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14)
애매모호(曖昧模糊)
40대 중반의 학자풍의 중년…… 이라기보다는 겉보기에는 완연한 노인을 모시고 제주로 온 여남은 명의 2, 30대 젊은이들을 보고 몽주는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지 말았으면 하는 자들이 열 명이나 와 버렸기 때문이다.
“남방백을 뵙소. 고난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많은 편달을 바라겠소.”
간결하게, 오만하지도 굽실거리지도 않는 인사를 건넨 그는 원로에 몸이 상한 듯 몹시 피로한 모습이었다.
몽주는 자신이야말로 잘 부탁한다고 대꾸하고는 젊은이들…… 물론 몽주보다 어린 자는 단 한 명뿐인 그들을 보았다.
그들 중에는 안면이 익은 자들이 많았다. 아니, 안면을 익힌 수준을 넘어 인연이 깊은 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뵈니 씁쓸할 따름입니다.”
그 젊은이들 중 대표인 이가 고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말을 건네니, 몽주의 입가에도 쓴웃음이 번졌다.
“고생들이 많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래도 크게 상하지는 않으신 듯하니, 다행입니다.”
“몸이 상한 게 무엇이 대수겠습니까. 그저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그걸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저희의 마음이 상했을 뿐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니 의기소침함만을 전해 받을 뿐이었다.
몽주는 무어라 위로도 전하지 못하고, 그럴 입장도 아니라 묵묵히 시선만을 골고루 던졌다.
금방이라도 자리보전하고 누울 것 같은 40대 중반의 겉늙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그의 아홉 제자들이 몽주의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 아홉 제자들 역시 훗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자들이었다.
몽주와 대표로 인사를 나눈 포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야은 길재(冶隱 吉再), 가원 권근(可遠 權近), 쌍매당 이첨(雙梅堂 李詹), 호정 하륜(浩亭 河崙)이 서 있었고, 우측으로는 삼봉 정도전,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동정 윤소종(桐亭 尹紹宗), 동정 염흥방(東亭 廉興邦)이 있었으니, 정몽주와 정도전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이들 모두가 역사에 이름 석 자를 뚜렷하게 새긴 이들이었다.
물론, 그들 중 셋은 이미 몽주와 인연이 있었다.
이미 연이 있던 자들은 오랜만에 해후했기에 할 말이 많을 법도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반가워하며 수다를 떨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들 모두 지쳐 있었다. 제주로 오는 항해에 몸이 고된 것도 이유겠지만, 그보다는 고려 정국 속에서 크게 상심한 탓이었다.
그들 중 고려 신진사대부들의 의부 격인 이색과 아직 많이 어린 길재를 제외하면 모두들 고려에서 높고 낮은 벼슬을 하던 중에, 왕우 왕자에 대한 연대 상소를 올렸다가 보복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보복의 주체가 신돈과 이인임이었으므로, 몽주로서는 위로의 말을 전하기도 애매하였다.
그들의 눈에 자신은 여전히 신돈의 당여였으니까. 진실로 위로를 한다고 해도 위로로 받아들여질지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앙심을 몽주에게 대신 갚으려는 기미는 없었다.
이미 정몽주, 정도전, 염흥방과 인연이 있고, 그 인연이 나쁘지 않았으니, 몽주가 신돈의 당여이기는 하나, 상종 못할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하여, 몽주는 위로의 말을 하기보다, 장차 왜국으로 행차해야 할 상황에 대한 말로 첫 만남을 갈무리하였다.
“왜국에 가는 일이 급하나, 다들 많이 지쳐 계시니, 원기를 회복할 때까지는 쉬십시오. 제 가복들을 이곳에 두겠으니,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물론, 제게도 하실 말씀이 있다면 언제든 만나자 청하십시오.”
“고맙소. 대임을 맡은 주제에 몸조리부터 하는 것이 불충한 일이기는 하나, 여력이 없으니 양해해 주시오.”
이색의 대답을 끝으로 몽주는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몽주는 구 성주청이자 현 탐라현 관아의 별채를 그들에게 내주었고, 가복들을 불러다 그들의 수발을 들게 명하고 곧 행재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 관아 대문을 벗어나기 무섭게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남방백,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돌아보니, 염흥방이었다. 그는 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슬쩍 몽주의 등에 손을 대어 밀면서 잠시 걷자고 하였다.
하여,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데, 염흥방이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문을 열었다.
“하아,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지요.”
“무슨 말입니까.”
