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03)
* * *
첫 천몽 전, 몽주가 살던 한국도 당연히 한글을 문자로 사용했고, 지금의 현대에서 보는 한글과 다를 게 없었다.
한글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15세기 중후반이었으니까.
한글의 옛 글자도 같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낙오된 글자도 같았다.
다 같은 중에 결정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세종대왕이라는 창시자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즉, 첫 천몽 전의 한국에서 쓰인 한글은 분명 발명된 것이 틀림없어 보임에도, 뚜렷한 발명자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한글은 처음엔 상인들을 시작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 상인들이 남긴 기록에 분명 누군가 일부러 만들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정작 그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몽주이기에 이제 와 짐작할 수 있었으니, 아마도 왕이 아닌 세종 이도(李祹)가 역시 만든 것이 아닐까.
물론, 첫 천몽 전 역사에 이도라는 이름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똑같이 이방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도 그 이름이 다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인연이 우연을 만나 이도와 같은 자가 세상에 나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이도라는 자는 실로 천재였나 봅니다. 이렇듯 쉬운 문자라니요, 아마도 천치도 익히려 한다면 익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영민한 자는 한나절이면 배우고, 그렇지 않은 자도 며칠 안에는 익힐 것이라기에, 어찌 문자를 그렇게 빨리 익힐 수 있을까 믿기 어려웠었습니다. 한데, 이렇듯 배우고 나니 과연 현백의 말씀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도라는 자도 그렇지만, 현백께서 참으로 영민하시어, 소인 같이 어리석은 자도 쉽게 깨우치게 하셨으니, 정말이지 이곳 제주를 현백께서 다스리시게 된 것이 대운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
제주 양가의 가주 양치승과 제주 부가의 가주 부삭섭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도라는 정체 모를 천재에 대한 칭찬을 은근슬쩍 몽주에 대한 아부로 바꾸고 있었다.
그래서 몽주는 조금 더 부끄러웠고, 세종대왕에게 좀 더 미안해졌다.
지금 예닐곱 살일 이방원에게서 24년 후에야 태어나실, 아니 이제는 태어나실지조차 장담 못할 위인의 업적을 빼앗은 기분은 솔직히 죄책감에 가까웠다.
하나, 어쩌겠는가.
문명을 발전시키고, 문화를 창대하게 하기 위해서 글자는 필수적이었고, 한국어에 가장 걸맞은 음성 문자인 한글은 도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몽주는 제주에서 식자층(識者層)이랄 수 있는 제주 사성의 가주 및 그의 직계들을 불러 ‘훈몽자회(訓蒙字會)’식으로 한글을 가르쳤다.
다만, 현대에서 24자를 쓰는 한글과 달리, 몽주가 제주에서 가르친 것은 28자 전부로, 현대에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탈락한 ㆁ(옛이응), ㆆ(여린히읗), ㅿ(반치음) 그리고 ㆍ(아래아)까지 알려 준 것인데, 이는 고려와 제주의 말에 아직 그 발음이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살짝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아직 맞춤법이 없어, 한글로 쓰는 글은 발음대로 적는 수준이라, 현대의 한글로 된 문장처럼 한눈에 들어오기보다는 읽으면서 봐야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 사람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발음하기 마련이니, 같은 말도 표기하기를 달리 할 수도 있었다.
아쉬운 부분임에 틀림없으나, 통일된 맞춤법을 제정하고 이를 교육하는 건, 교육 시스템이 어느 정도 갖춰진 이후에나 시행해야 할 일이라, 지금은 아쉬우나마 문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만족해야 했다.
어쨌거나, 몽주는 이틀에 걸쳐 십여 명의 제주 사성(四姓)들에게 한글을 강론하여 그들로 하여금 익히게 하는 데 성공했다.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이들은 한글이라는 문자에 거부감이 없었다. 덕분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맞지 않으니 하며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하나, 그걸 모든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문제는 조금 달랐다.
“어찌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문자를 가르치려 하십니까. 그들이 문자를 알면 함부로 고소하려 하고, 웃전을 능멸하려 들 것입니다. 만약 문자를 알아 오만해진 백성이 있어, 현백의 치세를 함부로 비판하면 그때는 후회하셔도 늦을 것입니다.”
