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01)
* * *
네덜란드의 질란트-판 담 사의 협상 팀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그 주 목요일 오후였다.
그들은 바당보름 측이 개략적으로 설계한 것과 캐드로 작업한 3D 화면을 보며 자신들이 감수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보다 상호 간의 연계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한국에 기술 팀을 상주시켜야 한다면서 그 체류 비용을 요구하여 잠시 계약 체결에 난항이 있었다.
결국 기술 팀의 체류 비용을 5:5로 나누어 지불하는 것으로 타협하였고, 그 후에는 런던에서 받았던 제안서에 따라 계약을 확정 지었다.
“생각해 보니, 이걸 물어본 적이 없네요.”
질란트-판 담 사와 계약을 마무리하고, 바당보름의 대표로 나섰던 이주찬, 황진주와 더불어 맥주 한 잔의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을 때, 문득 진주가 말을 꺼내며 물어 왔다.
“저희가 설계한 배, 맘에 드세요?”
“……아, 물론 맘에 드니까 오케이 한 거죠.”
“정말 다행이네요. 내심 긴장했었거든요. 기대에 못 미칠까 봐요.”
그러면서 하하 웃는 진주를 보며 몽주는 속으로 자신을 한심하게 여겼다.
뭔가 물어본다기에 좀 긴장했는데, 여전히 일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꾸 앵도와 겹쳐 보이니 어쩔 수 없긴 했지만, 뭔가 진주와 관계가 진척될 여지도 없었는데 괜히 기대한 것이 부끄러웠다.
물론, 겉으로는 태연히, 말 나온 김에 한다는 식으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이미 많이 발을 걸치셨는데, 그만 연구소를 나오셔서 저희 재단으로 오시죠. 이제 제가 충동적으로 이 일을 하는 게 아닌 거라는 정도는 확인하셨잖아요?”
몽주가 재차 제안하자, 건너편에 있던 이주찬도 거들었다.
“그래요, 누나. 이거 누나가 꼭 해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그러니 같이해요.”
“야, 그 말을 하면 어떡해…….”
주찬의 말에 진주가 문득 놀라며, 주찬을 타박하였는데, 툭 치는 손목의 스냅이 남달랐던 탓에 주찬이 맞은 어깨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하였다.
몽주는 웃으며 넘어가 주었지만, 그녀가 처음 만났을 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 것과 달리 바당보름에서는 적극적으로 설득에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조금 기쁜 마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진주가 그녀 방식대로 쑥스러워한 것 자체가 맘에 들었던 것이다.
진주는 괜히 맥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갑자기 생각이 난 양 다른 말을 꺼내었다.
“저번에 말씀드린 전통 선박 전문가 말인데요…….”
“아, 예. 그분과 말씀을 나누셨나요?”
“예, 관심 있어 하세요. 사실 저희 과 선배인데, 박사 학위부터 한선 연구에 관한 걸로 받으셨고, 바당보름에도 도움을 많이 주신 분이세요. 한선뿐만 아니라 정크선을 비롯하여 동양 목선에 관해서는 이론 이상으로 상당한 경험이 있으세요. 한번 만나 보시겠어요?”
“지혁이 형, 말하는 거죠?”
어깨를 연신 비비던 주찬이 끼어들어 묻자, 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형이라면 좋죠. 성격 좋고, 성실하고, 이쪽으로 아시는 것도 많죠. 다들 좋아할 거예요.”
“그치?”
주찬의 지원에 앵도가 아니, 진주가 반색하였다.
몽주는 두 사람 모두 찬성하는 걸 보고 속으로 잘됐다 싶었다.
지난번에 진주를 설득하면서 굳이 전문가 필요 없다고, 마니아로 충분하다고는 했지만, 서양 범선의 전문가들인 질란트-판 담 사와 손을 잡은 이상 동양 범선의 전문가도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지혁이라는 분이 고루한 선입견만 없다면 바로 계약해도 좋을 것 같군요.”
“절대 고루한 사람 아니에요. 게다가 정의롭고 도전 정신도 갖추고 있어요.”
“그래요? 그것도 좋군요. 듣고 보니 굉장히 멋진 분이신 듯한데, 지금은 뭐하시는 분이죠?”