“그 상소 말입니다. 상소문을 올려 봐야 해코지만 당할 뿐이라고 반대하였거늘, 사형사제들의 고집이 너무 세서 만류할 수가 없었습니다.”
몽주는 무슨 의미에서 염흥방이 그런 말을 하는지 의아스러웠다.
“사실 금상께서 왕자를 공인하시면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아비가 아들을 두고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다른 자가 나서서 아들로 삼지 말라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천륜을 저버리라고 강요하는 짓이지요. 애초에 강요도 할 처지도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그렇기도 하지요.”
“게다가 이인임 그자라면 모를까, 영공 저하와는 큰 틀에서 손을 잡아도 될 법하다는 걸 생각하면, 스승님과 사형사제들의 고집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무슨 일이든, 자기가 옳다 여기는 것만 강공으로 밀어붙인다고 되겠습니까? 타협하여 부차한 것을 포기하더라도 핵심을 취하는 것이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거늘…….”
몽주는 절로 염흥방의 얼굴을 응시하였다.
지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자니, 그가 현대에서 익히 알던 염흥방의 모습과 비슷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난 날 목호와의 싸움 때, 함께하며 봤던 반듯하고 무결한 염흥방이 오히려 어색했었는데, 지금 곁에서 느껴지는 염흥방의 기운은 조금은 더 때가 탄 느낌이었던 것이다.
“사실 저 또한 영공 저하께 오해가 많았지요.”
몽주의 시선을 어떻게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염흥반이 문득 패랭이 아래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승려 출신이라 하여 배타하는 마음 탓이었을 겁니다. 불씨가 금상의 눈을 가리고 권세를 탐한다 지레짐작했던 것이지요. 한데, 나랏일에 나서고 세상 돌아가는 실체를 경험하다 보니, 권세를 다루는 자는 결코 만사에 무결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영공 저하만큼이라도 나라를 생각하는 이가 드물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물음에 몽주는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역사에 기록된 신돈과 당대에서 바라보는 신돈이 다른 만큼, 처음 권세를 쥐었던 신돈과 이제 십 년의 권세를 유지하고 있는 신돈 또한 많이 달랐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흔한 말은 차치하더라도, 신돈의 처음과 지금을 도합하여 그를 평가하는 것은 몽주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다만, 적어도 지금의 역사가 후에 기록될 때는, 현대의 기록보다는 어쩌면 조금 나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이 정상배(正常輩)로 타락했을지언정, 지금의 신돈은 분명 역사보다 많은 것을 바꾸지 않았는가.
그가 그렇게 된 것에는 몽주 자신의 역할이 컸음은 분명했다.
“사실 지난 날 제주에서 귀환하였을 때, 영공의 덕을 보았습니다. 이인임 그 작자가 제가 올린 장계를 두고 곡해하였다며 마구 몰아쳤으니, 하마터면 제가 오히려 크게 망할 뻔했지요. 그나마 영공 저하께서 저를 믿고 두둔한 덕에 살 수 있었습니다. 이번 상소문으로 인해 곤경을 당할 때도, 저는 광주에 유배되었으니, 그 또한 영공께서 저를 봐주신 덕이지요.”
광주란 전라도 광주(光州)가 아닌, 오늘날의 경기도 광주(廣州)를 의미했다.
외진 곳이 아님은 물론 오히려 번화한 곳이기도 했고, 유배치고는 개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배정되었다 할 법했다.
그러니까, 염흥방은 신돈의 은혜를 연달아 입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건 몽주에게 역사적 기시감을 느끼게 하였다.
역사에서 신진사대부와 같은 궤로 움직이다가 이인임, 임견미의 일파가 되었던 염흥방.
그가 그렇게 변절하게 된 변수가 단지 이인임이나 임견미의 수작만이 아니었다면, 신돈의 일파가 된다 한들 그리 이상한 변화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염흥방이 문득 사위를 둘러보고는 조심스레 품에 손을 넣더니, 이내 서찰을 한 통 꺼내었다.
“영공 저하께서 남방백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몽주는 서찰을 받고는 염흥방을 빤히 보았다. 그는 결코 쫓겨 온 것이 아니었다. 유배당하고 살기 위해 왜국 사신행에 어쩔 수 없이 함께한 것이 아니었다.
염흥방, 그는 어느새 신돈의 당여가 되어 있었다.
“홀로 보시고, 읽은 후에는 파기하십시오. 괜히 드러나 헛된 소문이 퍼지는 걸 피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알겠소.”
