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00)
제주 구상(濟州 構想)
척, 척.
목성의 북면 숲 속에서 무쇠로 된 삽으로 땅을 팠다. 한 사람이 누울 만한 크기였고, 깊이도 사람을 묻는다면 적당할 만큼이었다.
그 구덩이를 판 초고독불화는 그대로 그 안에 들어가 무릎 꿇고 있었고, 주변에서 그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표정은 무척 엄엄하였다.
내내 먼 곳에서, 목호 수용소 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아마도 초고독불화의 가족이 곡하는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초고독불화의 표정은 이미 죽은 자의 것과 다름없었다. 적어도 그가 판 구덩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제, 초고독불화를 비롯한 목호들을 데려오러 갔던 탁기는 오늘 새벽에야 돌아왔으니, 만 하루가 꼬박 걸린 셈이었다.
새별오름과 항파두리 성의 거리로 볼 때, 그리고 탁기의 승마 실력과 임무의 난이도를 볼 때 많이 늦게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데려온 이는 초고독불화뿐이었다.
다른 세 목호들은 일이 틀어졌음을 깨닫고 도주하였다가, 탁기와 더불어 갔던 탁가 무인들에게 추살(追殺)되었고, 애초에 자포자기한 초고독불화만이 잡혀 온 것이었다.
몽주는 구덩이 안의 초고독불화를 내려다보다 문득 말하였다.
“너는 아니나, 다른 목호들은 도주하다 죽었으니, 이는 지난밤에 약속한 것을 어겼다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
고실개 성주가 통역하여 말을 건넸음에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기회도 얻지 못한 것을 두고 변명을 할 법도 하였으나, 그저 무릎 꿇은 채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만약 딴 맘을 품는다면 다 죽을 것이라 한 것도 기억할 것이다.”
“……!”
그 말에 초고독불화가 흔들렸으니, 감은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나, 이미 이곳 제주에 와서 너무 많은 살업을 쌓았으니, 저 많은 목호의 일족들을 죽이는 것이 내키지 않은 바, 너에게 다시금 네 가족과 일족들을 살릴 기회를 주겠다.”
말을 마친 몽주는, 고 성주가 통역을 하는 사이에 옆에 있는 앵도로부터 단도를 받아 구덩이 안, 초고독불화의 앞에 던졌다.
툭.
초고독불화는 눈으로 그 단도를 보고, 귀로 고 성주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다시 얻은 기회가 무엇인지를 짐작한 기색이었다.
“죽어라. 그리한다면 이제 이 난리로 인해 죽는 목호의 일족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물론, 저항하여도 좋다. 그 단도로 살기 위한 마지막 발악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만약 그가 저항을 선택한다면 진실로 발악으로 끝날 것이다. 겨우 단도 하나를 들고 주변에 십여 명이나 있는 무인들을 상대하여 살 가능성은 없으니까. 그리고 그 발악의 대가로 일족들은 참살당할 것이다.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던 초고독불화가 눈을 뜨고 단도를 쥐며 몽주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무어라 말이 나오니 고 성주가 즉시 전해 주었다.
“자신이 죽어 일족을 살릴 수 있다면 그리하겠다며, 가족들을 잘 보살펴 달라고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일족 모두가 저자의 생각보다 잘 살 것이라 전하시오.”
고 성주가 몽주의 말을 전하니 초고독불화가 조금 떨리는 손을 높이 들어 단도를 역으로 쥐었다.
잠시 날카로운 단도의 첨단을 응시하던 초고독불화가 몽주에게로 시선을 두는 그 순간, 손을 힘껏 자신의 목을 향해 당겼으니, 단도가 그의 목에 박혀 들어갔다.
챙!
하나, 그 직전에 쇠가 울리는 소리와 더불어 초고독불화의 손에서 단도가 떨어졌다.
앵도가 그녀의 단도를 던져 초고독불화의 손에 있던 단도를 맞춘 탓이었다.
“……!”
질끈 감았던 눈을 뜬 초고독불화가 어찌 된 것인지 의아한 시선을 던지니, 몽주가 실소하며 말하였다.
“네가 인간됨의 정리(情理)를 보인다면 운에 맡겨 살 기회를 주라 하기에 그리해 보라고 하였다. 물론, 내 안사람의 단도 쓰는 실력은 운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 말이 고 성주를 거쳐 초고독불화에게 전해지는 사이에 몽주는 주변에 명을 내려 초고독불화를 수용소로 데려가라 하고는 몸을 돌려 멀어졌다.
