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82)
“마리엔…….”
다 쉬어서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바일레온은 사람을 불러오겠다며 자리를 뜨려는 마리엔을 붙잡았다.
“왜 그러세요? 뭐 필요한 거라도……. 물? 물 드릴까요?”
마리엔이 물잔을 입가에 대주었다. 바일레온은 빨대 끝을 물고 조금씩 물을 삼켰다. 버석하게 말라 있던 목구멍이 적셔지고 나서야 바일레온은 자신이 목마른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천천히 드세요.”
다만 한 번에 많이 마실 순 없어서 시간이 좀 걸렸다. 문득 제 쪽으로 물잔을 기울이고 있는 마리엔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
팔에 감은 붕대 위로 불그스름한 피가 비쳤다. 그걸 보자 마리엔이 습격자의 칼에 베였는데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꺅!”
무도회장에 울려 퍼진 날카로운 비명.
애초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바일레온이 주군의 명을 어기고 조금 더 일찍 뛰어들었다면, 그녀는 지금처럼 붕대를 감고 있지 않아도 될 거다.
습격자와 대치한 상황에서 마리엔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일레온은 대체 어디 있지? 왜 날 도와주지 않지? 경계를 늦추는 순간 찔릴까 봐 맘 놓고 두리번거리지도 못하던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다.
가족들과 오데트는 바일레온더러 과보호를 그만 멈추라고 했다. 이건 걱정 많은 연인도 아니고 거의 어미 새 수준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바일레온 비어스 따위를 제대로 된 연인이라 할 수 있나?
정작 그녀에게 제 도움이 필요할 때 지켜보기만 하는 인간이, 감히 연인 관계입네 말할 수 있느냔 말이다.
“마리엔, 다친 데…… 아직 아파요?”
“아프시다고요? 아, 역시 약을. 지금 눈 떴을 때 드시는 게 좋겠어요.”
“아뇨. 나 말고.”
바일레온의 목소리가 꺼져 들어갔다.
“당신이요.”
“저요?”
마리엔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바일레온의 시선을 따라 붕대 감은 제 팔을 보고 나서야 아아, 하고 소리를 냈다.
“이거 피 아니에요. 소독약 색깔이 빨갛더라고요. 황실의가 봉합도 필요 없는 가벼운 외상이랬어요.”
대답하는 마리엔의 목소리가 과하게 밝았다. 바일레온의 낯빛이 흐려졌다. 드레스 위로 후드득 떨어진 핏자국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었다.
“진짜예요. 진짜, 진짜. 아니면 붕대 풀어서 보여드릴까요?”
“아니, 그러지 마요.”
바일레온이 다급히 말렸다. 마리엔은 지금 경황없는 동시에 들뜬 상태였다. 이 상태로 붕대를 부주의하게 풀다가 상처를 덧내기라도 할 것 같았다.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마리엔이 그런 일을 감행할 필요는 없다.
정말로.
“아프지 않으면 됐어요.”
“안 아파요. 며칠 안에 다 나을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마리엔, 내가 쓰러진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죠?”
마리엔이 잠깐 대답을 망설였다. 평소의 장난기가 스멀스멀 발동하려다가 마는 게 보였다.
“만 하루도 안 됐어요. 어젯밤에 의식을 잃으셨고 지금이…… 오후 4시 10분이니까.”
“그럼 4황녀궁은 오늘 오전에 다녀온 건가요?”
“헉, 어떻게 아셨어요?”
마리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일어나기 전에 제가 한 이야기 들으셨어요?”
“네, 어떻게 말소리는 들리더군요.”
마리엔의 초점이 흔들렸다. 자기가 말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 기억을 더듬는 중일 터다. 바일레온은 자꾸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누르고 말을 이었다.
“블랙우드 공작의 요구에 전하께선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결론만 말하면 보류죠. 저랑 전하랑 일대일로 만나고 있는 자리에 공작이 멋대로 쳐들어온 거라서요. 일단 전하의 몸 상태를 핑계로 돌려보내셨어요. 다른 날 정식으로 날짜를 잡아 방문하라면서요.”
보류.
다시 말해 완전한 거절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데트의 성정이라면 카인의 행태를 괘씸히 여기는 동시에 재빨리 실리를 따져봤을 것이다. 마리엔이라는 체스말을 어디로 옮겨야 장기적으로 이득이 될까.
