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07)
설욕지수(雪辱之數)
바다 위에 칼바람이 한바탕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승리의 깃발을 휘날렸다. 하나, 흔한 표현대로 상처뿐인 승리였다.
몽주의 대선에 왜구들이 침범한 건 다섯 척이나 물리친 후였다. 세 척은 폭죽의 도움으로 비교적 쉽게 떨쳐 내었다면, 다른 두 척은 사병들이 필사의 노력이 물리친 것이었다.
하나, 폭죽의 양이 몽주의 배보다 적게 실렸던 다른 배에서는 보다 일찍 백병전이 벌어졌고, 그만큼 일찍부터 많은 피가 흘러 갑판을 적시고,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다.
백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몽주는 호위 여무인들 중 넷을 자유로이 싸우게 하고, 둘만 곁에 붙인 채 칼을 뽑아 들었다.
앞에 나서 전투를 이끈 건 아니었지만, 몽주를 노리고 덤비는 왜구들도 적지 않았기에 몽주 또한 칼을 휘둘러 적을 상대해야 했다.
물론, 호위 여무인들이 적을 막는 사이에, 나름 첫 천몽의 경험을 끌어올려 틈틈이 칼을 박아 넣는 수준이었지만, 나름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다만, 여무인들도 그리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싸움 속에 있을 때는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지, 승부의 방향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같은 건 당장 자신을 노리는 적 앞에서 주의를 기울일 여지를 남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당장 몽주가 타고 있는 배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향방도 보기 어려운 판국에, 다른 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자신을 노리는 어느 왜구가 칼을 휘두르는 걸 몸을 날려 피하고 갑판 위를 뒹군 후, 그 왜구가 여무인의 검에 배가 꿰뚫려 죽는 걸 확인하고서야 문득 갑판 위에 날뛰는 왜구가 더는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구가 물러갑니다.”
어느새 다가온, 핏물을 뒤집어쓴 탁기의 말에 몽주가 바다를 보니,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왜구의 잔당들이 배를 뒤로 물리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근 백 척은 족히 되었던 왜구의 배들 중 멀어지는 건 서른 척 정도에 불과했고, 그나마 그중 전력을 보존한 배는 십여 척에 머문 듯했다.
몽주의 이십여 척 배가 사투 끝에 근 백 척의 왜선을 물리치고 떨쳐 낸 것이었다.
그제야 몽주는 다른 배들의 상황을 보았다.
백병전이 시작될 쯤에 돛을 접어 나아가지 않던 상황이라 바다의 흐름에 따라 선단이 다소 흩어져 있었다.
낙오된 왜선들도 많아, 몽주의 선단 소속 배들만 헤아리기가 어려웠지만, 얼추 숫자는 본래와 비슷한 듯했다.
하나, 왜구들이 물러나면서 불이라도 지른 건지 몇몇 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투 후처리가 끝난 건 대략 한 시진이 더 흘러 해가 서쪽 바다 위에 떠 있을 즈음이었다.
총 선박 중 네 척이 공파(空破)와 돛대 파열, 그리고 화재 등의 이유로 항해 불능으로 판정되었다.
사상자는 총 322명으로, 그중 사망자는 113명이고 중상자도 27명에 이르렀다.
솔직히 말해서 그제야 몽주는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전투 직전에도, 전투 중에도, 그리고 전투 직후에도 겁이 났든 긴장이 됐든 무슨 이유에서든 몸이 떨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전투 후 시간이 흘러 피해 상황을 확인하자 충격과 분기에 쉽사리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건 몽주만이 아니었다. 다른 배의 상황을 알게 된 모든 이들이 마음 깊은 슬픔과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그중 화극은 아예 목 놓아 통곡하였다.
“나 때문이네, 나 때문이야. 엉엉!”
그 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책이었으나, 몽주는 그가 화포 개발에서 손을 떼었던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화약과 화포에 손을 놓지 않았더라도 이번 항해에 화포를 쓸 수는 없었을 테지만, 화극은 포기한 자신 자체를 책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슬픔 속에서 몽주는 소독약 겸으로 가져왔던 주정으로 부상자들의 상처를 씻어 내게 하고, 망가진 배의 선원을 재조정하여 움직이기 곤란한 배들을 자침시키게 하였다.
그 탓에 화물들을 많이 버려야 했는데, 철을 남기고 흑토를 버리게 하였다.
