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02)
진봉 식읍(進封 食邑)
제주가 따뜻한 곳이기는 했다.
입춘에 이르자, 벌써 날씨가 온화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개경에서 교지가 온 것이 그쯤이었으니, 시일을 따지면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회답이 온 것이었다.
“제주현남 석몽린은 어명을 받으시오!”
예의정랑(禮儀正郞)이 호령 치니, 몽주가 미리 깔아 둔 자리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 나니, 몽주는 좀 민망한 감이 있었다.
사극에서 어명을 받는 장면을 봤을 때는 찾아오자마자 어명부터 주고받았던 것 같았는데, 오늘 교지(敎旨)를 가져온 이들은 원로에 피곤하다며 한잠 자고 일어나더니, 배가 고프다며 진수성찬으로 거하게 먹기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라 소화가 안 된다고 산책을 하겠다며 현내 여기저기를 쏘다니다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제 어명을 내리겠다며, 의복도 정돈하고 성주청 마당 가운데에 자리도 깔고, 교지를 받는 예의에 대해서도 강의를 하는 등 한참 부산을 떤 끝에 드디어 하교(下敎)의 예를 시작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묵직하고 낮은 음성으로 바뀐 예의정랑의 호령과 함께 그가 왕명이 담긴 교지를 촤락 펼쳤다.
툭!
“아이구야…….”
이상한 감탄사에 몽주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보니, 예의정랑이 양손에 분리된 교지를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교지가 말려 있는 두 개의 축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간 모습이었다.
“이거야 원, 잘 좀 만들 것이지.”
부끄러운 기색으로 변명 같은 혼잣말을 하는데, 자기가 과하게 ‘폼’을 잡다가 너무 힘을 준 것은 생각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와, 깬다.’
몽주는 속내로 그리 생각하며, 실소를 애써 참고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사이에 한쪽이 뜯긴 교지를 펼쳐 들고 예의정랑이 다시 무게를 잡고 어명을 전하였다.
“흠흠, 제주현남 석몽린은 들으라. 과인은 제주에서 목호를 토벌하고 제주가 다시 고려의 땅임을 확인시킨 것에 크게 기뻐하노라. 이는 장차 고려 천 년의 역사에서도 길이 남을 업적인 바, 과인의 이름을 고려 만방에 다시금 새기게 된 것에 흐뭇함을 감출 수 없도다. 지난날 호인들에게 강토가 유린당하였음을 상기하면 오늘에 이르러 호인들을 모조리 쫓아낸 고려는 참으로 태평하고도 성대함을 얻지 않았는가. 과인의 업이 하늘에 닿아 부처마저도 감명케 하여 고려 만방이 덕을 보니, 실로 국사에 매진 끝에 심신이 피로한 것마저도 잊겠노라…….”
“…….”
교지를 듣고 있자니, 몽주는 그 내용이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발개질 정도였다.
부끄러운 짓을 하는 건 왕이건만, 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인지를 속으로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왕이 목호 토벌에 있어 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다 자기 덕이라며 본인 입으로 떠벌리는 것이고, 대체 이 고려 어디가 태평성대라서 저렇게 자만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전근대의 왕정국가에서는 잘한 일이든 못한 일이든 결국 다 왕 덕이고, 왕 때문이라는 거야 알긴 하지만, 최소한의 겸양도 보이지 않는 교지의 내용은 듣는 이로 하여금 어이없음을 유발했다.
교지를 읽는 예의정랑도 이후로 한참 동안이나 나오는 ‘나르시즘’적인 내용에 읽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기 일쑤였다.
어쨌든 언제 끝나나 싶은 서두가 지나자, 마침내 본론이 나왔다.
