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88)
벌써 1차 위기인가.
옷이 몸을 옥죄는 듯한 갑갑증이 찾아왔다.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숨쉬기가 힘든 느낌이었다.
“하아…….”
바일레온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저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다른 건 몰라도 목에 감은 크라바트라도 느슨히 하고 싶었다. 이것만 풀어도 숨쉬기가 좀 수월해지지 않을까.
“읏.”
크라바트 정도야 괜찮잖아. 사실 마리엔은 내가 다친 후로 계속 실내복 차림인 걸 봐왔어. 게다가 전엔 실수였긴 했어도 목욕가운만 입고 있는 것도 봤고.
빗발치는 자기합리화 속에서 바일레온은 결국 크라바트를 잡아당겨 옆으로 내동댕이치는 데에 성공했다.
“아…….”
문제는 크라바트 푸는 정도로 갑갑증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일레온은 셔츠 단추를 두 개 풀었다.
‘아직 부족해.’
정신없이 세 번째, 네 번째 단추를 끄르다가 조끼로 손을 옮겼다. 바일레온 그쯤에서 간신히 손을 멈췄다. 마리엔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멀리서 물소리가 들렸다. 마리엔은 욕실에 있나 보다. 손을 씻기라도 하는 걸까.
물수건을 만들어주며 걱정하던 마리엔. 연인의 근심 가득하던 하늘색 눈이 떠오르자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최악이군.’
멋있는 척은 다 하면서 흑기사를 자청해놓고 이게 무슨 추태인가 싶었다.
아까 마신 벌주가 독하기도 했지만, 바일레온 자신은 확실히 술이 약한 편이다. 차라리 클로이즈가 제 오빠보다 더 잘 마실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내가 잠깐 잠들긴 했나? 늦어도 두어 시간 안에는 정신 차려야 하는데.’
머리를 대고 누워 있는데도 어지러웠다. 누가 커다란 국자로 두개골 속을 빙글빙글 휘젓는 것 같다.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돌리면 묵직한 푸딩 같은 뇌가 오른쪽으로 휙 기울었다가, 이내 뒤통수를 한 번 돌아 왼쪽으로 치우치는 느낌이 이어졌다.
‘그리고 계속 몸이 갑갑해.’
옷을 벗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바일레온을 재촉했다.
벗자. 벗자. 벗자. 안 돼. 벗자. 벗어. 벗으라고. 안 된다니까.
그럼 한발 양보해서 조끼와 셔츠만이라도 벗는 건?
‘안 된…….’
침대에 가지런히 내려놓은 바일레온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조끼와 셔츠, 그러니까 상의만 탈의하자는 아이디어가 상당히 유혹적으로 들렸다.
귀족 남성은 배우자 앞이 아니고서는 이성에게 맨살을 드러내선 안 된다.
바일레온은 그렇게 배웠고, 배운 대로 살아왔다. 다른 귀족들이 예외로 두는 하녀의 목욕시중도 바일레온에겐 예외가 아니었다. 이것 때문에 사석에서 놀림을 당한 적도 많았다.
한데 오늘 고작 술버릇 때문에 마리엔 앞에서 규칙을 깨자고?
‘그렇지만 난 어차피 마리엔에게 속한 몸이니까.’
바일레온의 손이 스멀스멀 움직였다. 가죽조끼 단추를 하나씩 풀 때마다 숨통이 틔는 것 같았다. 몸을 꽉 죄던 조끼가 이내 활짝 열렸다.
맹세컨대 마리엔을 마음에 들인 후로는 그녀 하나뿐이다. 미래의 배우자로 그녀 아닌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둔 적이 없다.
그리고 목욕가운 차림을 목격한 것까지 치면, 지금까지 자신의 맨살을 가장 많이 본 여자도 마리엔이다.
‘신혼 첫날밤을 아주 조금 앞으로 당긴다 치면…….’
그만.
바일레온은 다급히 손을 내리고 옷 대신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주제에 자기합리화만 하고 있다.