“백성이 어리석다면 그것은 문자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며, 그들이 문자로 고소하고 정치를 비판한다면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어야 할 것이오. 물론, 나도 그에 해당하겠지요.”
“…….”
몽주가 뜻을 꺾을 맘을 전혀 보이지 않자, 사성일족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이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독재 권력이란 게 이럴 때는 편한 법이었다.
“이제 그대들의 할 일은 다음과 같소. 내 각 가문마다 탐라현의 구역을 나누어 주고, 또 제주 전체 속현을 배정할 터이니, 그대들의 가문은 총력을 기울여 한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시오. 딱 일 년을 주겠소. 내년 입춘 이후 내가 직접 평가하여 만약 한글을 깨치지 못한 백성이 많으면 그대들이 벌을 받을 것이오. 특히 칠 세 이상 오십 세 이하의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다 알고 있길 바라오. 대신, 그 중임을 수행함에 차질이 없는 가문에서는 따로 상을 내려 교리들을 발탁할 것이오. 아마, 그 교리들 중에서 재리가 나올 수도 있고, 현리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오. 이것이 무슨 말인지 그대들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터, 최선을 다하길 바라오.”
교리(敎吏), 재리(財吏), 현리(縣吏)라는 말에 사성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결국 다 벼슬자리들이니까.
오늘에 이르러 제주 사성들은 아무런 공식적인 지위를 갖지 못했는데, 양씨와 부씨가 목호에 의해 탄압당하면서 그러했고, 고씨와 문씨도 몽주에 의해 지위를 반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에 현백이 그를 보좌할 벼슬자리를 내어 줄 낌새를 보이니, 저마다 그에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양씨와 부씨는 의욕이 활활 불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은 목호에 탄압당하면서 가문의 기세가 반절 이하로 떨어진 터라, 고씨와 문씨에게 경쟁심과 앙심을 느끼면서도 오히려 가문의 존속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하나, 만약 현백의 명을 수행함으로써 교리가 되고, 재리나 현리가 될 수 있다면, 가문을 다시 바로세울 수 있을 것이니,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글을 가르치려면 어차피 제주 곳곳을 누벼야 할 터이니, 그대들은 하는 김에 호부(戶簿)도 작성해야 할 것이오. 따로 호부의 예시를 줄 것이나, 무엇보다 호구(戶口)마다 딸린 모든 백성들, 노비까지 포함한 남녀노소들이 모두 적혀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오.”
“…….”
하는 김에 호구조사도 덤으로 얹어 주었더니 사성들이 옅은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제주의 곳곳에 퍼져 있는 백성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한글을 가르치고 호구를 조사한다면, 제주 사성들이 가문 전체를 동원해도 쉬이 해내기 어려울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대들의 가문이 제주의 네 기둥이라는 점에는 나 또한 동의하나, 기둥도 튼튼한 기둥이 있고, 썩은 기둥이 있는 법이오. 만약 썩은 기둥이 있다면 뽑아내고 다른 기둥을 세워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일 터, 나는 결코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으로 넘어갈 생각이 없소. 하니, 내게 보이시오, 그대들의 가문이 썩은 기둥이 아니라 튼튼한 기둥이라는 증좌를. 알겠소?”
썩은 기둥이 아님을 증명해야 할 상황에 처한 사성들의 표정이 썩어 들고 있었다.
* * *
“일만이천육백 석이라…….”
성주청에서 몽주는 기성현(거제도)에 보관했던 양곡을 제주로 다 옮겨 온 후 재고량에 대한 문서를 받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이만 석에 육박했던 양곡들 중 삼분지 일이 사라진 탓이었다.
이는 기성현의 탐관오리에게 빼앗긴 탓이기도 하고, 제주로 오는 중에 하필 풍랑을 만나 선박 몇 척이 침몰하고 여러 척이 침수하여 양곡이 바닷물을 뒤집어써 쓰지 못하게 된 탓이기도 했다.
“기성현 현령, 너는 내가 딱 봐 뒀어. 으으.”