그 등 뒤로 모든 사정을 파악한 초고독불화가 참았던 격정을 토하듯 울음을 터뜨리며 몽주를 향해 연신 무어라 소리쳤고, 동시에 절을 올렸다.
“마님의 청이 있으셨으니 어쩔 수 없으나, 제 생각에 싹은 애초에 도려냄이 옳다 생각합니다.”
탁기가 먼저 의견을 내니, 몽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옳다. 하나, 아내의 청이 있었던 데다가, 무엇보다 말을 키우는 방법을 제대로 아는 이가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 그 말씀 또한 맞습니다.”
제주에서 말을 키우는 기술을 가진 이들 중 탁월한 실력을 갖춘 이들은 모두 목호들이었다.
그런 목호들이 떼로 죽어 나간 상황에서, 그 실력을 전수할 사람을 남기지 못한다면, 제주에서 목마하는 데에 애로사항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대 기준으로 볼 때, 다른 목자(牧子)들이 ‘식당 아줌마’라면, 목호들은 ‘호텔 주방장’이라 해야 마땅하니, 그런 전문 기술을 사장시키는 것이 아깝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몽주는 문득 몸을 돌려 조금 뒤에서 따르던 앵도에게 손짓하여 다가오게 하였다.
“자내의 청이 있어 저자를 살렸소. 내 그가 가진 목마술이 탐이 나긴 하나, 그가 다시 호인들을 결집하여 반기를 들 수 있으니, 앞으로 자내가 특별히 관리해야 할 것이오.”
“…….”
그에 앵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아비의 말이 마치 자신에게 초고독불화를 노비로 준 것 같은 말이었던 것이다.
“어떠시오, 기분이? 이제 일만이 훌쩍 넘는 가복들을 거느린 집의 안주인이 되었으니…….”
“하, 하면?”
앵도가 크게 놀라워하였고, 그건 탁기도 마찬가지였다.
“여러모로 아직 믿기 힘든 자들을 그냥 둘 수 있겠는가.”
“하나, 도당에서 이를 허락하겠습니까?”
일종의 전리품인 포로는 나라의 것이라 해야 마땅하긴 했다.
“이곳은 제주일세. 호인들을 나라에서 거두어 가기도 저어할 것이고, 그 방법 또한 난감하니, 아마도 제주에 두고 대신 도형(徒刑)에 처하거나 관노비로 삼으라 하겠지. 하나, 다시 말하자면 이곳은 제주네. 나라에서 이곳의 사정을 잘 알기도 어렵고, 그럴 의지도 없는 곳이지 않은가.”
간단하게 말해서, 도당에서 무어라 처분하든 몽주가 제멋대로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분명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은 제주이기 때문에.
* * *
“왜 그렇게 초췌해 보이십니까.”
“요사이 심리가 육체에 주는 영향이 대단히 크다는 걸 느껴요.”
“……?”
몽주의 안색을 본 재상의 물음에 대한 몽주의 대답은 엉뚱했다.
고려에서 제주의 일을 마무리하느라 잠이 깨기 전까지 삼 일 동안 쉬지 못했던 게 현대에서도 피곤함을 느끼게 한 것이었다.
몸은 그렇지 않지만, 몽주의 정신은 나흘째 쉬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재밌네요.”
“뭐, 나쁜 상황에서 바쁜 건 아니었으니까요.”
결과가 엉망인 가운데 그걸 수습하느라 쉬지 못한 것에 비하면, 제주에서의 일은 전체적으로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몽주는 재상과 두신에게 지난 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쭈욱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은 몽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체크할 건 체크하면서도 일의 진행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 상당히 좋네요.”
“그런 셈이죠. 관군과 부딪친 것을 두고 고려 측에서 어떻게 반응할지가 문제로 남긴 했는데, 염흥방이 워낙에 제 편을 들어 주고 있어서, 적어도 올라가는 장계로는 트집 잡기 어려울 거예요.”
“염흥방이 몽주 씨의 사병이 가진 실력을 고려에 보고하면 고려 측에서 바로 견제하지 않을까요?”
