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21)
* * *
국상 중에 신돈은 고부청시청승습(告訃請諡請承襲)과 백관진향(百官進香)의 예를 주도하면서 피로함을 느꼈다.
고부청시청승습은 외국에 사신을 보내 국상을 알리는 것으로, 금번 국상과 관련해서는 명에 부고를 알리고 대행왕(大行王 : 시호 전 죽은 왕을 가리킴)의 시호를 통보하며, 왕자의 사위에 대한 인준을 요구하는 절차였다.
과거 원에 사대하던 고려 시절에는 원으로부터 시호를 내려받고, 새 임금을 낙점받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반대로 시호를 통보하고 사위(嗣位)의 인준을 요구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사실 이를 두고, 명에 사대해야 함을 주장하는 유자들의 반발이 있긴 했으나, 이미 권력이 거세된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영공과 수시중에게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반대로, 반원 정책과 요동 정벌로 대변되는 선왕의 유지를 기린다는 명분을 가진 영공과 수시중이 대행왕의 시호와 후계의 사위를 두고 명에 몸을 굽히지 않겠노라 방침을 정한 것은 유자들 외 거의 모든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 덕에 영공과 수시중이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는 비난도 일부 줄기도 했으니, 유자들의 주장은 철저히 무시되었던 것이다.
물론, 영공과 수시중이 지금과 반대로 유자들의 주장을 따라 명에 사대하며 시호와 사위를 명으로부터 구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으로부터 지지를 얻었을 것이다.
그 지지라는 것들은 어차피 영공과 수시중의 쌍두 권력에 대한 복종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만큼 두 사람의 권력이 막강하다는 의미였다.
“심왕? 허!”
서찰을 손에 들고 읽던 신돈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퇴청하여 상복 차림에서 환복한 신돈은 왜국사행에서 돌아온 염흥방과 만났고, 그와 짧은 대화를 한 연후에 그로부터 제주현백의 서찰을 전해 받았다.
애초에 공식 사신단으로 행차했던 염흥방이었기에 굳이 먼저 따로 만난 것 자체가 그 서찰 때문이었으니, 제주현백이 반드시 직접 영공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던 탓이었다.
한데, 그 서찰 안의 내용이란 영공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저 자신의 명을 수행한 것에 대한 보고에 제주를 다스리는 자로서 부탁 같은 것을 더한 것이라 여겼는데, 엉뚱하게도 심왕위가 언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포은이 따로 부탁하길, 만약 그들을 고려로 돌려보낼 수 없다면 차라리 북방으로 보내 달라 하였나이다.
그 말이 수상하여 다시 묻자, 포은이 주저하며 말하길, 경흥후는 마땅히 자신들을 받아 줄 것이라 하였고, 다시 캐물으니, 경흥후가 요동을 원하고 있으니, 그를 위해 함께 힘쓸 자들이 필요할 것이라 하였나이다.
수상함이 더욱 깊어져 몇 번을 다시 은근히 물으니, 마침내 포은이 고백하였는데, 경흥후가 훗날 심왕위를 얻고자 한다고 하였사옵니다.
실로 믿기지 않는 말이었으나, 소신으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는 없기에 그들과 더불어 북방으로 가서 경흥후의 환심을 사고자 하온데, 이는 그의 심중을 듣기 위함이옵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사방침에 기대어 서찰을 몇 번이나 훑던 신돈은 어느 순간 실소하였다.
“제주현백이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어찌 포은의 말을 믿고, 그들을 북방으로 보냈다는 것인가. 죽을 처지에 놓여 살고자 말을 꾸민 것을 철석같이 믿다니…….”
신돈이 보기엔 포은이 거짓말로 제주현백을 구워삶아 왜국에서 버려지는 것을 회피하려 든 것이었다.
그냥 무시하고 뿌리치면 그만인 것을 제주현백이 깜빡 속아 넘어갔으니, 제주현백마저 우스워 보일 정도였다.
“아니면, 제주현백이 일부러 그들을 살리기 위해 꾸민 일이거나.”
제주현백에 대한 실소는 이어 그에 대한 의심으로도 번졌다.
그간 봐 왔던 제주현백은 이 정도로 우스운 속임수에 당할 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심왕위(瀋王位)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정도는 충분히 알 것이고, 당연히 심왕위를 노린다는 포은의 고백이 사실이라면 콧방귀를 껴야 마땅했다.