“아, 지금은 외국 역사책을 번역하는 일을 하고 계세요. 원래 국가에서 공영하는 학술 재단에서 일하셨는데, 거기 재단 쪽에서 정부 지원금을 횡령하는 걸 고발했다가 결국 나오셔야 했거든요.”
“음, 저런…….”
진주가 문득 눈썹을 팔자로 고치더니, 애원하는 양 혹은 일종의 애교인 양 간절하게 말하였다.
“부탁드려요. 그런 분이 진짜 일다운 일을 하셔야 해요. 책 번역도 보람 있는 일이긴 하겠지만, 그분이 원래 원하던 일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예에…….”
몽주는 문득, 어째 진주의 청원에 묻은 감정이 미묘하다고 느꼈다. 뭔가 선망의 감정이 묻은 듯하다고나 할까.
“지금 승낙하신 거죠? 잘됐네요!”
“…….”
그때, 주찬이 주절거린 말이 들렸는데, 몽주의 귀에 상당히 거슬리는 것이었다.
“아, 누나도 그 형 얼빠구나? 하여튼 여자들은 그 형만 보면 다 좋아 죽더라. 그 형이 그렇게 잘생겨 보여?”
“아냐! 그런 거 아니거든! 얼굴만 아니라 다 멋진 선배거든!”
몽주의 눈에 들어온 주찬의 말에 대드는 진주의 뺨이 붉어진 것 같았다.
문득 머릿속에 맘에 안 드는 상상이 펼쳐졌다.
우수에 찬 눈매를 가진 미남이, 불의에 항거하다가 탄압당하고, 그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곧은 마음을 지키면서 언젠가 다시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며 속으로 동정을 넘어선 애정을 품은 한 여인, 진주에 대한 상상.
진주는 가슴 아픈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진 남자에게 끌리는 타입인 것인가.
몽주는 비하인드 스토리라면 자신도 어디 꿀리지 않는데…… 라는 생각과 함께 얼결에 중얼거렸다.
“맘에 안 드네…….”
그 말이 얼핏 들렸는지, 진주가 물었다.
“네? 뭐가요?”
“아뇨, 아무것도. 근데 주찬 씨, 그 지혁이라는 사람, 능력 면에서는 문제가 없다는 거죠?”
“예.”
“그럼, 가급적 그분을 고용하도록 하죠. 근데, 그럼 진주 씨도 재단으로 오실 건가요?”
“네? 음…… 네. 아니, 원래도 재단 일에 더 흥미가 생겨서 고민 중이었어요.”
몽주는 속으로 ‘비겁한 변명입니다!’라고 소리쳤다.
“이렇게 진주 씨가 중심이 된 사람들이 재단에 모였는데 정작 진주 씨가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그쪽 정리하는 대로 바로 오세요.”
또 한 번 비겁한 변명이라고 속으로 외쳤다. 다만 그 대상이 이번엔 본인일 뿐이었다. 정말 진주를 데려오려는 이유는 그녀가 앵도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진주에 대한 소유욕이 생긴 탓이었으니까.
“네, 알겠어요.”
“결정 잘하셨습니다.”
몽주는 진주를 향해 웃음을 보였고, 속으로도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 웃음은 아직은 얼굴도 모르는 어떤 남자를 향한 것으로 고소를 넘어서 냉소에 가까웠다.
보아하니, 진주가 그 남자에게 짝사랑을 품은 듯했다. 앵도의 환생이 엉뚱한 남자에게 쓸데없이 애정을 낭비하게 해서야 쓰겠는가.
* * *
영당각 내외에 많은 이들이 모였으니, 근래에 고려 개경에서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의 집합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중에는 고려 권력의 양대 첨단이랄 수 있는 신돈과 이인임이 있었다.
일찍이 영당각에 신돈과 이인임이 한데 모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오늘은 그 규모와 분위기가 달랐다.
그 두 권력자들과 그들의 당여에 해당하는 세도가들이 거의 총집합한 데다가,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 쑥떡거리는 한편, 틈틈이 어딘가를 향해 경계와 의심의 시선을 던졌고, 그 시선들은 크게 양편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 시선들은 공히 한 곳으로 종종 옮겨졌으니, 그곳은 바로 영당각 안이었다.
그 안에서 신돈과 이인임이 먼저 독대 중이었던 것이다.
“우리 이제 솔직히 말해 봅시다.”
