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24)
원민 호민(怨民 豪民)
“곤란하네요. 곤란해요.”
재상이 머리를 헝클면서 중얼거렸고, 그 옆에서 두신은 팔짱을 낀 채 근육을 불끈거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몽주는 이상하게 죄인이 된 기분으로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는데, 그건 왜국이 화약 제조법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왜국이 화약 제조법을 알게 된 걸 가지고 재상이나 두신이 몽주를 탓한 건 아니었다.
그들도 설마하니, 그렇게 빠르게 왜국이 화약 제조법을 알아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고, 그래서 몽주가 고려에서 화약을 거래한다고 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었다.
“일본이 얼마나 빠르게 화약을 얻은 거지?”
재상이 묻자, 두신이 답하였다.
“원래는 1543년이었을걸. 거의 170년쯤 빠른 거네. 포르투갈 표류인 덕에 구했지.”
“쩝, 많이 빠르네. 이제 어떻게 바뀔까.”
“그걸 예상할 수가 있나.”
역사에서 일본이 화약 제조법을 구한 시기는 전국 시대였고, 화약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철포(鐵砲 : 뎃뽀)를 통해 일본의 역사를 결정지었다.
그리고 일본이 화약을 얻은 지 50년 후에는 임진왜란을 통해 한국의 역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최악으로 생각하자면, 일본이 한반도를 침공하는 거지. 무로마치 막부가 화약을 구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화약 무기를 사용하게 된다면, 일본의 남북조 시대는 역사보다 빠르게 종결될 수도 있고, 그렇게 일본이 통일된다면, 통일 일본은 언제나 대륙으로 진출을 꿈꿨다는 역사의 교훈으로 비춰 볼 때, 일본이 한반도로 진출하려고 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에도 막부가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잖아. 보다 중앙 집권적인 성격을 띤 에도 막부에 비해 무로마치 막부는 연합 정권이란 말이지. 통일이 되었다고 해도 진정한 의미의 통일은 아니잖아?”
“막부가 화약 관리를 잘한다면, 그래서 화약의 제조법을 일본 내에서 독점하는 데 성공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이룰 수도 있지.”
두신의 말에 재상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다가 몽주를 바라보았다.
“료슌의 배에 화포는 없다고 했죠?”
“네. 화포를 쓴 흔적도 없었어요.”
“다른 형태의 화약 무기는요?”
“적어도 그 배 안에서 볼 수 없었어요. 하지만, 폭죽 같은 거야 제가 준 것도 있으니,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죠. 그리고 화포의 개념이야 왜국에도 알려져 있으니, 시간만 좀 지나면 청동제 화포 정도는 만들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어쨌든 몽주 씨가 본 건 함에 든 화약 가루뿐이고, 무기는 없었다는 거죠?”
“네.”
“흠…….”
몽주의 대답을 듣던, 재상은 검지와 엄지로 턱을 매만지며 뭔가 고민하였다.
왜 그러나 싶을 때 재상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쩌면, 생각처럼 최악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함에 든 화약이 의외로 귀한 것이었을 수도 있어요.”
“화약이야 그때는 다 귀한 거죠. 특히 일본한테는.”
“아뇨. 그게 아니라, 일본이 화약 제조법을 얻긴 했지만, 그렇다고 대량 생산법을 구한 건 아닐 거라는 말입니다.”
“음.”
“만약 염초를 자연 발생한 함토(醎土)에서 추출하여 얻은 거라면, 화약의 생산량이 많을 수가 없겠죠. 물론, 국가적인 차원에서 함토를 모은다면 분명 많은 양이긴 하겠지만, 그에 드는 비용과 노력이 굉장히 클 수밖에 없죠.”
확실히 몽주의 화약을 견본으로 따라 한 것이라면, 염초밭을 조성하는 것까지는 알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료슌의 블러핑에 제가 당한 건가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화약을 얻은 막부와 척을 지지 않은 건 잘한 겁니다. 이미 말했듯 국가적 단위의 세력이 나서서 함토를 구한다면 꽤 많은 양의 화약도 만들 수 있을 테니, 그 화약의 사용 목표가 되는 건 절대 피해야죠.”
재상의 말을 들으며, 몽주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한 것이고, 막부가 몽주의 화약을 따라 할 수 있을 줄 몰랐던 것처럼, 염초밭 조성법을 막부 측이 알고 있을 수도 있는 법이다.
하나, 화약 제조법을 몰랐으면서, 염초밭 조성법은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클 리는 없으니, 막부라는 세력의 단위에 비해 화약의 생산량이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막부가 화약 제조법을 알아냈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화약 제조법을 알아냈지만, 대량 생산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위기감의 크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몽주가 조금 안도하자, 두신이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나섰다.
