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98)
물에 빠져 죽다 살아났으니 한동안 물 가까이 가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안 씻을 순 없는 노릇이다.
마리엔은 백조처럼 새하얀 욕조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어내렸다.
자스민꽃 향기가 엷게 나는 로션을 몸에 토닥토닥 바르고 헐렁한 통짜 잠옷을 걸치자 절로 나른한 한숨이 나왔다.
실크 슬리퍼를 끌고 욕실을 나왔더니 커다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라고, 여기 누워보라고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마리엔은 푹신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아, 살 것 같다…….”
누운 채로 허공에 다리를 걷어차 방금 신은 슬리퍼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맨살에 닿는 침대 시트의 촉감이 너무도 좋았다.
“이거지.”
마리엔은 깃털 이불을 퍽퍽 차며 지금 이 순간을 만끽했다.
“출세했구나, 마리엔 디디. 좁디좁은 보좌관 숙소에서 벽에 머리 찧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이걸 봐. 황녀 전하의 궁에서 귀빈 대접을 받고 있잖아.”
심지어 오늘 새벽부터는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1황비와 황태자 책봉을 목전에 두고 있던 2황자도 마리엔 자신만큼 좋은 곳에서 잘 수 없다.
마리엔은 2황자에게 주먹을 날렸던 오른손을 들여다봤다.
원래 사람을 세게 때리면 이렇게 되나? 아니면 창고에 갇혔을 때 어딘가에 부딪혀서 남은 흔적일까.
손가락 마디가 조금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멋져.”
전자건 후자건 상관없긴 한데 되도록 전자면 좋겠다. 때리는 사람 주먹이 이 지경이 됐을 정도면 맞은 인간 눈두덩엔 시퍼런 멍이 들었을 테니까.
“불 끄기 귀찮은데 그냥 잘까.”
눈 감으면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 정도로 피곤했다. 그때 작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엔은 문밖의 사람을 시녀라고 생각했다.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살피러 왔을 거라고.
“들어오세요.”
그래서 침대에 뻗은 채로 대답했다. 죄송한데 불 좀 끄고 나가달라고 부탁할 셈이었다.
“마리엔.”
“……비어스 경?”
이미 반쯤 눈을 감고 있던 마리엔은 익숙한 목소리에 후닥닥 일어나 앉았다.
“어쩐 일이세요?”
“그게, 아…….”
바일레온이 갑자기 눈을 피했다. 마리엔은 그게 자신의 옷차림 때문인 줄 모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바일레온 입장에선 더 곤란해졌을 뿐이다. 마리엔은 느슨한 목선의 잠옷이 흘러내려서 한쪽 어깨가 다 드러난 것도 깨닫지 못했다.
“비어스 경?”
“그게, 드, 들어오라고 해서 옷을 다 입고 있는 줄 알았어요. 미안해요. 아니면 잠깐 나가 있을까요?”
“옷이요?”
마리엔이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옷이 좀 흘러내려서 그런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잠옷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대충 수습한 매무새는 쉽게 원상태로 돌아가는 법.
진줏빛 잠옷은 마리엔이 손을 떼기 무섭게 다시 어깨를 반쯤 드러냈다. 바일레온이 급히 말했다.
“역시 내가 잠깐 나가 있는 게.”
“저 옷 입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내 말은.”
“저 이제 잘 거예요. 옷 더 안 입을 거예요.”
마리엔이 발치의 이불을 끌어안았다.
“이것보다 더한 차림도 아까 보셨으면서 새삼스럽게.”
“…….”
“비어스 경, 귀에 불이 옮겨붙은 건 아니죠? 얼마나 빨개지셨으면 여기서도 보여요.”
바일레온은 방을 나가지도, 마리엔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일레온은 새 셔츠에 조끼까지 갖춰 입은 상태였다. 무려 크라바트까지 매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엔은 현재 시각을 확인하고픈 충동에 시달렸다.
“이 시간에 어디 나가세요?”
“아뇨.”
“근데 비어스 경의 방은 제 옆방이지 않나요?”
