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83)
저녁부터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이 심상찮게 번쩍거리더니 몇 초 뒤에 귀청이 찢어질 듯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하늘이 무너지기 직전에 나는 소리가 이럴까 싶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는 사람이 많을 밤이다.
과연 멀리 내다보이는 2황비궁 건물에 불이 켜졌다. 올해로 열세 살인 7황자는 두 이복형과 달리 겁이 많다. 사방을 꽝꽝 울리는 굉음에 비명을 질렀을 게 분명하다.
‘저 집에서 그나마 주의해야 하는 사람은 딸 3황녀였지.’
이복오빠인 황태자 측에 섰다가 지금은 잿빛의 궁에 유폐된 그 인물이 맞다.
딸을 잃은 2황비는 하나 남은 유약한 아들 챙기기에 바빠 힘을 못 쓴다. 저쪽은 중요한 일을 다 끝낸 후에 천천히 처리해도 늦지 않다.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각.
오데트는 어깨에 두른 숄을 여미며 말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이어서 1황비궁에도 불이 켜졌다. 저 궁의 주인도 지은 죄가 참 많다. 오늘 같은 밤이면 본인이 ‘처리’한 이들의 원혼이 찾아올까 두려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떨어야 마땅한 인간이다.
하지만 오데트는 그녀가 무서워서 시녀들을 부른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원래는 숙부의 정부였다가 아버지의 눈길을 끌어, 먼저 있던 여자들을 밀어내고 1황비 타이틀을 차지한 분이시니……. 이까짓 천둥 번개를 겁낼 리가.’
1황비의 동선을 따라 불빛이 움직였다. 그녀가 서둘러 향하는 곳은 황제의 처소다. 우리의 요염하신 1황비께서는 새틴 네글리제에 가운만 걸친 차림으로 울먹이며 황제의 품에 뛰어들러 가는 중이다.
궂은 날씨는 그녀에게 또 하나의 기회에 불과하다.
‘실제로 잠을 설치는 쪽은 귀밑머리 희끗한 저 중년 남자지. 나이 들수록 의심병이 심해지기만 하는 황제. 1황비는 그 남자에게 겁먹은 미인을 달랠 기회를 주는 거야.’
평소엔 도도한 태도를 취하던 황비가 오늘 같은 밤이면 체면도 내려놓고 어리광을 부린다.
황제는 어린아이도 아닌데 천둥 번개가 뭐 그리 무섭냐며 핀잔함으로써 그녀가 도착하기 전까지 덜덜 떨던 자신을 잊을 수 있을 터다.
‘아주 전형적인 총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지.’
1황비는 권력을 쥔 남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저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황제에게 가는 걸 보라.
그녀는 첫 천둥소리에 기다렸다는 양 1황비궁을 나서지 않았다. 마치 빵 반죽을 발효시키듯이, 황제의 불안이 일정 정도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이고 있다.
오데트는 1황비가 어둠 속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천둥 치는 횟수를 세고 있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네가 오데트구나. 소름 끼치게 예쁘네.”
담장 높은 별저에 갇힌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검은 비로드 망토 차림의 여자가 자신을 찾아왔다. 여자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는 눈으로 오데트를 들여다봤다.
“넌 날 모르겠지만 난 너에 대해 잘 알고 있단다. 네 어머니에 관해서도 알고 있지. 황후나 다른 황비와 달리 난 하룬을 보고서로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여자가 살며시 웃었다.
“하룬은 제국의 기밀을 빼 간 데다 탈출하면서 숱한 병사를 죽였어. 심지어 폐하의 핏줄을 황궁으로 보내지 않고 협박 수단으로 삼았지. 온전한 무덤도 남겨선 안 되는 중죄인이야.”
“어머닌 저 갖고 협박하신 적 없어요. 그리고 무덤은…….”
“그래도 친모라고 편드는 것 좀 봐. 딱하기도 해라. 어쨌든 이제부터 네 어머닌 하룬이 아니야. 넌 폐하의 사생아로 추정되는 여자애인데, 몸이 약해서 황궁 밖에서 따로 지내는…… 그런 뒷배경을 갖게 된 거야.”
“잠깐만요. 가지 마세요. 무덤, 무덤 얘기는 무슨 말이에요?”