“저는 나름 이번 왜국행이 기대가 됩니다. 이것이 단지 벌이거나 보복의 일환이 아닌, 재기의 발판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남방백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염흥방은 사람 좋은 웃음을 남기고는 떠났다.
그가 떠나고도 몽주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염흥방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시 멀어져 있었던 탁기가 다가와 행재청으로 가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더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건 단지 신돈의 서찰이나 염흥방의 변절(?)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진사대부들의 중심이라 할 만한 자들로 이뤄진 왜국 사신단.
처음 제주에 그들이 닿았을 때, 신돈과 이인임이 그에게 처리 곤란한 자들을 떠넘겼다고만 여겼는데, 그 안에 그들을 대신해 자신을 살펴볼 자들을 숨겨 두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신돈이 염흥방을 포섭하였다면, 이인임도 마땅히 그런 자를 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하륜이겠지.”
하륜. 두 왕조 아홉 왕 아래 살았고, 일곱 왕을 섬긴 신하.
그는 신진사대부이면서 동시에 권문세가의 일원이었고, 이인임의 조카사위이기도 했다.
신진사대부 중에 권문세가의 일원인 자가 많기는 하나, 이인임의 조카사위라는 점은 분명 대단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할 만했다.
그런 그가 아무리 상소 사건으로 인해 벼슬을 빼앗겼다고 한들, 다른 사형사제들과 더불어 제주까지 떠내려 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편복(蝙蝠)인가, 유영(游泳)인가.”
몽주가 복잡한 속내를 두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편복은 박쥐이고, 유영은 처세술을 둘러말하는 것이니, 염흥방과 하륜을 어찌 평가해야 할지 어지러웠던 것이다.
그건 단지 인물평의 문제가 아니었다.
짧게는 이번 왜국사신행에서 염흥방과 하륜을 어찌 대하고, 어찌 경계해야 할지를 판가름하기 위한 고민이었고, 길게는 장차 고려 도당에서 출세할 그들에 대한 예비적인 고민이었다.
“이보게, 탁기. 성가신 일이겠지만, 관아에 탁가 무인들을 몇몇 붙이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사신단을 지켜보고, 특히 염흥방과 하륜을 주시하게. 특이한 일이 있으면 즉각 보고하고, 아니더라도 하루에 한 번은 그들의 행보에 대해 내게 알려 주게.”
“알겠습니다.”
탁기는 의아한 표정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믐달 초순도 지나 보름에 이르러서야 도착한 왜국 사신행을 위한 보좌(?)들과의 첫 만남은 몽주로 하여금 시작부터 경계와 의심에 눈을 뜨게 하였다.
* * *
“근본적인 문제는 제주가 아직 고려 외에는 교류할 곳이 없다는 점입니다.”
재상의 지적에 두신은 물론, 몽주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였다.
고려에서 몽주는 아직 제주에 있었다. 사신단들이 휴식을 충분히 취했음에도 왜국으로의 뱃길에 나서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에서 결정을 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상, 두신과 논의를 하다 보니, 몽주가 고려의 간섭마다 흔들리는 근본적 원인이 고려 외 교류, 교역할 곳이 없다는 점에 닿았고, 그건 깨달을 필요 없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만약 제주가 따로 교역할 수 있는 곳이 있어, 지금 고려에서 얻고 있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몽주는 고려 도당의 간섭과 개입을 뿌리칠 수 있었다.
여력이 있을까 싶지만, 최악의 경우에 이르러, 고려 도당이 군사를 일으킨다고 해도, 화약만 있다면 바다에서 그들을 물리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 일본행을 통해 일본과의 기본적인 교류의 가능성 정도는 얻어야 할 겁니다. 물론, 당연히 그 교류의 당사자는 막부(幕府)여야겠지요.”
“쉽지는 않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쓰시마와 이키를 포기하는 대신 교역권을 얻기라도 해야 할 겁니다. 둘 다 얻는 게 최선이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두신과 재상의 연이은 조언에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전제를 깔고 있었다. 왜국사신행 이후 고려와 척을 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예견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 할 것인데, 하나는 몽주가 대마도와 일기도를 완전 복속은 아닐지언정 제주현백으로서 고려와 별개로 그 두 섬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지금의 제주현백이 마치 중세 유럽의 영주와 비슷하게 왕 아래 작은 왕이 되었다지만, 그렇다고 영토와 관련된 외교적인 권한까지 위임된 건 결코 아니었다. 달리 말해서 고려가 그것을 가납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몽주가 수단 좋게 쓰시마나 이키를 얻는다면 고려 도당에서 그것을 빼앗으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몽주로서는 원치 않는 일이었고, 마땅히 저항해야 할 일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역시 화포였다. 일회성 유사무기쯤으로 폄하되고 있는 폭죽과 달리, 화포는 누가 뭐래도 지방 권력이 독점해서는 안 되는, 당대의 전략 무기였다.