항해만 못할 뿐이고 가라앉지 않는 배라면, 다른 배에 연결하여 끌고 갈 수도 있었지만, 몽주가 소유한 고려의 배로 그러기에는 추력이 약할 뿐더러, 가급적 뭍에 들리지 않고 제주로 곧장 가려 하는 점을 고려할 때, 미련 없이 포기한 것이었다.
물론, 그래도 가는 길에 할 건 해야 했다.
낮이 저물고 별자리를 헤아려 항해를 한 몽주의 선단은 새벽녘에 나주 근처 해안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들을 나룻배로 옮겨 실었다.
탁가 무인 몇 명과 더불어 배에 올라탄 이들은 모두 검모포 선소에서 일했던 양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검모포 선소에 속했던 천민들은 몽주가 가복으로 바꾸어 제주로 옮겼으나, 양인들은 그러기가 어려워 훗날을 기약했던 것인데, 오늘 뭍으로 나온 김에 그들을 빼돌리기로 했던 것이다.
하여, 일전에 개경에 들렸을 때, 탁기 무인 몇을 보내 그들을 데리고 나주 해안 근처에서 기다리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세 밤이나 해안에서 기다린 끝에 마침내 몽주의 배에 올랐으니, 그만큼 몽주를 믿는 마음이 큰 이들이었다.
하기야 어지간히 대우를 잘해 준다고 해서, 고려에서는 그저 궁핍한 곳 이상의 의미가 없는 제주로 야반도주하는 걸 결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몽주가 검모포의 바치들을 잘 대우해 준 덕인 것이었다.
몽주는 배바치 양인들을 환영하고, 그들이 배에 올라 남아 있는 전투의 흔적에 놀란 것을 위로한 후, 그들을 데려온 탁가 무인들을 불렀다.
그들에게는 배바치들을 데려오는 것 외에 다른 임무가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알아보았는가.”
“홍사우 댁에 도당에서는커녕, 영공이나 수시중 측으로부터 연락이 간 바가 없었다고 합니다.”
“……알겠네. 수고했네.”
홍사우를 청한 것을 거절당한 명분이었던, 홍사우 본인의 거부는 사실이 아닌 것이 거의 확실했다.
결국, 신돈이나 이인임에 의해 홍사우를 청한 것을 거부되었다는 의미이니, 이는 홍사우의 아들인 홍륜을 그들이 혹은 그들 중 누구라도 사주하고 있다는 의미가 진실에 더욱 가까움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몽주로서는 조금 더 빨리 입지를 다져야 한다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 자신의 입지든, 제주의 입지든.
* * *
제주에 도착한 건 곡우(穀雨 : 4월 20일경)에 이르러서였다.
도착하자마자 한 것은 거대한 장례식이었다.
고려군 부원수들의 반란을 정리하면서 죽은 사병들을 위한 장례식도 경험한 바 있었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중상자 대부분이 죽어, 140명에 가까운 이들을 위한 장례였던 만큼, 그 슬픈 분위기는 제주 전체를 장악할 정도였다.
사병들 모두 제주에 별다른 연고가 없었지만, 몽주가 울고, 몽주의 가족이 우니, 다른 모든 이들마저 눈물을 쉽게 멈추지 못하였던 탓이었다.
장례는 화장(火葬)이었고, 그 유골은 일단 홍로현으로 옮겨 두었다가 후에 납골당을 지어 보관하기로 하였다.
훗날 일종의 국립묘지와 같은 곳의 시초가 될 장소였다.
장례의 분위기가 거두어 지자, 화극이 몽주를 찾아왔다. 시름과 자책으로 얼굴이 크게 상한 그가 잔뜩 각오한 얼굴로 뜻을 밝혔다.
“강철을 만드세. 그리고 화포도 만드세.”
“알겠습니다.”
몽주는 먼저 강철을 만들기로 하고, 일단 화극으로 하여금 가마를 짓게 하였다.
흑토가 있긴 하나, 도중에 포기한 탓에 많지 않았고, 그중 역청탄이 얼마나 있는지, 또 코크스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단 도가니법으로 제강을 시도할 참이었다.
물론, 고로를 만드는 데 필요한 강철을 먼저 얻기 위해서라도 구식 방법으로 강철을 생산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미 예전에 가마를 짓는 것에 대해 화극과 논의하고 실험한 것이 있어, 화극이 홀로 해도 될 법하기에 제주로 이주하면서 가져온 고령토를 그에게 내주었다.