“이에 제주에서 목호를 토벌함에 있어서 큰 공을 세운 제주현남을 제주현백(縣伯)에 진봉(進封)하고, 남방백(南方伯)이라 따로 칭호를 내리니, 제주현백은 대촌현(大村縣 : 탐라현의 다른 이름) 칠백 호를 식읍으로 삼되, 제주 고을 모두를 아울러 다스리라. 이는 제주를 현백에게 일임하는 것이니, 그 대임을 천리(天理)에 따라 성심껏 수행해야 할 것이다.”
“……!”
몽주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게 제대로 된 것이 맞는 것인가. 저 덜렁거리는 정랑이 혹여 미치기라도 하여 헛말을 내뱉은 게 아닌가.
하나, 예의정랑은 한쪽이 찢어진 교지를 대에 둘둘 말더니, 몽주를 향해 내밀었다.
“뭐하는 것이오, 얼른 받들지 않고?”
“아,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천세, 천세, 천천세!”
양손으로 교지를 받든 몽주는 그대로 북쪽을 큰절을 올렸다. 절을 하고 나자, 문득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애매하여 예의정랑을 보니, 그는 이미 에헴 헛기침을 하고 의복을 툭툭 건드리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끝입니까?”
“그렇지요.”
“그렇군요.”
뭔가 허탈하게 끝났다 싶었지만, 어쨌든 어명을 담은 교지를 받긴 한 것이었다. 몽주에게 중요한 건 어명 그 자체였고, 그 교지의 뒤에 따로 별첨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현남, 아니 현백 덕에 금상 대에서 또 관제(官制)가 바뀌었소.”
예의정랑이 한마디 던지니, 마치 너 때문에 관리들이 고생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저도 예기치 못한 것입니다. 그저 목사에 임하실 줄만 알았건만, 어찌…….”
“그렇소? 난 또 현남, 아니 현백께서 신돈에 청하여 식읍까지 얻어 낸 줄 알았건만…….”
말을 하며 사모(紗帽) 아래를 긁적거리던 예의정랑이 문득 표정을 달리하였다. 그 표정과 시선에 예리함이 남겨 있었으니, 그의 명성에 걸맞은 기세가 그제야 여실히 느껴졌다.
“서로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으니,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러지요.”
성주청 본관에 두 사람이 나란히 들어가니, 몽주는 그제야 자신이 누구와 대화를 해야 하는지를 체감하고 다소 긴장하였다.
예의정랑 겸 성균관 태상박사(太常博士) 정도전.
그가 어명을 전하기 위해 제주에까지 온 건 몽주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 * *
조선의 실질적인 설계자, 한국 역사에 수많은 위인들 중 손꼽히는 풍운아.
철혈의 정치가로서 가장 잘 알려졌으나, 학자이자 철학자로서도 존경받을 실력을 충분히 갖추었으니, 그건 동방이학의 비조라 불리는 포은 정몽주의 존중을 받은 것만으로도 증명될 만하였다.
……는 것은 역사 교과서를 통해 볼 수 있는 정도전이었고, 고려에서 몽주가 직면한 삼봉(三峰) 정도전은 덜렁대고, 좀 가벼운 느낌마저 드는 인물이었다.
몽주는 그래서 더 긴장하였다.
역사에 이름 석 자를 드높인 정도전이라면, 이런 성격으로 인한 타인들의 폄하마저도 이겨 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덜렁대고 가벼이 굴다가, 어느 순간 진실을 꿰뚫은 눈으로 냉소를 보일지도…….
“아, 뜨뜨……!”
“……저런, 좀 식혀 드시지요.”
“잔이 따뜻한 정도기에 찻물도 그럴 거라 여겼지 뭡니까. 허허.”
데인 혀끝을 날름거리며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인 정도전은 잠시 포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포은이 석 현백의 말을 많이 했던 터라, 내 오면서도 마치 친우를 만나러 오는 기분이었소.”
“……저도 낯설지마는 않군요.”