오래전 충렬왕 이후, 고려에서 심왕은 그야말로 반역의 상징이었다.
심왕위에 앉은 자치고 고려의 왕좌를 노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상징성을 이해할 수 있으니, 만약 경흥후가 심왕위를 노린다면 그가 역적이 되려 한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신돈이 아는 경흥후 이성계는 충신이었다.
그가 고려에서 당한 괄시와 무시에도, 왕명과 도당의 결정에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가 충신이 아니라면 고려에 충신인 자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돈의 입장에서 그는 불가근불가원의 인물이었고, 때문에 경흥후로 봉하여 일부러 멀리 떨어뜨린 것이다.
신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찰을 접고는 이내 그 내용을 잊었다.
다만, 후에 제주현백과 만나면 이에 대해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 * *
비슷한 시기에, 이인임은 조카사위 하륜을 만나고 있었다. 왜국사행 후 돌아온 하륜이 수시중을 찾아와 왜국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내가 패망할 수 있으니, 자네더러 나를 따르지 말라 했단 말이냐, 제주현백이?”
“소생은 분명 그리 들었습니다.”
“허허, 제주현백이 나날이 오만해지는구나.”
퉁명스레 내뱉고는 이인임은 잠시 제주현백이 조카사위에게 그리 말한 연유를 따져 보았다.
그가 아는 제주현백이라면 결코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말을 내뱉을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 따져 보려 해도 따질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에 대한 경계와 미움만을 거듭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저 소생을 식겁하게 하고, 격동케 하려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네를?”
“그러합니다. 마치 그에게 대단한 술수가 있는 것처럼 꾸며 소생이 흔들리게 만들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소생이 어리석어 그 말에 흔들렸다면, 저를 통해 일을 꾸미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륜의 말에 이인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완전히 마땅하다 여기지는 않았다.
그건 제주현백치고는 너무 얕은 수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가 왜국에서 무왕(武王 : 쇼군)의 관령과 담판하여 그들로 하여금 왜구의 거점인 대마도와 일기도를 치게 만들었다는 걸 듣고, 대단한 방책이라고 속으로 감탄하였는데, 그런 수를 만들 정도의 능력을 지닌 인물이 이처럼 수준 낮은 격동지계을 꾸몄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 뭐라도 있긴 있는 것인가?’
하나, 당금의 고려에서 이인임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는 자는 신돈뿐이었고, 이인임은 그와 손을 잡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신돈과의 연대에 있어 갈등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갈라설 기미는 없었다.
오히려 대행왕(선왕)의 붕어와 관련하여 같이 일을 꾸미고 그 일을 성사시켰으니, 일이 있기 전에 견제했던 것조차 오히려 줄어든 면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제주현백이 신돈의 당여라 하나, 신돈이 자신을 상대로 하여 제주현백과 더불어 일을 도모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제주현백이 지닌 힘이 너무나 약하지 않은가.
“혹, 다른 이가 있는 것인가…….”
이인임이 문득 생각을 골몰하다가, 그의 앞에 조카사위가 있는 것을 보고는 표정을 달리하며 말하였다.
“수고하였네. 그만 물러가게.”
한데, 하륜이 바로 물러가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하여, 할 말이 남았으면 서둘러 말하라 하니, 그가 곤궁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고하였다.
“왜국에 남은 자들을 구하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그들이 가여운 게냐.”
“스승이요, 같이 동문수학한 사형사제들이니, 걱정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어찌 변할지는 모르나, 당장은 그들을 고려에 둘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너도 잘 알 것이다. 혹여 불안한 국정 중에 그들이 백성들을 충동하려 들 수도 있지 않느냐.”
“…….”
하륜은 뭔가 안타까운 표정을 잠시 보이다가 이어 절을 하고는 물러났다.
“쯔쯧, 조금 더 과단할 수 있다면 크게 쓰일 터인데…….”
이인임은 방을 떠난 조카사위를 두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하게 태도를 정하면 어느 쪽에서라도 크게 인정받을 능력을 가졌건만, 세가와 유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니, 그 능력을 오히려 경계 받아 편복(박쥐) 취급이나 당하고 있는 조카사위가 안타깝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인임은 잠시 조카사위가 전한 말들을 헤집으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이내 별것 아니라 여기고 머릿속에서 치웠다.
* * *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오?”