개경에서도 멀고, 제주에서도 멀다 여겨 몽주의 양곡 중 일부를 약탈하다시피 가져간 탐관오리.
하기야 단기적으로는 그 새ㄲ…… 그자의 판단이 틀리지는 않았다.
제주에서 함부로 벗어나기 어려운 몽주나, 아무리 몽주를 아낀다고 해도 개경에서 남쪽 먼 기성현에까지 일을 봐줄 리는 없는 신돈이나 그 탐관오리가 신경 쓸 이유는 별로 없었다.
해서, 지금의 몽주로서는 두고 보자는 마음만 단단히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일만 봐도, 야거리 수준의 작은 배로는 해상 상업 무역에 도전하는 건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다가 잔잔할 때야 상관없지만, 아닐 때는 침몰은 면하더라도 침수를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소중한 상품이 그런 식으로 망가질 수도 있는데, 그저 운에만 맞기고 작은 배로 바다에 나갈 수는 없었다.
물론, 바다가 성났을 때는 제아무리 큰 배라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파도를 뒤집어써도 쉽사리 선창이 침수되지 않도록 조치를 할 만한 크기의 배는 되어야 한다는 게 몽주의 생각이었다.
현대에서 진행 중인 ‘통합 범선’ 프로젝트의 진행 속도를 높여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몽주는 그가 직접 쓰는 장부를 펼쳤다.
그 장부는 그와 그의 집안의 재산 상황을 기재한 것으로, 주로 한글과 인도-아라비아 숫자로 작성된 것이었다.
장부 자체야 몽주가 밤마다 쓴 것이지만, 그렇다고 장부에 적을 재산의 변동 상황까지 일일이 몽주가 파악하는 건 아니었다.
몽주의 재산을 관리하는 실무 담당자는, 몽주의 입장에서도 뜻밖에도, 점녀였다.
원래는 믿을 수 있는(?) 석삼이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려 했는데, 녀석이 한글은 곧잘 깨우쳤으면서도 숫자와 계산에는 너무 약했던 것이다.
한데 의외로, 아니 이미 똑똑하다 생각하긴 했던 점녀가 석삼이를 돕다 보니, 어느새 주객이 전도되어 버렸고, 몽주도 그걸 알고 앵도에게 양해를 구해 점녀로 하여금 재산을 파악하는 일을 맡게 한 것이었다.
잘하면, 점녀가 후에 재정 부문 관리로도 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였다. 물론 그 전에 노비 신분을 벗어나야 하겠지만, 몽주는 이미 그리 멀지 않아 제주에서 노비 제도를 폐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도 하고 싶지만, 당장 목호 일족 때문에도 그렇고, 아직은 제주에서 노비를 폐했다가 고려 도당에서 알고 태클을 걸어오면 곤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뒤로 미룬 것이었다.
어쨌거나, 장부를 보며 몽주는 근심에 쌓여 있었으니, 장부에 기재된 재산이 분명 많으나, 여차하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제주의 물산이 풍족하지 않아 조세량이 많지 않은 가운데, 많은 것들을 몽주와 가문의 재산으로 대신해야 했다.
당장 가복이 된 목호 일족들의 호구지책이 그러했고, 제주에서 일으킬 산업에 들일 ‘마중물’ 격 투자도 그러했다.
양곡이 1만 2천여 석이라고 해도, 일 년을 버틸 정도에 불과하고, 석회가 풍족하여 비노와 선로를 많이 만들 수 있다곤 해도, 고려에 파는 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비노와 선로를 따라 만든 것들이 고려에 많이 나온 탓이었다.
실제로, 분명 비노와 선로를 바치라고 했을 법한, 교지의 별지에도 그에 관해 쓰이지 않은 걸 보면, 고려의 시중에 나온 비노와 선로의 품질도 꽤 좋아진 모양이었다.
금은보석류의 재산도 많지만, 그 또한 화수분은 아닌 바 넋 놓고 있다가는 삽시간에 양곡과 바꿔 먹다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1, 2년 사이에 몽주는 제주를 지탱할 만한 산업을 반드시 육성해야 했다.
“시멘트는 좀 그런데…….”
아무래도 제주에서 산업을 일으키는 것에 있어서, 제주에서 풍족한 자원을 이용해야 했다.
