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06)
* * *
달도 없는 깊은 밤.
일단의 무리들이 저마다 포대를 하나씩 짊어지고 해안가 숲에 모였다.
“좀만 기다리세. 조만간 불빛이 깜빡일 터이니…….”
무리를 이끄는 자의 말에 그들은 무거운 포대를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였다.
잠시 후, 해안에서 불빛이 껌뻑이니, 무리들이 다시 포대를 들고 조심스럽되 서둘러 그 불빛을 향해 나아갔다.
“네 이놈들!”
불빛에 거의 닿을 때, 문득 그 방향에서 호령이 터져 나왔고, 그 무리가 달리던 좌우에서도 함성과 함께 횃불들이 일며 주위를 밝혔다.
그제야 기겁한 무리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자들이 누군지 깨닫게 되었다.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주위에 가득한 군병들이 곤봉을 들고 달려들어 마구 휘두르니, 둔탁한 타격음과 더불어 비명 소리가 야밤에 가득하였다.
* * *
“바른대로 말하게.”
“이미 말한 것이 전부입니다.”
본래대로라면 지금쯤 출항하여 한창 항해를 하고 있어야 했으나, 몽주는 도로 요성으로 와 있었다.
흑토(黑土)를 밀반출(?)하던 것이 들통 나는 바람에 그리된 것이었다.
다행이랄까, 당연이랄까, 죄인처럼 끌려간 건 아니었다. 아무리 최영이라고 해도 그렇게 하기에는 몽주의 지위가 마냥 낮지마는 않았으니까.
문제는 최영이 몽주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이 자칫 몽주가 가진 지위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그저 흑토라는 것이 불에 탄다 하여 써먹을 데가 없을까 싶어 가져간다는 게!”
“하면, 상원수의 말씀은 말이 된다 여기시는 겁니까?”
몽주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앞서 최영이 몽주를 압박하길, 흑토가 불에 탈 때 나는 연기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며, 누굴 죽이려고 그걸 가져가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산화탄소 중독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실제로 석탄이 이른 시기에 발견되고, 그 쓰임새도 알려졌음에도 의외로 좀처럼 널리 쓰이지 않은 것이 그 탓이었다.
특히 온돌을 난방을 쓰는 집에서는 치명적이었다.
당대의 건축술에서 구들장이 약한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 석탄처럼 불완전 연소가 심한 연료를 쓴다는 건 죽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입식 생활 문화가 전반을 이루는 터라, 고려 전역에 온돌 문화가 퍼져 있는 건 아니었으나, 유독 개경 부근에는 온돌을 쓰는 집들이 많았고, 특히 부유한 집일 경우에는 거의 다 온돌을 쓰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영은 몽주가 그 흑토를 몰래 아궁이에 넣어 개경의 누군가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냐며 추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 몽주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고, 객관적으로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계절상으로도 난방을 틈타 누굴 죽인다는 건 시기가 늦었고, 그런 이유로 흑토를 구한다면 굳이 장정 백여 명을 동원할 정도로 많은 양을 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 굳이 요동까지 와서 흑토를 구할 건 무엇일까.
고려에서 석탄을 캐내는 일이 드물고, 노천광도 찾기 어렵다곤 하나, 흑토 약간을 구하려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대는 신돈의 당여가 아니더냐?!”
“그렇다 한들, 지금과 무엇이 상관있습니까?”
“신돈이 네놈을 시켜 흑토를 구하게 하고, 그것을 써 정적을 암살하려는 걸지도 모르지 않느냐!”
“참으로 듣고 있기 힘든 말씀입니다. 대체 영공 저하가 누굴 암살한다는 겁니까?”
그에 최영이 입술을 움찔거리며 말을 입 안에 담고 있다가 억지로 삼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이지, 최영은 신돈이 암살할 만한 자가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한참을 머뭇거리던 최영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분기가 사라진 말을 뱉었다.
“나는 신돈의 권세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네.”
“…….”
뜬금없는 말에 몽주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 말의 의미를 헤아려 보았다. 대략 짐작하는 게 있으나, 그가 먼저 꺼낼 말은 아니었다.