이성계가 아쉬운 표정으로 물으니, 몽주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약은 나라에서 관리해야 마땅한 바, 비록 제가 화약을 제조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경흥후께 알리려면 마땅히 도당의 허락을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그 폭죽이라는 것은 결국 호인들을 상대로 쓰는 것이니, 호인들과 맞닿은 이곳에서 쓰는 것이 올바르다 하지 않겠소?”
“하면, 요동에도 화약을 전하오리까.”
“…….”
몽주가 되물으니, 이성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이곳에 이색과 그의 제자들을 데리고 온 날 이후, 며칠이 지나 경흥후가 다시 제주백을 청하였다.
몽주가 그에 응하자, 경흥후가 몽주의 눈에는 다소 엉성한 지도를 펼쳐 보이며, 봉지의 사정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건 일종의 시위 같은 것이었으니, 자신이 경흥후로서 봉지를 안정시키고, 또 경흥을 개척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를 밝힘과 동시에 그 때문에 너무나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몽주가 폭죽으로 제주의 호인들을 토벌하였다는 것을 언급하며, 자신도 폭죽을 얻어 호인들을 상대하고 싶다고 그 제조법을 청한 것이었다.
하나, 이미 도당에 폭죽과 화약에 대해 밝히며, 그 방법을 함구하기로 한 몽주로서는 응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또, 이성계가 폭죽을 얻고자 함은 비단 호인을 상대하는 것 외에, 요동을 얻기 위함임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이성계에게 홀로 폭죽과 화약이 쥐어진다면, 그는 더더욱 누구와도 연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그가 신돈과 결탁하기를 노리는 몽주로서는 당연히 거부해야 할 제안이었다.
“차라리 영공께 청하여 폭죽과 화약을 전해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저도 곤란하지 않을 수 있고, 경흥후께서도 떳떳이 쓰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그 말을 들은 이성계의 표정은 여전히 마땅치 않았다.
그도 몽주가 하는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전에 권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공과 손을 잡으라는 의미였다.
“이보오, 제주백. 아무리 그리 권하여도, 나는 영공과 손을 잡을 수가 없소. 무엇보다 나는 영공을 믿을 수 없소. 영공은 이미 선왕 시절에 독재하여 오롯한 권력을 맛을 본 자. 어찌 그가 나에게 심왕위를 인정해 주겠소? 손을 잡는다 하여도 나는 영공의 수하로만 여겨질 것이니, 차라리 경흥의 땅을 얻어 이곳에 남는 것이 나을 것이오. 또, 포은을 비롯한 유자들 또한 결사로 반대하니, 그들을 써 봉지를 안정시키고, 수월하게 경영하고자 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뜻을 가납하지 않을 수가 없소.”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하는 이성계를 보고 있자니, 몽주는 그가 의외로 연기를 제법 잘한다 여겼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단 하나 스스로 밝히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그가 가진 심왕위에 대한 욕망이 그 어떤 조건들보다 크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경흥후로서 동북면에서 작은 왕처럼 다스릴 수 있다 하더라도, 진짜 왕은 될 수 없다.
이는 세력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인정과 관련된 것으로, 여타의 왕들은 물론, 중원의 황제마저도 세상의 인정을 얻지 못한다면, 그저 홀로 봉기한 무리의 수장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국의 황제가 경제적 손해에도 불구하고 조공 체제를 유지하려 하고, 또 역사에서 그 많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여러 왕국들이 중국에 조공하면서 동시에 근린의 나라들과 교우하고자 한 것은 결국 왕권을 인정받기 위함이고, 그를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탓이었다.
당연히 인정받지 못한 왕칭(王稱)은 오히려 침탈의 명분만을 남길 뿐이었다.
하니, 이성계가 진정으로 왕좌를 노린다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 줄 또 다른 왕, 혹은 황제가 필요하였고, 그를 위해서는 다른 모든 장애를 무슨 수를 써서든 극복하려 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성계가 말하는 여러 불가의 이유들은 그의 진심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지금이야 영공이 경흥후를 믿지 않을 수도 있으나, 영공과 더불어 고난을 이겨 낸다면, 그때는 믿을 것입니다. 또 심왕위에 남은 반역의 역사가 있어 고려에서 거부감이 있다 하더라도, 중원의 도움이 없는 심왕이 고려를 거스를 수 없음을 들어 냉정히 설득한다면 그 또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결국 경흥후께서 영공과 더불어 고려를 평정할 수 있다면 다 얻을 수 있는 것이니, 굳이 어렵고 힘든 길로 가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성계의 표정에 고민이 가득했다.
