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80)
“부탁해, 클로이즈.”
“어서 가버려.”
그렇게 마리엔을 뒤로하고 무도회장을 빠져나가는데 마음이 얼마나 무너지던지.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비밀 통로를 지나 다다른 어두운 방. 불도 켜지 않은 방 한가운데 오도카니 서 있던 오데트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경고했다.
“마음의 준비를 해둬, 비어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평정심이 무너질 이야기니까.”
그리고 바일레온은 오데트의 설명이 끝날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데트는 질문이 있으면 지금 하라고 했다. 욕이나 원망의 말도 괜찮으니 할 말이 있으면 빨리 쏟아내라고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
손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배정된 자리를 바꾸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특히 앞자리 사람에게 뒤로 가라고 하면, 요구받는 쪽에선 이를 모욕으로 느낄 수 있다.
그중에 한 명이라도 불쾌한 표정으로 항의하면 사람들의 눈길을 끌 터다. 다들 무슨 일인가 싶어 수군거릴 테고, 그럼 곧장 2황자 측의 의심을 살 것이다.
따라서 오늘 저녁엔 믿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람만 움직여서 일을 진행해야 했다.
바일레온을 돌려보낸 후엔 마리엔과 카인도 따로 불러 언질을 줘야 하니, 오데트에게 남은 시간이 촉박한 것은 사실이었다.
‘급조했다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계획이야.’
과연 오데트다.
자신을 해치려는 2황자의 계획을 역이용해서 황태자의 잔당을 뿌리 뽑을 생각을 하다니.
누명을 쓰고 첨탑 감옥에 갇히면 황태자는 절대 제정신으로 버티지 못할 터다.
귀한 아들이 그 지경이 됐는데 황후가 멀쩡할 리는 더더욱 없다. 다급하고 억울한 심정에 지배될 게 분명하다. 남편에게 할 말과 해선 안 될 말을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24세에 황태자비가 된 후부터 내궁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군림한 그녀. 이제는 모든 실권을 내려놓은 뒤 아들이 머물던 잿빛의 궁으로 옮겨질 일만 남았다.
황제의 성정상 바로 폐후로 만들지는 않을 것 같다. 장남에 이어 그 친모까지 연달아 폐위하면 자칫 내정이 불안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바일레온이 예상컨대 폐위는 내후년 이맘때쯤이 아닐까.
그렇게 황후와 황태자 세력은 로즈 황가에서 사라진다.
2황자는 이복여동생을 제거하는 덴 실패했지만 다른 쪽으로 성과를 얻었으니 이에 만족하고 잠시 나태해질 터.
다음 목표물이 본인인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이번 일로 더 깊은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도 모른 채.
‘백번 생각해도 기가 막힌 계획이야. 만일 이걸 책에서 봤다면 대담성에 탄복했을 텐데…….’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가 됐다. 오데트는 단시간에 그야말로 놀라운 계략을 짰다. 바일레온이 생각하기에도 전혀 손댈 구석이 없는 계획이었다.
이대로 진행해야 한다.
당연히.
안 한다는 선택지 따윈 없다.
‘한데 도저히…… 맨몸의 마리엔을 칼 앞에 서게 한다는 게.’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짚어야 할지 아득할 정도로 화가 났다. 속이 뒤틀린다. 저택을 나서기 전에 먹은 게 없어서 다행이다. 조금이라도 요기를 했다면 바로 신물이 올라왔을 테니.
“말을 하랬더니 눈으로 욕을 하고 있네.”
오데트가 폭이 넓은 실크 허리띠를 건넸다. 지금 바일레온이 착용한 것과 비슷한 생김새의 것이었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자 안쪽에 얄팍한 무언가를 덧댄 게 느껴졌다.
“기름 먹인 종이를 여러 장 겹쳐 만들었어. 그걸 허리띠 안쪽에 넣고 꿰맸지. 칼을 완전히 막진 못해. 막아서도 안 되고. 그래도 황실의의 의심을 피하는 동시에 부상 정도를 낮춰줄 거야.”
오데트는 만약을 대비해 만들어둔 건데 오늘 밤 쓸 줄은 몰랐다고 덧붙였다.
