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15)
* * *
조막만한 발로 자박자박 잘도 걷는다. 이제 두 돌이 지난 강영이가 홍로현 집무실에서 이리 걷고 저리 걷거나, 잠시 주저앉아서 이것저것 만지다가 물건을 넘어뜨리기를 반복하였다.
몽주는 그 모습이 어여뻐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강영이가 몽주를 보며 ‘빠빠’거리자 부리나케 달려갔다.
양팔을 들어 안아 달라고 하는 강영이를 얼른 들어 품에 안으니, 고사리 같은 손이 몽주의 얼굴을 더듬거리고 툭툭 치기도 했다.
물론,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비유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참을 강영이를 안고 어화둥둥하다가 앵도가 들어오자 그제야 그녀에게 강영이를 넘겨주었다.
앵도의 표정은 밝았다. 내일 출항에 그녀도 함께 가기로 결정한 덕이었다.
그녀는 그간 홍로현에 주로 머물며 석황촌 내의 일을 주무하였지만, 간간이 배에 타서 물살을 익히고 탁가 무인들과 더불어 훈련도 하였다.
제주 주변을 항해할 때는 앵도도 이제는 따라나서지 않았지만, 이번 항해가 아주 먼 곳까지 가는 것임을 알자 죽어도 따라가겠노라 떼를 썼고, 몽주도 그 고집을 꺾지 못했다.
연신 옹알거리는 강영이를, 마치 수십 년은 못 볼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으로 앵도에게 넘기고 나자 그제야 몽주는 집무실 한가운데 있는 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탁기가 곁을 지키고 있는, 아니 감시하고 있는 그의 자세는 몹시 이상했다.
머리를 바닥에 댄 체 몸을 들어 발과 머리로만 지탱하고 있었으니, 현대에서 ‘원산폭격’이라고 이름 붙은 그 자세였다.
“일어나라.”
몽주가 명하자, 그가 쓰러지듯 몸을 내리고는 부들거리는 몸을 애써 움직여 무릎 꿇고 앉았다.
얼굴에 땀이 가득한 건 물론, 입고 있는 옷 여기저기에도 땀으로 얼룩져 있었으니, 꽤 오랜 시간 머리를 박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자는 다도, 사 와카게였다.
“너는 이미 죽은 자다.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다도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허락없이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한 터라, 나름 고갯짓으로라도 자신의 의사를 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7일간 성주청 대문 앞에 걸려 있던 그는 기아와 갈증, 그리고 백성들의 해코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목숨을 부지하였다.
배고픔과 목마름이야 견딘다고 해도, 백성들이 오가며, 혹은 대놓고 치도곤을 내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살아남은 것이다.
물론, 그를 내려놓으러 갔을 때, 겉보기에는 피투성이 시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하여, 그냥 산에다 시신을 유기할 생각으로 가져가려다가 혹시나 싶어 숨을 확인했는데, 미약하나마 숨결이 있었고, 그것을 보고 받은 몽주가 살리라 명하여, 이 자리에 다도가 있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다도는 이미 죽어 객한 곳에 묻혔다고 알려졌다.
이후, 그를 몰래 홍로현으로 데려와 몸조리를 시켰다.
그를 살린 건 당연히 쓸모가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네 죄를 뉘우치느냐?”
끄덕끄덕.
“못 믿겠다.”
당황한 표정으로 양손을 애타게 허우적거려 자신의 진심을 알리는 다도의 모습에도 몽주는 냉정한 표정이었다.
“네놈이 가슴을 갈라 그 속을 보인다고 해도 못 믿는다. 그리고 믿지 못할 자는 굳이 살려 둘 필요가 없겠지.”
다도의 눈에 눈물이 콸콸 쏟아졌다. 자신이 기어이 죽나 싶은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목숨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자였다.
하긴, 누가 그렇지 않을까.
“하나, 운좋게도 네놈은 쓸모가 있다. 그래서 살려 둘 것이다. 대신, 앞으로 네놈은 이것을 쓰고 있어야 한다.”