“들은 그대로란다. 하룬의 무덤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시신 자체가 남지 않았거든. 너도 그만 친모를 잊으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당시 황제는 세이브릴 하룬의 시신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길 원했다. 수도까지 시신을 방부 처리해서 담아 갈 관도 준비된 상태였다.
하지만 1황비 생각에, 옛 연인의 시신을 마주하면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황제 안에 피어오를 것 같았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자가 황제 본인이었어도 말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다음 순서는 죽은 연인이 남긴 제 핏줄에게 이런저런 보상을 해주는 것뿐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둔다는 원래 계획과 달리 그럴듯한 가짜 배경을 주어 황궁에 데려올지도 모르는 일.
그리하여 1황비는 세이브릴 하룬의 시신을 운반 도중에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니 당연히 혼자 추진해선 안 된다. 1황비는 내궁 여자들을 부추겨 동의를 얻었다. 화장터로 가는 무연고 시신과 바꿔치기하는 계획은 성공리에 진행됐다.
그때 매수했던 병사들은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사고사나 병사로 위장해 처리했다고 한다.
마무리까지 아주 확실했다. 덕분에 오데트는 어머니의 묘지에서 그녀를 추모할 기회를 영영 잃었다.
어머니가 어느 화장터에서 태워졌는지조차 모른다. 그 사실만 떠올리면 자다가도 숨이 막혔다. 불에 시뻘겋게 달군 인두로 가슴이 지져지듯이 고통스러웠다.
‘그런 짓을 저지르고는 태연히 내 얼굴을 구경하러 왔겠다.’
대담함, 정보력, 그리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냉혹한 짓도 서슴지 않는 수완.
“당신쯤은 돼야 로즈 황가의 남자를 셋이나 주무를 수 있나 봅니다.”
오데트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체스말을 내려놨다. 체스판 옆에는 암호로 작성된 보고서가 있었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오히려 의심병 황제의 총애를 받는 1황비. 그녀는 황제가 알게 되면 경악할 인물과의 밀애를 수년 즐겨왔다.
보고서는 그에 관한 내용이다. 오데트의 정보원이 오랜 시간을 들여 수집한 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저희 관계를 발각당할 리 없다는 자만으로 가득한 대화를 보면 황제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 졸도하지는 않을지.
오데트는 조금 걱정이 들었다. 황제를 쉽게 보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쓰러질 때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게끔 주시하고 있어야겠다.
우르르르, 쾅! 콰광!
병사들에게 쫓기던 밤. 어머니와 목숨 걸고 도망치던 날도 오늘처럼 세찬 비가 내렸다.
“엄마! 아아악! 싫어! 놔! 네놈들 다 죽일 거야! 얼굴 다 기억해놨어! 너희도, 너흴 보낸 놈도 죽일 거야. 단 한 놈도 안 살려둬! 아아아아악!”
태어나서 그처럼 발악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확실히 제 영혼의 일부는 그날 어머니와 함께 죽었다.
“당신들은 날 살려두지 말았어야 했어.”
오데트의 피맺힌 절규는 한 음절도 빠짐없이 황가에 전달됐을 터다. 단순히 어린 계집아이의 원망이라기엔 상당히 악에 받쳐 있다. 이에 신경 쓰이는 것도 잠시뿐.
한참 후 수도에 도착한 제 모습을 보고 다들 안도했을 것이다. 복수는 고사하고 성년식까지 숨은 붙어 있으려나 싶었겠지.
그러나 오데트 로즈는 살아남았다. 이제 각자에게 어울리는 결말을 안겨주는 일만 남았다.
내궁의 모든 권한을 빼앗긴 채 유폐된 황후.
그녀의 수족으로 활동하다가 혹독한 매질을 당한 뒤 시골농장으로 보내진 수석시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의 오데트처럼 발악하며 끌려가 첨탑에 갇힌 폐태자.
“시궁쥐 몇 마리를 친구 삼게 들여보내주는 것도 괜찮겠지?”
오데트가 작게 웃었다. 정궁 세력은 완벽하게 찍어냈으니 이다음 목표는 냉혹한 수완으로 따지면 천생배필인 한 쌍이 되시겠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오데트는 번쩍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옷장 깊숙한 곳에 잠자고 있는 검은 비로드 망토를 꺼내 입을 날이 손꼽아 기다려졌다.