“마리엔의 옆방은 비어 있어요. 난 그 옆방의 옆방.”
“오.”
이불을 뭉쳐 끌어안고 있으니까 마치 곰인형을 안고 있는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고 좋았다.
“나갈 일도 없는데 잠깐 복도 걸으려고 그렇게…… 입으신 거예요? 비어스 저택에서는 좀 더 편한 차림이셨잖아요.”
“그리고 여긴 황궁이고요.”
바일레온이 나직이 항변했다. 마리엔이 작게 웃었다.
“알았어요. 그만 괴롭힐게요. 무슨 일이세요?”
“나는.”
바일레온이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할 말이 있긴 한데 너무 많아서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마리엔은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앉아서 얘기해요.”
“…….”
“거절하기 없……기…….”
바일레온의 눈빛이 약간 달라지더니 금세 마리엔에게 다가왔다. 오라는 말에 이렇게 바로 올 거면서, 겨우 잠옷 차림 봤다고 당황하기는.
마리엔은 연인의 모순된 행동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마리엔,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어지럽지는 않고요?”
“괜찮아요.”
“속이 울렁거리거나 하는 다른 증상은요?”
“없어요. 걱정 않으셔도 돼요. 좀 많이 졸릴 뿐…….”
“그럼 키스해도 돼요?”
“네, 어…… 네?”
뒤늦게 말귀를 알아들은 마리엔이 바일레온과 눈을 마주쳤다. 짙게 드리운 녹음 같은 눈동자가 위태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 키스하지 못하면 죽어버릴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거 안다. 정작 바일레온은 입도 떼지 않았다. 하지만 마리엔 제 눈엔 바일레온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해도 된다는 뜻이죠?”
“아…….”
“마리엔…… 제발.”
바일레온이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였다.
“된다고 말해요.”
바다에서 뱃사람들을 홀리는 세이렌이 이처럼 유혹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을까.
바일레온의 반쯤 잠긴 목소리는 버터스카치 향을 입힌 연기처럼 달콤씁쓸했다.
마리엔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잠깐, 하고 멈췄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약 드셨어요? 귀 뚫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물에 빠지셨으니…….”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바일레온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웃었다. 내 말이 웃긴가? 웃기려고 한 말 아닌데. 엄청 진지한데. 마리엔은 서둘러 부연했다.
“곪으면 고생이잖아요.”
“그게 걱정됐어요? 내 귀가?”
바일레온이 마리엔의 한쪽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당신은 내 눈앞에서 숨이 멎어놓고 내 귀가 덧나는 걸 지금 걱정해주는 거예요?”
“나 죽고 싶어서 죽은 거 아닌데.”
“먹었어요, 마리엔.”
바일레온의 얼굴에서 일순간 웃음기가 가셨다.
“소독도 했어요. 내가 좀 위태로워 보여도 할 일은 다 해요. 그런 걸로 당신 걱정 안 시킬게요. 그리고 삐딱하게 말해서 미안.”
바일레온이 낮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제 키스해도 돼요?”
“응…….”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가 입술을 급하게 겹쳤다. 말랑한 두 입술이 뭉개지며 신음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리엔은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어째서 이 사람은 키스를 이토록 절박하게 할까.’
실제로 체격으로 밀리는 건 마리엔인데도 항상 더 절박한 쪽은 바일레온 같았다.
상대에게 매달리는 듯한 키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마리엔의 등에 닿는 매트리스. 어지러이 얽히는 손가락.
마리엔은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연인에게 언제까지 계속할 거냐고 물었다.
“잠들 때까지요.”
바일레온이 대답했다.
◇ ◆ ◇
마리엔은 하품을 참으며 진하게 우린 홍차를 마셨다.
어제 바일레온과 나란히 누워 잠든 게 새벽 4시 반이었던가. 그렇다면 다섯 시간도 못 잔 셈이다.
제가 아침식사를 앞에 두고 반쯤 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나 놔두고 다녀오라고들 하고 싶네.”
너무 졸리니까 입맛이 없었다. 마리엔은 한숨을 내쉬며 조그만 크로아상을 집어 들었다.