하기야 제주백과 나누는 모든 대화의 전제는 결국 수시중과 요동공이 결탁하여 고려를 얻는 것이니, 그가 영공과 더불어 맞서 실리를 나누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통할 것이란 말에는 그도 동의하는 바였다.
“길게 보고, 유연하게 움직이십시오. 내키는 것만 취해서는 이씨의 왕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고하니, 이성계가 어두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긴 하였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제주백의 말에 전적으로 설득된 건 아니었다.
“어려운 이야기는 그만하십시다. 음, 그나저나 늘 같이 오던 호위무사가 오늘 따라 안 보이오? 포은에게 들으니, 그가 왜국에서 왜인 무사들과 겨뤄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들었소. 하여 내 휘하의 맹장들과 겨루게 하고자 하였소만.”
이성계가 문득 탁기를 찾으며 말하자, 몽주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제가 개경 처가에 전할 서찰이 있어, 그로 하여금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렇소? 하면, 가까운 시일에 돌아오진 못하겠구려.”
“실은 돌아가는 중에 해후하기로 정하였으니, 탁기가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몽주는 미소를 띠며 말하니, 이성계가 조만간 떠날 것이냐 물었다.
“왜국사행 중에 이곳에 온 것이니, 서둘러 돌아가 일을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 또한 다스려야 할 작은 봉지가 있지 않습니까.”
“하하, 맞소. 제주백이라 부르면서도 자꾸 지난날 천마산에서 봤던 도령 시절의 그대가 떠올라, 현백이 현백임을 잊게 되오. 하하하.”
몽주는 그에 마주하여 웃음을 보였다. 다만 속으로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언제는 부처의 계시자처럼 대하더니, 웬 도령…….’
* * *
아직 이성계와는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분명 아직은 그랬다. 다만, 몽주는 영원함을 믿지 않았다.
이성계의 조금 바뀐 듯한 태도에서 느꼈듯 그가 자신을 이용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몽주도 이성계를 이용해야 마땅했다.
아니, 이미 이용하고 있었다.
완전히 내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의 누구도 영원한 같은 편이라 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설령 역사적 위인이라 할지라도.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건 물론, 적과 적을 친구로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친구들을 찢어 적으로 만들기도 해야 한다.
그가 이성계에게 조언한 길게 보고, 유연하게 행동해야 하는 건 몽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바라는 세상과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멀리 보는 건 당연하였고, 유연하다 못해 줏대 없다는 평을 받을 만한 결정도 감수해야 했다.
함주를 떠나 배가 나아가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몽주는 문득 지난번 현대에서 재상, 두신과 더불어 꾸민 것을 떠올렸다.
이인임과 신돈 사이에 불화를 키우고, 독립 변수처럼 동떨어진 요동과 동북면까지도 고려의 정국 속에 휘말리게 만드는 것.
그건 몽주가 바라는 고려 내 혼란스러움의 규모를 더욱 키우는 것이고, 그만큼 그와 제주가 자유로이 움직일 여지가 늘어날 수 있을 터였다.
다만, 그 방법이 문제였는데, 재상의 조언이 설득력 있었다.
* * *
“데일 카네기라고 아세요?”
“카네기라면 알죠. 철강왕이잖아요.”
“그 사람은 앤드류 카네기고요, 제가 말한 건 데일 카네기죠.”
재상이 언급한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라는 인물은 20세기 초반에 활약한 유명 작가이자 강사였다.
그는 인간 관계론과 자기 관리론을 주제로 한 일종의 처세술 강사였는데, 상당히 유명세를 떨쳐 오늘날에도 ‘카네기 리더십 코스’라는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그의 인간 관계 및 처세술에 대한 강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데일 카네기는 사람들에게 친구를 얻고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론을 설파했는데, 그중 설득과 관련하여 한 말이 잘 알려져 있었다.
“사람을 설득하려면 순리적으로, 은근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죠.”
“말은 그럴 듯한데, 구체적이진 않네요.”
“그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 구체적으로 잘 아시겠지만, 짧게 설명해 드리자면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남을 설득하여 무슨 일을 하도록 하려면 먼저 말로 부탁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하고 싶은 기분을 상대방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라는 거죠.”
