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8)
이런 질감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으려나.
푹신하다고 하면 솜으로 채운 베개처럼 힘없이 들린다. 그렇다고 마냥 단단한 것도 아니다. 바일레온의 가슴은 충격을 완화시킬 만큼 두툼하면서도 탄력적인 느낌이었다.
‘탱탱하다?’
완전 변태, 변태, 상변태. 마리엔 디디 아주 못 하는 말이 없지!
바일레온의 품에 쏙 안겨 있으니 아까 잠깐 맡은 민트 비누 냄새가 났다. 가까이서 맡으니까 더더욱 싱그러운 향내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실컷 맡아보겠냐 싶었다. 마리엔은 바일레온이 대사를 읊는 동안 열심히 심호흡했다.
이 좋은 냄새를 어딘가에 저장해두는 방법은 없을까? 향수로 만들 수 있다면 삶이 힘들 때마다 공중에 뿌리면서 마음을 다독일 텐데.
“디디 보좌관, 내가 생각해봤는데요.”
“……네? 아, 네.”
바일레온이 마리엔을 자기 품에서 떼어냈다. 그와 함께 좋은 냄새도 멀어졌다. 아쉬워라.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손목을 잡아당기는 건 너무 폭력적이에요.”
그는 천천히 마리엔의 등 뒤로 이동했다.
“막상 실전에서 내가 힘 조절을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
“별걱정을 다 하신다고 감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도대체 왜 나를 무작정 믿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 이래 봬도 힘이 꽤 세거든요.”
그 팔뚝, 그 가슴, 그 허벅지를 가지고 힘이 없으면 그거야말로 문제가 심각한 거거든요. 마리엔은 조용히 눈을 굴렸다. 바일레온은 오데트 손목을 놓치면 놓쳤지, 절대 그녀를 다치게 할 리 없으련만.
그 사실을 바일레온 혼자만 모른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는 게 목적이라면 차라리.”
다음 순간, 바일레온이 등 뒤에서 마리엔을 끌어안았다.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의 넓은 가슴이 이번엔 등으로 느껴졌다. 그는 마리엔을 속박하듯이 껴안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마리엔의 얼굴 바로 옆에 그의 얼굴이 자리하게 됐다.
두 사람의 뺨이 살짝 맞닿았다.
바일레온의 부드러운 뺨이, 살갗 위로 비벼졌다.
“이렇게 뒤에서 안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
“어때요?”
바일레온의 연습을 위해서 제 손목쯤은 멍이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마리엔은 그 무엇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한데 지금 같은 상황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와 뺨이 닿아 있는 부분이 간지러웠다. 꼭 바람에 날아온 민들레 홀씨가 제 뺨에 붙은 것 같았다.
잠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마리엔의 머릿속은 민들레 홀씨처럼 하얘졌다가 북부 놈의 머리카락처럼 까매지길 반복했다. 당연히 말도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으, 으아, 어…….”
어떠냐는 질문에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제 입에선 이상한 소리만 새어나왔다.
“으아아.”
“……!”
바일레온이 화들짝 놀라 몸을 떨어뜨렸다. 그는 얼른 부하의 몸을 여기저기 살피면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마리엔이 입을 금붕어처럼 뻐끔거릴수록 그의 얼굴도 무섭게 굳어갔다.
“아, 아픈 게 아니라.”
간신히 인간의 언어 비슷한 것을 쥐어짜낼 수 있었다.
“되게 가까워서, 어, 얼굴이 닿고. 네, 그래서.”
“놀랐군요.”
“네에…….”
바일레온과 닿았던 부분이 아직도 간질간질했다. 그 상태로 조금만 고개를 더 움직였으면 그의 뺨에 제 입술이 닿았을 상황이었다. 살갗에서 느껴지던 체온과 나직한 목소리, 숨소리, 좋은 냄새, 그리고 앞으로 쏟아져 내린 아몬드 색 머리카락.
단순한 설렘을 넘어서 충격에 가까웠다. 맨살이 맞닿을 때만 느껴지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걸까. 이래서 오데트가 그날 밤 이상야릇한 꿈을 꿨나.
바일레온이 소설책을 북 찢고 나와서 알몸으로 춤을 췄대도 이 정도로 충격에 빠지지는 않았을 거다.
“미안해요, 디디 보좌관. 미리 허락을 구했어야 하는데.”
그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쉬었다.
“정말 미안해요.”
“아.”
“역시 이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이게 정말 전하의 취향이라면…… 난 그분의 안위가 걱정스러워요.”