화포를 제주현백이 가지고 있고, 그 성능도 뛰어나다면 당연히 고려는 화포 제조 기술을 요구할 것이고, 화포를 회수하려 할 것이며, 나아가 화포를 개발한 제주현백을 의심하다 못해 끌어내리려 할 것이다.
사실 이 두 가지, 고려와의 관계에 있어 문제가 생길 소지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나, 지난번 논의 때만 해도 차후에 걱정할 문제라고 여겼었다.
하나, 몽주가 왜국사신행을 공식화하는 과정에서 도당이 사신단을 파견하고자 함으로써 차후의 문젯거리가 조만간의 문젯거리로 시일이 당겨진 것이었다.
몽주는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괜히 도당에 왜국사신행을 허락받으려 했다고 후회의 말을 뱉었다.
사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몽주가 만나려는 왜국의 상대는 단지 제주현백의 지위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웠고, 그들이 몽주가 고려의 대표라고 알아야 몽주가 제시할 계책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 회유는 힘들겠죠?”
재상의 물음에 몽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사람들이란 당연히 이색을 필두로 제주에 온 신진사대부들을 의미했다.
다들 기본적으로 유학의 근본에 열중하여 자신의 처지보다 경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인 데다가, 염흥방과 하륜은 각각 신돈과 이인임에 닿은 자들이니, 제주현백이 회유해 봤자였다.
“그럼, 적어도 화포의 공개는 불가피한 거겠네요.”
그것이 가장 문제였다.
많고 많은 문제와 고민 중에서 몽주가 가장 짜증을 내고 있는 부분이 그것이었던 것이다.
왜국으로 가는데 화포를 싣지 않고 갈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가장 믿을 만한 무기로 무장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그러면 당연히 신진사대부들로 이뤄진 사신단이 화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차후에 고려 도당이 화포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혹시 잔인한 해결책은 모색해 보지 않았습니까.”
“……?”
재상의 말에 몽주가 무슨 소린가 하다가 그 의미를 깨달았다. 제주에 있는 그들을 제거할 생각은 없느냐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재상의 입장에서는 그간 몽주가 당대의 기준에 능히 적응한 것을 알기에 혹시나 싶어 한 말이었다.
물론, 몽주는 고개를 저었다.
“왜국과 오가는 길에 수장시킬 수도 있고, 제주에 감금시키고 저만 따로 다녀온 후에 뒷감당을 감수하는 방법도 있겠죠. 하나, 적어도 그들을 데리고 왜국에 가는 것 자체는 이점이 있다고 봅니다. 정몽주가 왜국에 다녀온 기록을 보면 고려 유자들의 명망이 왜국과의 외교에 제법 큰 힘이 될 거라고 보거든요.”
“그야 그렇죠.”
역사에서 고려 당대의 ‘먼치킨’ 포은 정몽주는 명나라뿐만 아니라, 왜국에도 사신으로 행차하였었다.
비록 사신행의 목적인 왜구 방지를 이루는 것은 실패하였으나, 적어도 왜국이 왜구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에는 이바지하였다.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 한국과 일본에 적잖이 남아 있는데, 일본의 관리들과 승려들이 정몽주의 명성을 이미 알고 만나기를 먼저 청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왜국에서 왜국의 권력자들과 자리를 만드는 데에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 유자들의 명성을 이용하고자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그들 모두와 원한 관계를 지는 건 현명하지 못한 거라고 봐요. 그들을 죽이면 그야말로 고려 유자들 전체의 복수심을 떠안게 될 것이고, 왜국행을 방해하면 그들이 절 몹시 의심할 테니, 차후에 그들이 도당에 복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분란의 소지를 만들어서도 안 되겠죠.”
“제 개인적으로도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이색과 정몽주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거라고 봅니다. 사적에 남은 걸 보면, 그들이 고려의 여론과 민심에 영향력이 상당히 크거든요. 비단 유자뿐만 아니라, 백성들 전체를 대상으로도요.”
두신의 부연도 몽주의 의견을 지지하는 말이었다.