“다만, 석 현백이 신돈의 당여라 하여 작은 불만이 있긴 했으나, 명에서 현백이 활약하여 포은을 구하고, 또 대임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하니, 적어도 자리를 얻어서는 안 될 자가 자리를 차지한 건 아니라 믿고 있소. 게다가 이곳에서 공을 세워 고려에 박혀 있던 큰 가시를 하나 제거해 준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할 것이오.”
“…….”
칭찬에 딱히 할 말이 없어, 몽주는 미소만 띨 뿐이었다.
그 미소를 잠시 보던 삼봉이 다시 말을 꺼내니, 조금 놀랄 만한 말이었다.
“포은이 말하길, 현백은 결코 무력하게 제주로 밀려 갈 자가 아니라 하였소. 세간에 현백이 제주로 간 것을 두고 신돈의 당여들 간에 알력이 생겨, 현백이 살기 위해 도망친 것이라 수군대고 있소만, 포은은 그리 여기지 않았단 말이오. 내가 보아도 현백이 약관이 되기 전에 나라에 큰 공을 연이어 세웠고, 이곳 제주에서 저 험한 목호들을 상대로 약소한 병력으로도 대승을 거두어 문무에 두루 걸친 능력을 증명하였으니, 고작 작당질이나 일삼는 신돈의 하찮은 당여들에 현백이 밀렸다고는 믿기 어렵소. 하여, 묻고자 하니, 진실로 대답해 주시오. 대체 여긴 왜 오신 것이오?”
몽주는 양손을 살짝 들어 과장되게 흔들어 보였다.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포은과 삼봉께서 저를 높이 생각해 주시는 건 기쁘나, 세간에 나도는 소문이 거짓인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에 이르러 영공께서는 이 나라 권세의 으뜸이시니, 영공을 오래도록 따른 당여들 또한 그 권세가 하늘을 나는 새마저 떨어뜨릴 정도입니다. 제가 비록 작은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런 당여들을 하나도 아니고 대부분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가만히 앉아 죽고 싶지는 않으니, 살 방도를 구해야 했고, 그 방도를 좇다 보니 예까지 이르렀을 뿐입니다.”
제주에 온 목적을 의심하는 듯한 삼봉 앞에서 몽주는 자신을 한껏 낮추며 상황을 모면코자 하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다고 해야겠지요. 그래도 고맙다고 한마디 해야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덕분에 신돈과 이인임 사이에 알력이 불거졌으니까 하는 말이오. 임견미가 죽지 않았소?”
“…….”
말하는 것이 마치 몽주가 임견미를 죽게 만든 것처럼 들렸다.
몽주는 그에 대해 변명을 해야 하는가 싶었는데, 그 전에 삼봉이 먼저 말을 이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이인임을 그저 왕의 심복이라 여기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이미 달라졌소. 아마 현백께서도 알고 있을 것이오.”
“…….”
“아아, 굳이 가타부타 대답할 필요 없소. 대답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현백의 입장에서 그걸 말해 봐야 그렇고……난처하기만 할 테니. 하나, 분명한 건 그 두 사람이 마냥 친근한 것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아졌다는 것이오. 그들이 야합하면 고려에서 못할 바가 없으니까 말이오. 그런 참에 두 사람의 사이가 영원하지마는 않다는 걸 알리는 듯한 일이 벌어졌으니, 아마도 그건 신돈과 이인임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오. 하하.”
삼봉이 좋아라 웃는 걸 보며, 몽주는 임견미의 죽음 탓에 신돈과 이인임 사이에 충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인임이 임견미가 죽은 것과 관련해서 몽주에게 보복하려 하는 걸 신돈이 막았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임견미를 죽일 생각을 했을 때, 내심 기대했던 바이긴 했다.
두 사람이 그저 손을 잡고만 있으면, 언제고 무슨 빌미로 자신을 몰락시킬 계획을 짤지 두려워해야 하는 바, 만약 그 두 사람이 겉으로는 아닐지언정 속으로 서로를 견제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그 사이에서 자신의 안전을 보다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서로에 대한 견제 앞에 먼 제주에 있는 아무개 따위야 안중에 있을 수나 있을까.
