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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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태자에 대한 오우치씨의 마음은 진심일 겁니다. 일본의 지배자급 가문들은 주요성씨를 참칭하기를 일삼는데, 보통 지배권을 정당화시키고 가문의 격을 올리려는 목적이죠. 그런 면에서 오우치씨가 처음 참칭한 것이 타타라(多々良)라는 도래인 계열의 마이너급 성씨라는 건 꽤 이례적인 일입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백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성씨야 겐지, 헤이케, 후지와라 같은 당대 메이저급 성씨를 따르고 대외적으로만 백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실제로 후에 오우치씨의 분계는 대내적으로 후지와라를 참칭했고요.’
‘오우치씨가 대내외적으로 백제왕실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것에는 분명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15세기에 이르러 오우치씨가 전성기이던 시절에 조선과 독자적인 교역을 실행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오우치씨와의 통교 기록만 이백 회가 넘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백제 왕실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교역 특권을 요구하기도 했고, 게다가 조선에 과거 백제 왕실의 땅을 영지로 달라고까지 했었죠. 그러니 백제 왕실의 후손이라는 오우치씨의 주장에 있어 경제적인 실리가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선 것이 두신의 의견이었고, 뒤의 것이 재상의 의견이었다.
둘 다 맞는 이야기였고, 두 의견이 상충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두신은 자신들이 백제 왕실의 후손이라는 오우치씨의 주장이 진심일 가능성을 강조한 것이고, 재상은 그것이 진짜든 아니든, 오우치씨가 대외적으로 그런 주장을 한 건 경제적인 노림수가 있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현대에서 얻은 오우치씨에 대한 정보를 상기하는 몽주는 주방국(스오국)의 어느 장원에 머물고 있었다.
엿새 전에 장범국(나가토국)에 도착하였고, 다음 날 장범국의 총령(總領 : 무사 수장)과 더불어 간몬해협을 통과하였으며, 주방국에 도착하여 이 장원에 머물게 된 것이 나흘 전이었다.
오우치씨의 대접은 쭉 융숭했다.
처음 장범국에 닿았을 때 그곳의 국인(國人 : 고쿠진)의 대접부터 극진했지만, 주방국에 이르자 슈고다이묘(守護大名)의 대리인 격인 슈고다이(守護代)가 몸소 마중하여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는 장원을 내주고 호화로운 연회도 열어 주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미녀들까지 내주겠노라 하였는데, 회가 동한 이들도 앵도의 눈치가 보여 다들 거절하였다.
물론, 몽주는 전혀 회가 동하지도 않았다.
이 시대 왜국의 미녀들이란……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검게 물들인 이빨, 흑치(黑齒) 풍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보통 에도 시대(1603~1868)의 화장법으로 알려진 흑치는 이미 헤이안 시대(794~1185)에 등장하였고, 무로마치 시대(1336~1573)인 지금도 당연히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미녀 아닌 미녀 따위야 상관없는 일이었으므로, 몽주는 그보다는 장원의 규모와 화려함에 감탄하였고, 동시에 탄식하였다.
왜국에 닿은 후 목격한 왜국의 일반 백성들의 생활 수준은, 제주는 물론 고려보다 더 엉망이었는데, 그런 중에 정작 지배층의 생활 터전은 고려보다 더 크고 화려했으니, 절로 극심하게 수탈당했을 왜국 백성들에게 동정이 갔던 것이다.
심지어 아주 잠시 그들이 왜구가 되어 약탈에 나선 것조차도 이해가 갈 법했다.
물론, 왜구가 되는 순간 죽일 놈이 되는 건 달라질 것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 장원은 본디 가마쿠라 시대(1185~1336) 장범국의 지방 무사가 살던 곳인데, 무사의 시대가 열렸을 때 그들의 위세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무로마치 시대인 지금도 무사의 시대이고, 19세기 막부 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역사는 무사들이 계속 주도했다지만, 가마쿠라 시대와 무로마치 시대가 다른 것은 씨족 단위 각개로 흩어진 무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파견된 슈고들이 군사적인 지위권을 이용하여 아예 담당 지역을 영지화하면서 무사들을 지휘하는 것을 넘어 다스리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었다.