오데트 본인에게 좋을 게 없는 취향이지 않으냐고 덧붙였다. 상식적인 남자가 또 지나치게 상식적인 말을 하고 있었다. 응급. 응급. 바일레온이 연습을 그만두려는 상황이다. 잠깐 출타했던 마리엔의 정신이 돌아왔다.
“자! 방금 하신 걸 다시 해보죠. 괜찮았어요. 심지어, 어, 좋았던 것 같아요. 우리 동작을 좀 더, 다듬어봐요!”
마리엔은 일부러 과하게 밝은 행동을 이어갔다. 연습은 그 후로도 이십 분간 계속됐다. 여러 자세와 대사를 연습하는 내내 바일레온은 심각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한편 마리엔은 자신의 뺨이 딸기처럼 빨개졌을 거란 걱정에, 연습 내내 실수 연발이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제각기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 ◆ ◇
자꾸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바일레온을 어르고 달래길 나흘째. 마리엔은 ‘북부 놈처럼 행동하기 작전’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실전으로 넘어가지도 못하고 연습 단계에서 그만둬야 했지만 아쉬움은 남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바일레온은 잘못한 게 없었다. 잘못은커녕 마리엔은 요 며칠간 그의 다재다능함만 재확인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북부 놈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손목을 잡아당기는 대신에 뒤에서 와락 끌어안는 법을 생각해내는 등 훌륭한 합의점을 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할 순 없다니까.’
마리엔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굴 위해서든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그랬지. 그 와중에 애써준 부하에게 사과까지 했어.’
그의 올곧은 태도는 바일레온 비어스를 남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다면 어지간한 폭력은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마리엔 디디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만들고야 만다.”
마리엔의 짙은 하늘색 눈이 집념으로 불타올랐다.
“원래 바른 주군 아래 쪼끔 교활한 책사가 있는 법.”
손을 더럽히는 일은 내가 할 테니 그대는 꽃길만 걸어. 내가 어떡해서든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 테니까. 바일레온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좋은 모습을 보여줄수록 마리엔은 새삼 의지를 다지게 됐다.
독자가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오데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사람. 하지만 그것조차 오데트에게 부담을 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더군다나 바일레온은 사랑한다는 고백 빼고는 모든 것을 바쳤다. 북부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할 헌신을, 바일레온은 했다.
그가 카인 블랙우드보다 대단히 좋은 사람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데트는 물론이고, 카인 블랙우드 역시 동의할 거다.
‘어째서 더 좋은 사람이 더 아파해야 되지?’
마리엔은 예전부터 이게 마음에 걸렸다. 인품이 좋다고 무조건 그 사람의 사랑이 이뤄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도 최소한 구애 과정이 조금 덜 아플 순 없는 걸까?
왜 주인공 커플이 키스로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게 서브남의 몫이냔 말이다. 심란해하는 오데트 옆을 계속 지킨 건 바일레온이었다. 북부 놈이 아니라 바일레온, 항상 그였다.
하필 불가피하게 자리를 떴다가 돌아온 순간 둘이서 뜨거운 키스를 하고 있을 게 뭐람. 바일레온은 분수를 아는 서브남답게 조용히 뒤돌아서 사라진다. 그의 손에 들린 샛노란 해바라기 한 송이가 비련을 더한다.
‘오데트가 황위에 오르고 나서도 상황은 여전해.’
외전에서 바일레온의 분량은 병아리 눈물보다 적은 수준이다. 그렇게 잠시 얼굴을 내비쳐서 하는 일이 남편과 싸운 황제를 위로하는 거였다.
그리고 며칠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는 부부를 지켜봐야 하는 이도 바일레온이다. 재상은 언제나처럼 엷은 미소를 띤 채 국정 논의를 하려고 부부에게 다가간다.
북부 놈에게 견제란 견제는 다 받으며 그렇게 수십 년간 오데트를 보필할 사람.
마리엔은 오래도록 헌신하고서도 신뢰하는 친구이자 신하 자리에만 머물러야 하는 바일레온이 안타까웠다.
“하.”
슬픈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실용적인 생각을 해보자.
염색도 실패.
원작 남주인공 흉내도 실패.
시간은 점점 더 촉박해지고, 그럼 이젠 어떡한다?
“뭔가 기막힌 방법이 있는 걸 알아. 근데 생각이 날 듯 안 날 듯 가물가물하단 말이야…….”
소설 속으로 들어올 때 머리에 심한 충격을 받았나 보다. 그것 때문에 기억력 담당구역을 다친 게 틀림없다. 생각이 나려면 바로 나고, 안 나려면 끝까지 안 떠오를 일이지. 사람 안달 나게 생각날 듯 안 날 듯한 건 뭐냐고.
