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22)
금천정세(今川貞世)
우습게도 몽주가 풍전국(부젠국)에 도착한 건 입하(立夏 : 5월 6일경) 직전에 이르러서였다.
함주에서 출항한 것이 4월 초였으니, 고작 500여 길미의 거리를 항해 하는 데에 무려 한 달이나 걸린 것이었다.
물론, 한 달 내내 항해 한 건 아니었다.
도중에 연안에 수시로 선단을 정박해야 했으니, 봄날의 변화무쌍한 날씨 탓이었다.
게다가 맑은 날에도 바다에 나가면 바람이 너무 없거나, 있어도 풍향이 무작위로 변하여 배를 전진시키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바람이 그따위인 건 계절풍이 교차하는 시기인 탓도 컸고, 남북으로 오가는 항로상이라 위도별로 환경이 변한 탓이었다.
거기다가 답답한 마음이 몽주가 얕은 지식으로 해류를 타보려고 선단을 움직였다가 오히려 북쪽으로 떠밀리는 일도 있었다.
한반도 연안 동해의 해류는 대한 해협에서 올라오는 해류와 오호츠크해에서 내려오는 해류가 중간에서 만나 동쪽 즉, 동해 중심부로 가로질러 흘러 나가는 형태인데, 당연히 주류의 방향을 역하는 비주류의 해류가 존재하였다. 몽주는 바로 그 비주류의 해류를 타려 했다가 주류에 휘말려 하마터면 동해의 먼 바다로 쑥 밀려 갈 뻔한 것이었다.
덕분에 항해 기간이 왕창 늘어났고, 동래현쯤에 도착했을 때는 꿈도 깨어 현대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오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풍전국에 도착하니, 화극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제주에서 1통(톤)에 가까운 화약을 지어 온 것인데 이미 열흘 전에 온 모양이었다.
똑같은 시기에 항해했음에도 화극의 선단은 그리 늦지 않은 건 제주와 풍전국 사이의 항로가 동서 항로이기 때문에 환경의 변화가 적은 덕이었고, 또 대한 해협을 중심으로 양방에 흐르는 해류가 쌍방향으로 동등한 터라 해류를 타기 용이한 덕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일세. 이러다가 장마철이 될까 걱정했지 뭔가.”
안 그래도 몽주도 걱정하던 참이었다.
양력으로 6, 7월이 장마철이고 태풍철과도 겹치니, 자칫 가을이 되도록 바다로 나가기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몽주는 쓰시마와 이키를 정벌하기 위한 출항을 서두르기로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위해 요시히로와의 만남을 급히 주선하였다.
한데, 요시히로가 몽주 앞에 등장한 건 정작 닷새나 지난 후였다.
그가 풍전국의 슈고임을 생각하면 당일 만날 수도 있을 법한데도 두 번이나 재촉하는 사람을 보내고 나서야 만날 수 있었으니, 몽주로서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찌 이리 늦은 것이오?”
“규슈탄다이(九州探題)께서 절 찾으시는 바람에 일찍 올 수 없었습니다.”
“규슈탄다이라면, 이마가와 사다요 말이오?”
“알고 계셨군요. 그렇습니다. 저희는 료슌 님이라고 부르지요.”
이미가와 사다요(今川貞世) 혹은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
왜국 당대의 걸출한 인물 중 하나로, 막부의 중신으로서 문무 양면에 크게 활약한 자였다.
왜국의 포은 정몽주라 비유할 수 있고, 무략(武略)에 있어서는 포은을 능가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역사에서 남조가 득세했던 규슈 지방에서 북조가 세력을 키우고 마침내 남조 세력을 일소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마가와 사다요였다.
사실 역사에서 포은 정몽주의 왜국사행을 크게 도운 것도 이마가와 사다요로서, 포은과 뜻을 나눠 상호 간에 감명하였고, 그 덕에 포은이 그로부터 왜구 방비에 큰 협조를 얻을 수 있기도 했다.
하나, 역사가 바뀌어 이제 포은과 그가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금번 사행은 규슈를 건너 뛰어, 곧바로 혼슈에서 막부와 통행하였고, 이제는 포은이 왜국을 떠나 북방에 가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친한파(親韓派)’ 이마가와 사다요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몽주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요시히로에게 료슌이 왜 그를 찾았는지를 물었다.
“그것은 제가 이미 료슌님께 쓰시마와 이키를 치겠노라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밀약에 대해서는 함구하였지요.”