두신이 조금 걱정된다는 식으로 물었지만, 몽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트집 잡자고 나서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염흥방의 장계만 보고 그렇진 않을 거예요. 장계를 보면, 제 사병들의 실력 중 팔 할쯤은 폭죽 덕분인 것처럼 보이거든요. 또, 목호들과 관군들의 실책과 무모함에 대해서도 자세히 써서 사병들의 실력이 오히려 폄하되게 유도하기도 했고요.”
이미 꿈에서 깨기 전에 몽주는 염흥방이 쓴 장계를 확인해 보았다. 염흥방이 장계를 쓰는 걸 돕다 보니 절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은근히 내용 자체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제가 폭죽을 제조하는 방법에 대해 따로 자세히 장계를 만들어 염흥방에게 주었어요. 물론 염초밭을 조성하는 방법이나 황과 목탄을 순정하게 하는 방법을 뺀 것이긴 하지만요. 아마 고려 측에서는 제 사병들의 전적(戰績)을 폭죽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 여길 가능성이 매우 높고, 제가 그 제조법을 알려 바친 것에 만족할 거예요. 다만, 고려에서 따로 화약을 제조하지 말라고 명할 가능성이 있긴 한데, 그거야 뭐, 제주에서 몰래 하면 저들이 알 수 있을까요? 고려에서 워낙 제주의 상태를 무시하기도 하고, 사실 당대의 시점으로 보면 무시할 만하기도 하죠. 무엇보다 제가 믿는 건 신돈이에요. 남양 석씨의 땅 일천 결을 얻었는데, 다시 저와 관련된 문제가 생겨서 대여 상태인 땅에 문제가 일어나길 원하진 않을 테니까요.”
“너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재상이 실소하며 묻자, 몽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섣부른 생각일 수도 있는데, 저도 고려 도당과 여러 번 얽히다 보니, 그쪽 인간들의 사고나 안목이라는 게 뭔지 대략 짐작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물론, 현대인의 마음을 가진 저이기에 오판할 가능성이 여전히 많아서 완벽하게 예견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좋습니다. 그 장계가 올라갔다가 다시 명이 내려오기까지는 최소 한 달 이상 걸린다고 하니, 만약 문제가 있다면 다음번에 다시 논의하면 될 것 같군요. 그럼, 이제 제주에서 기반을 잡는 것에 대해 논의해 보죠.”
세 사람은 우선 당대 제주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장 먼저 논의된 건 인구였다.
목호 일족을 포함하여 5만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제주의 인구는 세 사람들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중 장정이라 부를, 현대로 치면 경제 활동 나이의 남성이 1만에 이를 것이니, 제주의 인구가 예상보다 많을 것이라 여겼던 재상마저도 기대 이상인 수였다.
다만, 예부터 여자 많은 것으로 유명한 제주인 만큼, 여초 사회일 거라는 점을 생각하면 기대보다 장정의 수가 적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애초에 제주의 인구를 2만 이하로 견주었을 때에 비하면 훨씬 많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조금 아쉬운 건, 아무래도 사병들 중 일부와 관군들 전부가 고려로 돌아갈 것이라는 점이었다.
사병들의 경우, 애초에 그들을 제주에 정착시킬 생각으로 고려에 연고가 약하거나 집안에 기여해야 할 입장이 아닌 자들을 주로 뽑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 중에 돌아가길 바라는 자들이 있었고, 대부분 전투로 인한 후유증을 얻은 자들이었다.
신체적 부상을 입은 자들은 오히려 남고자 하였는데,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은 자들은 떠나려 하였다.
신체 건강한 것과 전투에 적응하는 건 분명 다른 것이니, 처참하게 죽은 시체를 목격하고, 직접 부딪쳐 사람을 살상한 경험을 가진 자들 중 일부가 사병으로서의 일을 포기하고자 하였고 제주를 떠나고 싶어 한 것이었다.
포로 상태로 전락한 관군들도, 반란을 빌미로 제주에 묶어 두고 싶긴 했으나, 염흥방이 관군을 사사로이 해체할 수 없다 하여 그들은 일단 고려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후에 돌아오도록 회유할 수도 있었지만, 고려에서 혹여나 첩자가 되어 올 수도 있으니, 그때는 몽주가 거절해야 함이 마땅했다.
참고로 고려의 선박들도 사분지 삼은 고려로 돌아가게 될 참이었다. 200여척 중 150척을 몽주가 만든 것이지만, 이미 나라에 바친 형태라 몽주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염흥방도 몽주가 제주에 묶일 것이라는 걸 알고 그를 불쌍히 여긴 덕에, 차후에 관군이 회군할 때 가급적 배를 남겨 주기로 하였으니, 제주에서 줄어든 관군의 수와 소모한 군자를 생각할 때 대략 50척 정도의 대소선은 남을 듯했다.