그건 일족끼리 모인 무사 집단 여럿을 합한 위력의 지방 권력이 생겼다는 의미니, 지금의 슈고다이묘라는 지위가 바로 그 권력의 명칭이었다.
그리고 이 슈고다이묘는 무로마치 시대 중반기 이후의 혼란을 틈타 자기들끼리 반목하고 싸우며 더 큰 세력으로 확대되었으니, 그것이 훗날 센고쿠 다이묘, 즉 전국(戰國) 다이묘로 성장하게 된다.
그 전국 다이묘들이 군웅할거한 시대가 바로 일본의 전국 시대(戰國時代)였다.
지금 주방국과 장범국을 다스리는 오우치씨 또한 전국 다이묘로 성장하여 예닐곱 개의 율령국을 다스린다. 큐슈 북부와 주고쿠 서부 일대에 킨기 지방(近畿地方)과 간토 지방(關東地方)에도 영지를 가질 정도였으니, 서국(西國) 최고의 전국 다이묘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하나, 후에 원정의 실패로 인한 내분을 이기지 못하여 몰락하기 시작하고, 휘하 호족에 불과했던 모리씨에 의해 멸망당한다.
“오우치씨를 키워 봐? 아주 전국 시대를 쭈욱 늘려 봐? 후후.”
몽주는 장원의 정원 내에 있는 작은 연못가에서 문득 입 안으로 중얼거리다가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재밌는 상상이었지만 망상이었다.
아직 무로마치 시대 초기인 남북조 시대였고, 무로마치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인 무로마치 도노(室町殿 : 쇼군 이시카가씨의 저택)도 세워지지 않은 시점이었다.
몽주가 서는 곳의 역사는 변하였으니, 이제 일본의 역사도 변할 것이라는 건 예견할 수 있지만, 그 변화의 폭과 방향까지 내다볼 수는 없었다.
그저 한 걸음 앞을 미리 파악하여 대비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 여기에 계셨소?”
탁기와 앵도만을 데리고 산책 중인 자신을 보고 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포은이었다.
“절 찾으셨습니까?”
“좀 전에 수호대(슈고다이)가 와서, 수호대명(슈고다이묘)이 만남을 청한다고 전하였소. 드디어 수호대명이 돌아온 모양이오.”
“아, 그렇습니까. 마침내 생각을 정리…… 아니, 돌아왔군요.”
“서둘러 갑시다. 안 그래도 많이 지체하지 않았소.”
“그러시죠.”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몽주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내심 오우치씨의 당대 가독(家督 : 가주)인 오우치 히로요(大内弘世)가 어떤 자세로 나올지 예상해 보았다.
사실 주방국에 왔을 때, 가독이 급한 일로 풍전국(豊前國)에 갔다며, 대신 슈고다이를 통해 서찰만을 전해 받았다.
그 서찰에는 환영한다는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몽주는 오우치씨가 단지 고려의 사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화기애애한 만남을 단정하지 않을 작정이라는 걸 짐작했다.
아니었다면, 바쁜 일이 뭔지는 몰라도 굳이 극진히 맞이한 고려의 사신단을 외면하고 떠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정말 오우치 히로요가 풍전국으로 떠났든 아니면 그냥 말만 그렇게 둘러대었든, 자신들이 백제 왕실의 후손인 것과 상관없이 공무는 공무라는 자세로 나올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오우치씨와 몽주 사이에 사적인 약속을 입에 꺼내지도 못할 건 또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초반에는 좀 강경하게 나오겠지.’
초면에 더욱 존중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관계의 기본이라면, 외교관계에서는 초면에 더 냉정한 것이 기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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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씨의 저택은 몽주가 있던 장원과는 느낌이 달랐다.
장원의 저택은 전형적인 무가풍이었다면, 오우치씨의 저택은 서원풍이었던 것이다.
서원풍이라 함은 결국 현대에서 전형적인 일본 고옥(古屋)을 연상할 때 떠오르는 바로 그런 분위기를 의미했다.
그러니까 일본 전통 가옥의 전형이 완성된 것이 바로 이 시기인 셈이었다.