몽주가 상 위에 대충 놓여 있던 천뭉치를 다도 앞에 던지자, 살려 둔다는 말에 머리를 연신 조아리고 있던 다도가 얼른 집어 들었다.
그건 복면이었다. 하얀 천으로 만들어졌고 눈과 입의 구멍 사이에 붉은색으로 ‘死’자가 새겨져 있었다.
“삼 년간 너는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마라. 만약 그 복면을 쓰지 않고 누구에게라도 얼굴을 보인다면 참할 것이다. 또, 내 허락이 없이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삼 년간 이것을 지킨다면 나는 그때는 네놈이 죄를 뉘우쳤음을 믿을 것이다. 내 말을 따른다면 그 복면을 써라.”
“…….”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던 다도도 잠시 머뭇거렸다.
말이 삼 년이지, 죽을 사 자가 새긴 복면을 쓰고 다니는 건 문자 그대로 죽을 맛일 것이 분명했다.
하나, 다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직 땀기가 가득한 머리 위로 복면을 뒤집어썼다.
그러자 곁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탁기가 다가가 그 복면의 아래 달린 끈을 잡아당겨 조인 후 묶었다.
천주머니를 뒤집어쓰고 목에 묶은 모양이 우스꽝스러웠지만, 누구도 웃지는 않았다.
“나는 너를 이제 사복(死僕)이라 부르겠다. 죽은 노비라는 의미지. 알겠느냐? 대답해도 좋다.”
“네…….”
“하면, 이제 네게 첫 명을 내리겠다. 주방국의 대내씨에 대해 아는 대로 털어놓아라.”
“……?”
“어서!”
“네!”
몽주의 재촉에 다도…… 아니, 사복이 대내씨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몇 가지 확인해야 할 건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사복은 물론이고 탁기도 왜 몽주가 난데없이 주방국의 대내씨에 대해 묻는 건지 의아스러웠다. 탁기의 경우에는 그보다는 주방국(周防國)이 어디고, 대내씨(大内氏)가 누구냐는 의문이 먼저였다.
* * *
양력으로는 이미 1374년이었으니, 몽주가 이번 천몽을 시작한 지 어느새 만 5년이 흘렀다.
몽주의 선단이 제주를 떠난 건 그 즈음이었다.
5척의 대선과 25척의 소선으로 이루어졌고, 나머지 소선들은 제주에 남았다.
선원들의 총 수는 900여 명으로, 제주에 남은 자들은 채 2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사이 증원하여 그 정도라도 남은 것이었다.
총 1,300명도 안 되는 사병들의 수였지만, 제주를 기반으로 한 몽주로서는 최대한 짜낸 수였다. 공식적으로 소유한 식읍이 700호에 불과한 현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병들을 그만큼이나 모으고 유지하는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만약 몽주가 여러 기물로 상업적인 이익을 취하지 못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선단의 속도는 예전보다 약간은 더 빨라졌다. 그래 봐야 순풍일 때, 식경속 1길미(시속 2킬로미터) 정도 빨라졌을까 싶은 수준이었지만.
이는 대선 돛의 활대를 강철봉으로 대신하고 그 길이를 키워 돛 전체의 크기를 늘린 덕이었다.
덕분에 본디 소선보다 다소 느렸던 대선의 속도를 소선에 맞출 수 있었으니, 자연히 선단 전체의 속도가 그만큼 빨라진 것이다.
다만, 배에 비해 돛의 크기가 커진 탓에 만약 측면에서 강풍이 급하게 분다면 대선이 전복될 위험도 있었다.
하나, 어차피 그 정도 강풍이 분다면 비단 돛이 문제가 아니라 선단의 궤멸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으니, 그저 그런 다루지 못할 거센 바람이 불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대선에는 세 개의 선실이 있었는데, 세 선실에서 묵을 수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갑판 구석에 천을 걸치고 그 아래서 자야 할 정도로 열악했다.