“제 생각에 화약 제조법이 일본에 퍼진 이상, 염초밭을 조성하는 법을 일본이 아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봐요. 화약을 못 만들 때는 그 성과가 의심스러워서 막부에서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겠지만, 일단 화약을 만들 수 있다고 증명된 이상, 함토와 같은 토양을 만들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쓸 테니까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일본이, 적어도 막부는 화약을 충분히 구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대해야 할 거예요. 사실 제가 걱정하는 건 따로 있는데, 그건 왜구에게 화약이 흘러들어가는 거죠. 막부가 화약 제조법을 관리하긴 하겠지만, 아무리 남북조가 갈려 있다고 해도 교통이 연결된 이상 얼마든지 새어 나갈 수 있거든요.”
“아, 그러네요.”
“그래서 말인데, 차라리 막부 측에 화약을 가급적 많이 파는 게 나을 것 같거든요. 화약만으로 해결될 건 아니겠지만, 화약이 많으면 많을수록 북조의 전력이 상승하는 건 맞을 테니까요.”
두신은 아예 북조를 지원해서 일본의 남북조 시대를 일찌감치 종결하자는 것이었다. 왜구의 근원이 남조 세력인 만큼 남조가 혁파된다면 왜구 발생도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찍 통일되면, 아까 말한 대로, 일본이 외부로 확장하려고 들 수도 있어.”
재상이 다시 일본의 확장 성향을 지적하자, 두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였다.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일단 남조를 몰락시킨 다음에는 지방의 슈고다이묘들을 지원해서 막부로의 중앙 집권화를 막는 게 좋을 것 같거든. 규슈는 왜구화될 가능성이 높으니 일단 빼도, 주코구 지방, 시코구 지방, 그리고 칸토 지방의 세력을 키우는 거지. 시간적 여유가 좀 있을 테니, 그때면 몽주 씨의 제주에서 곧바로 일본의 전역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세 사람은 두신의 ‘일본 분열 책동’에 대한 아이디어를 두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적으로 해 볼 만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지만, 아직은 구체적으로 생각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주제가 옮아 간 것은 선박 건조였다.
일본과 교역을 하든, 분열 책동을 하든 어쨌든 해상으로의 교통이 보다 원활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저희도 인천에 가서 건조 중인 배를 봤는데, 겉보기에는 거의 완성된 것 같더군요.”
“어제 보고 받은 것을 기준으로 완성도를 따지자면 한 육십 퍼센트 정도죠. 내부 설비 공사는 이제 시작이고, 돛이나 각종 삭구도 아직 장착한 게 아니니까요. 물론, 고려에서 그걸 만든다고 가정하면 팔 할은 건조한 셈이죠. 전자 설비나 편의 시설을 고려에서 설치할 건 아니니까요.”
지금 인천에서 건조 중인 범선은 가급적 ‘클래식’한 면모를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근대 시절의 범선과 똑같을 수는 없었다.
그 시절 범선의 선내 환경은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비인간적인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현대에서 만드는 통합 범선은 그 선내 시설과 통신 및 운항과 관련된 부분 중 일부에 있어, 현대 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설계도는 잘 옮기고 있습니까?”
“좀 실수도 있었지만, 이번에 가서 수정하면 거의 다 옮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진짜 외우는 게 너무 빡세요.”
‘통합 범선’의 부품 수는 당연히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그 종류를 구분하면 540여 종에 이르렀고, 그중 비슷한 걸로 모으고, 고려의 배에 이미 구현된 것을 추려서 구분하면, 몽주가 제주로 옮겨야 할 부품은 총 88종이였다.
몽주는 전체 범선의 형태를 먼저 기억해서 옮기고, 그에 필요한 부품의 대분류를 나눈 뒤, 다시 소분류로 구분하여 도면을 작성하는 식으로 옮겼으니, 고려로 가기 전날은 언제나 암기하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고려의 배바치들이 가진 경험과 실력이 상당하여 몽주가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지 않아도 대략 그 부품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아직 제주에서 ‘통합 범선’의 건조가 시작된 건 아니었지만, 몽주가 배바치들에게 어설프나마 설계도를 보이고 설명을 해 주자 이내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하기야 ‘통합 범선’도 결국은 목범선이니, 목선이자 범선을 만들며 살아온 그들의 이해를 넘어설 수준은 아니었다.
당대의 기술자들이 구현하는 것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해 주자, 몽주는 왜국으로 가기 전부터 범선에 들어갈 목재부터 준비시켰다.
