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81)
꿈에서 바일레온은 아카데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였다. 다행히 시험 치는 꿈은 아니었다. 물론 예정에도 없는 수학 시험을 치는 꿈이었어도 자신은 무난히 만점을 받았을 테지만 말이다.
바일레온은 느긋하게 교정을 거닐었다. 몇 걸음 앞에서 걷고 있는 여학생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넌 네가 먼저 신청할 거야, 아니면 신청이 들어오길 기다릴 거야?”
“기다려야지.”
질문을 받은 여학생이 다소 새침하게 대꾸했다.
“파트너 후보가 세 명이 되기 전엔 안 고를 거야.”
“하여튼 그 이상한 자존심하고는.”
“뭐야. 그럼 넌 네가 신청하게?”
“안 될 게 뭐가 있어?”
먼저 말을 꺼낸 여학생이 어깨를 으쓱했다.
“눈치만 살피다가 다른 사람한테 빼앗기느니 선수 치는 게 낫지. 어제 본 칼럼에서 그러더라. 인기남은 의외로 제일 먼저 호쾌하게 신청한 여자애 몫이 되는 경우가 많대.”
무슨 그런 희한한 소리가 있냐며 어이없어하던 다른 여학생은 이내 친구가 읽었다는 칼럼 내용에 관심을 보였다.
바일레온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동급생들의 대화에서 지금이 어떤 시기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졸업 무도회 파트너 선정을 두고 학생들 사이에 눈치 게임을 하던 시즌이었다.
일찌감치 서로 호감을 확인한 커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졸업반 학생들은 파트너 선정에 고심하느라고 수업 시간에도 쪽지를 주고받기 일쑤였다.
갑자기 조금 딴 얘기를 하자면, 바일레온은 도서관 옆 그네를 매어놓은 나무 아래나 어딘가로 불려 나가 고백을 받는 생활에 익숙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로 종종 겪어온 일이었다.
그러나 고백받고 상냥하게 거절하는 데에 익숙한 바일레온마저도 진심으로 곤란을 겪은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온화하고 수려한 학생회장. 그와 손잡고 춤을 출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와 재회하는 장소는 수년 후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일지도 모른다.
그곳은 고위귀족과 사교계 중요인사가 포진하고 있는 엄격한 자리. 아무리 빛나는 제국 아카데미 동기라도 남들 시선에 개의치 않고 바일레온에게 다가가긴 힘들 터다.
비어스 영식은 졸업과 동시에 황궁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거라는 소문이 돈 게 벌써 몇 주 전이다.
그러므로 이번이야말로 용기를 낼 마지막 순간! 이런 조급함이 여학생들 사이에 깔려 있었다.
당시 바일레온은 근교 여학교를 다니던 동생 클로이즈를 파트너로 정한 상태였다.
동행할 사람이 있다고 부드럽게 말하면 다들 “아, 역시…….” 하고 낙담한다. 한데 그 파트너가 어린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돌연 눈을 반짝이면서 재도전을 일삼았다.
하루가 멀다고 남을 달래는 것도 참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보낸 많은 날 중에서도 하필 이때의 꿈을 꾸다니.
이왕 꿈인데 학교 다닐 적엔 한 번도 안 한 짓을 해볼까. 가령 수업을 빼먹고 옥상에서 책을 읽는다든가.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곤란한 파트너 신청을 더 받지는 않을 테지.
머릿속으론 이 같은 생각을 하며 걸음만은 착실하게 교실로 향한 바일레온이다.
‘음?’
복도에 누군가 있다. 바일레온보다 한참 작은 키의 소녀는 교실 내부가 궁금한지 발뒤꿈치를 한껏 들어올리고 있었다.
바일레온은 재킷에 달린 교표의 리본 색깔로 그녀가 1학년임을 알아보았다.
밤색 머리 끝부분이 동그란 시나몬롤을 떠올리게 하는 소녀는 두꺼운 노트로 눈 아래를 가리고 있었다. 두꺼운 노트 위로는 노트만큼이나 두꺼운 뿔테안경을 끼고 있었다.
동아리 선배나 형제자매를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바일레온은 1학년에게 친절히 말을 건넸다.
“누굴 찾니? 불러줄까?”
노트 위로 눈만 빼꼼 내밀고 있던 소녀가 바일레온을 돌아봤다.
“아, 저는…… 헉……!”
소녀는 바일레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노트를 이마까지 들어올렸다. 그러자 사람 얼굴은 하나도 안 보이고, 끝이 탐스럽게 말린 밤색 머리카락만 눈에 들어왔다.
“으어, 아, 아아악! 아닙니다. 아닙니다! 죄송해요!”
“내가 놀라게 했니? 미안…….”
“아니에요! 아니에요! 으아아아! 괜찮습니다!”
소녀는 말을 더 건넬 새도 없이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바일레온은 허공에 뻗은 손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작은 체구에 비해 발이 굉장히 빠른 여학생이었다.
‘근데 안경에 도수가 없네…….’
알이 저렇게나 두꺼운데도 얼굴 왜곡이 전혀 없는 건 안경에 도수가 없음을 뜻한다.
잘 어울리긴 하지만 도수도 없는 안경을 왜 쓰고 있었을까. 요즘 하급생 사이에 새로이 생긴 유행이기라도 한가.
‘가리기엔 아까울 정도로 예쁜 눈인데.’
소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아주 잠깐인데도 기억에 남은 이유는 오묘한 빛깔의 눈동자 덕분이다.
말간 유리알 같은 눈. 물색보다는 짙고 쨍한 가을 하늘보다는 옅다. 마치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하늘에다가 흰색 물감 세 방울을 떨어뜨린 것만 같았다.