고려나 다른 나라에서 재료를 들여온다는 건 생각하긴 쉬워도 실행하기 어려웠으니, 애초에 이 시대에 생산하는 자원의 양과 종류가 풍족하지 않았고, 운반 자체도 힘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또, 그 과정에서 도당의 간섭을 받을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답답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여, 제주에 풍족한 자원인 석회와 나무를 이용하고자 하나, 그리 마땅치가 않았다.
시멘트는 당장 제주에서 많이 써야 했고, 수출(?)하고자 하여도 운반에 드는 비용이 너무 컸다. 무엇보다 시멘트와 콘크리트가 세상에 퍼져 군사적으로 사용되면, 즉 콘크리트 성벽이나 요새 같은 거라도 생기면 몽주로선 부메랑을 맞는 셈이기 때문에 미량이라면 모를까, 자제하고자 하였다.
동양에서 대항해시대를 열든, 무역 네트워크를 만들든 확장은 필수고, 그 과정에서 군사적인 수단도 쓰일 것이 분명한데, 그때 적이 콘크리트 요새로 저항이라도 하면 갑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리를 만들어 볼까…….”
유리는 이 시대에서는 거의 보석 취급의 사치재였다. 운반이 힘든 건 매한가지이나, 그 비용을 모두 가격에 포함시켜도 상관없을 고가의 물건이었다.
고려에 유리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몽주가 본 건 다 수입품이거나, 고려 초 혹은 전조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즉, 신라 때만 해도 한반도에서 만들어지던 유리는 도자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쇠퇴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명맥이 끊긴 것이었다.
그래서 만약 유리를 만들 수만 있다면, 오히려 더 크게 ‘대박 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유리 제작이라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근대에 이르러서도 한참 후에야 유리가 대량 생산되었고, 판유리를 쉽게 볼 수 있게 된 것도 그쯤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숙련된 장인이 액화 유리를 철봉 끝에 매달고 빙글빙글 돌려서 원심력으로 펼쳐 만들었는데, 당연히 어지간한 숙련공이 아니고선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몽주는 제주에 풍부한 모래와 석회를 두고 유리 제작을 생각해 보았고, 그 기술의 대강과 제주의 자원 상황을 알아보기도 했는데, 곧 당장은 시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가장 쉬운 유리 제법에 필요한 건 이산화규소와 탄산칼슘, 그리고 탄산나트륨인데, 이중 탄산칼슘은 생석회였으니 이미 패사로 만들고 있고, 탄산나트륨으로 쓰일 소다회도, 한반도에 천연소다회는 없지만, 탄산칼륨이나 산화칼륨으로 대체가 가능하여 비누를 만들면서 얻은 노하우로 가능할 듯한데, 문제는 이산화규소였다.
이산화규소가 모래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모래로 만들면 불투명하고 얼룩진 유리가 나오기 때문에,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규소의 순도가 높은 석영(石英)을 써야 했다.
제주에도 석영 광맥이 있다곤 하나, 탐광과 채광은 시도하기 어려운 일이고, 그중에서도 질 좋은 석영을 구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1, 2년 안에 궤도에 올릴 만한 산업으로는 고개가 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불투명하고 얼룩진 유리 제작을 감행한다면, 그것이 과연 이문을 남길지도 자신이 없었다.
고려에 이르러 즉, 도자기 시대에 이르러 유리 제조 기술이 쇠퇴했음을 따져 보면, 투명하지 않은 유리는 상품성이 부족하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제주의 자원만으로도 시도 가능하고, 1, 2년 사이에 산업을 일으킬만하며, 이 시대에 충분히 팔릴 만하면서, 동시에 너무 귀하여 고려 도당에 수탈당하지 않을 만한 상품을 만들어야 하니, 여러모로 제약이 클 수밖에 없었다.
몽주는 고민하면서, 붓을 놀려 빈 종이에 끼적대다가 문득 붓을 노려보았다.
붓이라는 놈이 참 불편하다는 생각이 드니, 필기구에 꽂힌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보통 과거로 간 판타지 소설에서 비누와 더불어 나오는 게 연필이 아닌가.