“금상의 후계와 관련하여 신돈에게는 분명 위태로움이 찾아올 것이야. 나같이 정치에 불민한 자도 짐작하는 걸 신돈이 모를 리가 없지.”
“……대체 그 말씀을 이 자리에서, 제게 왜 하시는 겁니까?”
최영이 신돈을 두고 무슨 짐작을 하든, 그건 그의 마음이었으나, 몽주 자신에게 그 말을 털어놓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앞서 최영도 자신을 두고 신돈의 당여라며 몰아세웠지 않았는가.
“중결이 그러더군. 그대가 부처의 뜻을 받은 자라고.”
‘아이고.’
몽주는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계, 의외로 입이 싼 자가 아닌가. 이러다 고려 전체에 소문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니 한번 말해 보게. 장차 고려의 정국이 어찌 변할 것 같은가.”
태세 전환이 참으로 빠른 최영이었다. 조금 전까지 살해 의도를 두고 의심과 압박을 하더니, 순식간에 조언을 구하는 모습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말을 꺼내려고 압박을 했던 모양이었다. 트집을 잡고 그걸 빌미로 ‘부처의 안배’를 듣고자 한 것이다.
몽주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자, 최영이 은근 다급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곤 다시 말하였다.
“중결은 결코 헛소리를 할 자가 아니니, 분명 그대에게는 무어라도 보이고 있을 것 아닌가. 제발 말해 주게. 하면, 흑토를 빼돌리려 한 것을 눈감는 것은 물론, 마음껏 가져가게 도와줄 것이네.”
“만약 거부한다면 어쩌실 것입니까.”
몽주가 묻자, 최영이 얼굴을 굳히더니 주먹을 쥐고 흔들며 소리쳤다.
“만약 그리한다면, 내 요성의 상원수로서 그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그대가 아무리 제주 현백이라고 해도, 이곳은 제주가 아닌 요동이니, 그대의 목숨마저도 내가 취할 수 있음을 잊지 말게!”
냉온탕을 순식간에 왔다 갔다 하는 최영을 보니, 역사에서 그가 권력을 잡았을 때 보였던 여러 실책들이 어디서부터 연유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최영이 지금 협박 수준이 아니라, 진짜로 자신을 죽이려 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요동이 고려의 강역에 들어온 지 2년이 넘게 흘렀지만, 요성에는 여전히 고려군이 2만에 가깝게 주둔하고 있었고, 상원수가 있어 요동 전반을 관할하고 있었다.
휘하에 관리들도 있긴 하나, 요동의 ‘넘버 원’은 최영이다.
쉽게 말하면, 요동은 여전히 ‘계엄령’ 상태인 셈이었다.
그런 중이니, 요동군 수장인 최영이 그러지 못할 건 없다 할 것이었다.
몽주는 잠시 최영을 보다가, 말문을 열어 물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십시오. 고려가 어찌 되느냐고 물으신다면, 제가 설령 진짜로 천운을 보는 자라고 하더라도, 무어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몽주는 ‘부처의 뜻’을 아는 자에서 슬쩍 물러나, 천운을 ‘볼 수도 있는’ 자의 입장인 양 다시 물었고, 그에 최영이 반색하더니 얼른 말하였다.
“내 솔직히 말하겠네. 내가 고려를 쥘 길이 있겠는가.”
“……권력을 얻고자 하십니까.”
최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 몽주가 왜냐고 묻자 무거운 인상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대로라면 고려가 무너지고 말 것이야. 간신과 난신이 판을 치고 있으니, 누구라도 나서서 청명하게 쓸어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상원수시란 말씀이십니까.”
“내 오만한 말을 하자면, 나야말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는 이로서, 어떤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중대한 일을 짊어질 각오가 있네.”
“각오가 있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다르지 않습니까.”
“나약한 소리! 하지 않아 안 되는 것이지, 하려 하면 되지 않을 것이 무엇인가!”
‘하아.’
몽주는 최영으로부터 군인 정치가의 냄새를 물씬 느꼈다. 그 냄새는 최영이 고려 정국에 있어 위험한 짐승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 당장 몽주에게도 위험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몽주는 잠시 최영을 응시하다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습니다.”