소선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몽주가 타는 기함의 경우에는 몽주와 앵도가 하나의 선실을 쓰고, 신진사대부들이 두 선실을 쓰는 바람에 선장마저도 선원들과 잠을 자야 할 처지였다.
작은 선실을 하나 더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곳은 조리실로 바꾸었다.
조리실 안은 사방을 세망(洗茫 : 시멘트)칠을 하여 불이 나지 않게 하고, 작은 화덕을 만들어 조리가 가능하게 하였다.
식사는 주먹밥과 절인 생선 조각, 그리고 장아찌로 하루에 두 끼가 나오게 되어 있었고, 물의 배급량도 개인당 매끼마다 반 리타(리터)만 주었다.
아무래도 배가 크지 않으니 식료품의 양과 종류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몽주는 선실에서 홀로 남아 서찰을 읽고 있었다. 그것은 신돈이 보낸 것으로, 이미 여러 번 읽은 것이나, 다시 읽을 수밖에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목은 이색을 통신사로 왜국에 두라. 만약 유자들 중 함께 남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들도 남겨라.”
서찰의 내용 중 한 구절을 중얼거린 몽주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색이 그리 쉽게 남고자 하겠는가? 결국 신돈의 명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색을 버리다시피 해야 할 것이고, 자연히 이색은 물론 그 제자들 대부분과도 악연이 생길 것이다.
몽주의 한숨에 섞인 고민 중 8할은 신돈이 왜 그들을 왜국에 버리려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색이 왜국에 남게 된다면, 자연 신진사대부들 대부분도 남게 될 것이다. 스승을 홀로 왜국에 두고 떠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중 염흥방과 하륜은 다른 결정을 할 수도 있고, 아마 그리하겠지만 말이다.
단지 자기들이 권세를 부리는 것에 대서는 자들을 쫓아내기 위함일까? 그저 낙향시키고 유배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다 여긴 것일까?
몽주는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긴 했다.
낙향이든 유배든 고려 땅에 남아 있으면 여론과 민심에 영향을 줄 만한 인물들이 신진사대부들 중에 많았고, 그들 중 주역이 지금 몽주의 선단에 있으니, 그들을 왜국으로 보내고 쉽게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큰일을 벌일 속셈이 있음을 의미했다.
그런 큰일에 앞서 신진사대부들이 여론과 민심의 향방에 작은 영향조차 주지 못하게 만들 속셈일 것이다.
자연히 그럴 정도로 큰일이 무엇인지에 고민이 닿았고, 이내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제주에서 왜국으로 가는 도중에 고려에 닿지 말라. 상황이 여의치 않아 뭍에 닿더라도 유자들을 상륙시키지 말라.”
다른 구절도 읊조렸으니, 그건 신돈이 유자들이 왜국으로 가는 걸 고려에 알리지 않으려는 속셈임이 틀림없었다.
이미 이색 일파가 왜국에 사신으로 가는 것이야 알려졌겠지만, 그 오가는 것을 모르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 의도는 다른 문장에서도 살필 수 있었다.
“……만약 제주로 돌아오는 유자가 있다면, 입동 이후에 상경하게 하라.”
올해 안에 무슨 일을 벌일 것이고, 그 일과 신진사대부들을 떨어뜨릴 속셈이라고 대놓고 밝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시나 금상이겠지.”
1374년. 역사에서 공민왕의 시해가 일어난 해였다.
단지 같은 해라고 해서 역사의 흐름대로 금상이 죽는다고 예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몽주가 파악하는 고려 정국의 흐름은 금상의 죽음, 혹은 퇴위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왕우 왕자의 문제를 걸고넘어져, 후계에 대해 반발할 자들을 정리했으니, 이제 금상만 무너진다면 이후에는 왕우를 왕으로 앉히고 그 뒤를 조종할 신돈과 이인임의 세상이 될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된 공민왕에게는 미련이 없었다. 신돈과 이인임이 나란히 쌍두의 권좌를 차지한다고 해도 몽주로서는 나쁘지 않았고, 이미 그런 세상을 염두에 두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몽주가 신돈의 서찰을 받고 마음속에 은근히 생긴 반발심은 결국 그와 함께 왜국으로 가고 있는 이색 일파에 대한 처분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왜국에 이색과 그의 제자들 대부분을 둔다면,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몽주가 왜국과 교류하며 그들을 진정 통신사로 쓰지 않는다면,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 소외되어 역사와 시간에 파묻힌 채 사라질 것이다.