게다가 뭐, 신혼 첫날밤이 어쩌고? 옷 벗는 술버릇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데, 기어코 그걸 하겠다고 선 넘는 스스로에 자괴감이 들었다.
“비어스 경, 아직 정신이…… 으악!”
그때 침대로 돌아온 마리엔이 비명을 질렀다. 바일레온은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잠깐 욕실에 다녀온 사이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마리엔은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또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비어스 경의 배려와 반듯함이 좋다던 연인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바일레온의 자괴감은 더욱 깊어졌다.
“미, 미, 미친.”
마리엔이 말을 더듬었다. 숨쉬기 불편한 건 이제 더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숨을 안 쉬었으면 좋겠다. 바일레온은 진심으로 연인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오, 옷이 왜……. 아니, 조끼 단추가 다 풀려 있잖아. 셔츠는 또 언제 이렇게 훤히…….”
마리엔의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렸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믿기지 않는 투다. 그러다가 갑자기 침묵이 이어졌다.
바일레온은 이제 모든 게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보고 만 거야.’
신혼 첫날밤. 그 생각을 해선 안 됐다. 차라리 그딴 자기합리화 없이 상의만 벗었다면 나았을 텐데.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마리엔에게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제발 아무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싶다. 욕을 해도 좋으니까 이런 벌 같은 침묵만은.
“흉부.”
마리엔이 경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여기가 왜 이래. 나보다……. 아니, 어떻게 이런 두께.”
츄르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릴까.
“피부도 정말 매끄럽고…….”
숨죽여 듣고 있자니 조금 헷갈렸다. 마리엔의 목소리는 분명 충격으로 가득한데 내용이 어째 묘했다.
자신이 징그럽지 않나? 마리엔은 이런 제 상태를 보고도 괜찮은 걸까?
찰싹!
돌연 뺨 때리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바일레온은 움찔했다.
그렇지. 내가 맞을 짓을 했지. 기왕이면 마리엔이 자신을 흠씬 패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보면 정신이 좀 돌아오지 않을까 해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찰싹 때리는 소리 후에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일레온은 이 또한 취기로 감각이 무뎌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마리엔의 다음 말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변태 마리엔 디디. 얼마나 야한 생각에 빠져 있었으면 바일레온의 옷을 벗기고도 기억을 못 해?”
찰싹!
“이 파렴치한! 변태! 음란마귀! 그러고도 돌아와서는 가슴근육을 보면서 희롱질을 하다니.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바일레온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뇨, 마리엔. 이건 당신이 한 게 아니라.
찰싹!
내가 한 건데.
찰싹!
그만 때려요.
찰싹!
피 나겠어요.
“으아아아! 너무해. 어째서 내게 이런 시련이! 차라리 맨손으로 악당을 때려잡으라고 해!”
자해를 멈춘 마리엔이 이번에는 주먹으로 침대를 퍽퍽 내리쳤다.
“어서 정신 차려요, 바일레온. 당신의 순결이 위험해요. 빨리 눈뜨지 않으면 내가 사탕 껍질 벗기듯이 당신 옷을 벗길지도 몰라요. 흐어, 이거 봐요. 벌써 셔츠 단추까지 풀어재꼈다고요.”
그 단추 내가 푼 거라고.
“정말 내가 이대로 잡아먹어도 괜찮겠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 바일레온은 이견이 없다.
마리엔이 정말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 하지만 만일 그녀가 원한다면, 그래서 실행에 옮기려 한다면 자신은 기꺼이 모든 것을.
‘아, 안 돼. 또…….’
생각을 멈춰야겠다. 그게 힘들다면 우스꽝스러운 생각이라도 하자. 그것도 어려우면 장엄하고 진중한 무언가를 떠올리기라도 해야 한다.
바일레온은 속으로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국가를 부르고도 어지러운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서 제국 아카데미 교가를 불렀다.
다행히 교가 후렴구를 부를 때쯤 몸의 열기가 다소나마 가라앉았다.
“흑흑, 어떡하지? 도저히 자릴 뜰 수가 없어!”