화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날부터 일에 열중하였다.
몽주는 화극에게 강철 생산에 대한 초기 작업을 맡기고, 다른 일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의료과 관련된 것이었다.
왜구와의 싸움에서 중상을 입은 자들 거의 모두가 결국 사망하였는데, 그중 많은 이들은 수혈이 필요한 터라 지금 시대에서는 살기 어려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끝내 다 죽었다.
체온이 급격히 오르락내리락하다가 호흡이 어려워지고 끝내 피부가 퍼렇게 변질되며 죽었으니, 그건 패혈증으로 죽은 것이 분명했다.
주정으로, 그러니까 알코올로 나름 소독을 한다고 했건만, 역시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 참담한 광경을 보면서, 몽주는 다른 일로 미루고 있던 일이 사실 가장 급한 것임을 깨달았다.
위생을 개선하고, 기초적인 의료 상황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화약을 만들고, 무기를 제작하는 것보다 급한 일임을 새삼 절실히 느낀 것이었다.
몇 가지 계획을 세운 후 몽주는 배로 탐라현으로 가서 행재청으로 제주 사성의 가주들을 불렀다.
“이곳 제주에도 벌이 있겠지?”
뻔한 몽주의 물음에 가주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봉하는 자들도 있나?”
“벌꿀을 생산하는 자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물론 있습니다. 많지는 않습니다만…….”
“하면, 그들을 모아 데려오게. 아니, 소만(小滿 : 5월 21일경)일에 이곳에 모이도록 연락하게.”
“어려운 일은 아니오나, 그 연유를 알 수 있을지요.”
“그들의 일을 크게 키우고 돕고자 하는 것이니, 일단 그리 알게.”
여전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주들은 그들의 일족들이 어차피 지금도 제주 전역을 오가고 있는 터라 어려운 일이 아니라 여겨 그리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또 하나, 전에 보니 제주에도 소를 드물게나마 볼 수 있었네만, 몇 마리나 있는가?”
“제주는 뭍과 달리, 말을 노역에 쓰는 터라, 소가 많지는 않습니다. 잘은 모르나, 많아야 이백여 수가 전부가 아닐까 합니다.”
“그대들이 가진 소는 얼마나 되는가?”
그에, 가주들이 서로 소유한 소의 마릿수를 밝히니, 도합 90마리 정도 되었다.
“혹 그 소들 중에서 젖통에 발진이나 물집이 생긴 것이 있던가.”
“……?”
가주들이 저마다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소를 관리하는 자들은 따로 있을 것이니, 가주가 그것까지 알 리가 없었다.
“제주의 소 중에서 지금 젖통에 발진이나 물집이 생긴 소가 있는지 찾아보게. 만약 있거든 내게 알리고, 또 증세가 거의 사라져 딱지가 앉은 게 있거든, 그 딱지를 떼어 가져오게.”
가주들의 인상이 구겨지는 게 보였다.
소가 병을 앓고 있는 걸 알아보라는 거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발진이나 물집의 딱지를 떼어서 가져오라니, 무슨 해괴한 짓인가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건 몽주가 그 딱지로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기에 짓는 표정이었다. 그걸 알았다면 지금의 명령 정도로는 아직 놀랄 게 아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몽주의 명은 하나 더 있었다.
“장지를 잘 담그는 여인들도 모아오게.”
“장지를 드시고 싶으시다면 굳이 그러실 필요…….”
“그 때문이 아니니, 불러 모으게.”
사성의 가주들은 그렇게 희한한 세 가지 명을 받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행재청을 나섰다.
몽주가 내린 명 중 가장 먼저 시행된 건 장지를 담그는 여인들을 모아오는 것이었으니, 바로 다음 날에 예닐곱 명의 여염집 아낙들이 행재청에 모였다.
몽주는 그들에게 장지를 담그게 하였는데, 마침 제철인 마늘로 만들게 하였다.
그 모습을 보던 몽주는 역시나 싶었다.
사실 항해 말미에 장지의 맛이 변한 듯하였는데, 장지를 담그는 중에 간장을 펄펄 끓이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장아찌가 오래 못 가지.’
장지(醬漬)란 바로 장아찌였다.
현대에서 소금이나 간장으로 절인 채소 음식은 오래된 음식 문화였으나, 이 시대의 절인 채소 음식은 여전히 발전 도상에 있었다.