기대하고 의도한 바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니 좋긴 한데, 막상 삼봉이라는 인물이 속뜻을 짐작하고 있는 듯해 께름칙했다.
정도전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이기 전에 ‘유학 근본주의자’로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이건 포은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의 과한 주목을 받는 건 몽주로서는 분명 피해야 할 일이었다.
“저는 그저 암담할 따름입니다. 제주에서 살 길을 찾기는 하였으나, 이곳이 몹시 궁핍하여 제대로 생활이나 할 수 있을지 두렵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오늘 교지를 받아 드니, 능력을 웃도는 중임까지 떠맡게 되었습니다. 하아, 금상께서 저같이 별 볼 일 없는 자를 현백으로 높여 주시고, 제주를 맡기신 것은 크게 황공한 일이나, 내년에 말 오백 필, 그 후년에는 칠백 필, 그다음부터는 천 필씩 진상해야 하는 판이니 그 부담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게다가 제주에서 왜구를 상대하라고까지 하셨으니, 삼봉 선생 앞에서 할 말은 아니나, 금상께서 제주의 크기를 착각하신 것은 아닌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몽주는 겸양을 넘어 엄살을 부리며, 은근슬쩍 이야기의 주제를 교지와 교지에 별첨된 별지의 내용으로 옮겼다.
다행히, 삼봉도 그 내용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안 것인지 몽주의 주제 전환을 거부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런 면이 없지 않소. 아무래도 석 현백께서 그간 능력을 선보인 업이 많은 탓인 듯하오. 말이야 애를 쓴다면 맞춰 볼 만하나, 거기에 더해 왜구까지 상대하라는 건 분명 무리일 것이오. 하나, 만약 그런 부담이 없었다면 과연 금상께서 관제를 다시 혁파하여 식읍을 부활시키기까지 하면서 석 현백에게 제주를 맡기셨겠소? 내가 보기에 현백을 위해 신돈이 애를 쓰던 일이 꼬여 교지의 내용에까지 귀결된 것이 아닌가 싶소. 아닌 게 아니라, 금상께서 신돈과 이인임이 봉작에 관한 관제를 바꾸도록 상주하였음에도,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소. 자세한 과정은 나도 모르나, 결과만 보자면, 금상이 관제를 변경케 하기로 결심하신 것에는 현백에게 주어진 대임이라면 따로 제주를 위임하게 할 만하다 여기신 탓이 있지 않겠소?”
몽주는 삼봉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의 짐작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이 닿은 게 있으니, 아무래도 수시중이 나름 몽주에 대한 견제책을 구상한 탓이 아닌가 싶었다.
삼봉의 말을 들으면, 신돈과 이인임이 함께 금상에게 진봉과 식읍을 권한 것인데, 과연 자신을 향해 앙심을 품었을 게 분명한 이인임이 아무 생각 없이 그에 동의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진봉과 식읍 수여는 몽주와 신돈 사이의 거래에서도 나온 바 없었던, 더 큰 대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쩌면 그 제안 자체도 신돈이 아닌 이인임이 내었을지도 모른다.
금상이 그에 내켜 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실제로 그러하자 금상의 반응을 이용하여 신돈이 반대할 수도 있는 제안을 통하게 한 것이 아닐까.
몽주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의 짐작이 맞다 싶었다.
물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있었으니, 왜 신돈이 진봉과 식읍 수여에 찬성, 혹은 제안을 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가 자신을 의외로 아끼고 있었음은 아는 바이나, 그렇다고 그 아끼는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바는 결코 아니었다. 그저 부릴 만한 괜찮은 수하에 대한 적절한 보상 수준의 아낌인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그리고 그간 지켜보았던 신돈이라는 인물을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결코 그 과한 대가를 제안하거나 동의하지 않아야 마땅했다.