“판을 완전히 뒤엎을 히든카드가 있는데. 그런 게 있다는 사실만 떠오르고 정작 중요한 내용이 기억 안 나.”
북부 놈의 손발 오그라드는 대사까지 몽땅 기억해낸 마리엔 디디가! 가장 중요한 설정을 까먹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팔짝 뛸 순 없는 상황이었다. 마리엔이 들고 있는 상자 안에는 재상부로 옮겨야 하는 서류가 가득 들어 있었다. 마리엔의 소속을 알아본 이들이 ‘옮기는 김에’ 같이 가져가라고 얹어준 물건도 제법 됐다.
불평하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필 보좌관 아저씨랑 제2보좌관은 이런 일 안 하던데. 도대체 재상부 청소 담당 샐리한테 빌렸던 책 반납까지 내가 맡아야 하는 이유가 뭐야.
“너무 귀엽게 생긴 탓이다…….”
마리엔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안에 얼마나 미친 영혼이 들어 있는지 모르니까 다들 겁이 없지.”
덜커덩. 두두두.
“그래도 잡일은 괜찮아. 북부 놈에 비하면 짐 나르기쯤이야.”
재상의 제3보좌관 월급은 썩 나쁘지 않은 편이다. 게다가 내부 복지는 훌륭한 수준이다. 이래 봬도 마리엔 디디는 북쪽의 누구랑 다른 인격자라서, 월급을 날로 먹기엔 양심이 좀 찔린다고나 할까.
그때 멀리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여럿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도 느껴졌다. 마리엔은 “조심해!”라고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마리엔 자신을 향해서 짐마차가 돌진하는 중이었다. 더 큰 문제는 마차와 연결된 말이 흥분해서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다는 거였다. 머리로는 무거운 상자를 팽개치고 피해야 함을 아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까이서 본 말은 정말 컸다. 말이 앞다리를 들어올려 내리찍으면 조막만 한 마리엔의 몸은 와지끈 부러질 것이다.
‘왜 말발굽에 채어 죽는다는 건지 알겠네.’
얼어붙은 두 다리가 야속했다. 이런 상황이 오면 이렇게 피해야지. 평소에 머릿속으로 훈련하던 것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마리엔은 소설에 빙의했다가 도중에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은 특정 시점으로의 회귀 기능을 제공하나?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지는 못하면서, 그런 생각 할 짬은 있다는 게 황당했다.
“위험해! 피하라고!”
근위병 아저씨, 저도 피하고 싶은데요. 몸이 안 움직여요. 그리고 제가 짐마차를 본 지 아직 오 초도 안 지난 거 아시잖아요.
다행히도 말이 방향을 꺾었다. 녀석이 방향을 튼 건 좋지만, 이번엔 말과 연결되어 있던 짐마차가 무시무시한 회전력으로 마리엔을 덮쳐오고 있었다.
‘망할. 그냥 깔려 죽는 수단이 바뀐 것뿐이잖아.’
그게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누군가가 마리엔과 마차 사이로 뛰어들었다. 상대방은 마리엔을 품에 안은 채 마차를 등지고 섰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끼어들어봤자 죽는 사람만 늘어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어진 장면은 일반적인 상식과 달랐다.
남자의 등과 맞부딪친 순간, 오히려 견고한 짐마차 쪽이 부서지면서 무거운 포대자루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찢어진 포대자루 틈으로 입자 고운 설탕 가루가 날렸다. 마리엔의 머리카락과 눈썹과 입술에 뽀얗고 달콤한 설탕 가루가 눈처럼 내려앉았다. 짐마차의 파편 역시 사방으로 튀었지만 남자의 커다란 몸이 방패가 돼주었다.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왜 여기서 특수효과가 나타나는 건데.’
혀끝에 느껴지는 단맛이 불쾌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울리지 않는 설탕 가루 세례라니. 기분 나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마리엔은 남자의 품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당신은…….”
악마의 뱃속보다 시커먼 머리카락이 실바람에 너울거렸다. 대체 이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 걸까? 아까까지만 해도 바람이라곤 일절 없는 날씨였다.
거기다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푸른빛 눈동자. 세상 사람 전부를 발아래로 깔아보는 오만한 분위기. 감출 수 없는, 북녘의 냄새.
발끝에서부터 거부반응이 일었다. 마리엔의 본능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등장부터 재수 없는 새끼!
놈은 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