그런 판단 끝에 내린 결정이 ‘보류’다. 설마 싶으면서도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자신은 다쳐도 상관없다. 어차피 희생과 헌신의 표상 바일레온 비어스가 아닌가.
‘하지만 마리엔은 안 돼.’
바일레온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마리엔이 서둘러 비어스 경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했다.
“공작은 절대 방문 약속을 잡지 못할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결정 보류라면서요.”
“보류는 보륜데 다만 그 기한이 수십 년 후랄까요. 전하께선 매번 새로운 핑계를 대서 접견을 피하실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됐냐면…….”
마리엔이 갑자기 우쭐대듯 웃었다.
“제가 놈을 이겼거든요.”
그 말을 하는 마리엔은 세상 제일 뿌듯한 표정이었다.
“뇌까지 근육이 들어찬 흑발 놈이 상대의 마음 얻는 법을 알 리 없지요. 바보 멍텅구리. 진심을 증명하겠답시고 자기 머리카락까지 자르려고 했다니깐요.”
마리엔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4황녀 전하를 뭘로 보고 그런 차력쇼를 하는 거래요? 그럴 시간 있으면 자기 약혼녀가 평소 무슨 생각 하는지나 고민해보지.”
“그럼 마리엔은 전하의 마음을 얻었다는 거예요?”
“물론이죠.”
마리엔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저게 마리엔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면, 그건 그것대로 놀라운 일이다.
바일레온이 알기로 누군가가 오데트의 흥미를 자극할 순 있어도 그녀의 마음을 얻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오데트 로즈는 그런 사람이다.
바일레온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이런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요. 방금 마리엔의 모습은 뭐랄까…….”
그가 말을 멈췄다. 보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황제한테 속살거리는 후궁이 떠올랐다는 말. 역시 연인한테 해선 안 되겠지.
“인상적이군요.”
“……네, 근데 그게 왜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건가요? 하나도 안 이상한데.”
“그, 렇죠.”
바일레온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돌렸다. 나쁜 소식은 됐으니 이제 좋은 소식이 뭐냐고 물었다. 이에 마리엔이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콕콕 가리켰다.
“방금 말한 이 소식이요. 제가 카인 블랙우드를 물리쳤다는 거.”
바일레온은 그저 자랑스럽다는 말밖에 해줄 수 없었다.
◇ ◆ ◇
회복은 아주 더디게 진행됐다. 바일레온의 상태는 일주일 전보다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기대만큼 빠르지도 않았다.
황실의가 매일 방문해 그를 살피는데도, 현재 제국에서 제일 좋다는 약과 연고를 쓰는데도 그랬다.
“중요한 건 내상입니다. 약과 연고의 도움이 미치지 않는 곳이죠. 안쪽이 자연히 이어 붙을 때까지 무리 않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황실의가 바일레온을 힐끗 봤다.
“회복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침대에서 서류를 보는 것도 지양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겉이 아물어도 방심해선 안 된다는 말이 이어졌다. 검날에 상한 근육이 회복되는 데엔 생각보다 훨씬 오랜 기간이 걸린댔다.
부상 여드레째에 재상부로 출근하려던 바일레온의 계획은 그렇게 무산됐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 집에 있던 비어스 백작이 잠깐 할 말이 있다며 황실의를 데려갔다. 연인과 둘만 남게 된 마리엔은 흡사 애원했다.
“쉬세요, 비어스 경. 제발요.”
“이렇게 오래 쉰 적은 처음이라 마음이 불편해요.”
“경은 지금 마음만 불편한 게 아니에요. 몸도 불편하시다고요.”
“하지만 마리엔, 통증만으로 따지면 난 이보다 더 아플 때도 일한걸요.”
마리엔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노동법 이대로 괜찮은가? 바일레온은 얼마 전 배에 칼을 맞아서 대야 가득 피를 쏟았다.
근데 이보다 아플 때도 일을 했다고?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뜯어고칠 법 조항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이러다 대업을 이루기도 전에 재상 장례에 쓸 관부터 고르게 생겼다.