“그렇소? 그럼, 탄다이가 무어라 답하였소?”
“깊이 고민하시더니, 지원은 불가하나, 그래도 하겠다면 만류하시지는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흠…….”
이해가 되는 결정이긴 했다.
이 시기에 쓰시마국과 이키국은 규슈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규슈와 정치적 관계가 밀접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특히 쓰시마국의 경우에는 도주가 막부에 인정받지도 못하던 시기였으며, 쓰시마국이 남조 세력과 더불어 왜구 행위를 한 건 쓰시마국이 남조 세력에 속했기 때문이기보다는 그저 그것이 그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북조의 세력인 요시히로가 규슈의 다른 구니를 치는 것에 민감할 수 있는 당금의 규슈 상황에서 북조의 관리인 이마가와 료슌이 요시히로가 쓰시마와 이키를 치는 것을 허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규슈의 구니를 치는 것이었다면 분명 절대 반대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이해가 되는 결정이고, 북조를 따르는 요시히로임을 생각하면 료슌의 허락을 구한 그의 행동도 일리가 있었다.
하나, 몽주는 유심히 요시히로의 얼굴을 살폈으니, 혹여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밀약은 비밀이 지켜질 때야 밀약인 것이다. 요시히로와 맺은 밀약이야,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쓰시마와 이키를 점령하고 그 두 곳을 몽주의 세력권화하는 시간을 얻은 이후여야 했다.
한데, 만약 그 비밀이 새어 나갔다면, 설령 요시히로의 의도가 아닐지라도, 외부의 공격이나 간섭을 받을 수 있다.
또,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요시히로는 이미 료슌과 밀접한 관계일 것이다.
교토에서 요시히로가 관령과 통하고 있는 것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요시히로와 료슌이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료슌이 관령과 절친하니, 그를 통해 요시히로와 관령도 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몽주가 빤히 그를 바라보자, 요시히로가 문득 실소하며 말문을 열었다.
“저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시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가 웃음을 이내 지우고 당당하게 말하니, 그게 맞는 말이다 싶긴 했다.
요시히로가 밀약을 저버리고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밀약을 지켜서 얻는 것이 훨씬 크기 때문이었다.
밀약을 지키면 명목상 그는 세 율령국의 슈고가 될 것이고, 실질적으로 몽주와의 교역을 주도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거기다가 화약까지 얻게 된다.
하나, 밀약을 파기한다면, 설령 그것으로 쓰시마와 이키를 그가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이익을 얻는다기보다는 부담을 얻는 것이나 다름없다.
경작지가 별로 없는 쓰시마와 이키는 교역이나 왜적질이 아니면 이익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혹여 료슌과 거래하여 따로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화약을 얻지는 못할 것이니, 어떻게 봐도 요시히로가 밀약을 깰 이유는 없었다.
물론, 몽주는 자신이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나,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없었다.
이제 곧 장마철이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쓰시마와 이키를 정벌하는 건 가을까지 미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건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보다 더 곤란한 상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내가 신돈이 된 것 같군. 괜한 의심을 하고 있는 건가.’
몽주가 간접적인 유도로, 신돈의 마음에 이인임에 대한 의심을 심으려 한 것처럼, 몽주도 요시히로가 료슌과 만났다는 것만으로 그가 밀약을 깰 가능성을 스스로 깨닫고 의심하고 있었다.
몽주는 잠시 생각을 거듭하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신의가 쌓이면 때로는 큰 이익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법이오.”
“틀림없는 말씀이십니다.”
몽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단 요시히로에 대한 의심을 지웠다.
의심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최악의 상황이란, 천몽이 끝나는 것이었다.
꿍꿍이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나, 있다 하더라도 제주로 돌아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화약도 충분하지 않은가.
몽주는 자신감을 가지고, 요시히로와 출정을 위한 마무리 의논을 진행하였다.
* * *
“방포하라!”
쾅쾅! 화포가 폭음을 토하니, 이시다(石田)성에 철구가 날아가 박혔다.
가난한 율령국의 튼튼할 리가 없는 토성은 순식간에 여기저기 부서지기 시작하였고, 몇 번 더 화포의 위력을 선보이자, 이내 성문 위에 하얀 기가 마구 휘날렸다.
안 그래도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요시히로의 병력을 돌격시킬 작정이었던 몽주는 요시히로로 하여금 적의 항복 여부를 확인하게 하였다.
