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89)
마리엔은 아까 급하게 세면대에 얼굴을 처박다가 깃이 부러지고 만 타조 깃털 장식을 종이에 싸서 트렁크 안에 고이 넣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하녀에게 접착제로 붙여달라고 부탁할 셈이다.
아무리 황녀 전하의 명을 받고 공작의 돈을 쓰게 됐어도 소시민 마리엔 디디의 본능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돈은 쓰겠는데 그 과정에서 낭비되는 물건은 아깝다.
‘물건이 무슨 죄야.’
그래서 룸서비스로 시킨 호화로운 저녁도 열심히 긁어먹었다.
매끼를 새 모이만큼만 먹는 입 짧고 까다로운 귀족 영애 연기를 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이 점에서만큼은 오데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벼락부자 리디엔은 품위 따위에 신경 안 쓰기 때문에 소스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접시를 싹싹 비워도 된다. 마리엔은 현실과 긴밀히 맞닿아 있는 생활 연기에 충실했다.
‘여기 음식이 훌륭하네. 비싼 값을 해. 주방에 실력자가 있나 봐.’
어쨌든 배도 채웠겠다. 옷도 갈아입었겠다. 비뚤어진 백금색 가발도 다시 썼겠다.
출동 준비 완료다.
“비어스 경, 그럼 적진으로 돌아가볼까요?”
“네, 씩씩한 토끼 아가씨.”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상태가 훨씬 나아진 바일레온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리엔은 아까 그 억지 부리던 사장실 여자한테 술을 끼얹으려 했죠?”
“하하, 과연 제가 끼얹으려 했을까요?”
마리엔은 아주 재밌는 농담을 들은 양 웃었다.
“끼얹는 건 이미 물로 했잖아요. 그리고 뭔가를 끼얹는 정도로는 용서 못 할 억지를 부렸다고요.”
마리엔이 바일레온의 팔짱을 끼며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죄가 깊어요. 비어스 경의 몸을 너무 세밀하게 뜯어봤어. 변태 같은 눈빛으로 말이에요. 완전 짜증 나.”
“그렇게 보라고 꾸민 차림인걸요.”
바일레온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 역시 옷을 갈아입었는데 아까보다 더 노골적인 스타일이었다.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오묘한 광택이 흐르는 호박단과 촉감 좋은 연갈색 가죽으로 만든 조끼는 코르셋을 연상케 할 만큼 몸을 꼭 조였다.
게다가 조끼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바일레온의 검은 셔츠엔 비밀이 있었다.
바로 등판이 시폰으로 만들어져서 속살이 아른아른 비친다는 점이다.
귀를 뚫은 것처럼 그 셔츠 역시 바일레온 자의로 고른 거였다. 리디엔이라면 제 과시용 하인에게 이런 옷을 입혔을 거라나.
이에 마리엔은 잠깐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팀 오데트’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팀 리더 오데트는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답게 인물 분석 능력이 탁월했다. 리더의 오랜 친우이자 신하인 바일레온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일상에서는 옷으로 인식하지도 않을 셔츠를, 임무를 위해서 일부러 공수해 입다니.
심지어 바일레온은 자신의 차림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파트너 ‘리디엔’의 성향까지 분석한 끝에 내린 판단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정말 환상의 군신 관계군요…….’
오데트와 바일레온.
왜 둘의 친분이 오래도록 이어지는지 이해가 됐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최고의 동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더니 마리엔의 속이 갑자기 따끔거렸다.
“비어스 경은 제 거예요.”
“맞아요.”
“제 사람이란 말이에요.”
심통 난 마리엔에 비해 바일레온은 한없이 행복해 보였다. 마리엔의 것이라고 불려서, 그리고 그 말을 마리엔의 육성으로 들어서 기쁜 얼굴이었다.
“눈알을 확 뽑아버릴라.”
“그랬어요? 아까 그 여자의 눈알을 뽑으려고 다가갔어요?”
“아, 그건 아니고요.”
마리엔이 부인했다. 유혈사태는 끔찍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턱을 꽉 잡아서 강제로 입을 벌린 뒤에 목구멍으로 술을 들이부으려 했어요.”
“…….”
“비어스 경이 말리셔서 불발에 그쳤지만요.”
“으음, 피를 안 흘린다뿐이지 그것 역시…….”
그때 마리엔의 시선이 테이블로 향했다. 연인에게 정신이 팔려서 하마터면 맨얼굴로 방을 나설 뻔했다.