몽주는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두 사람만의 노림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궁금하면서 두려웠다.
제주로 와 안전을 얻은 것은 좋으나, 그만큼 고려의 상황에 어두워지고, 알 방도도 줄어들었다. 만약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주에도 영향이 있을 거대한 변화가 있을까 저어되었다.
“고민이 많은 얼굴이외다.”
문득 삼봉이 씨익 웃으며 말하니, 몽주가 이것저것 고심하는 게 표정에 드러났던 모양이었다.
“아닐 수 있겠습니까.”
“허어, 그래도 심중을 잘 다스리시오. 비록 부담이 있는 건 사실이나, 오늘에 이르러 현백만이 진실로 봉작된 것 아니겠소? 고려 도처에 작위를 얻었다며 으스대는 자들이 적지 않으나, 그것들은 그저 이름만 남은 것이니, 오직 현백만이 실제로 식읍을 가지신 것이오. 하여, 나는 기대하는 바가 있소. 만약 현백께서 힘을 다하여 이곳 제주를 잘 다스리면서 나라에 충성하고 이바지함이 크다면, 이는 옛 주나라의 질서를 이곳 동방에서 다시 일으키는 것이니, 현백께서 춘추오패의 예를 재현하실 수도 있지 않겠소.”
“…….”
웬걸, 느닷없는 춘추고 주나라란 말인가.
몽주가 어이없는 표정을 감추며, 삼봉을 보니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즐거운 상상이라도 하는 듯하였다.
역시나 아직은 역사에 기록된 그 정도전이 아닌 것인가.
고려를 바로 세우기 위해 힘을 다하다 좌절한 끝에 고려를 폐하기로 마음먹은, 잿더미 속의 부활을 꿈꾸던 그 정도전 대신에 유학 경전에 푹 빠져, 성인의 가르침을 고려에서 재현하고픈, 정치에는 아직 미숙한 정도전이 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말씀조차 부담스럽습니다. 저는 난데없는 대임을 어찌 수행해야 할지도 벅찰 뿐입니다.”
“아니오. 나는 능력이 없는 자에게 기대하지 않소. 할 수만 있다면, 벼슬마저 내버리고 이곳에 와 현백을 돕고 싶은 마음이오.”
‘아아, 제발, 그 마음 넣어 두십시오.’
몽주는 속으로 경기하였다.
아무래도 삼봉은 어지러운 고려를 바로 세우는 것에 열중한 끝에, 차라리 춘추 시대의 상황을 살려 고려의 명맥을 잇게 하고, 동시에 백성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기에 이른 모양이었다.
아직 좌절을 맛보지 않은 유자라면 결국 경전 속에 치장된 옛이야기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할 것이니…….
아마도 이 또한 변한 역사의 일면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차가 식었습니다. 다시 덥혀 오게 하지요.”
몽주는 이제 그저 정도전이 서둘러 돌아가기를 바라기 시작하였다.
* * *
“쿵다닥 쿵~다, 쿵다닥 쿵~다…….”
반나절 가까이 몽주의 입에서 연신 가락이 묻은 의태어가 흘러나왔다. 그만 그런 건 아니었고, 곁에 함께 걷는 앵도도 같이 부르고 있었다.
몽주를 수행하는 이들 중에 부부가 그러는 꼴이 우스운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 노래 아닌 노래는 오전에 사라봉 남향에 짓고 있는 행재청(行在廳) 건설 현장에서 들은 것이었다.
제주에서 집지을 때 하는 노동요인 모양인데, 말이 크게 달라 전혀 알아듣지 못한 가운데, 쿵다닥거리는 부분만 귀에 남았고, 그것이 흥겨워 계속 입에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사라봉(沙羅峰)은 탐라현 우측에 속한 해안가 분석구(噴石丘) 봉우리로, 그중에서도 행재청 터는 현대에는 공원이 위치한 곳으로, 사라봉을 북쪽에 두어 해안가 바람을 막을 만한 곳이었다.