좀처럼 대화가 진척되지 않는 중에 문득 신돈이 꺼낸 말이었다.
“나의 당여들이 내 총애가 석몽린에게 향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질시하였으니, 그들은 석 현남을 죽이거나 쫓아내려 하였소. 그를 위하여 수시중에게 협조를 청한 것이고.”
이인임은 말을 삼갔으나, 표정으로 영공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인정하였다.
“하여, 수시중과 내 당여들이 석 현남을 압박하여 제주의 목호를 토벌케 하였으니,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안 석 현남이 내게 와 목숨을 구걸하고, 그 대신 그가 가진 것의 대부분을 바쳐 왔소. 나는 그것을 허락한 바, 이는 수시중과 내 당여들이 원하는 것과 내게 유리한 것 사이에 공통으로 만족스러울 결과라 여겼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신돈의 당여들은 석몽린을 죽이지는 못했으나 제주로 쫓아내고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으니 만족할 만하였고, 신돈은 남양 석씨가 쥐고 있던 1천 결의 토지를 얻게 되어 그에게 크게 이익이 되니, 양측이 모두 원하는 것을 얻은 셈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인임이 신돈의 당여들의 청을 들어줌으로써 그들에게 영향력을 일정 부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다만, 대놓고 말하기에는 서로 손잡은 상황에서 언급하기가 꺼려지는 부분이라 은근슬쩍 넘어간 것이었다.
“결국 석 현남이 제주로 간 것 자체가 모두가 좋은 마무리이니, 그가 제주에서 어찌 행동하고 어떤 일을 하든 사실상 의미가 없다 할 것이오. 어차피 그 궁핍한 곳에서는 말을 키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도 없으니. 물론, 확실히 의외이긴 하오. 그가 고려군 대신 사병들을 통해 목호들을 진압하는 데에 성공했다니, 나 또한 처음 소식을 듣고 장계를 훑어보면서도 쉬이 믿기 어려웠소. 거기다가 임견미가 뜻밖의 횡사를 당하는 일도 있었고, 그의 휘하 장령들이 감히 나라에 올리는 장계를 고쳐 쓰게 하려고 삿되게 군을 움직이는 일까지 했다는 것 또한 믿기 어려운 일이오. 하나, 이는 분명한 사실일 것이오. 석 현남이 어리고 나랏일에 임한 지 짧다곤 하나, 그간 세운 공을 보자면 그는 사실을 말한 것이 틀림없소. 아니었다면, 그렇게나 자세히 상황을 설명하고 그의 사병들이 공을 세운 연유라 할 수 있는 폭죽의 제조법과 사용법을 낱낱이 밝히려 하지 않았을 것이오.”
신돈이 말을 일단락하자, 이인임이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양 말하였다.
“그 때문이라도 오히려 강도를 높여 사정(司正)을 실시해야 할 것입니다. 폭죽을 썼다 함은 화약을 사사로이 제조하였다는 의미이니, 그가 혹여 제주에서 반기를 든다면, 고려에서 그들을 진압하기가 크게 어려울 것이 아니겠습니까.”
“석 현남은 이전 한양별시의 판관으로서, 한양별시의 임시 승이었던 최무선과 더불어 나라의 허락을 받아 폭죽을 개발하고자 한 바가 있었음을 모르는 것이오? 이미 장계에 나와 있듯 만들어 두었던 폭죽을 조금 고쳐 만든 것에 불과하고, 폭음이 기마를 쓰는 목호들에게 소용 있을 것이라 예견했기 때문이라 하지 않았소. 다시 말하지만, 석 현남이 그에 대해 따로 소상히 밝혔으니, 오히려 상을 주어야 마땅하지 않겠소? 그리고 수시중, 사실을 말하자면 석 현남이 제주에서 반기를 들 수 있다는 의심 자체가 우습지 않소?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먹을 식량도 확보할 수 없어 따로 뭍에서 곡식을 사야 하는 곳이 제주요. 호수는 고작 수천에 불과하여 인구도 적소. 아무리 폭죽이 쓰임새가 있다 하나, 넓은 곳에서 대군을 상대할 것은 되지 못하며, 이미 그 제조법을 도당에 알렸으니, 만약 제주에서 반란이 있다면 고려군이 폭죽을 쓰면 될 일이잖소.”