바닥에 다다미를 깔고 천장에 반자(평평한 천장)를 하며, 통풍과 채광용 교창(交窓)이 있었다. 또 장지와 칸막이로 방을 구분하고 있었으니, ‘일본 옛날 집’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런 모습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몽주는 웅장한 규모에 비해 내부의 분위기는 소박한 느낌이 드는 그 아이러니한 감상을 즐기며 저택의 안으로 들어갔다.
사신단이 안내 받은 곳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서원이었고, 그중에서도 서재에 닿았다.
그 서재가 동시에 슈고다이묘의 대전(大殿)인 셈이었다.
입구 안에 다시 작은 방(?)이 있어 잠시 대기하였고,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다시 앞에 닫힌 문이 열려 서재 안을 볼 수 있었다.
서재라고해서 책이 가득한 방은 아니었다. 아니, 책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길고 큰 방 안에 사람들이 가득했으니, 입구 좌우로 열을 지어 앉은 오우치씨의 가신들이 방석을 깔고 있었고, 그 끝 가운데에 오우치씨의 가독이 낮은 단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있었다.
몽주와 사신단은 가신들의 열 사이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당당히 걸음하였다.
가독의 앞 쪽에 이미 방석을 수대로 깔아 둬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곤란해할 필요도 없었다.
몽주는 방석에 앉기 전에 가볍게 읍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고려 제주현백 남방백 석몽린이외다. 우리 상께서 왜구 문제를 비롯하여 왜국과의 교린 관계를 논하라 명하시여 왜국 막부의 무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오. 대내가가 백제 왕실의 후손이라 하니, 많은 협조를 부탁드리오.”
막부의 무왕은 막부 쇼군(將軍)을 의미했다. 그냥 왜왕이라기에는 왕이 따로 있으니 무왕(武王)이라 돌려 말한 것이었다.
몽주가 대표하여 말하니, 뜻밖에도 사복이 통역하기 전에 가독 근처에 무릎 꿇고 있던 자가 있어, 그가 가독에게 몽주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고려말을 아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을 전하니, 문득 서재 안이 시끄러워졌다. 가신들이 저마다 호통을 치니, 통역하지 않더라도 대충 말투와 태도가 무례하다고 난리를 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째 일본 야쿠자 간에 오야붕들이 나서기 전 똘마니들이 공포 분위기를 잡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긴, 동서양을 막론하여 영지영주제란 결국 조직 폭력의 시스템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나와바리’의 오야붕이 있고, 그 오야붕을 받드는 중간 보스들이 있어 이익을 대가로 충성을 받는 시스템.
어쨌거나 소란한 가운데에도 몽주는 꼿꼿이 서서 가독을 직시하였다. 가독 또한 가신들과는 달리 담담한 표정으로 몽주를 마주 보았고, 잠시 후 그가 손을 들어 가신들을 조용히 시킨 뒤, 말문을 열었다.
“백제 왕실의 후손으로서 고려의 사신을 환영하는 바이오. 나는 오우치타타라 히로요이오.”
손을 뻗어 앉으라고 권한 것에 몽주는 방석을 깔고 앉았다. 앉으면서 속으로 실소하였는데, 그건 가독이 자신의 성을 오우치타타라(大內多多郞)라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오우치의 첫 참칭인 타타라를 굳이 오우치에 붙인 것이 마치 백제 왕실의 권위를 빌리려는 것 같았던 것이다.
사신단이 자리하자, 가독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여기는 내 장남 요시히로요. 지금은 풍전국(豊前國)의 슈고(守護)로 있소.”
몽주는 요시히로를 소개하는 말에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
차기 가독이 될 자로, 오우치씨의 전성기를 연 자이자, 하마터면 무너뜨릴 뻔한 자였다.
몽주의 눈에 비친 요시히로는 장군감이었다. 왜국에서는 물론이고 고려에서도 그 기골의 장대함이 눈에 띨 것이 분명했다.