훗날을 대비하여 터 자체는 크게 잡았지만, 행재청은 그리 크게 지을 생각이 없었다. 일단 12칸 단채로, 임시적으로 석씨 일가가 있을 정도만 되면 되었고, 이후 석씨 일가가 홍로현(洪爐縣)으로 가면, 그때는 몽주와 몇몇 수행원들만 종종 머물 것이니 클 필요가 없었다.
대신 홍로현의 사택은 저택이다 싶을 만큼 크게 지을 생각이었고, 행재소와 달리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지을 생각이었다.
목조로 짓고 있는 행재소와 달리, 홍로현에 지을 사택의 건설을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일단 시멘트가 있어야 하니까.
처음에 홍로현에 사택을 짓겠노라 하였을 때, 다들 의아해 했다.
현대에도 그렇지만, 당대 고려에도 제주의 백성들 대부분이 북반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남방백에 임해서도 그렇지만, 그 전 목사에 임하는 걸 예정하였을 때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많은 곳에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의미였다.
해서 고 성주도, 아니 이제 인부(印符)를 반납하고 이름을 폐하여 더는 성주가 아닌 고실개도, 몽주가 탐라현에 있지 않은 것에 기뻐하기보다는 왜 하필 홍로현인지 의아해 하였던 것이다.
홍로현은 현대의 서귀포에 속한 곳으로, 서귀포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모두 속한 곳이었다.
제주 내 탐라현을 포함하여 15개 현 중 10개의 현이 북반에 속하고 남반에는 5개 현뿐인 데다, 인구수는 그 이상으로 차이가 있었다.
홍로현도 남반부에서는 큰 속현이긴 했으나, 호수가 300호를 조금 넘을 정도였고, 크나마 흩어져 있어 체감으로는 더욱 적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몽주가 홍로현을 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가복으로 삼은 목호의 일족을 제주 백성들과 가급적 떨어뜨리겠노라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몽주는 그가 고려 몰래 할 일들을 위해 제주의 남반부에 거점을 둘 생각이었던 것이다.
또, 홍로현에 속한 현대의 서귀포는 제주에서 가장 좋은 항구 입지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홍로현에는 그곳 백성들이 서천(西川), 동천(東川)이라 부르는 두개의 작은 강줄기가 있었는데, 그중 서천 어귀가 작은 만을 이루고 있고, 그 만 앞으로 ‘새 섬’과 ‘문섬’이 앞뒤로 나란히 있어 풍랑이 심한 날에도 그 섬들 덕에 큰 파도가 들이치지 않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 현대에서도, 서귀포 항이 위치한 곳이 바로 그 서천 어귀였다.
어쨌든 의아한 가운데에 조금 불만을 가지고 있던 몽린의 부모들도 막상 홍로현에 가서 확인하니 나쁘지 않다 여기는 듯했다.
석해민의 경우에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홍로현에 속한 분지에 제주에서 몇 곳 안 되는 논농사가 이뤄지고 있음을 알고는 좋아라 하였고, 엄주이의 경우에는 그곳에서 며칠 지내보면서 일교차가 적은 날씨가 맘에 든 모양이었다.
앵도야 애초에 딱히 불만이 없었고.
“쿵다닥 쿵~다, 쿵다닥 쿵~다…….”
“엥? 대체 그게 무슨 방정인가?”
몽주가 걷던 길 끝에 마침내 목적지에 닿았다. 그곳에서 일을 하던 화극은 별 해괴한 꼴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몽주와 앵도를 번갈아 보았다.
“하하, 여기 집 짓기 노래가 흥겨워서 조금 따라 해 보았습니다.”
“난 또 뭐라고…… 쿵다닥 쿵~다! 좋군. 여기서 일할 때 써도 좋겠어. 쿵다닥 쿵~다!”