“음…….”
“데일 카네기의 주장에 제 생각을 더해서 설명해 보자면, 호의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고, 또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이나 목표를 잘 알고 있다면 조금 더 과감하고 직설적으로 설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즉 적이거나 호의를 얻지 못한 상대, 혹은 쉽게 설득을 시도하기 어려운 위치의 인물이라면 데일 카네기의 말처럼 직접 말을 하기보다는 그런 마음이 들게 만드는 게 최선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재상의 이어진 설명으로 그가 무슨 의도로 데일 카네기라는 이를 끌어들여 말을 한 건지 몽주도 이해했다.
‘신돈과 이인임 사이의 불화를 키우고, 동시에 최영과 이성계마저 엮어 양분시키고자 한다면, 결국 몽주 씨가 신돈을 충동질하고, 그런 충동질에 그가 반응하게 해야 하는데, 절대 직접적인 방법은 쓰지 말자고 말하고 싶은 거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미 신돈과 이인임에 대한 자료는 역사적인 것은 물론, 몽주를 통한 것도 많이 쌓여 그들 각각의 성품이나 사고 성향 등은 제법 파악되어 있었다.
그것을 토대로 따져 보니, 신돈과 이인임이 서로에 대한 견제를 마음에 품되, 그것이 물리적으로 관찰될 정도의 충돌로 자연 촉발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여겨졌고, 만약 함께 공민왕을 끌어내린다면 둘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있었다.
실제로 역사에서 이인임은 최영과 더불어 권력을 오래도록 나누었고, 신돈 또한 불안한 기반 속에서도 10년이나 공민왕에게 충성하였으니, 신뢰가 쌓이거나 서로 얽힌 것이 많아질수록 얼마든지 다른 권력자에 대한 견제를 물밑으로 억눌러 참을 만하다 여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 이성계는 아니더라도 신돈을 대상으로 간접적인 설득을 시도하고자 하였고, 그 방법의 일환으로 ‘이성계의 심왕위에 대한 욕심’을 밝혔던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당연히 신돈이 이인임을 경계할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하나, 하나의 정보만 더 던진다면, 충분히 이어질 만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잘되려나…….”
짧은 읊조림에 걱정과 기대가 섞여 있었다.
* * *
몽주가 슬슬 함주를 떠나 돌아갈 차비를 할 무렵, 신돈은 제주현백의 또 다른 서찰을 받았다.
늘 제주현백과 같이 다녀 익숙한 얼굴의 무인이 전한 것이었기에 믿을 만했다.
급하게 전하나이다. 경흥후의 환심을 사 그의 말을 들으니, 그가 심왕위를 얻고자 함이 사실이었사옵니다. 다만,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가 말하길 요동공이 심왕위를 노리니, 자신 또한 왕위를 노리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나 그저 삿된 마음을 모면하기 위해 꾸민 것으로 보이지 않으니, 영공 저하께옵서 이를 살피시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시옵소서.
이번에도 신돈의 반응은 실소로 시작되었다.
서찰에 이미 적혔듯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최영의 충심은 그도 인정하는 바인데, 그가 역적의 상징인 심왕위를 얻으려 한다니 당연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설령 요동공이 노망이 들었다 하더라도,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만약 진짜 노망이 들어 그가 심왕임을 선언하면 그를 토벌하면 그만일 터, 그가 따로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어찌 이겨 낼……!”
허탈하게 중얼거리던 신돈이 문득 말을 멈추고 눈을 부릅떠 허공을 응시하였다.
하나의 사실이 뇌리에 스치니, 이어진 사고의 흐름이 연신 그의 머리를 마구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란 바로 최영이 이인임과 각별한 사이라는 것이었다.
그걸 알기에 최영을 방면하면서도 이인임을 통해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 여기겼을 정도로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사실이라 몇 번이나 재확신하자, 최영이 미치지 않고서도 심왕위를 노릴 수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수시중이……?”
믿고 싶지 않은 의혹을 입술 사이로 흘리며 신돈은 사방침을 손아귀로 움켜쥐었다.
그러고 보면, 요동공 최영이야말로 심왕의 위를 허락하고서도 고려에 충실하길 바랄 만한 인물이 아닌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가정이 연이으면서, 신돈의 머릿속에는 서서히 수시중이 권력의 동반자가 아닌 적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