후에 요시히로는 아버지 히로요와 반목하는데, 히로요는 북조에 속하되 남조와도 교린하려 하였고, 반대로 요시히로는 북조의 선봉을 자처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요시히로는 규슈 북부를 치는 것을 도우라는 막부의 명을 거부한 아버지와 달리, 풍전국의 슈고로서 단독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고, 그 덕에 아버지를 밀어내고 오우치의 가독이 되었다.
그 뒤, 아버지의 명을 받은 동생 미쓰히로와 가독투쟁을 벌였는데, 결과는 요시히로의 승리였고, 미쓰히로는 막부의 중재로 석견국(石見國 : 이와미국)의 슈고로 살아남게 된다.
동생과의 가독투쟁이라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와의 가독투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막부의 힘을 빌려 아버지를 밀어내고, 스스로 가독을 쟁취한 자가 바로 요시히로인 셈이었다.
몽주가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오우치 요시히로가 본격적으로 오우치씨가 백제 왕실의 후손임을 주장하고 대내외적으로 알린 자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오우치씨가 임성태자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14세기 중에 이미 등장하나, 고려에는 알려지지 않다가 조선조에 이르러서야 요시히로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당연히 그런 주장은 오우치씨와 조선 간의 통교로 이어졌고, 이후 오우치씨가 더욱 번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서재에 요시히로가 있음을 알게 된 이후, 몽주는 가독과의 대화 중에 은근히 그의 표정을 살폈고, 때때로 시선을 마주하기도 하였다.
몽주와 가독 간의 대화는 사신단의 유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는데, 특히 포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포은께서 시를 지어 남기셨으니, 오늘에 이르러 마침내 오우치씨가 명문 가문의 기반을 세운 것임을 새삼 깨달았소. 채 오기도 전에, 이미 각지의 슈고들이 포은의 시를 얻기를 내게 청하니 절로 기분이 흥겨웠소.”
그 말에 포은이 겸양하며 작은 재주가 있을 뿐이라 하였다.
그 재주가 큰지 작은지는 뻔한 만큼, 포은의 이름은 왜국에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장원에 묵을 때도 가장 바쁜 건 포은이었으니, 소문을 듣고 근처에서 찾아온 크고 작은 권세가들이 포은의 글과 시를 받기를 간청했던 것이다.
재밌는 건 특히 승려들의 방문과 시청(詩請)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그건 왜국의 당대에 글을 아는 이들의 대부분이 승려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본의 승려들이 주자학을 익히기도 했다는 점에서 기인한 바도 컸다.
특히 선종(禪宗) 계열의 승려들은 주자학을 일종의 불경처럼 익혔는데, 불자의 도리가 왜국에 와 변질된 것처럼 유자의 도리도 왜국화되었으니, 선종의 영향으로 주자학 또한 불교화된 것이었다.
그래도 주자학이 유학임은 분명하니, 유학에 있어 선진학문을 지닌 고려의 이름난 유자의 등장에 자연 그 선망(羨望)을 따라 승려들이 방문하길 쉬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비단 이번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도 있었던 일로, 포은이 일본에 있을 때도 수많은 승려 및 명사와 가인들이 만나기를 자청하였었다.
그 덕에 어려운 가운데에도 최소한의 외교적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니, 그 모두가 포은 정몽주의 학문적 위상 덕이었다.
다만 다른 것은 이번에는 비단 포은뿐만 아니라, 스승 이색과 다른 사형사제에게도 시를 청함이 많았는데, 그들이 포은의 스승이고 사우들임을 알게 되자, 자연히 부탁이 연이은 것이었다.
덕분에 지난 나흘 간 오우치의 영지에 수십 점의 시구들이 뿌려졌으니, 이러다가 고려 문인들의 시가 왜국에 너무 흔해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신진사대부들의 시와 글에 대한 대화 덕에 분위기가 다시 안정되자, 몽주는 용건을 꺼내었다.
“지금 고려에 무도한 왜구들이 수시로 약탈을 하여 크게 곤란한 지경이외다. 아마 가독도 아실 것이오.”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소.”
“그저 안타깝게만 여길 일이 아니오. 그 왜구들은 모두 남쪽의 반도들이 막부에 대항하기 위해 군자를 마련하려는 목적에서 나타난 것이니, 이를 그냥 두면 남북의 합일은 기약할 수 없게 될 것이오.”