하늘에 구멍이 뚫리기라도 했는지 지난 사흘간은 쉴 새 없이 비가 내렸다. 그렇게 쏟아붓던 비가 그치자 거짓말처럼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
비어스 백작은 이제 수염과 가발, 모자까지 동원해 마리엔을 속여 넘겼다.
“정말 황실의인 줄 알았다고요!”
“하하하하하하!”
“그만 웃으세요, 백작님. 그렇게 좋으세요?”
“너무 뿌듯하단다, 너무. 하하하! 속이는 보람이 있는 친구라니. 아하하하하!”
“진짜 황실의는 어디 가둬두셨어요?”
“가둬두긴. 어제가 저택을 방문하는 마지막 날이라더구나. 솔직히 지난주부터는 우리 집에 와도 별로 하는 일이 없었잖으냐. 괜히 비싼 찻잎만 축내고.”
방금까지만 해도 숨넘어가게 웃던 비어스 백작은 돌연 눈을 가늘였다.
“이건 내 추측인데.”
“네.”
“황실의 선생이 내 정원에서 희귀약초를 뿌리째 캐 간 것 같다.”
마리엔은 잠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했다. 이것까지 백작의 연기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황실의는 필요한 약재가 있으면 구매 신청서를 써서 올리기만 된다. 한데 남의 집 정원에서, 그것도 그 집 장남을 치료하러 왔다가 사유지 내 불법채취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상식적으로 들린다.
“백작님, 약초도 키우세요?”
“걔들도 식물이야. 아주 사랑스러워. 왜 내가 안 키울 거라고 생각하지?”
“캐 갔다고 의심 중인 약초의 이름이 뭔데요?”
비어스 백작이 대답했다. 마리엔은 그것을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외국어처럼 들린다고 말하자, 외국어로 된 학명이 맞다는 답이 돌아왔다.
“무려 세 뿌리나 캐 갔다. 뻔뻔한 마멋 같은 자식.”
“아까는 추측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느새 확신으로 바뀐…….”
“새로운 외부인은 황실의 선생밖에 없잖느냐. 게다가 첫날부터 내 정원 칭찬을 한참이나 하더라고. 예전부터 꼭 한 번은 방문해보고 싶었다고 말이야.”
백작이 흥, 코웃음을 쳤다.
“그때부터 눈독 들인 게 틀림없다.”
“음, 네…….”
“정원 경비를 강화해야겠어. 맙소사, 자식 고쳐주러 온 의사가 되려 약초를 훔치다니 이게 말이 되니?”
백작은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냐는 탄식과 함께 자릴 떴다.
‘끝내 연기인지 진짜 일어난 일인지 물어보지 못했네.’
마리엔은 눈을 도르르 굴렸다. 어차피 연기였어도 백작이 실토하지 않는 한 자신은 또 속았을 거다. 지금도 봐라. 이미 반쯤 넘어갔다.
“앗, 비어스 경. 천천히! 천천히요!”
마리엔이 바일레온에게 달려갔다.
“그렇게 성큼성큼 걸으시면 어떡해요!”
“이렇게 걸을 만큼 나았는데 어떡해요.”
“그래도요. 걱정된단 말이에요. 조심히 걸으세요.”
마리엔의 눈썹이 아래로 축 내려갔다.
“절대 무리하시면 안 돼요.”
“분부대로 할게요, 아가씨.”
“오늘 출근도 이른 감이 있긴 한데……. 게다가 점심 먹고 4황녀궁에도 가야 하고요.”
오데트가 마리엔과 바일레온을 동시에 호출했다.
사실 마리엔은 오늘 황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원작에선 무도회장 피습 사건이 마무리되면 2황자 축출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드디어 오데트와 카인이 같은 조로 작업에 나선다.
고급 휴양시설로 위장했으나 실은 지하조직까지 연루되어 있는 범죄 소굴. 2황자의 소중한 재원인 그곳에 두 사람이 잠입하는 것이다.
조장님 직접 출두요!
저와 바일레온은 앞선 사건에서 대활약을 했으니, 이번엔 후방지원만 하면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