왕자의 공인이라는 명분이 확실함에도, 이인임과 신돈은 물론 금상도, 감히 왕자를 의심하는 상소를 올린 그들을 죽이지 않고 유배의 처분만을 취한 건 그만큼 이색 휘하 신진사대부들을 함부로 다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왕명도 아닌 일개 현백이 그들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려다가는 고려 전체가 제주현백을 외면할 것이고, 그렇게 비뚤어진 여론과 민심은 어떤 식으로라도 고려와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몽주의 안배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잠시 논의를 잇다가 몽주는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이것도 힘들고, 저것도 힘들고,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라면 결국 해결책은 이럴 수밖에 없겠네요.”
몽주가 그의 생각을 재상과 두신에게 밝히자, 재상과 두신은 의외로 이내 찬성하였다. 그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정 할 게 없을 때는 기본으로 돌아가야겠죠. 이 방법이 외교의 기본이자 클래식이고요.”
외교의 기본이자 클래식. 그건 비단 고려와 왜국 사이의 외교 문제만을 겨냥하여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고려와 제주 사이 또한 갑을 관계가 명확해서 그렇지, 결국 외교에 해당하는 것 아닌가.
잠시 더 논의를 한 세 사람은 왜국행의 주요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을 수정하였다.
“애매모호로 하죠.”
“네?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요?”
“이번 왜국행의 작전명을 애매모호로 붙이면 어울릴 것 같아서요. 작전명 애매모호.”
재상과 두신의 표정이 애매모호해졌다.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 *
고려에 돌아온 몽주는 그 첫날 하루 종일 행재청에 틀어박혀 있었다.
탁기와 화극이 들락거리기는 했으나, 다른 이는 만나지도 않았다. 정몽주가 만나기를 청하기도 했으나, 그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틀어박혀서 몽주가 한 일의 대부분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현대에서 완성된 통합 범선의 설계도를 옮기기 위함이었다.
화포 설치와 관련하여 몽주가 설계 변경을 요구하는 바람에 천몽에 들기 하루 전에야 완성된 설계였지만, 그 과정에서 몽주가 참여한 탓에 오히려 머릿속에 기억나는 건 많았고, 그 기억을 잊기 전에 서둘러 그림으로 남기고자 한 것이었다.
어차피 그날 하루는 탁기와 화극이 꾸며야 할 일이 많았고, 그 전에는 신진사대부들과 만나지 않는 게 낫기도 했기에 그 참에 틀어박혀 범선 설계도를 옮기는 일에 열중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시 한나절이 지난 신시(오후 3-5시)에 이르러서야 몽주는 탐라현 관아로 가서 신진사대부들을 데리고 나섰다.
대체 무슨 일로, 어디로 가느냐고 연신 묻는 것에 대충 둘러대고, 왜 왜국으로 서둘러 가지 않느냐고 힐난하는 것에도 사정이 있다 변명하면서 걸음을 옮긴 곳은 근처 해안가였다.
그곳에는 포목으로 감긴 덩어리들이 예닐곱 개가 있었다. 그제야 다들 제주현백을 닦달하던 걸 멈추고 저것들이 뭔가 싶어 궁금한 시선을 던졌다.
“사실 왜국행을 서두르지 못한 건 저것들 때문입니다.”
“남방백, 저게 뭔지 알려 주시는 것이 우선이지 않소?”
회복한 이색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하기에, 몽주는 사병들을 시켜 포목을 걷게 하였다.
“음? 저건 화포가 아니오?”
먼저 말한 것은 정몽주였다. 역시나 사신행차로 외국 문물에 대한 경험이 많은 그가 먼저 알아본 것이었다.
“맞습니다.”
“하면, 혹 남방백께서 화포를 주조하신 것이오?”
“그렇습니다. 다만 화포의 성능이 충분치 않아, 왜국행이 미뤄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
몽주의 대답에는 화포를 왜국행 선박에 실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안 신진사대부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방포 시험을 한번 보시지요.”
몽주가 화극에게 방포를 개시하라 명하니, 화극이 사병들을 지휘하여 방포 절차를 시작하였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포탄으로 철구가 아닌 돌덩이가 쓰였다는 점이었다.
바다를 향해 쏘는 참에 아까운 철을 낭비할 수는 없었고, 신진사대부들로 하여금 화포의 위력을 폄하케 하기 위함이었다.
“방포하라!”
화극이 명하자, 화포에서 폭음이 터졌다.
멀찌감치 구덩이 안에 들어가 있던 신진사대부들이 그 폭음에 놀라 다들 주저앉았다. 특히 어린 길재는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였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몽주가 묻자, 그제야 신진사대부들도 자신들이 몸가짐을 흐트러뜨리고 부끄러운 작태를 보였음을 알고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일어났다.