“맞는 말씀이시오. 하나, 이는 막부에서 결정할 일, 나로서는 가타부타 할 말이 없소.”
역시나였다. 남북조 사이에서 오우치씨의 성장을 노리는 정책을 추진하는 히로요는 왜구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럴 것이오. 하면, 교토에 서둘러 사람을 보내 고려 사신단이 방문하려 함을 알려 주시오.”
본디 오우치씨를 좀 더 설득할 생각도 있었으나, 몽주는 가독의 아들 요시히로가 있음을 알기에 이내 포기하였다.
“그러겠소. 다만, 막부는 먼 곳이라 시간이 필요함을 이해해 주시오.”
오우치 가독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유자들도 오우치씨와 따로 이야기를 나눌 것이 없음을 예견했는지 굳이 나서지 않았다. 그저 오우치씨 가독과 교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물론, 몽주는 그렇지 않았다.
막부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겠지만, 몽주에게 있어 오우치는 중요한 외교의 상태였고, 특히 북조 휘하에 몸담아 남조를 압박하는 오우치씨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몽주는 히로요보다 그의 아들인 요리히사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가독 앞에서 물러날 때, 몽주는 은근히 요리히사를 바라보았으니,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몽주는 눈짓을 슬쩍 보냈다.
이 시대 왜국에서 ‘윙크’를 어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 * *
다행히도 몽주가 보낸 윙크의 의미를 요리히사는 제대로 파악했다.
장원으로 물러나 밤이 되자 그가 가복 일인만 데리고 몰래 방문한 것이었다.
호위를 멀찍이 물리고, 사복과 다른 두 통역만을 뒤에 세운 채 나란히 정원의 연못가에 섰다.
22살의 몽주와 18살의 요리히사였지만, 얼핏 보면 요리히사가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실제로 요리히사는 이미 실전을 경험한 무장으로서 체구가 번듯하고 볕에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어, 마른 체구의 백면서생에 가까운 몽주와는 많이 달랐다.
물론, 나이도 체구도 중요하지 않았다. 몽주는 제주현백이고, 요리히사는 오우치씨의 후계자이자 풍전국의 슈고였으니, 결코 낮은 지위들이 아니었다.
근처 여기저기 불을 피워 놓아 빛과 그림자가 선명하게 두 사람에게 드리우고 있을 때, 요리히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내게 할 말이 있으신 듯합니다만.”
“맞소. 중요한 이야기가 있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이미 밝혔듯 고려 사신단을 이끌고 있소. 하나, 동시에 제주를 영지로 가진 현백이기도 하오. 왜국식으로 하자면, 제주의 슈고다이묘인 셈이오.”
“…….”
“당연히 사신으로서의 입장이 있고, 제주현백으로서의 입장이 따로 있소. 그 두 가지가 불가분의 관계는 아니나 조금은 다를 수도 있을 것이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소?”
통역을 받은 요리히사가 잠시 갸우뚱하였다.
“제주현백의 개인적인 용무가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 생각하여도 좋소. 어쨌든 나는 사신단의 수장으로서 왜구에 대한 고려의 입장을 왜국 막부와 논의할 것이오. 하나, 제주현백으로서는 막부보다 오히려 오우치씨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오.”
“말씀을 너무 돌리지 마십시오. 저와 나누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원래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일본인의 특기이건만, 정작 요리히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같은 식으로 답을 받길 원했다.
“좋소. 나는 사신단으로서의 임무를 마친 후, 제주현백으로서 쓰시마와 이키를 칠 것이오.”
“……!”
“이는 우선 왜구를 방비하기 위함이니, 이번 사신행으로도 막부가 왜구의 출몰을 막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놀란 표정이던 요리히사도 그 말에는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막부에 청하여 막부가 왜구를 막을 수 있다면, 이미 예전에 그리되었을 것이다.