그중 혜형(醯型) 김치라 하여 채소만 건져 먹는 채소 음식 종류에 속한 장아찌는 후에 간장을 끓여 그 보관 기간을 획기적으로 늘이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아예 작정하고 오래 보관하려면 만든 후 칠 일 단위로 간장을 도로 따라 냈다 끓여서 식힌 후 다시 붓는 과정을 두어 번 거쳐야 했으니, 끓인 간장물이 보관 기간을 늘이는 관건이었던 것이다.
몽주는 이번 항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장지를 충분히 싣게 하고 사병들에게 매끼마다 장지를 많이 먹게 하였는데, 이는 괴혈병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현대에서 대항해 시대에 관한 책을 읽고 자료를 찾으면서, 긴 항해에 대비하여 비타민C를 섭취할 방법으로 장아찌를 알게 되었고, 그 제법도 대강 알아 두었던 것이다.
사실 대항해 시대 때, 선원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괴혈병을 예방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라임이나 오렌지 같은 과일을 섭취하는 방법, 콩나물을 배 안에서 재배하여 먹는 방법, 신대륙 발견 이후에는 말린 고추를 음식에 뿌려 먹는 방법 등이 그것들이었다.
물론, 장아찌를 포함하여 괴혈병을 예방하는 방안 중 실제로 쓰인 것은 과일과 콩나물뿐이었고, 그나마 콩나물을 명나라에서 정화의 원정 때만 쓰였을 뿐, 그 외에는 쓰이지 않았다.
이는 아시아에서 원양 항해를 거의 시도하지 않은 탓에 굳이 괴혈병을 앓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서양에서 과일로 괴혈병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방법을 도입하여 쓴 것이 유일한 셈이었다.
사실 전근대 사회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선한 과일을 매 항해마다 챙기는 건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 고려에서 대항해 시대를 준비하는 몽주는 이 괴혈병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으니, 그 해답이 바로 장아찌였다.
제대로 만들기만 한다면 석 달은 무리 없이 유지할 수 있는 데다가, 과일처럼 비용이 많이 들지도, 콩나물처럼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고춧가루처럼 말리고 분쇄하는 중에 비타민C가 대량으로 감소되지도 않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물론, 고추의 경우에는 신대륙 발견이 먼저 필요할 테고, 무엇보다 이 시기의 자생 고추는 할라피뇨처럼 미치도록 매운, 위험한 작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애초에 염두에 둘 이유도 없었다.
하여, 고려에서 장지를 먹은 바 있던 몽주는 대수롭지 않게 장지를 배에 실었던 것인데, 처음에는 괜찮더니, 요동까지 들러서 제주로 오는 도중에 맛을 보니, 그 맛이 변했다 싶었던 것이다.
그에 몽주는 여인들에게 간장을 팔팔 끓여 장지를 많이 만들어 두게 하였다.
사실 설탕이 있다면 같이 넣어 주면 단맛이 돌아 더 맛있겠지만, 지금은 언감생심이었다.
몽주는 왜 현백이 장지를 담그는 것까지 나서는지 수군거리는 여인들에게 후에 그들이 담근 것과 비교해 보라고 말하여 돌려보냈다.
“항생제랑 종두법은 갔다 와서 해야겠군.”
몽주가 양봉하는 이들을 구한 것과 젖통에 발진이나 물집이 생긴 소를 찾은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프로폴리스를 이용한 항생제야 이미 첫 천몽에서도 해 본 바가 있어 지금 만들어도 문제는 없었지만, 종두법(種痘法)은 아무래도 현대에서 정보를 구해야 했다.
우두의 고름과 상처 딱지를 이용하여 접종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 접종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몽주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종두법을 실시하려 하면 난리 나겠지?”
몽주는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 * *
“아이고, 이러니까 사람이 소가 된다고 하지.”
꿈에서 깬 몽주는, 일어나자마자 종두법의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보고는 탄식했다.
한국의 역사에 실시한 종두법은 크게 네 가지였다.