그러자 수하 넷과 더불어 성을 향해 말을 달린 요시히로는 일다경 만에 돌아왔는데, 이키국의 슈고 쿄고쿠 도요(京極導誉)가 가문의 존속을 보장하면 항복하여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음을 알려 왔다.
몽주는 가납하기로 하고, 다시 사람을 보내 무장을 해제하고 슈고가 인부를 들어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그 요구에 따라 이시다 성의 문이 열리고, 그 열린 성문으로 슈고 도요가 갑옷을 벗은 채 나오자, 그제야 몽주가 요시히로와 더불어 다가가 정식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
풍전국에서 새벽에 출항한 지 고작 반나절 만에 이키의 슈고이자, 도주를 항복시킨 것이었다.
하기야 수하 무사가 고작 200에 불과하고, 이시다 성이 섬의 남쪽 해안과 근접하여 급습당하였으니, 화포를 앞세운 몽주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키섬을 정복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이키의 슈고를 항복시킨 것으로, 이키섬이 작다고는 하나, 엄연히 슈고 외 작은 영주라 할 수 있는 자들이 존재하였다.
몽주는 슈고 도요에게 주종의 계약을 강요하고, 그에게 이키섬의 다른 유력 가문들을 항복하게끔 설득하게 하였다.
“항복한다면 그대와 마찬가지로 가문의 존속을 보장하겠으나, 만약 저항한다면 가문 자체를 지워 버릴 것이니, 그리 전하라.”
몽주는 냉정하게 통보한 후, 사병 중 200인과 화포 10문을 이키섬에 남기고 다시 바다로 나섰다.
본디 이키섬의 슈고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면, 당장 이키섬을 장악하기보다 쓰시마섬부터 치기로 계획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이키섬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소란을 쓰시마섬에서도 눈치를 챘을 터, 습격에 대비할 시간을 많이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쓰시마섬은 이미 방어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현대의 쓰시마섬(본섬)이 상하 두 개의 섬으로 구별되지만, 그것은 후대에 ‘만제키(万関)’ 운하를 만들어 나눈 탓으로, 고려시대 당대의 쓰시마섬은 하나의 섬이었다.
그래서 쓰시마섬은 남북으로 긴 섬이었는데, 다행히도 그 중심지는 현대로 치면 하(下)쓰시마의 동안에 위치해 있었고, 이는 이키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바로 그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의 앞바다에 몽주의 함대가 도착하였을 때, 이즈하라의 포구 입구에 작은 배들이 연달아 묶여 장애물이 되어 있었고, 포구에는 100여 명쯤 되는 활을 든 무사들이 보였다.
그건 이키섬의 대응과는 달랐으니, 포성에 놀라 금세 달아나긴 했지만, 그래도 수전으로 저항하려 했던 이키섬과 달리, 쓰시마섬은 아예 수전을 포기하고 육지에서 저항할 준비를 한 것이었다.
“오히려 저항의 의지가 더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하나, 그렇다고 저것이 우리를 막지는 못할 걸세.”
몽주의 말에 화극이 어림없다는 듯이 대꾸하였다. 물론, 그의 말이 옳았다.
나름 쓰시마 측에서 어떻게든 상륙을 막아보고자, 상륙 중에 피해를 강요해 보고자 머리를 굴린 모양이고, 그나마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긴 했지만, 위력을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워낙 차이가 큰 터라, 조금 번거로울 뿐 유의미한 방해가 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몽주가 말하는 저항의 의지는 그 어선의 장벽을 가리키기보다는 당대 쓰시마 도주인 소 쓰네시게(宗經茂 : 종경무)가 어지간해서는 항복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포구부터 저렇게 방비할 정도로 기민하게 움직였다면, 이키의 슈고처럼 성만 믿고 있다가 고스란히 사로잡힐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이즈하라성부터 점령하고 어찌할지를 생각해 보죠.”
“알겠네.”
몽주가 명을 내리자, 화극이 수하들에게 소리쳐서 함대를 2열로 분열하게 하였다.
앞선 열은 포구의 입구를 봉쇄한 어선들을 향해 방포하기 시작하였고, 뒷 열은 멀리 포구를 향해 철구를 날렸다.
쾅쾅!
포구 입구의 어선들이 탄환에 얻어맞아 산산이 부서지는 동안, 포구에 떨어진 철구는 그곳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중에 몇몇이 이를 악물고 불화살을 쏘기도 했지만, 채 반도 미치지 못하고 바다 위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일기도보다는 오래 걸려야 할 것 같군요.”
앵도의 말에는 걱정이 살짝 묻어 있었다.
