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97)
“들어가.”
“우읍, 읍, 읍읍!”
“잔말 말고 들어가라고……!”
비밀 통로로 난 문이 아니라 뻥 뚫린 벽 쪽에서 왠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엔은 저게 원래 있는 문이 아니라 벽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보나 마나 카인이 뚫었을 것이다.
이리저리 돌아가게 만들어놓은 비밀 통로에서 헤매느니 벽을 뚫어버리자고 생각한 게 카인다웠다.
‘그래……. 문이 없으면 벽 뚫으면 되고, 문이 잠겨 있으면 쇠문을 뜯어내면 되지. 다들 그렇게 하고 싶어 하잖아. 카인에겐 그걸 실행할 힘이 있는 게 다른 점이고.’
카인을 반짝반짝 민머리로 만들지 않길 잘했다. 머리카락을 살려두었더니 그게 마리엔 자신의 목숨으로 돌아올 줄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비어스 경.”
훤칠한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를 알아본 마리엔의 눈이 동그래졌다.
“휴고?”
“아, 디디 보좌관님. 안녕하십니까.”
셔츠 없이 맨몸에 검은 실크 조끼만 입은 휴고는 목에다 검은 리본 타이까지 야무지게 매고 있었다.
마리엔은 그게 전용구역 직원의 유니폼이란 걸 떠올렸다.
“그럼 비어스 경이 말한 내부 조력자가 휴고…….”
마리엔의 경호만 하는 줄 알았더니 투잡을 뛰고 있었단 말인가. 다른 일도 아니고 클럽 블루밍의 전용구역에 침투해서 정보를 빼내는 일을 맡았다니.
바일레온이 마리엔을 부축해주었다. 그는 오늘 밤 마리엔을 품에서 놓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마리엔은 그렇게 연인의 품에 안긴 채로 휴고를 쳐다봤다.
‘밝은 데서 보니까…… 와!’
휴고는 어떻게 전용구역 직원 면접을 통과했을까.
비밀을 엄수해야 하는 곳인 만큼 아무나 뽑지는 않았을 테고, 신원 확인과 관리자 면접 등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위조서류와 신분증을 확인한 후에 이제 실물을 보자는 관리자 앞에 짠, 하고 나타난 저…… 흉부.’
즉시 합격 도장을 찍는 관리자의 모습이 상상됐다. 그리고 휴고는 출근 첫날부터 음험한 미소를 띤 귀부인들에게서 수십 골드의 팁을 챙겼을 것이다.
별것 안 해도. 그냥 눈앞에서 숨만 쉬며 걸어다닌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도주하는 범인들을 잡아 왔습니다.”
휴고가 개 목줄처럼 쥐고 있던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벽 뒤에서 드레스 차림의 2황자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는 1황비가 딸려왔다.
포승줄에 몸이 꽁꽁 묶인 두 사람은 꼴이 말도 아니었다.
오다가 먼지 구덩이에 처박히기라도 했는지, 가발이 반쯤 덜렁거리는 데다 옷도 너덜거리는 상태였다. 두 사람의 입엔 재갈이 물려 있었다.
휴고의 신호에 경비대원이 묵직한 포대자루를 그들 옆에 내려놓았다.
“다른 손님들은 값비싼 트렁크를 챙겨 달아나는 와중에 이 둘만 낡은 포대자루를 짊어지고 누가 봐도 수상하게 움직이더군요. 그래서 혼란을 틈탄 도둑이라 판단했습니다.”
“우읍, 누우, 읍!”
휴고가 2황자의 오금을 걷어차서 놈을 무릎 꿇렸다. 그때 마리엔이 쏜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망할 자식, 죽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엄청난 힘이 마리엔의 주먹에 몰렸다. 마리엔은 이를 악물고 2황자의 눈두덩에 주먹을 날렸다.
무릎 꿇린 탓에 딱 마리엔에게 맞기 좋은 위치였던 2황자는 억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한 번으로 끝내줄 것 같아? 일어나!”
마리엔은 직접 놈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워, 이번엔 반대쪽 뺨에 주먹을 냅다 꽂았다.