“근데 흑연이 없네…….”
한반도에 흑연이 풍부하나, 제주는 아니었고, 그나마도 한반도에서 흑연이 채광된 건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지금은 철이나 다른 광물을 채광하는 중에 섞여 나와도 그냥 버려지고 있을 것이고, 약재로 쓰는 것도 아니라, 따로 구하려 해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굳이 구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겠으나, 몽주가 제주의 자원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을 육성하겠노라 했던 조건에는 어긋나는 것이기도 했다.
하여, 잠시 반색했던 몽주는 다시 실망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연필만 필기구가 아니지…….”
몽주의 머리에 떠오른 건 백묵(白墨) 즉 분필이었다.
칠판이 필요하나, 칠판이야 판판한 목판이면 충분했다. 검게 물들이면 더 좋고.
머릿속이 몇 번 번뜩이니, 몽주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분필이 필요한 건 식자층->이 시대의 식자층은 대부분 부유층->이 시대에 소비 주체는 부유층->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물건의 상품성은 굿!’
분필을 만든다면 충분히 통하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군사적으로 위협이 될 가능성도 낮고, 처음은 아니더라도 곧 널리 쓰이게 된다면 고가일 필요도 없었으니, 적어도 수탈까지 당하진 않을 것이었다.
또, 분필은 보는 것만으로는 모방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도 좋았다.
다만, 석고 같이 자연 상태에 있는 암석이 분필을 대신할 가능성이 있긴 한데, 보통 채취한 석고는 잡석이 많이 붙어 있어, 분필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 굳이 분필을 살 수 있는 부유층이 그리할 이유는 없었다.
“근데 분필을 만들 수 있을까?”
잘은 모르나, 연필심도 그러하듯 분필도 원재료를 점토와 함께 구운 것일 것이다.
몽주는 패사를 빻아 만든 하얀 가루를 떠올리며, 분필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한 정보에 골똘했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 천몽에서 역사를 바꿔 보겠노라 각오했을 때, 마구 봐 둔 책에서 백묵에 관한 글도 읽은 듯하긴 한데, 기억에 남은 게 없었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뭐, 현대로 가서 알아보면 되겠지.”
너무 급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할 필요도 없었다.
* * *
백묵에 꽂힌 탓인지, 몽주는 행재청을 짓는 곳에 가서도 분필이 쓰일 곳이 눈에 들어왔다.
까칠한 표면만 있으면 쓸 수 있으니, 건축 현장에서 치수를 자재에 표시할 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물론, 몽주가 행재청 현장에 온 건 그 때문은 아니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화극이 몽주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게 도량형을 개혁할 생각을 비치며 상담을 청하자 그리 말한 것이었다.
“그렇게 거부감이 드십니까?”
“좀 그렇긴 하네. 무엇보다 이미 있는 것을 잘 쓰고 있고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그런 걸 따로 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굳이 정할 필요가 있으니 하는 것이었다.
고려에서 쓰이는 척관법(尺貫法)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십진법의 체계 하에서 척관법은 불편하기 때문이다.
몽주는 일단 길이를 예로 화극을 설득해 보았다.
“한 자가 열로 나누면 뭡니까.”
“그야 한 치지.”
촌(寸)과 치는 같은 치수였다.
“하면, 한 치를 열로 나누면 뭡니까.”
“한 푼이지.”
“하면 한 푼을 열로 나누면 뭡니까?”
“엥? 반 푼도 아니고 그렇게 짧은 걸 셈해야 할 필요가 있나?”
1푼은 약 0.3센티미터 즉 3밀리미터 조금 넘는 길이었다. 그리고 1푼을 열로 나눈 단위도 모(毛)라고 하여 있긴 하나, 보통은 쓰이지 않았다.
“그야 앞으로 더 세밀한 치수도 필요하니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장차 화포를 만듦에 있어서 화포의 구경과 탄구의 크기가 거의 완벽히 맞아 떨어져야 하는데, 그 차이가 반 푼 수준까지 늘어난다면 화포가 제대로 성능을 내겠습니까.”
“그야 공인이 잘 만들면 되지.”