세 사람은 이어 몽주가 내린 목호들에 대한 처분을 두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몽주가 그들을 노비로 삼아, 5년간 일하게 한 후,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양인으로 풀어 줄 생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재상과 두신 모두 괜찮다는 반응이었으나, 다만 목호의 일족을 관리하는 방식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두신은 결국 그들도 제주의 백성으로 동화되어야 하니, 하루라도 빨리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제주의 여러 고을에 분산시켜 살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혹여 딴마음을 품고 뭉치는 것을 막을 것이고, 또 몽주가 그들을 통해 여러 고을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나, 재상은 원한이 적지 않을 그들을 철저히 관리해야 하고, 군대식으로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면서 한 곳에 모여 살게 하라고 하였다. 흩어지면 관리하기가 오히려 힘들다는 것이고,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둘 다 맞는 말이라, 몽주는 조금 더 고민하기로 하였다.
노동력을 이용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주제는 제주의 산업으로 넘어갔다.
어획, 목마, 밭농사로 간추릴 수 있는 제주의 경제 활동은 분명 몽주가 그곳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서는 많이 부족했다.
제주에 있는 기존의 산업 외에 몽주가 크게 성장하기 위한 발판이 필요했기에, 그간 그에 대해 논의한 바가 있었는데, 그 논의의 대부분은 제주에 있으나 아직 산업과 기술이 미비하여 이용되지 않는 자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사실 제주의 자원이라는 게 보잘것없긴 했다.
화산 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섬이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유황 같은 걸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당대의 기준에서는 전무하다고 해야 마땅했다.
하나, 그렇다고 죽으라는 법은 없었는지 제주의 자연에서 풍족히 얻을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는 역시나 제주에 가득한 원시림이었다. 제주의 인구가 생각보다 많다고는 하나 그래도 섬의 태반은 사람의 손길이 좀처럼 닿지 않은 원시 상태였으니, 그곳마다 숲이 울창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따뜻한 곳이라 땔감의 소모가 많지 않았던 덕인 듯도 하였다.
그만큼 수령이 오래된 큰 나무도 많았고, 위치와 높이별로 소나무, 삼나무, 참나무 등등 이용할 가치가 높은 것들이 충분히 있었다.
둘째는 바람이었다. 제주가 삼다도(三多島 : 여자, 돌, 바람이 많은 섬)인 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제주에서 바람이 멎은 날은 없다 싶을 정도라니, 풍차를 쓰기에 적합했다.
기관을 이용하지 못하는 시대에 풍족한 바람은 풍차를 통해 기계 장치를 움직이게 해 줄 동력원임에 틀림없었다.
하나, 나무와 바람은 산업을 키워 줄 부자재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그 자체가 산업의 중심이 되기에는 시대 상황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부족하였다.
그래도 몽주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패사(貝沙)였다.
“패사가 진짜 많더군요.”
산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몽주가 기쁜 낯으로 말하자, 재상이 역시 그랬냐며 되물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말씀하셨던 북동부 쪽만 잠깐 확인해 봤는데, 해안 지대가 패사 일색이더군요.”
해안 지대라 함은 단지 해변과 그 주변을 의미하는 걸 넘어, 거의 10킬로미터 안쪽까지를 의미했다.
일전에 재상이 제주의 해안 전역에 패사가 많다고, 그중 현대의 김녕해수욕장 부근에 특히 많다고 해서 그쪽을 확인했다.
해변에 아이보리색 모래는 물론, 더 안쪽 밭들도 패사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 잠시 조개님들에게 감사를 올리죠. 하하.”
재상이 장난스레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며 농을 하였다. 그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항구와 부두 등 해안 건물로 인해 패사가 쓸려 내려가 많이 줄어들었다면서 고려시대에는 제주에 패사가 더욱 풍족할 것이라고 하였었는데, 그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그가 조개에게 감사하자고 한 것처럼 패사는 조개껍질로 만들어진 모래였다.