물속에서 숨 못 쉬던 순간을 떠올리면 화가 치밀었다. 2황자 놈도 숨을 못 쉴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패고 싶었다.
“재갈을 물려두길 잘했군요.”
휴고가 2황자를 바닥에서 일으키며 말했다.
“헛소리 막을 목적이었는데 뜻밖에도 마우스피스 역할을 했네요.”
“한 대만…… 한 대만 더 패고.”
“그만 패세요. 흔적 남습니다.”
“치…….”
마리엔은 미련이 득시글대는 눈으로 2황자 커플을 노려보며 물러났다.
휴고가 2황자의 재갈을 잠깐 빼주었다. 그러자 2황자가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네놈들이 내게 감히 이딴……!”
휴고가 다시 더러운 재갈을 2황자 입에 쑤셔넣었다.
“뭔 말을 하려나 했네요. 역시 입을 막아놓는 편이 좋겠습니다.”
“수고했네.”
바일레온이 수하의 꼼꼼한 일 처리를 치하했다.
“일개 도둑이 늘어놓는 헛소리가 사람들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것 없으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바일레온은 2황자가 변장한 점을 역이용해서 경비대 앞에서는 그를 철저히 잡범 취급하기로 한 모양이다.
1황비의 가면을 여태 벗기지 않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황궁에 들어갈 일이 거의 없는 수도경비대는 높으신 분들의 얼굴을 모른다.
하지만 바일레온은 이야기가 다르다. 2황자 커플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는데도 무례를 범하면, 이후 황제 앞에 나갔을 때 바일레온도 벌을 받을 수 있다.
황제는 안 그래도 2황자 때문에 망신살이 뻗친 상태일 터. 거기에 화를 더할 필요는 없다.
얼룩덜룩한 화장과 가발, 1황비의 가면은 몰라봤다고 둘러댈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휴고와 카인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리엔 자신도 슬쩍 얹어가는 수밖에.
‘가발 벗기기 전까지는 황자를 황자라고 부르지 말아야지. 그 정도야 문제없지. 야 아니면 인마가 좋겠어.’
아무래도 새끼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다. 마리엔 디디의 품위를 해치는 행동 같다. 마리엔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다시 바일레온의 품에 안겼다.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도둑들 재갈을 풀어주는 일이 없도록.”
휴고와 경비대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바일레온은 도둑들을 마차로 옮기라고 명했다.
이 와중에 카인이 증거가 담긴 포대자루를 제 몫이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어깨에 짊어졌다.
바일레온은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린 후에 방을 나섰다. 그와 함께 걸음을 옮기던 마리엔이 휴고에게 나직이 한마디 하려던 찰나였다.
“그리고 휴고.”
“예, 비어스 경.”
“따라나서기 전에 옷 갈아입게.”
◇ ◆ ◇
클럽 블루밍 내부 정리는 조용하고 신속하게 진행됐다. 마리엔 일행은 교대해서 현장을 지킬 경비대가 도착하는 것까지 본 다음 황궁으로 향했다.
마차 세 대가 4황녀궁에 당도할 즈음에 시곗바늘은 어느덧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범인들은 따로 가둬라. 어차피 동트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물이나 화장실 요구를 들어줄 필요는 없다.”
“예.”
눈과 입은 막혔어도 귀는 멀쩡하다. 두건 너머로 바일레온의 명령을 들은 2황자가 거세게 저항했다. 바일레온은 이를 못 본 척하며 경비대에게 이만 가보라는 눈짓을 했다.
오데트의 충직한 수석시녀가 경비대에게 범인들을 가둘 장소를 친절히 안내해주었다.
손목만 묶은 상태라 한결 운신이 편한 콘스탄체는 경호 겸 감시로 붙은 네 명의 경비대와 한 몸처럼 움직였다.
바일레온은 휴고에게 먼저 방에 가서 쉬어도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 바일레온, 마리엔, 카인 셋이서 오데트를 대면하게 됐다.
“저 포대자루에 담긴 게 현장의 증거물인가?”