화극이 내는 가락을 들으며 몽주는 그의 시야 앞에 펼쳐진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위치한 작은 사구(砂丘) 아래에 수십의 여인들이 천막 밑에서 방아질을 하고 있었고, 그 너머에 백이 훨씬 넘는 수의 장정들이 모래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이곳은 김녕현(金寧縣)의 해안이었는데, 몽주의 가복이 된 목호의 일족들 중 일부가 패사를 채취하고, 그것을 빻아 가루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시멘트를 만들기 위한 재료였다.
나름 장관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화극이 흥얼거리다 말고 몽주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겼다.
“잠시 이야기 좀 하세.”
그가 끄는 대로 가니, 화극이 괜히 주변을 살피곤 품에서 종이 말린 걸 꺼내어 펼쳐 보였다.
“조카사위 말대로 내 한번 구상을 해 본 것이네. 이것이 수차(水車)고, 이것이 풍차(風車)일세.”
몽주는 화극이 펼친 종이들을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화극이 나름 특급 기술을 연구한다 싶어 남몰래 몽주에게만 알리고는 있으나, 몽주의 눈에 비친 그 종이 위의 수차와 풍차 그림은 귀엽기만 하였다.
목호 토벌 후, 혹여 화극이 뭍으로 돌아갈까 싶어, 그에게 풍차와 수차에 대해 슬쩍 말을 흘렸는데, 역시나 몹시 흥미로워하였다.
그 스스로 연구하도록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가 영 맥을 못 짚는 곳만 ‘힌트’를 주는 식으로 알렸더니, 이제는 그래도 대략적인 작동 원리를 깨달은 듯하였다.
사실 몽주는 풍차는 몰라도, 수차는 화극 정도면 알고 있으리라 여겼으나, 의외로 전혀 몰랐다.
그러고 보니, 고려에서 지내는 동안 수차를 쓰는 걸 본 적도, 그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바가 없었다.
현대에서 책속에서 본 바로는, 이미 삼국 시대 때 연자 맷돌을 만든 기록이 있어, 수차나 그와 비슷한 기계 제작술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고려의 현실에서는 아니었다.
어쨌든 화극에게 수차와 풍차를 알려 주고, 그것으로 회전시킨 축에 톱니바퀴를 달아 동력을 전달하는 원리를 알려 주고 나자, 화극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고, 상당히 흥분하였다.
“근데 말일세, 아무래도 이 치차(齒車)의 이빨들끼리 서로 맞물리면 금세 닳아 약해지지 않겠나. 설령 쇠로 만든다 해도, 오래가기 힘들 것 같은데? 강철로 만들면 모를까.”
몽주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화극의 발전을 보는 것만큼 재밌는 것도 없었다.
화극의 의문은 과연 중요한 것이었다. 설령 강철로 만든다 해도, 초고강도 합금쯤 되지 않는 이상, 톱니바퀴의 이는 곧잘 닳기 마련이었다.
“닳는 건 어쩔 수 없지요. 다만, 골고루 닳게 하여 가급적 오래 쓰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오호, 그런가? 그럼 어서 말해 주게.”
“한번 고심해 보시죠.”
“어허, 이 사람, 또 나쁜 버릇을 보이는구먼. 그냥 말해 주게. 아니, 좀 그냥 말해 주면 어디가 덧나는 겐가?”
몽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날름 주면 발전이 없을 것 아닌가.
‘사실 까먹기도 했고…….’
맞물리는 톱니의 수끼리 공약수가 없게끔 하면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도 않고, 그게 전부인지도 애매해서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도량법부터 개량해야겠군.’
화극이 보인 수차와 풍차의 설계도(?)가 제대로 된 도법이 아님은 물론, 수치 표기도 제멋대로인 걸 보면서 몽주는 도량법을 제정할 것을 생각했다.
물론, 도량법보다 먼저 개량하고 전파해야 할 것이 있었다.
‘좀 찔리니까, 이도라는 천재가 만들어서 내게 알려 주었다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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