제주의 패사는 그 양이 많은 것은 물론, 순도도 매우 높았다. 순도가 높다는 건 그만큼 석회 함유량이 높다는 의미이니, 북동부 쪽 패사의 경우에는 순도가 90퍼센트가 넘어가 그냥 빻기만 해도 꽤 고품질의 석회 가루를 얻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세 사람이 패사가 풍족한 것에 만족한 것은 석회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척 많기 때문이었다.
일단 비노와 선로를 만드는 것부터 석회가 기본이었다. 고려에서 악회(堊灰)라 하여 생석회를 구하여 썼으나, 아무래도 고려에 유통되는 악회의 양이 많지 않아 어차피 석회로 생석회를 만들어 써야 할 참이었다.
생석회를 만드는 건 해 봐야겠고, 그걸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도 도전이라 할 만했으나,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당대에서도 충분히 해 볼 만한 것이었다.
여러모로 제주에서, 한양부에 있던 시절보다 더 많은 비노와 선로를 만들 수 있을 듯했다.
또 하나 당장 기대할 만한 건 시멘트였다. 송대에 이미 현대의 시멘트와 다를 바 없는 것이 중국에서 개발되었으나 널리 쓰이진 않았고, 고려에서도 비슷한 것, 석회 모르타르에 해당하는 것을 쓰고 있었으나, 시멘트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 상품화하기에 가능했다.
다만, 몽주가 시멘트의 개발을 원하는 건 판매보다는 제주에 세울 여러 기반 시설, 특히 항구와 부두를 보다 튼튼하고 크게 지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시멘트를 상품화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 문물과 마찬가지로 외부에 혹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을 경계해야 했다.
그렇기에 어지간해서는 상당 기간 동안 감추거나 극히 일부만 아주 어렵게 구한 것처럼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결국 제주에서 기반이 될 산업은 여전히 비노와 선로, 그리고 원래 있던 말 생산이 될 참이군요.”
정리 끝에 두신이 말하는데,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하였다.
“구할 수만 있다면 사탕무를 키우면 좋을 텐데요. 하얀 황금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 시기에 만드는 건 아주 하얗지는 않겠지만요. 게다가 남은 부산물로 토양을 기름지게 할 수도 있고, 또 말 사료로도 아주 좋거든요.”
하얀 황금이란 설탕을 의미했다.
오늘날에도 그렇고, 설탕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시기에는 더욱 그러하듯 대부분의 설탕은 사탕수수를 원료로 하지만, 사탕무를 이용한 제당 사업은 분명 경쟁력이 있었다.
그 시대에는 더욱.
열대 지방에서만 자라는 사탕수수와 달리, 사탕무는 냉대 지방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한반도 남부는 너무 따뜻한 편일 정도였다.
대신 제주라면 동절기에 재배하기에 적합하였으니, 이 시기에 설탕의 가치를 생각하면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사탕무를 구하는 건데, 원산지가 지중해 동북부와 중앙아시아 쪽이거든요. 고려 말이라면, 몽골 제국 덕에 잘하면 중국 북부에서도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힘들까요?”
“일단 중국에 가는 것부터가 문제겠죠. 하지만, 한번 구해 보죠. 명나라나 북원까지 못 가더라도, 잘하면 요동에는 갈 수 있을 듯하니까요. 거기서 수소문해 보죠.”
“아, 맞다. 몽주 씨가 고려 본토에 종종 들릴 수 있었죠?”
재상이 문득 생각났다는 양 확인차 물었고 몽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날 신돈과 거래를 하면서 추가로 얻은 것들 중 하나가 제주와 고려 본토 사이의 상업 거래 허가였다.
본래도 제주에 식량이 부족하여 본토에서 식량을 구하곤 했던 터라 신돈은 어렵지 않게 허락하였으니, 아직 정식으로 문서를 받은 건 아니나, 적어도 고려의 시전을 이용할 수는 있을 것이었다.
신돈이 시전을 통해 이문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하, 기대가 되는군요. 이제 배를 타고 동아시아의 바다를 종횡무진 하는 건가요?”
“종횡무진까지는 아직 갖춰야 할 게 많지. 그래도 첫 걸음을 내딛을 때는 된 셈이지만.”
두신과 재상이 한마디씩 하니, 몽주도 내심 기대감이 생겼다.
두려운 바다를 극복하고 정복하여 제주와 고려의 위상을 역사와 완전히 다르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배는 어찌 돼 가고 있습니까?”
“아, 그거요?”
고려의 선박 기술을 뛰어넘어 대양으로 가기 위한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은 현대에서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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