갑자기 이유 모를 그리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오늘 꿈에서 처음 보는 소녀에게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 오랫동안 닿지 못했던 사람을 또다시 눈앞에서 놓치는 듯한 기분에, 바일레온은 왼쪽 가슴께를 꾹 눌렀다.
‘이름이라도 물었어야 했는데…….’
◇ ◆ ◇
“바일레온.”
의식 저편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은 순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일레온, 내 목소리 들려요?”
마리엔은 혼자 있을 땐 그를 비어스 경이 아닌 이름으로 부른다. 새로운 발견에 바일레온의 가슴이 간질거렸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어요. 뭐부터 들을래요?”
마리엔은 아직 연인이 정신을 차린 줄 모르는 듯했다. 아마 그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일레온은 눈을 뜨고 마리엔을 쳐다보려고 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눈꺼풀에 무거운 추를 단 것처럼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의식만은 점점 또렷해지는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바일레온은 눈을 감은 채 마리엔의 말을 들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나쁜 소식부터 말해줄까요?”
마리엔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속삭였다. 무도회 당일 오데트가 했던 말과 비슷하다. 이후에 오데트가 늘어놓은 이야기는 정말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내용이었다. 앞서 당한 경험 때문에 바일레온은 자연히 긴장하게 됐다.
“세상에, 방금 움직인 거 맞죠?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어요.”
마리엔의 목소리에 흥분이 묻어났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혈압이 올라 쓰러진다잖아요. 근데 지금 보니까 반대로도 가능할 것 같아요. 황당한 나머지 정신이 돌아오는 거죠. 바일레온, 내 말을 들으면 당장 벌떡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서두가 길어질수록 바일레온의 긴장도 심해졌다.
‘마리엔, 그냥 빨리 말해요. 내 정신은 이미 돌아왔고 여기서 더 기다리다간 벌떡 일어나기 전에 다시 쓰러질 것 같으니까.’
마리엔이 말하기 전에 한숨을 쉬었다. 나쁜 소식인 것만은 확실한가 보다.
“카인 그놈이요. 4황녀 전하께 대놓고 절 데려가겠다고 했어요. 동맹이 끝나면 공작성으로 제 거취를 옮기게 허락해달라나요?”
불현듯 마리엔이 로켓 목걸이를 찾으려고 연못을 뒤지다가 쓰러졌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마리엔은 고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문장도 뚝뚝 끊기고 발음도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일레온은 그녀가 울먹이며 한 말을 죄다 기억하고 있었다.
카인 블랙우드가 그녀를 공작성의 하녀로 삼겠댔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바일레온 안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졌었다. 첫 만남부터 마리엔의 목을 조른 놈이다. 이후로 번번이 마리엔을 위험에 처하게 하더니, 이제 와 그녀를 하녀로 삼겠다고.
그때 바일레온 자신은 깨달았던 것 같다. 카인이 마리엔을 탐내고 있다는 사실을.
심장이 내려앉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마리엔이 카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는데도 그랬다. 놈이 마리엔에게 완력을 써서 데려가기라도 할까 봐 불안했다.
‘마리엔이 내 연인이 된 후로도 도발을 멈추지 않았지. 날 신경 안 쓰는 건 괜찮아. 원래 그런 놈이니까.’
그렇지만 약혼녀인 오데트에게 마리엔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내가 진작에 미친 놈이라고 했죠? 가운뎃다리를 잘라서 튀겨버릴 새끼.”
마리엔이 요정 같은 목소리로 신랄한 욕을 퍼부었다. 그녀의 입에서 연이어 나오는 욕을 듣고 있자니, 가슴속 불길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북부의 지배자는 개뿔. 내가 북부인이었으면 걸음마 시작하자마자 거주지 옮겼어요. 뇌를 길바닥에 흘리고 다니는 새끼. 북부의 수치.”
맞아요. 그렇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거예요. 바일레온은 열렬히 호응했다.
“황제도 그 자식보다는 남들 눈치를 볼걸요? 유폐된 망나니 황태자도 그 인간보다는 상식적일 거예요. 아니, 어떻게 약혼녀 앞에서 약혼녀의 부하를 자기 정부로 삼겠다는 소릴 지껄이지? 존중 두 글자는 전쟁터에 내다 버리고 왔나 봐요. 하, 공작부인 자릴 제의한 것도 아니었어요. 미친 소리 하는 와중에 묘하게 계산적이어서 그게 더 짜증 났다니까요?”
마리엔은 자기 말에 자기가 화를 더 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침대를 내리쳤다.
“날 갖고 싶긴 하지만 공작부인 감은 아니라고 여기는 거잖아요? 건방진 새끼. 그래, 난 장차 공작부인이 아니라 공작이 될 거다. 대공이 돼서 네놈 머리 위에 올라설 거다! 진짜 열불 터져서…….”
마리엔이 갑자기 소스라치듯 놀랐다.
“내, 내가 미쳤나 봐요. 환자가 누운 침대를 치다니. 괜찮아요? 어떡해……. 상처가 터지면 어쩌지.”
통증 따윈 바일레온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마리엔이 침대를 내리치기 전부터 봉합 부위가 쑤실 듯이 아팠다. 진통제를 복용하더라도 웬만큼 낫기 전까지는 계속 이럴 것이다. 자신은 그것보다도 마리엔이 하던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었다.
근데 마리엔은 환자를 걱정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카인이 저 난리를 친 후에 오데트의 반응이 어땠는지, 어떤 결론이 났기에 마리엔이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는지, 좋은 소식은 또 무엇인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바일레온 자신이 의식을 잃은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고 싶었다.
하루? 이틀? 설마 열흘 넘게 시간이 흘러버려서 그새 카인이 또 개수작을 부린 건 아니겠지?
바일레온의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뜨려고 해도 떠지지 않던 눈이 스르르 떠졌다.
“비어스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