이어 몽주가 최영에게 무어라 말을 남기니, 최영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그 심각함 아래로 기대감이 스치고 있었다.
* * *
제주를 떠날 때는 빈 배들이 태반이었으나, 요동을 떠날 때는 거의 모든 배들에 짐이 가득 실렸다.
순풍을 받아 연안을 좌측에 두고 남쪽으로 향하는 중에 몽주는 화극과 더불어 선두의 선박 뱃전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궁금해서 그러네. 대체 어찌 그 노회한 장군을 설득한 겐가?”
이미 요동에서 떠나기 전부터 듣던 질문이었고, 바다에 나선 지 나흘째인 오늘까지 몇 번 더 물으면 열 번을 채울 정도로 집요한 화극이었다.
“제 대답은 전과 같을 것입니다.”
“거참, 좀 말해 주면 어디 뿔이라도 나는 겐가!”
옷자락을 뿌리는 소리와 함께 화극이 토라진 듯 멀어졌다.
그 모습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짓던 몽주는 다시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용이 승천하니, 두 마리의 범이 남았습니다. 한 산에 두 범이 공존할 수는 없는 법. 만약 그 바깥에 사냥꾼이 있다면 마땅히 양상구패(兩傷具敗) 이후를 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몽주가 최영에게 해 준 말이었고, 아마도 최영이 듣고 싶어 하던 말일 것이었다.
물론, 거짓을 꾸며 한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제주에서 임견미를 죽이려 할 때, 몽주가 내심 노렸던 것이 신돈과 이인임 사이의 갈등이었으니, 그것이 이뤄진다면 제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제주 현백에 봉작되면서 듣고 본 것을 토대로 파악하자면, 분명 두 권력자 사이에 알력이 없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금상 이후의 세상을 노리느라 그 알력이 수면 아래 잠겨 있겠으나, 만약 금상이 죽은 뒤라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홍사우를 통해 금상을 시해할 가능성까지 포착된 상황이었으니, 몽주가 최영에게 한 말은 진실에 가까울 것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대단한 예언을 한 건 아니었다. 그 말을 한 후 최영의 반응을 보자면, 그건 깨닫지 못한 것을 알게 된 것에 대한 반응이기보다는, 그가 예상하고 있고, 기대하고 있던 것을 몽주의 입으로 확인 받았다는 사실에 달가워하는 반응이었던 것이다.
“나는 고려를 더 큰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는 대답이 몽주의 속내에 떠오르고 있었다.
다만, 스스로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적어도 최영이 신돈과 이인임의 충돌 전에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즉 당장은 고려의 정국에 변수로 변하지 않도록 자중하게 만들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하나, 반대로 말해, 몽주가 한 말과 같이 고려의 정국이 변하게 된다면, 최영은 분명 고려의 권력을 취하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움직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인임과 손을 잡으려 할 수도 있겠지.”
만약 신돈과 이인임이 충돌하게 되었을 때, 최영이 친분이 있는 이인임에게 손을 뻗는다면, 이인임은 그 유혹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신돈, 고려 세족의 대표 이인임에 이어, 고려 무인들의 수장 격인 최영까지 고려의 권쟁(權爭) 속으로 뛰어든다면, 고려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궁금한 건 신돈과 이인임이 어찌 대처할 것인가였다. 그저 금상의 몰락 이후 다가올 충돌을 대비하려 할 뿐일지, 아니면 공존의 가능성을 타진할 것인지.
그 두 권력자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미래를 두고 여태껏 아무런 생각도 없을 리가 없었다.
생각에 생각이 겹치고, 안배 위에 안배가 드리울 것이니,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고, 누구의 계획이 실현될지는 알 수 없었다.
“제주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몽주는 제주를 택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저 동양판 대항해 시대를 염두에 두고 제주를 택한 것이었지만, 그가 고려에서 산 몇 년이 바꾼 세상을 보자니, 제삼자인 것처럼 동떨어져 있을 수 있는 제주에 사는 것 자체가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하나, 고려의 정국이 복잡해질수록 고려 백성들이 더 힘들어질 것이고, 그에 책임이 없지 않은 몽주로서는 더 미안할 따름이었다.