그건 결코 몽주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들이 사그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들이 왜국에 남아 장차 왜국과 교류할 몽주의 움직임을 그들이 알게 될 가능성을 두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사실 몽주의 세상에 유학과 유자는 필요 없다.
현대에서 고려 말, 당대의 유학이 사회참여적이고 실천적이라는 평도 찾아볼 수 있었으나, 그건 당대의 기준에서 그러하다는 것일 뿐, 몽주가 그리는 세상에서는 족쇄가 될 가능성이 오히려 높았다.
사실 사회참여적이고 실천적이라는 평가도 꿈보다 해몽에 가까웠으니, 그들이 관직에 나아가고 권력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을 꾸며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어떤 사회에 참여하고 어떤 이상을 실천하느냐는 문제를 뒷전에 둔 ‘꽃단장’식 해석에 불과한 것이었다.
유자들이 바라는 사회와 꿈꾸는 이상.
그것이 몽주가 그리는 세상과 접점이 있을 수 있을까?
설령 있다하더라도, 당장은 아닐 것이며, 후에도 힘의 우위를 보인 후에야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몽주는 유자들과 악연을 쌓지는 않되, 가까이 둘 생각도 없었다.
“고려로 보내지도 못하고, 왜국에 둘 수도 없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였다. 아마 그라면 신진사대부들을 환영할 것이고, 나름 잘 써먹을 것이다.
고민을 일단락한 몽주는 신돈의 서찰을 접어 품에 넣고, 문밖을 지키고 있던 앵도를 불러 신진사대부들을 청하게 하였다.
답호 차림의 앵도는 아내이기보다는 호위무사처럼 대꾸하고는 이내 신진사대부들을 선실로 들여보냈다.
좁은 선실에 여남은 사내들이 모이니, 다 앉을 수도 없어, 몽주와 이색만 마주 앉고 다른 이들은 이색 주변에 그냥 서 있어야 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이미 아시듯 우리는 삼산도로 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후에는 알려 드린 것과 달리 항로를 수정하고자 합니다.”
삼산도로 향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유자들이 이어 항로를 수정한다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색이 대표하여 물었다.
“하면, 동래현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오?”
“고려에는 닿지 않을 것입니다. 곧장 왜국으로 갈 것입니다.”
“……!”
“지금처럼 맑고 순풍이 계속 있다면 나흘 정도 걸릴 것입니다. 어차피 동래현에 가는 것도 비슷한 거리이니 크게 당황하실 건 없습니다.”
비슷한 거리긴 했다. 거문도를 기준으로 동래현, 즉 현대의 부산까지 210킬로미터 정도고, 쓰시마까지는 180킬로미터 정도니, 오히려 왜국이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몽주가 목표한 곳은 쓰시마나 이키가 아니었으니, 실제로는 300킬로미터 이상을 항해해야 했다.
선단의 최고 속도는 시속 9킬로미터 안팎이니, 그래도 3, 40시간을 달려야 하고, 실제로 계속 최고 속도를 낼 수도 없고, 정확하게 직선 항해를 할 수 있을 리도 없으니 아마도 그 두 배의 시간은 족히 필요할 것이다.
물론, 폭풍을 만난다면 시간 예상 따위는 쓸데없는 추측일 것이다.