마리엔은 얼른 테이블로 달려가 가면 두 개를 챙겼다. 환히 웃는 얼굴로 바일레온에게 건네자 그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이 마리엔을 바라봤다.
“비어스 경? 쓰세요.”
“…….”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바일레온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져나갔다.
“아뇨, 안 묻었어요.”
“그럼 왜.”
“그냥…… 새삼스럽게 당신이 너무 좋아서요.”
이런 느닷없는 고백을 들어도 상대가 바일레온이다 보니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마리엔은 뿌듯한 얼굴 위로 가면을 썼다. 바일레온이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물었다.
“갈까요?”
“네!”
복도를 벗어날 때쯤, 마리엔은 그렇게 많은 양의 독주를 한꺼번에 마셨는데 벌써 멀쩡히 걸어다닐 수 있으면 절대 술이 약한 편은 아니신 것 같다고 속삭였다.
◇ ◆ ◇
전용구역은 그새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워진 실내를, 군데군데 놓인 신비로운 보랏빛 조명이 밝히는 중이었다. 탐스러운 꽃 모양의 조명 아래로 희뿌연 수증기가 흘러나왔다.
처음 보는 장식이다. 마리엔은 신기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수증기를 건드려봤다. 촉촉한 습기가 이내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별생각 없이 냄새를 맡았더니 물기 묻은 손가락에서 희미한 향내가 느껴졌다.
‘수증기에서 향기까지? 무슨 장치인지 몰라도 비쌀 것 같네.’
게다가 아까는 없었던 푹신한 2인용 소파 수십 개가 앞쪽의 무대를 향해 배치되어 있었다.
격투장 출입문은 열린 채였다. 불 꺼진 격투장 안은 언제 흥분한 사람들로 터져나갔냐는 듯이 텅 비어 있었다.
“너, 나가. 넌 뽐내기 좋아하잖아. 돈도 벌면서 네 몸 자랑질도 할 절호의 기회라고!”
“하지만…….”
“여기! 여기! 노예 후보 출전이야! 그리고 나한테도 피켓 줘.”
소라고둥처럼 돌돌 만 헤어스타일의 여자가 직원을 불렀다. 한 손에 경매 피켓을 수북하게 든 직원이 여자 쪽으로 다가갔다.
“뭐? 그런 게 어딨어.”
여자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아직 후보 자리 남아 있잖아. 두 자린가 남아 있는 거 저기서 들었거든? 왜 안 된다는 거야?”
여자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껑충 큰 직원을 전혀 위압적으로 느끼지 않는 태도였다. 직원이 뭐라고 설명했는지 몰라도 여자가 입가를 실룩거렸다.
“아니, 얘가 어때서? 얘가 뭐가 부족한데? 이래 봬도 제국의 꽃 선발대회에도 출전했……. 아, 넌 가만있어봐!”
여자는 절 말리는 남자를 향해 성질을 부렸다. 남자가 직원에게 가라는 손짓을 하자 그의 뺨을 후려치기도 했다.
“지금 어딜 끼어들어!”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흘러가는 분위기로 봐서는 설명이 아니라 숫제 설득 조긴 하다.
“리디엔 님?”
성질부리는 여주인을 구경하고 있던 차, 한 직원이 살가운 태도로 마리엔에게 다가왔다.
“오늘 처음 오신 리디엔 님 맞으시지요?”
“네…… 네가 알려준 거야, 발렌틴? 가면도 썼는데 어떻게 날 알아보지?”
습관처럼 존댓말을 하려 한 마리엔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바일레온에게 돌렸다.
전용구역 분위기를 보아하니 돈은 넘쳐나고 예의는 스튜에 말아먹은 인간만이 여기에 들어올 자격을 얻는 듯하다.
그렇다면 ‘리디엔’도 직원에게 반말하며 적당히 함부로 대하는 게 좋을 것이다.
“글쎄요. 전 모르는 일입니다만.”
바일레온이 눈치껏 응수해줬다. 직원은 오늘 레벨 3 등급으로 업그레이드된 새 손님은 리디엔뿐이라며, 어디서든 알아보는 게 자신의 소임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화술 하나는 제대로 교육받았네 싶었다.
“아까 안내 담당이 말씀드렸나 모르겠습니다만 오늘은 숙녀의 밤입니다. 여자 손님들을 위한 특별한 행사가 여럿 준비되어 있어요.”
“응, 그렇다고 들었어.”
“대략 십 분 뒤부터 시작될 행사는 노예 경매입니다.”