신돈은 이미 유리한 고지에서 수시중의 칭얼거림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으니, 수시중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반박할 자신을 보이고 있었다.
이인임이 그것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가 끝내 한마디 하였다.
“모르던 바였으나, 영공께서는 석 현남을 참으로 믿고 아끼셨던 모양입니다.”
“그렇소? 나 또한 수시중이 임견미를 그토록 믿고 아끼셨다는 걸 미처 몰랐었소.”
“…….”
그 말에 이인임이 움찔하였다.
지금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는 임견미와 부원수들이 죽었다는 장계의 내용을 두고, 이인임이 시비를 가려야 한다 강하게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인임이 임견미의 죽음을 빌미로 석 현남을 어찌해 보려는 것을 두고 신돈은 마치 애초에 그저 먹이 주고 부리려 들인 짐승 같은 자를 왜 그렇게 아까워하냐고 핀잔한 것이다.
신돈이 이인임이 움찔하는 모습에 실소를 참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다시 권하건대, 솔직히 말합시다. 만약 오늘 장계에 석 현남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고 적혀 있었다면, 지금 그대가 주장하듯 그 죽음의 시비를 가려야 한다 하였겠소? 제주는 먼 곳이고, 뭍과는 사뭇 다른 곳이오. 시중과 내가 수를 둔 것은 석 현남이 제주로 간 것까지일 뿐, 그 외의 일은 시중이나 나나 손을 뻗기 어려운 것이었소. 오늘에 이르러, 그 결과가 그대에게 좋지 않다 한들, 그것이 나의 수도 아니었음은 물론, 아마도 석 현남조차도 예기치 못했을 것이오. 그대가 장계를 못 믿겠다고 끝까지 우긴다면 어쩔 수 없으나, 그 장계를 쓴 자가 염흥방 밀직제학(密直提學)임을 잊지 마시오. 만약 수시중이 장계를 끝내 의심한다면, 이는 염흥방에게 수치를 주는 것은 물론, 그와 더불어 유자(儒者)임을 자처하는 모든 이들의 미움을 받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오. 그것이 정녕 수시중이 바라는 것이오? 임견미가 그럴 정도로 수시중에게 가치가 있는 자였소?”
“…….”
이인임은 가히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임견미가 제주에서 그리 당하리라 여기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로 하여금 석 현남을 죽게 만들라 했다.
실제로 후에 석 현남을 죽이지 마라는 서찰을 보낸 것이 미처 임견미에게 닿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으니, 아마도 임견미는 석 현남을 전장에서 죽게 하려고 여러모로 애를 썼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인임은 임견미가 무슨 수인지는 모르나, 석 현남에게 당했다고만 생각하고 분노했던 것이다.
물론 그자의 간사함은 이미 확인한 바 있으니,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신돈의 말대로 장계를 못미더워하는 모습을 계속 보일 수는 없었다.
도당의 하급에 위치한 유자들만 보자면, 얼마든지 그들의 불만이나 미움을 감수하고 무시할 수 있지만, 그들 대부분이 결국 세족의 일원인 만큼, 세족들의 대표라 자타에 공임(共任)된 그로서는 가급적 피해야 할 일이었다.
만약 이 일이 신돈과 더불어 꾸미고 있는 일이 시행된 이후라면 몰라도, 지금은 어쨌거나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신돈이 모니노와 관련된 말을 꺼내었다.
“수시중, 우리는 대계를 앞두고 있음을 명심하시오. 지금에 와서 고작 임견미 같은 자를 두고 마찰을 빚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서로 걸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오. 만약 시중이 계속 제주의 일을 두고 시비를 건다면, 그대에게 빚이 있다 여겨 온화한 관계를 맺은 나의 당여들마저도 수시중을 다시 경계할 것이오. 어차피 그들은 이미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 그저 돕겠노라 하였던 수시중이 달리 노리는 게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할 것이오. 그렇게 대계에 앞서 틈이 생기면 수시중이나 나나 좋을 게 하나도 없지 않소?”
그쯤에서 이인임은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도당의 주류에서 장계가 엄연히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상, 그가 대세를 바꿀 가능성은 없었다.