“네, 전하. 폐하의 인장을 교묘히 흉내 낸 가짜 도장부터 각 부서 대신들의 도장과 2황자 권한으로는 열람할 수 없는 기밀서류의 유출본까지 종류도 다양합니다.”
“훌륭해. 아까 계단에서 내려다보니 1황비의 사촌에게만 대우가 다르던데 어찌 된 일이지?”
“최후의 순간에 2황자 일당이 그녀를 배신했습니다. 서류상 사장으로 앉힐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정된 결과겠죠.”
바일레온이 마리엔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마리엔이 콘스탄체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신변 보호와 감형을 약속해준다면 우리 편에서 증언을 하겠다더군요.”
마리엔은 눈을 깜빡였다. 제게로 공을 돌린 바일레온 덕분에 오데트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됐다.
확실히 새벽 3시에 어두침침한 서재에서 마주하기엔 부담스러운 안광이었다.
“……네, 전하. 저예요. 제가 해냄.”
“꼴이 그게 뭐니.”
“오늘, 아니지, 어제 비어스 저택을 나설 땐 이보다 훨씬 예뻤답니다. 그런데 놈들의 비밀 창고에 굉장한 비밀이 숨겨져 있더라고요.”
마리엔은 카인의 코트에 잡아먹힌 제 몸을 내려다봤다. 원래 주인의 엉덩이를 덮는 코트는 마리엔의 종아리까지 가려주기에 충분했다.
“하마터면 창고에 수장될 뻔했어요. 벽에 난 구멍으로 물이 콸콸 흘러 들어오는데 정신이 아득해지는 거 있죠. 전하께선 그 장치에 대해 알고 계셨나요?”
오데트가 입을 열려는 순간 바일레온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마리엔의 심장이 멈춰서 심폐소생술을 시행해야 했습니다.”
“……저런.”
“십 분 넘게 했는데도 미동이 없었어요.”
오데트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황녀는 짧게 혀를 차고는 마리엔을 향해 말했다.
“내 불찰이야.”
“으음, 뭐, 불찰이라고 하실 것까지는…….”
“이제 죽다 살아나기까지 했으니 널 향한 비어스의 과보호가 정말 볼만해지겠구나.”
그런 의미에서의 불찰이었나. 마리엔은 볼을 부풀렸다.
사실 오데트의 말이 과장은 아닌 게, 자신이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바일레온은 한시도 제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돌려야 하면 마리엔을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을 넣었다.
그 말인즉, 현장에서 경비대장에게 보고받을 때도 그는 마리엔을 끌어안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비밀 연애고 자시고 물 건너간 게 아닐까? 손님 수백 명과 경비대가 심상찮은 차림으로 부둥켜안고 있는 우릴 봤잖아…….’
마리엔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가. 이미 오래전에 물 건너갔나? 그래도 난 재상부에서만큼은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여기까지 생각한 마리엔은 얼른 머릿속 생각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재수 없게 자꾸 물 건너갔다는 말은 왜 써? 안 그래도 물에 빠져 있다 와놓고.’
오데트가 진료는 필요 없냐고 물었다. 바일레온은 현장에 동행한 의사가 괜찮다고 했지만, 날이 밝으면 황궁의의 추가 진료를 받게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렇겠지.”
오데트가 의미심장한 투로 대꾸했다. 모든 황궁의로부터 마리엔은 이상 없음 소견을 받아야 네 성이 풀리지 않겠냐는, 약간의 체념마저 느껴지는 어조였다.
‘근데 거기서 약간의 안도감이 같이 느껴진단 말이죠. 바일레온 비어스의 저 과보호와 집착, 은은한 광기를 어떻게 견뎌. 당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차길 잘했어,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계시잖아요……!’
마리엔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이에 오데트는 두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을 피했어! 오데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오데트 로즈가! 시선을! 피했다고!’
진짜 안도하고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디도 그렇고 두 사람 다 수고가 많았어요. 폐하의 단잠을 깨울 필요는 없으니 오전 10시쯤 준비해서 넘어가죠.”
“네, 알겠습니다.”
“이제 천둥 치는 밤에 폐하를 달래줄 이가 사라져서 어쩌나.”
오데트가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