마리엔은 뜨악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지금 뭔 소릴 들었냐며 눈을 굴리는 게 아니라 흥미를 보여야 마땅했다. 리디엔이라면 그래야 했다.
“노예 경매애?”
“예, 손님들의 동행이나 하인 중에서 한 명을 내보내는 건데요. 진짜 노예처럼 아주 팔아버리는 건 당연히 아니고, 낙찰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할 겁니다.”
“하룻밤?”
“예, 재밌겠죠? 리디엔 님께서 관심 있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직원의 목소리엔 확신으로 가득했다. 리디엔이 호색한이라는 소문이 벌써 온 클럽 안에 퍼졌나 보다.
마리엔은 괜히 뿌듯해졌다. 제 연기가 괜찮긴 했다. 전용구역에 입장할 때부터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남의 남자 엉덩이를 탐한 보람이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리디엔 님의 하인을 참가시켜주십사 부탁드리려 합니다.”
마리엔이 옆에 선 바일레온을 힐끔 봤다.
“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불쾌해 마세요. 절대 강요는 아닙니다. 다만 경매라는 행사 특성상 참가자의 수준을 고려할 수밖에 없어서요.”
직원이 바일레온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면에서 리디엔 님의 하인은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모, 몸매, 패션, 에티켓까지 모두 훌륭합니다.”
“나의 발렌틴이 대단하긴 해.”
마리엔은 우쭐거리는 얼굴로 바일레온의 팔을 쓸어내렸다.
“저 숙녀 말로는 두 자리가 남아 있다며?”
“한 자립니다. 그새 한 명이 들어왔어요.”
“어, 그래?”
“네, 그래서 저흰 리디엔 님께 마지막 자리를 드리려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하인을 경매에 내보내주시겠습니까? 이따 보시면 알겠지만, 경매 자체도 아주 흥미진진할 겁니다.”
“발렌틴을 내보내서 내가 얻는 이득이 뭔데?”
이걸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성질난다고 상대의 뺨을 후려치는 저쪽 여자와 달리 리디엔은 어쨌든 제 하인에게 푹 빠져 있는 설정이니까.
별다른 이득도 없는데 다른 여자 시중들라며 ‘나의 발렌틴’을 무대로 올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마리엔은 그렇게 판단했다.
“오늘 경매에서 최고가로 낙찰한 손님껜 저희 사장님이 직접 감사를 표할 예정이랍니다.”
“감사를 표한다는 뜻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물건을 선물로 드릴 수도 있고요. 아니면 굉장한 체험을 시켜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후회 않으실 겁니다.”
실로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다. 위장잠입의 첫 번째 목표는 사장실로 가서 1황비의 사촌과 독대하는 것이다.
철통 경비를 뚫기란 힘드니 사장실에서 리디엔 일행을 불러들이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다.
이때 중요한 점은 불러들이는 이유다.
리디엔 일행이 의심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관심이 가서, 여야 한다.
그리고 방금 직원의 설명은 마리엔에게 지도 위로 갑자기 나타난 화살표처럼 느껴졌다.
“발렌틴.”
“네, 아가씨.”
“가보자고.”
“…….”
마리엔이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쳤다. 직원은 손님의 말뜻을 냉큼 알아듣고 명단에 발렌틴의 이름을 써넣었다.
“그럼 오 분 내로 저기 보이는 무대 뒤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았어.”
“리디엔 님의 아량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전 이만 물러갑니다.”
마리엔은 직원을 향해 장난스러운 손 인사까지 했다. 아무 말 않고 있던 바일레온이 마리엔을 스윽, 흘겨보았다.
“제 착각인가요, 아가씨? 지나치게 즐거워하고 계신데요.”
메소드 연기 중이라서 그렇습니다, 자기야. 이게 다 연기예요, 연기. 마리엔은 입가에 번져나가는 미소를 애써 지웠다.
“발렌틴도 들었잖니. 사장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낙찰자와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규칙도 들었죠.”
“아이참. 내가 널 다른 사람에게 낙찰되도록 둘 리 없잖아.”
게다가 계획대로라면 클럽 블루밍의 영업은 오늘 밤까지만이다.
낙찰자들이 낸 돈은 모조리 국고 환수. 노예와의 하룻밤은 없을 것이다. 수도경비대 손에 잡히지 않게 달리기나 해야 할 터.
찰싹!
마리엔은 바일레온의 엉덩이를 때렸다. 엄청나게 차진 소리가 났다.
“출동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