바일레온은 묵묵히 예복 코트를 벗고 허리띠를 풀었다. 제가 다치는 상황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렇지 않았다. 훈련받은 살수가 휘두르는 칼에 찔리라는 명을 받았는데도 동요는커녕 덤덤할 뿐이다.
아까부터 바일레온의 신경이 온통 쏠려 있는 곳은 단 하나.
“하여튼 본인 안위엔 여전히 무관심하구나.”
오데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예상했던 바이긴 한데 참 너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 뜻이 전해졌다.
바일레온은 대꾸하지 않고 새 허리띠 위치를 조정했다. 종이를 덧댄 부분이 복부를 제대로 감싸는지 확인한 후에 코트를 걸쳤다.
그가 정돈을 끝내길 기다린 오데트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렇게 생긴 놈들이래. 비밀 통로 안에서 불 켜고 특징을 외운 다음 종이는 태워버려. 손님들 사이에 숨어 있는 습격대를 경이 먼저 발견한 다음, 이따 공작에게 알려줘야 해. 경 혼자 셋을 막기엔 너무 정신없을 테니까.”
“블랙우드는 뭘 맡습니까?”
그게 바일레온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블랙우드 공작은 경이 알려준 습격대를 제압한 뒤, 최대한 빨리 무도회장을 빠져나가 황실의를 데리고 올 거야.”
“……알겠습니다.”
“디디는 요즘 경호원에게 호신술 수업을 받고 있다며.”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오데트를 향한 말투가 저절로 딱딱해졌다.
“말 그대로 호신술. 몸을 지키는 방법이죠. 전문적으로 살인기술을 훈련받은 자와 맞설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겠지.”
오데트는 자기도 마음이 안 좋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달라는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마리엔은 무사할 거라고 그를 달래지도 않았다.
일 초의 머뭇거림만으로도 생사가 갈릴 수 있음을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오데트였다.
네 연인이 다칠 수 있다. 어쩌면 중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이처럼 중요한 기회를 놓칠 순 없어.
오데트는 바일레온으로부터 당연히 원망을 들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 섣부른 위로를 시도 않는 점마저 오데트다웠다.
“우리가 미리 알고 있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해.”
“압니다. 제국의 재상은 오늘 밤 폐하를 동요시킬 만큼의 중상을 입어야 하죠. 제가 바닥에 흘린 피가 폐하 본인의 것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끔 해야 하는 거.”
오데트의 말은 혹시라도 마리엔이 다칠까 걱정돼서 그녀 쪽으로 먼저 가 있든가 하지 말란 의미였다.
바일레온은 무도회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경직된 표정의 그에게 오데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비어스, 제때 뛰어들 수 있겠어?”
바일레온에게 약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면 이 질문에 자조의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마리엔을 대신해 칼을 맞는 것.
그거야말로 오늘 계획에서 자신이 제일 손꼽아 기다리는 순간이니까.
◇ ◆ ◇
바일레온은 오데트의 지시사항을 차례차례 완수했다.
손님으로 위장해 있는 습격대 네 명을 알아보는 건 쉬웠다. 마리엔에게 아무 내색 하지 않고 간식을 권하는 건 그보다 좀 더 어려웠다.
그러다가 마리엔이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필사적으로 자기를 봐달라는 눈빛을 보냈을 때는.
‘제발…….’
솔직히 압정 한 움큼을 삼키는 게 더 쉬웠을 것이다.
마리엔이 보내는 시선에서 그녀의 불안과 초조, 절박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바일레온 자신은 이 애절한 구조 요청을 무시해야 했다.
‘미안해요.’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미안해요, 마리엔.’
바일레온은 어서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의 배에 칼이 꽂혀 있는 상황이기를.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먹을 움켜쥐지 않기 위해 애를 쓰다 보니 손끝이 다 저렸다.
쾅!
피를 발견했다는 외침에 이어 습격대의 두 번째 신호가 끝났다. 이제 본격적인 기습이 진행된다.
“클로이즈, 다친 덴 없어?”
“응, 나는 괜찮아. 근데 디디 보좌관님이……!”