몽주가 비슷한 거리라고 말했으나, 유자들은 여전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남방백, 내 뱃일은 잘 모르나, 단지 거리가 문제가 아니지 않소? 동래현에 들르고자 함은 연안을 따라 뱃길을 잡고자 함이니, 만약 왜국으로 곧장 간다면 망망한 대해를 가로질러야 할 것이오. 그것은 마땅히 피해야 할 일이 아니겠소?”
정몽주가 끼어들어 말하니, 이색은 물론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틀림없는 말씀이십니다. 하나, 저는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목은 영감께서도 이미 시일이 많이 늦었다고 저를 재촉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동래현을 거쳐서 돌아간다면 곧장 가는 것보다 며칠은 더 걸릴 것입니다.”
연안을 따라 항해한다면 비단 동래현뿐만 아니라, 틈틈이 기항하여 쉬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유자들이 직항로에 반대하는 이유 중에는 수시로 뭍에 올라 쉬고자하는 바람이 있었다.
몽주는 굳이 토론할 이유가 없기에 곧장 결론을 지었다.
“만약 원치 않으시는 분이 계신다면, 삼산도에서 소선으로 갈아타십시오. 제가 한 척의 소선을 제주로 돌려보낼 것이니, 제주에서 제가 귀환하는 것을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렇게 통보하자, 유자들이 움찔하며 저마다 시선을 나누었다. 속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자들이 얼핏 짐작이 되었지만, 다들 스승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색은 잠시 몽주를 보다가 옅은 한숨과 더불어 말하였다.
“남방백께서 자신하신다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오. 부디 왕명을 받드는 사신단의 수장으로서 불안한 일은 없길 바라겠소.”
“물론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불만 어린 표정으로 유자들이 선실을 나가자, 몽주는 선장과 항해사를 불렀다.
그들이 가져온 해도를 펼쳐, 몽주가 몸소 얇은 붓을 들고는 선장과 항해사에게 말하였다.
“삼산도에서 정동으로 직항한다. 그리하면 대마도와 일기도 사이로 가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면 이곳에 닿을 것이고.”
몽주가 왜국의 한 곳에 점을 찍었다.
그리 정밀하지 못한 고려보다 더 부정확한 왜국의 지도였지만, 대략 위치는 비슷하게 그려 둔 덕에 삼산도의 정동에 목적지를 둘 수 있었다.
그곳은 현대의 야마구치 현으로, 당대에는 장문국(長門國), 즉 나가토 국(구니)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땅에 규슈와 혼주 사이의 좁은 해협, 간몬 해협(関門海峡)이 있었다.
* * *
쓰시마 근방에 이르기까지 4일이나 걸렸다.
폭풍을 만난 건 아니었으나, 파도가 거친 날이 이틀이나 있어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배에 약간은 적응했다 싶던 유자들은 요동치는 배에서 결국 파김치 상태로 변했다.
그래서 대마도에 이르렀다는 말에 다들 이제야 땅을 밟고 쉬겠거니 하며 좋아라 하였지만, 몽주가 대마도에 들르지 않겠다고 하자 다들 기함하며 그를 원망하였다.
대마도에 들르지 않는 건 단지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고려에서 왜구질을 한다고 해도 막상 고려에서 사신이 올 때면 대마도 도주는 마치 신실한 고려의 신하인 양 박쥐처럼 행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대마도에 기항하는 것 자체는 안전에 문제가 아니나, 대마도에 들르면 그때부터 사신단의 행차는 왜국의 처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대마도에 사신단을 머물게 한 후, 아마 규슈의 슈고다이묘에게 사신단의 방문을 알리고, 그의 결정에 따라 막부에 연락하여 다시 사신단의 영접 절차를 받아서 시행할 것이니, 그 시일이 급격히 늘 수밖에 없었다. 또, 남북조로 나뉘어 있는 현재 왜국의 정국을 생각하면, 그리고 왜구라는 규슈 지역에서는 민감한 문제를 다루기 위한 사신단임을 생각하면 아예 규슈의 슈고다이묘가 이번 사신행에 훼방을 놓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역사에서 정몽주가 왜국에 다녀오는 데 무려 8개월이나 걸렸다. 딱히 오가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음에도 그렇게나 시간이 늘어진 것이었다.