“그렇지요. 그러니까 잘 만들기 위해 더 작은 단위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 푼을 셋으로 나눈 것을 밀미라 정하려 하는 것이고요.”
결국 밀미(密微)는 밀리미터였다.
“하면 세미(細微)와 미(微), 그리고 길미(佶微)는 어찌 필요한가?”
“세미는 밀미의 열 배요, 미는 세미의 백 배요, 길미는 미의 천 배이니, 계산하기 편하지 않습니까. 이미 제가 알려 드린 십진수가 편리하다 하셨으니, 어째서 열 배, 백 배, 천 배로 증가하는 것이 계산하기 편리한지는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몽주는 얼마 전에 화극에게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알려 주고 익히게 하였다. 그때는 화극도 편하다 하여 좋아라 하였다.
“흠, 그야 그렇지만…… 차라리 척(尺)와 촌을 기준으로 늘이고 줄이는 것이 낫지 않겠나.”
“…….”
그래도 상관없긴 했다. 어차피 미터법이라는 게 세상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몽주가 도입하려는 밀미, 세미, 미, 길미가 현대의 밀리미터, 센티미터, 미터, 킬로미터와 딱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
‘내가 불편해서요!’
미터법의 세상을 살다 온, 아니 지금도 살고 있는 몽주로서는 언제나 단위를 셈할 때마다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푼을 열로 나눠 보실래요?”
“그야…….”
화극은 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로 1푼의 길이를 대략 가늠하고 그것을 더욱 줄여 심분지 일로 줄이려 해 보았으나, 될 리가 없었다. 0.3밀리미터를 사람 손으로 가늠하는 건 불가능이었다.
“너무 짧지 않은가!”
“그렇지요. 하나, 반푼보다 짧은 단위는 필요하고 쓰일 것이니, 밀미를 도입하고, 그에 따라 십의 배수로 늘어나는 단위도 쓰자는 겁니다.”
“억지 같네만?”
“억지라고 여기시면 어쩔 수 없지요. 하나, 저는 그리할 것이고, 장차 제주에서 제 허락을 받아 물건을 만들고, 건물을 지으려면 미법(微法 : 미터법) 도량을 쓰셔야 할 것입니다.”
몽주는 쥐고 있던 종이 두루마리를 화극의 품에 안겨 주고는 더는 모르쇠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떠나는 몽주를 보며 화극은 어이없어 하다가, 몽주가 남기고 간 두루마리를 펼쳐 보았다.
그 안에 길이, 넓이, 부피 그리고 질량을 재는 단위가 새로 적혀 있었으니, 모두 10의 배수로 정한 것들이었다. 넓이와 부피는 길이와 같은 단위이나 앞에 각각 평방(平方 : 제곱)과 입방(立方 : 세제곱)을 붙였고, 질량의 경우에는 구람(玖籃)이라 하여 길이와 비슷하면서 다르게 밀구람, 구람, 길구람에다가 길구람의 천 배에 해당하는 통(桶)이라는 단위를 더한 것이었다.
다만, 부피의 경우에는 단위 사이에 격차가 커서 그 사이에 리타(裏馱)라는 단위를 따로 더했는데, 1리타는 1입방세미의 천 배였고, 1리타를 천으로 나눈 것을 1밀리타라 하였다.
“흠, 익숙해지면 상관이 없기야 하겠지만…….”
화극은, 한창 서까래를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 목장들을 보며 새로운 도량법이 통할지 의문스러웠다.
처음부터 통할 리는 없을 테고, 다만, 현백이 장차 제주에서 물건과 건물을 실제로 만들고 짓기 전에, 줄이 평방으로 쳐진 종이에 그린 설계도와 제작도라는 것을 모두 작성하게 한다고 하니, 거기에 미법을 쓰도록 하면 차츰 널리 쓰일 것도 같았다.
“에잉, 현백도 관리는 관리로구먼. 제 맘대로야. 쯔쯧. 그나저나, 하면, 내 수차와 풍차의 설계도도 다시 그려야 하겠구먼. 에잉!”
화극은 연신 에잉거리며 툴툴댔다.
그도 아직은 정비된 도량법에 기초한 설계와 제작이 보편화되고, 누적된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상상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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