마리엔은 여전히 자책 중이었다. 자신의 의식이 가물가물하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애초에 왜 욕실에 간 걸까. 많은 의문이 한꺼번에 바일레온을 찾아들었다.
“흣.”
이제는 눈을 떠야 할 시간이다. 마리엔이 비명을 지르면서부터 미친 듯이 심장이 쿵쾅거리며 긴장감이 확 올라갔다. 덕분에 술은 다 깬 것 같다.
“마리엔…….”
“헉, 다행이다. 바일레온. 아, 아니 비어스 경.”
비련의 주인공 같은 자세로 침대 가장자리에 엎어져 있던 마리엔이 반색했다.
“정신이 좀 드세요?”
“네.”
바일레온은 이마 옆을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약한 두통 기운이 남아 있었다. 마리엔이 얼른 부축해주었다.
“물 한 잔 드릴까요?”
“아…… 그래주면 고맙겠어요.”
“네, 잠시만요!”
찬물에 얇은 레몬 조각까지 띄워서 가져오는 마리엔의 얼굴이 더없이 밝았다.
바일레온은 물잔을 받아 들며 현재 시각을 물었다. 이에 마리엔이 대답했다.
답을 들은 바일레온은 내심 놀랐다. 어지러움에 몸을 못 가누긴 해도 계속 깨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새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잤단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혼자 너무 오래 있었겠군요.”
“저 대신 벌주 마셔서 그런 거잖아요.”
“그래도요.”
“아이참. 전 정말 괜찮다니까요. 얼마나 괜찮냐면 그사이에 룸서비스로 이것저것 시킨걸요. 무슨 와인 한 병이 얼마더라……. 빈티지라서 어마어마하게 비싸더라고요.”
마리엔이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짝, 치더니 테이블로 달려갔다. 다시 침대로 돌아온 그녀의 손엔 숙취 해소제가 들려 있었다.
“이거 드세요.”
“고마워요.”
바일레온 입장에서도 반가운 물건이다. 그는 건네받은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보통 물건의 뚜껑을 열 땐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아래를 향하기 마련이다.
바일레온의 눈길이 훤히 노출된 제 가슴팍에 다다랐다.
“이건…….”
“그건……!”
둘 다 동시에 말하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바일레온도 사람인지라 이대로 어물쩍 덮고 넘어갈까 하는 유혹에 흔들리긴 했다. 연인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건 바일레온 비어스라고 예외는 아니니까.
하지만 제 이미지를 지키자고 마리엔을 자책하게 둘 순 없다.
“내가 그랬어요. 마리엔이 기억 못 하는 게 아니라, 내 술버릇이 이래요.”
“비어스 경이 그랬다고요?”
마리엔의 목소리가 커졌다. 바일레온은 귀가 달아오르는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
“네, 술에 취하면 옷이 너무 갑갑해서 그만……. 나도 모르게 벗게 돼요. 미안해요.”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니구나!”
“아니에요.”
“난 음란마귀가 맞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법도는 지키는 종자였어.”
바일레온은 마리엔의 표정 변화를 보며 극도의 안도감이 뭔지 깨달았다. 역시 말하는 게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바일레온 제 얼굴엔 피가 쏠려 못 볼 꼴이 됐지만 말이다. 마리엔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 뭐예요. 반전매력!”
“매력……?”
바일레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싫지, 않아요?”
“뭐야. 뭐야. 뭐야. 제가 왜요?”
“평소의 내 모습과 많이 다르잖아요. 그런 술버릇이라니……. 왠지 난잡해 보이고.”
마리엔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두근거리는 표현만 골라 쓰지 말란다. 바일레온이 보기에 지금 마리엔은 별것 아닌 말에도 웃는, 과하게 흥분한 상태 같았다.
아마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직후라 그럴 터다.
‘여하튼 마리엔이 싫지 않다면 그걸로 됐어…….’
바일레온은 말없이 약병을 기울여 약을 털어 넣고는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다.
왠지 아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