물론, 이미 이 시기의 고려는 혼란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것이 역사처럼 고려의 멸망으로 치달을지, 아니면, 기적처럼 다시 부활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뿌우웅!
“……?”
한참 상념에 젖어 있을 때, 문득 들린 나팔 소리에 몽주는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 소리는 후미에 따르는 배들 중에서 난 것이라, 몽주는 얼른 걸음을 옮겨 옆으로 가 뒤를 살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무엇인지 이내 알 수 있었으니, 바로 뒤를 따르는 배에서 고려의 연안 쪽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리키는 방향 먼 곳에 수많은 배들이 조그많게 보이고 있었다.
섬들이 점점이 있는 사이에서 빠르게 빠져나오고 있는 그 배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분명 몽주 쪽이었다.
“왜구입니다. 아마 근처 섬에 있다가 우리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어느새 다가온 탁기가 몽주가 짐작하던 것을 짚어 주었다.
아직은 먼 곳이나, 쫓아오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몽주는 마른침을 남몰래 삼키곤, 탁기에게 물었다.
“도주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합니다.”
“그렇겠지.”
탁기도 단호히 대답했고, 몽주도 그럴 거라 예상했다.
왜구의 배는 첨저선인 데다 배의 형태도 폭이 좁은 형태라 물살을 가르기에 유리한데 비해, 고려의 배는 평저선인 데다가 크긴 하나 폭이 넓은 편이라 물살에 저항을 많이 받아 빠르게 나아가기 어려웠다.
게다가 지금 몽주의 배들은 짐을 가득 싣고 있어 더 느린 상태였다.
연안인 만큼 뭍으로 갈 수도 있겠으나, 왜구가 연안 쪽에서 쫓아오는 터라 자칫 오히려 거리만 가까워질 뿐, 뭍에 닿기 전에 접전하게 될 가능성만 높이는 일이 될 것이었다.
또 뭍으로 도망간다고 쫓지 않을 리도 없을 테고, 괜히 그 근방 고을에만 난리를 부를 수 있었다.
“일단 도주를 시도한다.”
“노를 저을까요?”
“아니, 어차피 추격을 허용할 듯하니, 괜히 싸울 힘을 뺄 필요는 없겠지. 대신, 대선들을 좌현으로 몰아 접전에 대비하게 하라.”
“알겠습니다.”
대선을 선단의 좌현에 붙이라는 명의 의미를 안 탁기는 곧바로 고물로 움직여 그곳에서 나팔을 세 번 불게 한 후, 붉고 검은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후미의 진형이 변하였는데, 도중에 신호를 잘못 파악한 배가 있어 잠시 혼란스러웠으나, 손짓 발짓에 여차하면 고함까지 마구 질러 겨우 대선들을 선단의 좌현으로 이동시켰다.
몽주가 틈틈이 봐 둔 범선에 관한 책과 다큐멘터리에서 이런 상황은 동방향 지향 중에 라인 배틀(Line Battle)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물론, 화포가 있다면 말이다.
하나, 왜구에게는 화포가 없었고, 몽주에게도 알량한(?) 폭죽노가 몇 대 있는 정도였으니, 결국은 화살을 좀 날리다가 어느 순간 접전하여, 백병전의 형태로 나갈 것이 분명했다.
몽주의 사병들이 출중하고 탁가의 무인들도 있지만, 이곳은 바다 위인 만큼, 백병전에 이르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수적으로 왜구들이 훨씬 많았다.
그렇기에 결국 관건은 어떻게 왜구들이 배를 범하는 걸 막느냐, 혹은 그 전에 왜구의 기세를 꺾느냐는 것이었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겠지만, 전투 또한 아군의 장점을 살려 적군의 약점을 노려야 함을 생각할 때, 몽주는 못 미더워도 일단은 폭죽노를 믿어 봐야 했다.
하여 폭죽노를 쓸 수 있는 대선을 좌현으로 세워, 왜구와 먼저 접전하게 한 것이었다.