“그땐 제가 없었잖아요. 이제는 경의 과로를 적극적으로 막을 제가 있으니까.”
“…….”
“왜 갑자기 말이 없으세요?”
“…….”
“설마 제가 재상부에 들어온 후의 일인가요?”
바일레온이 슬쩍 연인의 눈치를 봤다.
“마리엔이 들어오고 얼마 안 돼서였을 거예요.”
이거 다정남, 헌신남 키워드에 병약남이 추가될 판이네. 이렇게나 근육이 많고 체력이 좋은데도 그 넘치는 체력을 소진할 만큼 과로한다는 거잖아.
마리엔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병약한 미남도 취향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남자에 한해서다.
큰 소리 좀 들었다고 바로 심장 부여잡으면서 약 먹어야 하는 오데트를 보고 나니까 더더욱 깊이 와닿았다. 주군이 쓰러지려고 해도 그토록 당황스러웠는데, 하물며 연인이 그런다면 어떨까.
하느님이 보우하사 딱히 선량하게 살아오지도 않은 자신이 무려 최애와 맺어지는 복을 받았다. 앞으로 살면서 이만한 복을 다시 받을 수 있으려나 싶다.
신이 주판을 굴릴 줄 안다면 ‘얘, 너 이미 한도 초과야.’ 하고 이후 마리엔이 외출하는 날마다 소나기를 쏟아부을 것이다.
밑에서 비 쫄딱 맞는 마리엔 디디도 딱히 할 말은 없을 터다. 바일레온은 남은 생의 모든 맑은 날과 맞바꿀 만큼 좋은 사람이니까.
그러니 더더욱 바일레온의 건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언제 신이 정신 차리고 바일레온이란 복을 데려갈지 모른다!
“아무튼 안 돼요.”
마리엔은 침대 위에 널린 서류를 눈 깜짝할 새에 수거했다. 하는 김에 침대 옆 협탁에 쌓여 있는 서류철도 챙겨서는 멀리 떨어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바일레온이 미련 가득한 눈으로 테이블 쪽을 쳐다봤다.
의무감 42퍼센트, 자책감 50퍼센트, 무료함 8퍼센트가 합쳐진 눈빛이었다. 가만두면 마리엔이 없을 때 느릿느릿 움직여서 기어코 일을 더 할 낌새가 보였다.
“이 서류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비어스 경 서재로 옮겨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결국 마리엔은 하인을 불러 바일레온의 시야에서 일감을 치우게 했다. 그는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다.
“느리긴 하지만 이제 걸어다닐 수도 있어요. 침대 쿠션에 기댄 채 서류 좀 본다고 상태가 악화될 것 같진 않은데요.”
“만약 반대 상황이었으면 저 힘들다고 서류는커녕 신문 한 줄도 못 읽게 하셨을 거면서.”
“그건.”
“비어스 경, 일 중독이세요.”
마리엔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책으로 읽을 땐 몰랐다. 원작에는 그의 회복 과정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저 한참 등장 안 하다가 독자가 못 본 곳에서 혼자 나아서는 오데트 앞에 나타났다.
‘그동안 매일 이런 식으로 지내고 있었겠구나. 다시 출근할 날만을 기다리면서, 침대에서조차 보고서를 보면서.’
제발 쉬라는 의사와 가족의 말에도 그냥 웃기나 했겠구나 싶었다. 오데트의 마음이 이미 카인에게로 기운 것. 원작의 바일레온은 알고 있었을 텐데.
‘한데도 얼른 출근해서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온다. 이 답 없는 남자 같으니. 역시 마리엔 자신처럼 뻔뻔하고 약삭빠른 존재가 옆에서 지켜주는 수밖에 없다.
일 그만하세요. 주무세요. 지금은 무조건 쉬세요. 그나마 연인의 말은 귀담아들으려 하니까 다행이다.
“알았어요. 쉴게요, 마리엔. 그러니까 울 것 같은 얼굴 하지 말아요. 내가 잘못했어요.”
바일레온이 저자세로 나왔다. 그는 마리엔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면서, 오늘 저녁 상처 소독은 토끼 아가씨가 맡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아주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는 마리엔이 무엇에 약한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연애가 체질인 사람을 홀로 두는 것도 일종의 범죄가 아닐지.
오늘도 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