“내가 데리고 나갈게. 너 먼저 나가. 드레스 자락 안 밟히게 조심하고 절대 다시 들어오지 마.”
이어서 바일레온은 폭약이 터지자 제 약혼녀를 등한시하고 즉시 마리엔에게로 달려가려는 카인을 저지했다.
그러고는 아까 오데트의 귀띔을 잊어먹은 거냐며, 이렇고 저렇게 생긴 저 새끼들이나 제압하시라고 위협조로 말했다.
“쓸 데가 있으니까 죽이지 마십시오. 혀도 뽑아선 안 됩니다. 기절만 시키고 황실의나 모조리 끌고 오세요.”
“의사는 왜?”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카인 블랙우드.”
여기서 카인이 토를 달았다면 바일레온은 놈의 면상에 주먹을 내다 꽂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인은 바일레온이 지시한 대로 했다. 그 점이 퍽 아쉬웠다.
‘놈의 피를 볼 기회였는데.’
카인은 위험을 인지하자마자 마리엔에게 가려 했다. 앞뒤 재지 않고 그냥 몸부터 움직였다.
바일레온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카인이 부러웠다.
저도 뒷일 생각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저질러버리고 싶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여기서 사람들이 떼로 죽어나가든 말든 내 연인의 안위만 생각할 수 있다면.
그러나 바일레온 비어스는 카인 블랙우드가 아니었고, 그는 제 눈 앞에서 넘어진 노부인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바일레온이 손을 뻗는 그 짧은 사이에 누군가 벌써 노부인의 종아리를 콱 밟고 지나갔다.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일어나세요. 방향감각을 잃기 쉬우니 여기 벽을 따라 출구로 나가세요. 직진하면 됩니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은 일행을 소리쳐 부르랴, 옆 사람을 밀치고 조금이라도 빨리 도망치랴 정신이 없었다.
물론 이들은 더 이상의 폭발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공포에 휩싸이는 것도 당연하다.
바일레온은 바닥에 넘어져 마구 밟히고 있는 영애를 일으키는 와중에도 마리엔이 있는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기 있어……. 분홍색 머리.’
어디선가 지팡이를 구한 연인은 오데트에게 다가가는 중이었다. 마리엔의 온 신경이 오데트에게 쏠려 있었다. 바일레온은 그런 마리엔보다 먼저 흰색 예복 차림의 남자를 발견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바일레온은 마리엔 쪽으로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튀어나가려던 찰나, 마리엔이 습격자의 존재를 인지했다. 남자가 품에서 단검 두 자루를 꺼냈다.
놀랍게도 다음 순간 마리엔이 놈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녀는 양쪽에서 날아드는 단검을 한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지팡이로 쳐냈다. 뜻밖의 상황에 바일레온은 오데트를 쳐다봤다.
지금 끼어들어도 되느냐.
이에 대한 황녀의 대답은 ‘아니요’였다. 마리엔에게 절체절명의 상황이 닥칠 때까지 기다리라는 거다.
습격자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전에 황태자의 복수를 하겠다고 외칠 텐데, 그 소리를 사람들이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로 일분일초가 바일레온에겐 지옥이었다.
애가 탄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이 순간엔 자학도 사치에 불과하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놈의 단검을 빼앗아 스스로 제 배에 찔러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꺅!”
그러다가 마리엔이 팔을 베였을 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내가 저놈 앞에 섰을 때, 놈의 목을 비틀지 않을 수 있을까. 바일레온은 영 자신이 없었다.
피.
마리엔의 팔을 타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린다.
바일레온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황태자 전하의 복수다!”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바일레온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마리엔 앞에 몸을 던졌다. 습격자의 단검이 자신의 복부를 푹 쑤시는데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
느껴지는 것은 희열뿐이다.
이제야 남자의 팔을 부러뜨리고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들을 수가 있어서 바일레온은 기뻤다.
“너무 걱정 마요.”
마리엔이 울었다. 그녀가 더 다치지 않고 자신을 내려다보며 흐느끼고 있었다. 바일레온은 진심으로 깊이 안도했다.
f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