그 외 배의 성능에서 그나마 유리한 점을 꼽자면, 훗날의 2층 구조 판옥선에 비할 바는 아니나, 그래도 왜구의 배보다 고려의 배가 약간 더 높다는 것이었다.
평저선이라 흘수선이 낮기 때문이었고, 왜구의 배가 가진 선체 자체가 작은 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봐야 30세미(센티미터) 정도였지만.
몽주가 전투에 대한 생각을 가누고 있을 때, 어느새 갑판에 나온 화극이 무어라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훈련한 대로만 해라! 이 폭죽이라면 왜구가 함부로 배를 건너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미 몽주의 명을 선단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크게 소란스러웠기에, 화극도 몽주가 대충 어떤 생각으로 대선을 좌현에 모은 것을 깨달았는지, 사병들에게 전투에 앞서 훈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폭죽을 꺼내와 사병들마다 두 개씩 나눠 주고 있었다.
폭죽노로 쏘다가 더 가까워지면 수류탄처럼 적선에 던지게 할 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백병전이니, 아마 그 전에 대략 승패를 가늠할 수 있을 듯했다.
몽주는 문득 긴장감을 크게 올리며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 * *
“이놈들아, 아직 쏘지 마라!”
화극이 벌써 명도 받지 않고, 폭죽노를 쏜 후미의 배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 고함이 뒤로 뒤로 전달되는 사이에 몇 발이나 더 발사되었다. 아마 전투 직전의 흥분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폭음은 없었다. 거리에 한참 미치지 못한 폭죽들은 바다에 떨어져 잠겨 버렸으니.
왜구의 추격을 받은 지 한 시진가량 흐른 시각, 왜구의 배들이 바짝 쫓아왔다. 이미 양 선단이 거의 나란히 남향으로 물살을 가르고 있으나, 아직은 300미(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왜구 쪽 움직임을 볼 수 있었고, 왜구들이 소리치는 고함 소리도 들렸다.
그나마 아직 접전하지 않고 있는 건, 왜구들이 쫓아오느라 노를 힘껏 저었기에 싸움에 앞서 잠시 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몽주의 선단도 힘껏 달리는 대신, 배를 부리는 선원들의 수를 최소화하고 나머지들은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몽주도 선두 대선의 갑판 가운데에 있어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서 몽주의 전투 준비란 앵도가 따라오진 않았으나, 여전히 몽주를 지키는 탁가의 여무인들에 둘러싸이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이 나무로 된 큰 방패를 세워 벽처럼 몽주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좀 민망한 모습이기는 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몸 조심하게.”
“걱정 마십시오. 다들 주인을 철저히 보호하게.”
탁기는 여무인들에게 단단히 말하고는 곁을 떠나 고물 쪽 폭죽노로 향했다.
이미 왜구들이 부산히 움직이며 곧 접전을 시도할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채 일다경이 흐르기도 전에 왜구들이 다시 노를 젓기 시작했고, 선단의 방향도 비스듬히 꺾어 몽주의 선단 쪽을 향하게 하였다.
200미, 150미, 100미…….
왜구들이 가까워질 수록 그들의, 아마도 욕설일 고함은 더 크게 들렸지만, 정작 몽주의 배와 선단 전체는 조용해지고 있었다.
몽주도 그랬지만, 사병들도 언제 폭죽이 발사될지를 고대하며, 그에 주의를 집중한 탓이었다.
이미 폭죽노의 사거리 안에 왜구의 배들이 들어왔으나, 화극은 발사를 명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그것도 배가 달리는 중에 유효한 사거리는 뭍에 비해 형편없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몽주는 내심 조바심이 들었다.
이러다가 폭죽을 제대로 쓸 여유도 없게 되는 건 아닌가, 화극에게 무어라 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서야 마침내 화극이 발사를 외치며, 고물에서 붉은 기를 마구 흔들었다.
몽주가 탄 대선에서 먼저 폭죽이 쏘아졌고, 화극의 신호를 받고, 앞선 배의 폭죽이 발사되는 걸 본 후위의 배들도 연달아 폭죽을 쏘았다.
물론, 첫 발에 폭음은 들리지 않았다.
“야, 이놈들아! 움직임을 생각하고 쏴야지! 그래서야 맞추기라도 하겠느냐!”