고름을 따서 솜에 적셔 콧구멍에 넣는 방법인 장묘법(漿苗法), 고름이 생긴 자의 속옷을 벗겨 건강한 자에게 입히는 방법인 의묘법(衣苗法), 딱지 분말을 은관이나 거위의 깃털로 만든 관에 채워 넣고 그것을 코로 흡입하는 방법인 한묘법(旱苗法), 그리고 딱지 분말을 물에 녹인 다음 솜에 적셔 콧구멍에 넣는 방법인 수묘법(水苗法)이 그것들이었고,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마지막 수묘법으로 수묘비강접종법(水苗鼻腔接種法)이라고도 한다.
사실 이 방법들은 본래 종두법이 시행되기 전에 행한 인두종법(人痘種法), 즉 천연두를 앓은 자의 고름과 딱지를 이용하여 접종 하던 방법에 쓰던 것으로, 우두(牛痘)를 이용한 종두도 기술적으로 다를 필요가 없어 그대로 사용한 것이었다.
애초에 처음 서양에서 종두법이 실시되었을 때는 작은 상처를 내서 거기에 우두의 즙을 마찰시키는 방법이 쓰였고, 한국에서도 최초에는 그런 방법을 썼지만, 굳이 상처를 내지 않고 감염하게 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그것은 탁월한 선택임에 틀림없었다. 침이나 칼로 상처를 내다가 외려 다른 전염병이 옮을 수도 있고, 파상풍이나 패혈증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두의 즙이나 상처 딱지를 코로 감염시키다 보니, 전근대 사회에서는 마치 소의 영혼을 흡입한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이해하기 충분하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종두법 시행 전에 세균과 바이러스, 감염과 면역 및 교차 면역 같은 걸 깨우치게 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큰 걸 넘어서,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결국은 증명을 해야겠지. 증명 전까지의 오해와 비방을 이겨 내면서…….”
우두에 일부러 감염당하는 방법은 당대의 시야에서는 어쨌거나 미친 짓일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희생시켜 먼저 종두를 받게 하고 살아남음은 물론, 천연두에 면역된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몽주는 그 희생의 당사자로 누가 적합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긁적긁적.
찜찜한 마음에 머리를 긁던 몽주는 제주에서 종두법을 실시할 계획을 머릿속으로 구상하였다.
이미 현대로 오기 전, 고려에서 우두를 앓고 있는 소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기에, 우두 즙과 상처 딱지를 구하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 어떤 반발이 있어도 종두법을 실시하여, 천연두만큼은 이겨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안 그래도 많고 많은 전염병들 중 흑사병과 더불어 인류의 생명을 가장 많이 빼앗은 전염병인 천연두는 기술적으로 어려움 없이 자연의 것만을 이용해서도 극복할 수 있는 병이기도 했다.
평균 치사율이 30퍼센트를 넘나드는 천연두는 고려에서 수많은 이들, 특히 어린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었으니, 장차 고려와 제주가 발전하기 위해 인구를 늘이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었다.
전근대 시대의 극단적으로 높은 유아의 사망률의 원인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천연두를 극복하는 것만으로도 인구 팽창에 큰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 * *
“만약 왜구의 준동이 일본 정세에 의한 것이라면, 쇼니씨(少貳氏)가 그 배후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몽주의 물음에 두신과 재상이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제만 맞다면, 쇼니씨가 배후인 건 구십구 퍼센트입니다.”
그 질의와 대답은 결국 왜구가 대체 왜 고려 말에 그토록 난리를 쳤느냐는 의문에 대한 결론 중 하나에 해당하였다.
몽주는 제주로 이주하면서, 왜구에 대한 조사를 두 사람에게 부탁하였고, 그들이 이 주에 걸쳐 조사한 내용을 보고하였다.
사실 왜구는 동양사에서 주요 연구 소재이긴 했지만, 그건 주로 중국을 습격한 후기 왜구, 즉 16세기 왜구에 집중되었고, 그에 비해 한반도를 대상으로 한 고려 말의 전기 왜구는 상대적으로 연구 결과가 약소했다.
그렇기에 전기 왜구의 출몰과 관련한 추정만 여럿일 뿐, 확실하다 싶은 건 없었다.
다만, 왜구의 주체를 두고는 크게 두 갈래의 주장이 있었는데, 하나는 후기 왜구와 마찬가지로 다민족 다국적의 해적들이 왜구로 통칭된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규슈(九州)를 기반으로 한 지방 세력이 주도했다는 설이었다.
전자는 주로 일본 학계의 대세였고, 왜구에 대한 연구가 일본이 주도한 만큼 대세적인 이론이었지만, 후자이자 전자에 대한 반론인 일본 지방 세력 중심이라는 주장도 약하진 않았다.