차라리 강요를 할 수는 있겠으나, 신돈이 버티고 있는 이상 그것 또한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제주를 향한 앙심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임견미는 그에게 있어 쓸 만한 자였다.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만한 인재는 아니나, 확연하고 이익이 되는 일을 시키기에는 너무나 적합한 자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토지를 모으는 일을 시켰으니, 실제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인임의 명을 받들어 시행해 내었다.
한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가 하다 잠시 멈춘 많은 일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다른 당여들 중에서 그를 대신할 사람을 보낸다 하더라도 다시 일이 제대로 재개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임견미만큼 그 일에 적합한 자도 찾기 어려웠으니, 그보다 똑똑한 자들은 많으나, 그만큼 자신이 손바닥 위에 놓고 완벽히 다룰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임견미에 대한 아쉬움은 이인임에게 있어 감수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나, 그에게 그런 수치스러운 죽음을 공인하게 두는 것 자체가 그의 당여들에게 그가 충분히 믿고 따를 만한 ‘웃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신돈이라는 거물이 존재하는 탓이긴 하나, 당여들의 불만과 의심이 그런 것을 따질 리가 없었다. 어쩌면 오히려 신돈에게 선을 대려는 당여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런 당여들의 동요를 다시 잠재우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지 그도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절로 고심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전투 중에 죽었더라면, 아니더라도 휘하를 잘 다루어 자기가 죽은 후에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지 못하게 해 두었더라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이인임은 속으로 몇 번이나 앓는 소리를 내야 했다.
그저 신돈의 당여들을 조금 흔들어 볼까 싶어, 그들의 청을 받아들인 것이, 오늘에 이르러 자신의 당여들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손해가 제법 큰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인임은 앙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여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방법이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니, 당연히 당장은 힘들다는 답부터 나왔다. 이제껏 신돈과의 대화에서 그것을 확인했으니.
하나, 조금 시간이 지나 상황에 변화가 있다면 다시 일을 꾸밀 수 있을 것이다.
이인임은 그의 정치 인생에서 언제나 그러했듯, 답을 찾을 것이라 스스로를 믿었다.
“알겠습니다. 정론대로 처분하십시오.”
마침내 이인임이 안정된 표정으로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는 말을 꺼내자, 신돈이 묘한 시선으로 이인임의 표정을 살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는 물음에 다름없었다.
“대신, 장계가 온 후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잊어 주십시오. 영공 저하는 물론, 다른 당여들까지 오늘의 마찰이 마치 없었던 것인 양 해 달라는 말이니, 이는 대계를 위해서라도 오늘을 없던 날로 하겠다는 제 각오에 대한 당연한 보답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하, 과연 수시중이시오.”
깔끔하게 미련을 털어 내는 모습에 신돈이 만족스러워하였다.
이어, 밖에 있던 그들의 당여들을 부르니, 그들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일이 풀렸음을 깨닫고, 그들 또한 서로를 향한 경계의 태도를 지웠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영당각은 조정(朝廷)을 대신하여 국정을 논하는 자리로 돌아간 것이었다.
물론, 겉으로만 그럴 뿐이었다. 사람이 어찌 스스로 기억을 지울 수 있겠는가.
* * *
항파두리성 안에서 전투 중 도망친 이진성과 기마병을 비롯한 관군들은 열두 날에 걸쳐 잡아내었다.
사실 부원수 이진성을 비롯하여 도주한 관군들 중 대부분은 추적한 지 삼 일 안에 다 잡아내었고, 추살의 일순위였던 이진성은 이미 목이 잘려 다른 부원수들과 더불어 수급(首級)만 소금에 절여져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주하던 관군 넷이 잡힌 건 함덕포로, 그곳에서 배를 훔치려다가 어민들에게 걸려 두들겨 맞고 끌려왔다.
그들 모두가 중랑장이나 낭장었는데, 자신들은 항복한다고 해도 봐주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끝까지 도망치다가 도주 생활에 지쳐 일반 백성들에게 얻어맞기에 이른 것이었다.
사실 기마병들이 주로 도주하였다 들었을 때, 몽주는 좀 걱정이긴 하였다.
제주가 섬이라, 그들이 완전히 도망치기 어렵다고 해도, 기마로 날래게 이곳저곳으로 도주하며 백성들을 약탈한다면 막기 힘들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나, 의외로 삼 일 안에 대부분의 도주한 기마들이 항복하거나 잡혔으니, 이는 삼 일 안에 그들이 탄 말들이 버려졌기 때문이다.
