로 처리하기도 싫고요.”
그러니 계약을 수정하고 싶다면 정식으로 접견 날짜를 잡아서 4황녀궁을 찾아달라고 말했다.
비록 카인 블랙우드가 미친놈이긴 하나, 오데트에게 억지를 쓸 만큼 판단력이 떨어지진 않는다. 결정권자인 오데트를 더 밀어붙여서 본인에게 좋을 건 없다.
머리카락을 안 잘라도 되는 건 덤이고.
“어쨌든 거절한 건 아니라고 받아들여도 됩니까?”
“네, 그저 차후 논의하자는 뜻이에요.”
“……알았습니다.”
카인이 마리엔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후환이 두렵지도 않으냐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마리엔은 코웃음을 쳤다.
마리엔 디디는 후환 따위 모른다. 그런 거 무서워했으면, 애당초 전장의 사신 머리카락 자르겠다고 난리 치지도 않았다.
위대하신 원작 여주님만 내 편이라면야 뭐.
‘다른 놈은 죄다 피라미지.’
카인은 들어올 때와 달리 예를 갖춰 인사했다.
“물러가겠습니다. 조만간 찾아뵙죠.”
그가 응접실을 나갔다. 주종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오데트는 닫힌 응접실 문을 쳐다보다가 입을 뗐다.
“네 말에 동의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황녀의 표정은 다소 복잡해 보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이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네가 했었지. 황당하게도 복숭아 케이크를 들먹이면서. 사제를 만나러 신전에 다녀온 날 말이야.”
“네, 기억나요.”
“그 사람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안 다음에 그 점을 공략해야 마땅하다고.”
“그럼요, 그럼요.”
“하지만 난 그딴 걸로 사람이 쉽게 흔들릴 리 없다고 생각했거든.”
우리의 냉철한 원작 여주님다운 발언이었다.
“한데 아니네.”
“…….”
“흔들리네.”
“…….”
“원래라면 내가 할 법한 생각을, 네가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이 하니까. 그냥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네게로 돌아서게 되는구나. 꽤 신기한 경험이야.”
마리엔이 씩 웃었다. 오데트가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하다. 왜냐면 자신이 쓴 문장은 원작에서 오데트가 한 혼잣말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지 마라. 줄 수 있다는 여지만 흘려라. 일회성 선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일회성 보답뿐이다.
카인 블랙우드의 가치는 블랙우드 영지에서 거둘 수 있는 100년 치 조세보다 높다. 공작 개인의 무력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그러므로 공작이 강렬히 원하는 무언가가 생겼다면 그것을 냉큼 내주고 돈을 받을 것이 아니라 건네는 시기를 최대한 미루어야 한다.
마리엔은 오데트에게 그 점을 일깨운 것이다.
바로 원작 후반부에 나올 오데트의 혼잣말을 빌려서.
“비어스가 어쩌다 본인과 겹치는 구석이라곤 없는 널 좋아하게 됐을까. 다른 점이 매력이라기엔 너무 극단적으로 다르지 않나. 널 보고 있으면 종종 그런 의문이 들었는데 말이야. 이젠 조금 알 것도 같아.”
오데트가 말을 이었다.
“네겐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사람 마음을 읽는…….”
꽤 감명 깊다고도 할 수 있는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데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리엔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귀여운 배꼽시계 수준이 아니었다. 별안간 끼어든 괴성에 오데트가 입을 다물었다. 이어서 두 번째로 꼬르륵 소리가 났을 때 황녀는 “네 배 속에 두꺼비라도 기르는 거니?” 하고 물었다.
◇ ◆ ◇
“너 요기하라고 내오긴 했다만 정말 혼자 다 먹었구나.”
“엇, 전하께서도 출출하셨어요? 혹시 이거 2인분이었나요?”
“그건 아니지만…….”
“다행이다.”
마리엔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긴 전하께서 아무리 식사량이 적으셔도 요게 2인분일 리는 없죠. 이건 그냥 허기를 잠시 달래는 정도.”
오데트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에 마리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인데요. 백작가에 돌아가서 점심 먹을 거 염두에 두고 일부러 자제한 건데.”
오데트는 접시들을 내려다봤다. 훈제연어를 올린 샐러드와 버터 비스킷이 있던 접시는 강아지가 핥은 듯이 깨끗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구운 옥수수 반 개, 멜론 두 조각, 미트 파이 한 입 정도.
시금치 수프는 그릇 바닥에 아주 조금 고여 있었다. 그릇을 기울여 스푼으로 긁어모으면 간신히 한 입쯤 나올까.
“남겼잖아요?”
마리엔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오데트를 말갛게 쳐다봤다. 오데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에 관해서 더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아무튼 간식 대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배가 금방 꺼지는 느낌이에요. 아마도 부상 때문인가 봐요.”
오데트가 붕대 감은 마리엔의 팔을 성의 없이 쳐다봤다. 설마 그것 때문이겠니, 하는 눈빛이다. 당연히 마리엔은 어젯밤 입은 부상 때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참, 전하.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하렴.”
“어차피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