후자의 경우, 규슈의 쇼니씨가 일본 본토의 정국에 개입하고 대응하기 위한 물자와 식량, 그리고 노예를 구하기 위해 해적질을 동원하였다는 것으로, 만약 일본인 외에 다른 민족이 섞여 있다면, 그건 일종의 용병이거나 왜구에 납치되어 해적질을 강요당한 이들일 것이라고 하였다.
“두 분이 보시기에는 어느 쪽이 맞다 보십니까?”
몽주가 다시 묻자, 재상이나 두신이나 쓴웃음을 보였다.
“둘 다 일리가 있고, 약점도 있습니다. 사실 고려 말에 침입한 왜구의 규모나, 왜구의 출몰 빈도, 왜국의 정세가 맞아떨어지는 점 등을 보면, 일본인이 중심이라는 설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만약 그것이 정말 군량미나 물자를 얻고자 저지른 것이라면, 솔직히 그게 이익이 될지 의문이라는 점에서는 꼭 일본인만이 왜구의 주체였을지는 장담하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상이 간략하게 말한 바는, 정황상 일본 규슈 세력 그러니까, 쇼니씨가 해적질을 통해 군량과 물자를 약탈한 것이 맞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막상 그 대단위의 왜구를 동원하는 데에 쓰였을 양식과 물자를 생각하면 과연 남는 게 있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었고, 그걸 염두에 두면 단발적인 해적질은 몰라도 수십 년 동안 고려를 침범한 왜구 전체를 쇼니씨의 수작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다는 것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쇼니씨가 배후인 게 맞을 듯하군요.”
“그렇습니까?”
“네, 일본인 외의 왜구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거든요. 만약 일본인보다 많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적지 않은 다른 민족들이 해적질을 했다면 고려에 그에 대한 소문이 있었을 테니까요.”
몽주가 직접 경험한 왜구들부터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이성계와 만나게 된 계기였던 왜구의 잔당, 한양부를 습격했던 왜구, 그리고 직전 꿈에서 싸웠던 왜구까지 모두 일본인들이었고, 그중에 다른 민족이나 국적을 가진 이가 있다 하더라도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적은 수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말씀하신 대로 쇼니씨가 배후일 가능성이 높군요. 그런데 정말 그걸 하실 겁니까?”
“네, 화포만 개발한다면요.”
“위험할 텐데요? 자칫 천몽을 마치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죠. 다만, 쇼니씨가 배후라면, 조금 나은 상황일 겁니다.”
“그런가요?”
“쇼니씨가 왜구를 조장할 정도로 군세를 끌어올릴 상황이라면, 분명 큰 적이 있을 테니까요. 적의 적은 아군이죠.”
그에 재상이 두신과 함께 만든 보고서를 뒤적거리더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적의 적이 누군지부터 아는 게 우선이겠는데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몽주가 물으니, 두신이 대답해 주었다.
“아시다시피, 당대 일본은 남북조 시대입니다. 규슈는 보통 남조의 영역이라고 하는데, 시기별로 꼭 그렇지마는 않습니다. 또, 그 지역의 슈고 다이묘들도 진영을 여러 번 바꾸죠. 쇼니씨도 처음엔 제삼의 세력이었다가 남조에 붙고, 다시 북조에 붙습니다. 근데, 지금 시기가 딱 애매할 때입니다. 북조에 붙었다가 깨져서 남조의 아래에 있을 때지만, 북조의 막부 측에서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이라는 유명한 가인(歌人)을 규슈 관리로 파견하여 남조 휘하의 다이묘들을 설득하고 있을 때거든요. 다만 2년 정도 후에 이마가와 료순이 쇼니씨의 가주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져서 또 한바탕 혼란이 벌어지죠.”
“…….”
몽주의 머리가 딱딱 아파 왔다. 상황도 상황이고, 영 알지 못하는 일본의 역사와 인물의 이름을 들으니, 더 정리가 안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처음 생각한 대로 무차별 사략이나 할까요?”
몽주가 처음 왜구에 대한 조사를 두 사람에게 요구하면서, 생각한 바를 밝힌 것이 바로 사략이었다.
왜구도 막고, 물자도 얻는 방법으로 구상했던 것이었다. 이제는 복수와 설욕의 의미도 있었다.
그 물음에 재상과 두신이나 일단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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