기마병은 강력한 만큼 손이 많이 들었다. 말이라는 동물은 의외로 약하고 생존력도 높지 않아, 관리되지 않은 생활이 며칠만 이어져도 이내 퍼져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특히, 야생마가 아닌 사람의 손길을 타던 말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현대에서 기계화된 군대일수록 보급과 관리가 더 철저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성주청에서 몽주가 도주 관군들에 대한 녹계를 작성하며 그 일을 일단락하자, 일을 돕던 고실개 성주가 다가와 물었다.
“현남 나리, 이제 자택을 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물음에 몽주가 실소를 보였다.
“그렇지요. 안 그래도 고민 중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삼 일 전에 부모를 비롯하여 일가의 전부를 실은 30여 척의 배가 제주에 도착하였다.
뱃멀미로 고생한 사람들은 많았으나, 그래도 무사히 바다를 건너는 데에 성공한 것이었다.
몽주도 강영이를 오랜만에 품에 안고 혹시라도 아비의 품을 잊었을까 싶어 그날 내내 떼어 내지 않았었다.
탐라현 내에 빈집이 꽤 있어, 일가를 그곳에 임시로 머물게 하였으니, 허름한 집이 낯선 부모와 언제나 최고의 것만을 주고 싶은 여식을 위해서라도 급하게 사택(舍宅)을 지어야 할 참이었다.
문제는 어디다 집을 지을 것이냐는 것이었다.
그건 단지 풍수지리적인 문제를 넘어, 제주 지배층의 권력구조와도 닿은 문제였다.
“굳이 먼 곳에 지으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제주에 여러 고을이 있으나, 이곳 탐라현이 가장 크고 제주의 중심이라 할 수 있으니, 탐라현 중 적당한 곳에 집을 지으시지요.”
고 성주가 조심스레 다시 말을 건네자, 몽주는 그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정말로 그가 탐라현에 자신이 머물길 바라기에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멀어지길 바라면서도 혹여 그런 눈치를 주어 미운털이 박힐까 싶어 속내와 다른 말을 한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몽주가 제주현남이고, 그의 사병들을 통해 제주를 지배할 만하니, 제주 최고의 권력자가 될 것은 분명한 바, 고 성주는 그런 권력자와 가까이 붙어 2인자가 되길 바랄 수도 있고, 반대로 멀리 떨어져 몽주의 통치와 간섭에서 가급적 벗어나고 싶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몽주가 고 성주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었다.
칼자루는 몽주가 잡고 있었고, 이 좁은 제주에서 멀든 가깝든 몽주는 모든 것을 관장할 생각이었다.
“그 전에 말할 게 있소.”
“하십시오.”
“도당에서 명이 내려와 나를 이곳 목사(牧使)로 임할 것이니, 그때가 되면 고 성주는 성주라는 칭호를 폐하고 인부(印符)를 반납하시오. 이는 성주뿐만 아니라 문 왕자도 마찬가지라오.”
“……알겠습니다.”
말하는 투에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혹시 고 성주는 소영웅심(小英雄心)이라도 가지고 계신 것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용의 꼬리가 되느니, 차라리 뱀의 머리가 되겠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신 것이냐 물은 것이오.”
“…….”
“있다면 포기하고, 없다면 성주 직 따위에 미련을 두지 마시오. 나를 따르는 것만이 그대와 가문이 안락할 수 있는 길이오. 제주가 고려 최고의 고을이 되는 대가라 여기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몽주의 말에 곧바로 미련을 떨쳐 내는 건 아니었지만, 고 성주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노라 답하였다.
몽주는 이어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 앞에 이미 펼친 단출하기 그지없는 제주의 지도를 보며 말문을 열었으니, 사택을 지을 곳을 정한 것이었다.
“내 급하게 제주를 돌아본 중에 홍로현(洪爐縣)에 괜찮은 땅이 있더군.”
“……?”
“그리고 여기도 맘에 들고. 해서 두 군데에 지을 생각이오. 홍로현에 일가와 노비들을 데려 갈 것이고, 이곳에 행재청(行在廳)을 두어 오갈 것이니, 그리 아시오.”
고 성주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였다. 인상이 찌푸려지는 걸 애써 막다 보니 그리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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