하나, 막부가 규슈에 가진 영향력은 극히 미미했다. 그나마 지금에 이르러, 규슈의 도지사 격인 규슈탄다이(九州探題)로 임명된 이미가와 료순이라는 명망가가 힘써 노력하고 있어 조금 확장된 수준에 불과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마가와 료순이 포은과 만나 크게 감읍하여 왜구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제로 실효가 나타난 건 한참 뒤 남조가 무너진 이후였다.
“쓰시마와 이키를 점하여 그곳에서 왜선을 막을 것이니, 왜국 막부가 수단을 강구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유효할 것이오.”
“하나, 그것을 막부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리히사의 반론이 있었다. 그리고 몽주는 그 반론이 참신하다 여겼다.
그건 그 반론의 내용 자체가 참신하다는 게 아니라, 그 반론이 있기 전에 그의 입에서 나올 법한 물음이나 항의를 건너뛰고 바로 그 말이 나왔다는 점이 참신하다는 것이었다.
쓰시마와 이키는 왜국의 영토이니 제주 현백이 칠 수 없다든지, 제주현백이 쓰시마와 이키를 점할 수 있는지 의심한다든지, 혹은 왜 그걸 자기에게 이야기하느냐고 되묻는다든지 하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 생략되었던 것이다.
몽주는 내심 요리히사를 영특하다 판단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젠구니(풍전국)의 슈고와 논의하는 것 아니겠소.”
풍전국의 슈고는 물론 요리히사였다. 그리고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쓰시마와 이키를 치는 건 공식적으로 제가 되어야겠군요.”
“바로 그것이오. 그걸 안다면, 내가 쓰시마와 이키를 점하는 것으로 그대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오.”
“교역소를 여시겠습니까.”
“그렇소. 쓰시마에 상시(常市)를 열 것이니, 나를 통해 그대는 고려와 유통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제주현백으로서는 연간 팔 회에 걸쳐 고려의 시전과 크게 거래할 수 있으니, 그대도 큰 이문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본디 4회였던 제주의 시전 교역 횟수는 두 배로 늘었는데, 이는 왜구와 싸워 이긴 것에 대한 상이었다.
역사에서 요리히사가 얼마나 조선과의 교역에 열심이었는지를 알기에 몽주는 그렇게 배팅한 것이었다.
비록 아직 그가 어리나 역사에서 그가 가독이 된 건 불과 5년 이후이며, 이미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으니, 자신이 어떤 정책을 취해야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이미 머릿속에 있었을 것이다.
“과연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럴 것이오. 하면, 내 뜻을 따르겠소? 그대는 이름을 빌려 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것이오.”
몽주는 당연히 그가 응하리라 여기며 최종 결론을 요구하였다. 하나, 정작 요리히사는 고개부터 저었다.
“크게 마음을 움직일 말씀이나 가납하기 어렵습니다.”
“…….”
“현백께서는 단지 이름을 빌리는 일이나 하나, 이름을 빌려 주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일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 제가 쓰시마와 이키를 친다고 하나, 현백의 군이 움직이면 자연히 그것에 대한 소문이 퍼질 것이고, 저와 현백 간의 밀약 또한 모두가 짐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저는 사방의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니, 막부 또한 저를 외적을 끌어들인 반도라 칭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저 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보기와는 달리, 제법 똑똑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똑똑했다. 먹이를 앞두고도 그 먹이에 독이 묻었는지 확인할 줄 아는 자제력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논의가 길어질 것 같다고 여길 때, 문득 요리히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다만, 만약 현백께서 제 청 하나를 받아들이신다면 현백의 뜻을 따를 수 있을 것이며, 저 또한 위험을 무릅쓰고도 망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청이 무엇이오?”
“화포를 얻고자 합니다. 만약 현백께서 화포 제조법을 알려 주신다면 제안하신 것보다 더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
몽주는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똑똑한 데다가 협상에 있어 ‘블러핑’도 할 줄 아는 놈이었다.
앞서 제주현백이 어떻게 쓰시마와 이키를 점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은 것은 애초에 화포의 위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그렇기에 화포를 요구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너 같으면 그러자고 하겠냐?’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곤 다시 요시히로와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의 대화는 한참 동안 이어졌으니, 비록 주방국이 따뜻한 편이기는 하나, 엄연히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가득했음에도 논의의 열기를 범할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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