몽주는 그런 번거로움을 감당할 여유도 없었고, 이유도 없었다.
남조와 규슈를 대상으로 하는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막부와 직접 통해야 한다.
하여 대마도와 일기도 사이를 가로질러 장문국으로 직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장문국은 일본 혼슈(本州)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율령국(律令國 : 행정 단위)으로 왜국의 북조, 당대 막부의 영역이었다.
하여, 쓰시마를 빗겨 선단을 나아가게 하는데, 쓰시마를 정좌에 둘 즈음에 그곳에서 일단의 배들이 몰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쓰시마 측에서 몽주의 선단을 보고, 정체를 살피고자 한 것인 모양이었다. 아니, 몰려나오는 배들의 수를 보자면 단지 검문만이 목적은 아닌 듯했다.
하기야 몽주의 선단이 출몰한 방향이나, 배의 생김새를 보면 어디에서 온 배인지 파악했을 것이다.
몽주는 선단에 전투 준비를 명하였다.
이색 일파들이 놀라 당황하는 걸 수졸들을 시켜 감금하듯이 선실에 들어가게 하고는 곧장 화포를 준비시켰다.
다만, 몽주의 기함은 물러나 있고, 다른 대선들과 특별히 화포 무장이 좋은 소선들을 내세웠고, 1길미의 거리 안에 왜선이 들어오자마자 방포하게 하였다.
쾅쾅―!
폭음이 쩌렁쩌렁 울린 후, 몰려드는 왜선 근처 바다에 포탄이 떨어져 물기둥이 마구 솟아올랐다.
“엥? 저놈들이 뱃머리를 돌리는데?”
기함은 방포하지 않은 탓에, 여유롭게 다른 배에서 화포를 쏘는 것을 보던 화극이 이상하다며 몽주에게 말하였다.
실제로 왜선들은 폭음을 듣자마자 뱃머리를 돌렸고, 꽁지 빠지게 도로 쓰시마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소문이 난 모양이죠.”
“음, 그런 모양이구먼.”
지난 남해 수전에서 도망친 왜선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자기들이 당한 것을 설명하고, 포장하기 위해서라도 몽주의 화포가 가진 위력을 자세히, 아마도 몇 배는 과장해서 말했을 것이다.
그것을 믿든 안 믿든, 지금에 이르러 화포가 1길미의 거리를 날아오는 걸 봤으니, 왜선들이 두려운 마음을 갖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에잉, 간만에 손맛을 보나 했더니…….”
화극은 화포를 자랑 못한 것이 아쉬운 모양이었고, 몽주가 허락만 한다면 쫓아가 더 쏘고 싶은 표정이었다.
“화약 재고량을 생각하시죠.”
“끄응.”
그렇게 두 식경에 걸쳐 쓰시마를 스쳐 지나가자 이내 일기도를 우측에 두었다.
일기도에서도 일단의 배들이 나왔다. 다만 그 수가 많지 않아, 약탈이나 전투보다는 검문에 목적을 둔 것처럼 보이긴 했다.
하나, 이번에도 몽주의 선택은 화포를 이용한 무력시위였고, 일기도의 왜선들도 폭음과 물기둥을 확인하자마자 부리나케 도주하였다.
굳이 검문을 받아 규슈의 슈고다이묘나 토호들에게 고려의 사신이 왜국에 행차하고 있음을 알릴 이유는 없기 때문이었다.
해류의 요동이 심한 쓰시마 해협(대한 해협 동수로)을 지나자 그 뒤로 만 하루에 걸쳐 장문국에 닿을 때까지 모든 것이 평온했다.
혹여 현대의 규슈 후쿠오카 현에 해당하는 축전국(지쿠젠국 : 筑前國)에서 또 왜선들이 출몰할까 경계했으나, 어선조차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무사히 장범국의 서안에 이르자, 그곳에서 왜선이 등장하였다.