“저, 저런……!”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다가 방포한 화포 쪽으로 시선을 두던 신진사대부들이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을 보고는 경악하였다.
“저들이 어찌 다친 것이오?”
아닌 게 아니라, 화포 중 하나가 완전히 망가졌고, 그 주변에 사병들이 모여 두엇의 병졸들을 업어 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업힌 자들의 옷이 붉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몽주는 태연히 옅은 한숨과 함께 대답하였다.
“화포를 만들기는 하였으나, 아직 모자란 점이 많아 종종 저렇게 터져 버리곤 합니다. 하여, 열 번을 쏘면 그중 한 번은 저렇게 화포가 망가지니, 자연히 그 주변에 있던 자들이 다치곤 합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벽 뒤에 몸을 숨겨 적게 다친 듯한데, 장차 배에서 화포를 쓰고자 하면 어찌 될지 걱정입니다.”
다시 화포를 배에 싣는 이야기가 나오자, 신진사대부들이 안색을 달리하였다.
“저걸 배에 싣고자 함이오? 왜국으로 가는 배에?”
“그렇습니다. 아니라면 굳이 완성도 안 된 화포를 시험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왜국으로 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당연히 싸움이 일어날 것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왜구를 만날 수도 있고, 왜국의 오만한 관리가 해코지를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 하나, 그래도 저런 위험한 것을 …….”
정도전이 크게 경계하는 표정으로 반론하는 것을 몽주가 막았다.
“아군 하나가 다친다하더라도, 적군 열을 잡을 수 있다면, 다소 위험이 있다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너무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탈 배에는 특별히 검증하여 터질 가능성이 적은 화포를 실을 것이고, 만약 그 화포가 쓸 일이 있을 때는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길 것입니다.”
몽주는 담담히 말하니, 신진사대부들도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들도 왜국행에 위험이 상존함을 알고 있기에, 만약 화포가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주현백이 사사로이 화포를 제조한 것을 두고 탓하는 마음이 당장 일지 않는 것도, 놀란 마음이 남은 탓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왜국행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포은만이 혼란한 마음을 금세 정리하고는 예리하게 물었다.
“하면, 소문에 떠도는 남해 수전 우렛소리의 연유가 바로 저 화포들이었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때 쓴 것은 폭죽이었지요.”
“하면, 이번에도 폭죽을 쓰면 될 것 아니오?”
“폭죽을 써봤으니, 무리해서라도 화포를 쓰고자 하는 겁니다. 폭죽은 적이 가까울 때만 쓸 수 있으니, 폭죽을 쓸 때가 되면 이미 적이 아군을 범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폭죽이 적을 놀라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도 이내 기세를 회복하여 덤비니 아군이 많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몽주가 반론하니, 포은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여기에 몽주는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을 더하였다.
“게다가 화약도 부족합니다. 이미 제가 도당에 화약을 제조하는 것을 고하였으니 아시겠지만, 화약에 쓰일 염초를 구하는 건 몹시 힘드니, 제주에서 화약을 만드는 양은 몹시 적습니다. 화포에 쓰일 화약도 부족하여 만약 왜국행 중에 싸움이 연이어 발생한다면 화포도 폭죽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겠지요. 참으로 걱정이 많습니다.”
몽주가 수심에 젖은 표정으로 말하니, 신진사대부들도 그에 전염이라도 된 양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미 왜국행이 몹시 위험함을 알고 있었으나, 막상 그 준비를 하던 남방백의 입으로 확인을 받으니, 한결 더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분위기를 암울하게 몰아가고 있는데, 문득 이색이 몽주에게 말하였다.
“하나만 묻겠소. 화포 제조가 완성되면 도당에 고할 생각이었소?”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이미 화약과 폭죽의 비법을 도당에 알린 바, 화포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여러 분들께서 이미 보셨으니, 제가 도당에 알리지 않는다 한들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몽주의 말이 사리가 맞으니, 이색도 은근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둬야 했다.
“왜국행을 위해 궂은 일을 감당하는 남방백께 감사드리오.”
“저 또한 살고자 하는 일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잠시 후, 몽주는 신진사대부들을 이끌고 다시 관아로 향하였다.
뒤에서 신진사대부들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몽주는 속으로 안도하였다.
일단 그들의 뇌리에 화포의 성능을 애매모호하게 남기는 것에는 성공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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