“화포의 도움으로 우세하나, 우리가 가진 군병의 수가 너무 적어요. 이럴 상황에서는 아무리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적진에서 밤을 보내는 건 위험해요.”
“자내의 말이 모두 맞소. 하나, 대마도는 일기도보다 크고 험하니, 만약 저들이 끝내 투항하길 거부한다면, 하루아침에 정벌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오. 하여, 이번에도 나는 대마도의 도주와 유력 가문들을 회유할 생각이오. 어차피 그들을 모조리 도륙한다고 하더라도 이곳에 다스리게 할 자를 따로 두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이오.”
“일기도도 그렇지만, 대마도의 왜인들이 우리를 기만할까 우려되지 않나요?”
앵도는 대마도 도주 등이 거짓으로 항복한 후 몽주의 주력이 철군한 뒤에 바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오. 하나, 만약 그리한다면 그때는 오랜 시간을 두고 진정으로 멸살할 것이오.”
몽주가 아내의 우려를 불식하며 쓰시마를 정벌하려는 의지를 재확인시키자, 앵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을 쳐 고려로 왜구가 가지 못하게 하려는 건 잘 알지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열심으로 할 일인지는 모르겠어요. 고려 도당에서 과연 그 공을 높이 사줄까요?”
“도당이 몰라준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은 알아주지 않겠소?”
몽주는 앵도의 손을 잡아 도닥이며 설득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에 앵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 와중에도 포성이 연이으며, 철구와 석환이 이즈하라의 연안을 범하고 있었다.
* * *
이즈하라 성을 함락한 것은 첫 방포 이후 한 시진가량 흐른 후였다.
포구에서 있었던 왜인 무사들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어선의 장벽을 산산이 부숴 끊고, 몽주의 함대가 포구에 접근하였을 때, 무사들 중 대부분이 도망쳤고, 소수의 남은 이들도 대부분 다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개중 비교적 멀쩡한 자를 앞세워 이즈하라 성으로 길을 잡으니, 성에는 이미 도주가 없었다.
살펴보니, 아주 급하게 도망친 흔적만이 남았는데, 우습게도 귀중품은 가져갔으면서 정작 식량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에, 탁기와 요시히로는 곧바로 추격하기를 청하였으나, 몽주는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이곳의 지리가 몹시 험준하여 추격하기 어렵소. 자칫 되려 역습을 받을 수 있지 않겠소?”
“하나, 어찌 되었든 소씨를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요시히로가 되묻자, 몽주는 그의 생각을 밝혔다.
“소씨 도주가 양초를 그냥 두고 급하게 도망쳤으니, 자연 이곳의 토호들에게 의탁하려 할 것이오. 그러니 만약 토호들을 하나하나 항복시키고 토벌한다면 소씨 도주도 더는 도망치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이오.”
느린 방법이나, 정석이었다.
몽주는 쓰시마에서 급하게 움직일 생각이 없었는데, 이미 말했듯 쓰시마의 지리가 너무나 복잡하고 험준하기 때문이었다.
쓰시마는 평지가 거의 없고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산지인 터라, 화포와 더불어 추격하기 불가능했다. 만약 화포가 없다면 많지 않은 군병을 가진 몽주로서는 크게 위험한 경우를 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쓰시마 도주를 따르는 무사들은 이키의 슈고와 비슷한 200여에 불과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만약 도주가 쓰시마의 왜인들을 부려 모두에게 무기를 들고 저항하게 한다면 크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몽주가 결정하자, 요시히로가 도주의 무사들 중 생포한 자들을 데려와 쓰시마의 토호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었다.
“도주가 도망친 방향으로 볼 때, 이나(伊奈)의 쇼야(小野)씨에게 의탁하려 함이 분명합니다.”
‘이나’라는 곳은 쓰시마를 상하로 구분하는 기준인 아소만(淺茅灣)의 남쪽 지역으로 쇼야씨는 쓰시마의 4대 가문 중 하나였다.
몽주는 대략적으로 그려진 쓰시마의 지도를 보며, 다른 가문들의 위치도 표시하게 하였다.
그러자 아소만 북부에 있는 오자키 지역의 소다(早田)씨, 그리고 상(上) 쓰시마에서도 북단에 위치한 지다류(志多留)의 다게다(武田)씨가 표시되었다.