이번에는 화포를 쏘지 않았고, 왜선도 단 한 척에 불과했다.
왜선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본 몽주는 갑판장에게 명하였다.
“사복과 다른 두 통역을 데려오라.”
그러자 갑판장이 기함의 뒤를 따르는 소선에 신호하여 그곳에 타고 있던 사복과 두 통역을 옮기게 하였다.
사복은 물론 ‘死’자가 새긴 복면을 쓴 다도였고, 다른 두 통역도 왜구였던 고려인들로, 다른 고려인 왜구들보다 왜어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사복이 왜어에 가장 능숙하나, 그의 통역만을 믿을 수는 없기에 다른 두 통역을 통해 사복이 제대로 통역하는지를 감시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 직후에 왜선도 다가와 뱃전에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자신이 대내씨의 무문(武門)에 속한 국압령사(国押領使)라고 소개했습니다. 배에 오르겠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복의 통역을 들은 몽주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였다.
왜선이 작고 낮아 기울어지게 판을 대 주니, 국압령사라는 자가 불안하게 비틀거리며 간신히 기함에 올라왔다.
국압령사의 첫 인상은 일단 ‘작다’였다.
왜국이라고 꼭 왜소한 자들만 있는 건 아닐 터인데, 작다는 편견이라도 심어 줄 셈인 양, 당대 고려인에 비해도 확실히 작았다.
그런 체구에 정작 허리에는 제법 긴 칼을 차고 있어 여차하면 바닥에 검집 끝이 끌릴 것만 같았다.
갑판 위에 오른 국압령사는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두리번거리며 배 위를 살피더니, 화포를 보고는 움찔 놀라는 표정이었다.
규슈만이 아니라, 혼슈 주코구(中國) 지방의 장범국에도 화포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쓸데없이 두리번대지 말고, 용무나 말하라고 전하라.”
사복이 통역하니, 국압령사라는 자가 헛기침을 하고는 무어라 한참을 말하였다.
“이곳이 대내씨의 영토라는 걸 한참이나 자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무슨 일로 온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몽주는 실소를 지으며 국압령사를 직시하였다.
몇 걸음 떨어져 있었지만, 키가 30세미 가까이 차이 나는 덕에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몽주는 입을 열었다.
“나는 고려의 제주현백 석몽린이다. 이곳에 임성태자(琳聖太子)의 후손인 오우치씨(대내씨)가 크게 번창하고 있다고 들었다. 백제 왕실의 후손과 만나는 영광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 말에 어느새 갑판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 특히 이색 일파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이 몰락한 백제 왕실을 언급한 것이 기이했던 것이다. 어차피 전조 신라에 700년 전에 망한 나라의 왕실이라 언급한다고 해서 불충한 일은 아니나, 어찌 왜국에 그들의 후손이 번창하고 있다고 장담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 통역을 전해 들은 국압령사의 표정은 달랐다. 그는 크게 반색하더니 뻣뻣하던 허리를 굽실거렸다.
“말씀을 전해 올리겠다면서, 천천히 따라오시라고 합니다.”
몽주가 전해 듣고 고개를 끄덕이자, 국압령사는 서둘러 배를 옮겨 가곤 급하게 뭍으로 향하였다.
몽주의 선단도 천천히 왜선의 뒤를 따라갔다.
“남방백, 진정 이곳의 주인이 백제 왕실의 후손이오?”
정도전이 급한 말투로 묻자, 다들 몽주의 대답을 주시하였다. 하나, 몽주는 미소만 띨 뿐이었다.
사실 몽주도 그 답을 알지 못했다. 중요한 건 일본 주코쿠 지역의 율령국들 중 장범국과 주방국, 즉 나가토국과 스오국을 지배하는 당대의 오우치씨가 스스로 과거 백제 왕실의 임성태자를 조상으로 모시고 있으며, 그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사실인지 혹은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몽주는 그것을 충분히 이용해 볼 속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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