“식욕이 없으니까 세 개만 먹자…….”
마리엔은 이어서 부드럽게 익힌 오믈렛과 겉면이 바삭해지도록 구운 소시지와 버터 냄새가 솔솔 나는 감자를 먹었다.
“요리사가 만들어준 성의가 있는데 그래도 입 댄 시늉은 해야지.”
시늉에 진정성을 더하느라 스튜 절반을 비웠고, 깎은 과일은 놔두면 갈변되니까 다 먹었다.
결국 먹다 보니까 졸음이 어느 정도 가시게 됐다.
“배도 채웠겠다. 슬슬 옷 갈아입고 준비를 해볼까.”
황태자가 축출되는 광경은 구경꾼들 틈에 끼어서 봤으나 오늘은 다르다.
오늘 마리엔은 4황녀의 심복이자 2황자 손에 죽을 뻔한 증인, 그리고 콘스탄체가 두말 못 하게 자리 지키는 역할로 황제 앞에 설 것이다.
“자꾸 목숨 간당간당해지는 건 불만인데 이럴 때면 또 고속승진하는 맛이 난단 말이야.”
제대로 된 업무도 없던 재상부 제3보좌관의 위치가 반년 남짓한 사이에 몰라보게 변했다.
황자 눈탱이에 주먹을 날리고도 목을 빳빳이 세운 채 황제 앞에 설 수 있으니.
“역시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해.”
마리엔은 다소 적폐 세력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1열 직관하러 가보자고!”
◇ ◆ ◇
원래라면 재상 바일레온으로부터 국정 보고를 받고 있을 시간이다. 한데 재상직을 맡은 후로 단 한 번도 지각한 적 없던 바일레온이 십오 분째 쏘른 홀(Thorn hall)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황제는 낱말 퍼즐을 푸는 척하다가 옆의 시종에게 물었다.
“지금이 몇 시지?”
“10시 30분입니다, 폐하.”
“간밤에 비어스 백작가에 무슨 변고라도 있었나?”
“……제, 제가 알기로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왜 비어스가 지금 내 눈앞에 없냔 말이야.”
황제가 연필 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황제가 신하를 기다리는 일이 가능하게 된 거지?”
때마침 바일레온이 쏘른 홀 안으로 들어왔다. 시종의 얼굴이 단박에 밝아졌다. 반면 황제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내가 재상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줬나?”
황제가 연필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일이 너무 버거우면 언제든 말해라, 비어스. 난 네게 긴 휴가를 허락하지 않을 만큼 비정한 황제는 아니니까.”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늦은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늦은 이유도 있어?”
황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넌 어릴 때부터 언변 하나는 대단했지. 그래, 네가 뭐라 둘러대나 보자. 황제를 기다리게 할 정도로 심각한 일인지 아닌지 어디 한번 듣고 판단하자고.”
바일레온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런 다음 여상스러운 말투로 엄청난 단어를 입에 올렸다.
“역모를 꾸미는 세력이 클럽 블루밍의 전용구역에 종종 모인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중대한 사안이라 비밀리에 진행한 점, 폐하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잘못 들은 거냐? 역모……?”
“예, 폐하.”
“클럽 블루밍이라면 1황비의 먼 친척이 운영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거기서…… 역모?”
“사장의 이름은 콘스탄체 데모나입니다. 제보에 따르자면 역모 세력이 클럽을 모임 장소로 이용할 뿐, 사장은 그들이 무엇을 꾸미는지조차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장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친척인 1황비는 결백하다. 황제는 바일레온이 그어준 선 안에서 안심한 눈치였다.
물론 그것은 황제의 착각이다. 누구도 발뺌 못 할 증거를 직접 당신 눈으로 확인하며 충격에 빠지라는, 친딸의 배려이기도 했다.
“하여 어젯밤 저는 수도경비대를 동원해 역모 세력 진압에 나섰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침 황궁에 있는 카인 블랙우드 공작에게 지원을 요청했고요.”
바일레온이 신호를 보내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인이 포대자루를 메고 왔다.
“거기서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