“다행이군. 모두 해안에 가까운 곳이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농사가 불가능한 쓰시마인 만큼, 쓰시마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어획과 무역, 그리고 해적질뿐이었으니, 모두 바다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이미 날이 기울고 있으니, 내일 나아가기로 한다. 탁기, 성 안을 대략 정리하고는 병사들을 쉬게 하게.”
“알겠습니다. 하면, 내일 쇼야씨부터 치실 예정이십니까?”
“아마도 그렇지 않겠는가.”
* * *
다음 날, 몽주는 일백의 사병들과 화포 5문, 그리고 소선 4척을 이즈하라에 남겨 두고 다시 출항하였다.
다만, 어제 말한 것과는 달리, 목표는 지다류의 다케다씨였다.
‘곧바로 추격하지 않음으로써 소씨 도주를 방심케 하되, 대신 북쪽의 토호부터 복속시키고, 도주를 공격한다면 그가 달아날 곳이 없지 않겠는가.’
몽주는 창으로 찔러 물고기를 잡는 대신 그물을 던져 잡고자 한 것이었다.
다케다씨는 곧바로 항복하였다. 몽주의 함대가 앞바다에 등장하자마자, 마치 올 줄 알았다는 양 순식간에 복종의 뜻을 밝힌 것이었다.
“다케다씨가 말하길, 가문 대대로 고신(告身)를 받아 아끼고 있다면서, 고려에 신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복이 통역하여 전한 것이 흥미로웠다.
고신은 대마도의 인사들이 고려 조정으로부터 받은 교지를 의미하는데, 일종의 벼슬을 하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물론, 그것은 쓰시마의 왜구를 회유하고자 한 것으로, 고려가 충만하던 시기에는 적절히 녹을 주어 관리하였지만, 근자에 이르러서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사실 고신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유력한 왜구라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복종의 관계를 맺는 데에는 꽤 괜찮은 명분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 이곳의 주인이 될 것이니, 그대는 이미 고려의 신하로서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에, 다케다씨의 가주는 연신 굴신(屈身)하며 따를 것을 맹세하였다.
“이곳에 소씨가 도망쳐 온다면 반드시 사로잡아 대령해야 할 것이다. 내 명을 수행한다면 너희는 내게 크게 쓰일 것이고, 만약 소씨가 이곳에 도망쳤음에도 도와주거나, 놓아준다면 다케다씨는 사라질 것이다.”
몽주가 반쯤 협박하니, 다케다 일족이 몸서리를 치며 반드시 명을 따를 것이라고 소리 높였다.
그렇게 다케다씨를 굴복시키고 몽주의 함대가 향한 곳은 아소만이었다.
아소만 북면 오자키의 소다(早田)씨도 몽주에게 곧바로 항복하였고, 다케다씨와 마찬가지로 주종의 관계를 맺었다.
이어, 아소만을 가로질러 남면에 있는 이나(伊奈)의 쇼야(小野)씨에게로 쳐들어가니, 그 또한 항복하겠노라 하였다.
“거참, 고신을 대체 얼마나 뿌린 거야?”
항복하며 바친 문권을 보니, 그 또한 소야씨가 고려 조정에서 받은 고신이었다.
자기들이 고려의 신하이니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앞서 다케다씨는 물론, 소다씨도 고신을 가지고 있었으니, 쓰시마의 4대 가문 중 세 가문이 고신을 얻었던 것이다.
어차피 어지간하면 존속시킬 생각이라 고신을 명분으로 주종의 관계를 맺을 수 있어 좋긴 하지만, 쇼야씨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소씨 도주는 어디 있는가.”
몽주가 하문하자, 쇼야씨 가독이 그들이 자기들 양곡을 일부 강탈하여 남쪽으로 도망쳤다고 대답하였다.
“사실이렸다?”
쇼야씨의 가독이 사실이라고 열심히 주장하였으나, 몽주는 쇼야씨의 집과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게 하였다.
“만약 도주를 숨겨 두었거나 다른 방향으로 도망친 것이 드러난다면, 쇼야씨는 몰살당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곤, 배에서 내린 화포 몇 문으로 쇼야씨의 사택을 겨누게 하니, 쇼야씨의 가독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얼마 후 몇 번이나 머뭇거리던 그가 마침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니, 소씨 도주가 도망친 것은 사실이나 다만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도주하였음을 고백하였다.
“하면, 거짓을 고하였다는 것인가!”
몽주가 대노하여 크게 소리치니, 쇼야씨 일족이 모조리 부복하여 살려 달라 사정하였다.
소씨 도주가 자신이 도주한 방향을 사실대로 밝힌다면 후에 돌아와 보복하겠노라 협박하였다는 것이었다.