화극이 방방 뛰며 연신 소리쳐 대었다.
첫 폭음이 난 건, 몽주의 배를 기준으로 세 번째 폭죽이 발사되었을 때 즈음이었다.
이미 왜구와의 거리는 50미가 채 안 되었고, 그들로부터 화살이 날아오고 있었다.
빗나가는 화살들이 많으나, 거리가 가까운 만큼 배에 날아드는 화살들도 많았다.
몽주와 사병들은 저마다 갑판에 세워 둔 나무 방패에 몸을 숨겨 화살을 막았지만,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방패와 선체 여기저기에 박히는 화살의 위력은 두려운 것이었다. 그나마 약탈이 목적인지 불화살은 날아오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그 와중에도 화극은 활을 가진 사병들로 하여금 화살을 쏘게 하면서, 다시 폭죽을 쏘라 명하고 있었다.
몽주도 여무인들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방패 너머를 엿보았다. 다른 건 둘째치고 폭죽이 터진 곳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폭죽이 터진 왜구의 배는 선두에서 세네 번째쯤 달리던 배로, 얼핏 봐도 갑판 위가 아수라장이 된 듯했다. 배가 불타진 않은 것 같지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갑판 위에 붉게 물든 왜구들이 부선하게 움직거리고 있었으니, 다친 자들이 많은 것 같았다.
다시 두 번의 폭죽이 더 발사되었고, 그 사이에 양측 간에 화살이 수도 없이 날아가고 날아들었다.
폭음이 도합 열 번쯤 들린 듯했고, 몽주의 배에서도 화살에 당한 자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폭죽을 쏘고, 활을 당기는 중에 날아든 왜구의 화살에 맞은 탓이었다.
몽주는 사실 경황이 없었다. 목을 조금이라도 빼면 금방이라도 머리로 화살이 날아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수그리고 있는 스스로 한심하여 애써 용기를 내 방패 너머를 힐끗 보다가, 이내 방패에 박히는 화살에 놀라 다시 몸을 웅크리기를 반복하던 중이었다.
차라리 적병이 칼을 들고 덤벼들면 없던 용기라도 쥐어짜겠건만, 먼 곳(?)에서 화살만 날아오니 더 겁이 났다.
그나마 요성에서 창름을 지키던 몽주의 모습을 본 자가 이 자리엔 아무도 없다는 게 위안이었다. 괜히 그때 그가 보여 준 모습을 지금도 기대했다면 몽주로선 곤란했을 것이다.
“투척을 준비하라!”
갑판 위에서 날뛰던 화극은 잘도 살아남아 몽주의 근처를 달려 지나가며 소리쳤고, 좌현 갑판에 있던 사병들이 폭죽에 불을 붙여 왜구의 배로 던졌다.
이미 왜구와의 거리는 채 30미도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신기하게도 화극이 명하는 시점부터 화살이 거의 날아들지 않았다. 왜구들이 백병을 준비하느라 활 대신 칼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잠시 후, 가장 가까운 왜선으로부터 다른 게 날아들었으니, 줄이 달린 쇠고리가 그것이었다.
갑판에 세운 나무 방패 때문에 쇠고리가 배에 걸리는 대신 방패만 부쉈지만, 이내 결착될 것이 분명했다.
하나, 그 전에 폭음이 먼저 있었다.
쾅쾅쾅!
폭죽노로 쏠 때와 달리, 이번에는 폭음이 무수히 터졌다. 그만큼 가깝기 때문이었으리라.
몽주의 눈에는 폭발의 결과가 보이지는 않았으나 사병들이 환호작약하는 걸 보아 성과가 나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쇠고리도 더는 날아오지 않았고, 아군의 배를 범하려 달려드는 왜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힘없이 뒤로 낙오하는 왜선의 돛대만 보일 뿐이었다.
몽주는 크게 기뻤으나, 아직 좋아할 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저 처음 접전한 배만 떨쳐 냈을 뿐이고, 선단 전체의 상황은 알 수 없었다.
아직 왜구들은 전의를 잃지 않았고, 그들의 배는 여전히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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