하나, 봐줄 생각이 없는 몽주는 쇼야씨의 가독과 그 아들들을 붙잡아 태를 열 장씩 치게 하고 그중 장남을 인질로 삼아 버렸다.
“만약 아직도 거짓이 있거나, 후에 소씨 도주가 도로 이곳에 왔을 때 그것을 고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진정으로 모조리 도륙할 것이다.”
몽주는 쇼야씨 일족에게 단단히 다짐시키고는 인질과 더불어 다시 바다로 나갔다.
쓰시마를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며 주요 토호들을 복속시켰으니, 일단 이즈하라로 돌아가 소씨 도주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고자 한 것이었다.
한데, 의외로 빠르게 소씨 도주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몽주의 함대가 이즈하라에 들어서자마자, 이즈하라를 지키는 군병을 지휘하는 탁가 무인이 다케다씨로부터 선편(船便)으로 서찰이 왔다고 하였다.
그 서찰의 내용이란 소씨 도주 일당이 지다류에 왔는데, 아직 그 일당의 규모가 커서 자기들로서는 잡아들이기 어려우니 몽주가 와서 잡으라는 것이었다.
앵도가 혹시 다케다씨가 배신하여 소씨 도주와 더불어 함정을 판 것일 수 있다고 하며, 이미 날이 기울었으니, 가더라도 내일 날이 밝을 때 가라고 청하였다.
다들 그 말이 옳다 하여, 몽주는 이즈하라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출항하여 지다류로 향하였다.
한데, 지다류 앞바다에 닿으니, 먼 곳에 배 몇 척이 멀어져 가고 있는 게 보였다.
“도주 일당이 탄 것일 수도 있네.”
화극의 말에 일리가 있어, 몽주가 그 배들을 추적하게 하였다. 바람이 제법 불어 풍랑이 다소 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범선으로 노선을 쫓기 용이하였다.
채 한 식경도 되지 않아, 그 배들을 쫓을 수 있었고, 이어 화포로 맹공격하였다.
수십 발이 방포되자 그중 명중포가 나오기 시작했고, 얼마 후 작은 노선들은 하나둘씩 박살이 나 버렸으니, 몽주는 박살 난 배 주변에서 살아남아 구조를 간청하는 자들을 볼 수 있었다.
“살려 주시오!”
그중 어눌하나마 분명한 고려말로 구원을 소리치는 자도 있었다.
하여, 물에서 꺼내 올리니, 뜻밖에도 그가 소씨 가주, 즉 소 쓰네시게였다.
그는 물을 먹은 것을 한 사발이나 토하고는 혼미한 중에도 몽주 앞에 부복하여 애원하였다.
“소신의 가문은 고려의 신하이니, 부디 자비를 바라나이다.”
그러면서,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는데, 그건 기름종이에 싸인 고신이었다.
‘뭔 부도수표도 아니고, 무슨 고신을 이렇게 남발했냐.’
어쨌든 당장 소 쓰네시게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기에, 그를 가두게 하고, 해역에 남은 소씨 일파들을 가능한 구하였다.
이어, 지다류에 닿아 다케다씨를 치하하고 이즈하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도 서찰이 와 있었다.
“…….”
그 서찰을 보자, 소씨 도주를 붙잡아 흥겨웠던 마음이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그것은 규슈탄다이 이마가와 사다요로부터 온 것으로, 그가 이키섬에 있으며, 수만의 병력으로 이시다 성을 포위하고 있다고 밝히고, 내일 안에 이키섬으로 몽주가 오지 않는다면 이시다 성에 있는 몽주의 사병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라고 하였다.
몽주는 서찰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곧바로 탁기에게 명하였다.
“탁기, 요시히로를 포박하게.”
몽주의 명에 바로 곁에서 태연히 있던 요시히로를 탁기가 기습하니, 부지불식간에 당한 공격에 그가 나뒹굴었고, 다음 순간 그의 목에 탁기의 검날이 닿았다.
검에 목이 겨눠진 채 포승에 묶이는 요시히로의 표정은 당황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것이 연기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또 요시히로를 사로잡는 것이 장차 유효하게 쓰일지, 아닐지도 알 수 없었다.
하나, 일단은 그리해야 했다.
“료슌이 이키섬에 있다 하는군. 내 병사들의 목숨을 두고 협박하고도 있고. 이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
냉정한 시선으로 몽주가 묻자, 요시히로의 표정이 한층 더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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