“물에 직접 닿는 배밑판 및 삼판용으로 소나무와 전나무를 건조하고 있고, 용골 및 갑판용으로는 졸참나무나 비자나무, 그리고 상수리나무를 준비시키고 있어요. 아, 그리고 키는 조록나무로 만드는 게 좋다고 해서 그것도 잘 말리고 있죠. 조록나무는 한반도 일대에서 완도랑 제주도에서만 자생한다니, 운이 좋았죠.”
사실 튼튼하면서, 물과 소금기에 강한 목재로는 참나무, 백양나무, 전나무 등이 꼽히는데 그중 몽주가 제주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전나무 정도였다. 백양나무는 신대륙에나 있을 시기이고, 참나무의 경우도 제주에서 자생하는 참나무의 종류는 왜소한 편이라 그 쓰임새가 많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배를 많이 만들수록 인력 문제가 커지겠네요.”
“그렇죠. 사실 제주의 궁극적인 문제점이 그거죠.”
몽주가 걱정스레 말한 것처럼, 제주의 인구수는 몽주의 가장 큰 취약점이었다.
예상보다 많아서 당장 산업을 육성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 본격적으로 바다로 나가고 교역하고자 하면 인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주는 여초 사회인 터라, 남성의 수가 상대적으로 더 부족했다.
지금도 몽주의 선단이 한 번 출항하면, 홍로현 일대에 남자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몽주가 근심어린 표정을 짓자, 재상이 문득 뭔가 떠오른 양 말하였다.
“신돈과 이인임 사이에서 충돌할 조짐이 보인다고 했죠?”
“예. 근데 그건 왜요, 갑자기?”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고려 내정에 틈이 보일 수도 있겠죠? 그러면 고려 백성들을 제주로 빼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음…….”
얼핏 가능할 법도 했다. 굳이 신돈과 이인임이 크게 충돌하지 않더라도, 고려 내에 여전히 유민(流民)으로 떠도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잘 설득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심지어 몰래 빼돌리지 않더라도, 유민을 제주가 데려가겠다고 도당에 알리면 오히려 반가워할 수도 있었다.
“근데 제주로 오려고 할지 모르겠네요. 아직 제주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 좋을 테니까요. 떠돌아도 뭍에서 떠도는 게 낫다고 여길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강제로 잡아가기도 그렇고…….”
“강제로 잡아 오시죠.”
“예?”
재상이 뭘 그리 고민하느냐는 식으로 말을 이었다.
“원래 살던 것보다 더 잘 살게 해 준다면 결과적으로 좋은 거잖아요. 다른 일은 꽤 잔인한 결정도 잘하시더니, 왜 이번에는 우유부단하게 구시나요? 하하.”
“아, 그랬나요? 하하, 뭐, 일단 알아보기는 하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인데, 그렇다고 해서 너무 많이 한꺼번에 유입시키지는 마십시오. 교역만 잘된다면 어지간한 인구 증가는 지탱하겠지만, 그 외에도 토착민과 외부인 간에 갈등 같은 문제도 일어날 수 있고, 범죄자나 악인, 혹은 첩자도 섞여서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몽주는 이어진 두신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신돈과 이인임 말인데요. 일단 지난번에 그 이간질이 통한 것 같기는 하거든요. 분명 처조부가 보낸 편지에도 영공과 수시중 간에 다툼이 있어 그 당여들도 여기저기서 서로 싸우고 있다고 했어요. 근데, 그 싸움이라는 게 기세 싸움 내지는 권세 겨루기 정도고, 실질적인 충돌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어요. 또, 신돈과 이성계 사이에 뭔가 논의가 오간 것 같지도 않고요. 일이 제대로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저희가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양분한 자들이 내내 평화적으로 양립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특히 견제하는 마음을 어느 한쪽이라도 분명히 가진다면 더욱 그렇죠. 몽주 씨가 신돈으로 하여금 이인임과 최영의 연합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하였다면, 시간이 문제일 뿐, 분명 크게 대립하긴 할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신돈도 세력을 키우려할 것이고, 자연히 이성계를 못 본 척할 수 없겠죠. 다만, 아무래도 최영과 이성계가 워낙에 친한 사이라는 게 잘 알려져 있으니, 신돈도 신중하게 판단하려고 할 겁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지만 않을 뿐, 실제로 물밑으로 이미 대화가 오가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세 사람 사이의 대화는 만약 신돈과 이인임의 관계가 쉽게 대결 양상으로 번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그러고도 한참이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몽주가 보낸 두 번의 서찰로 인해, 이인임이 최영과 손을 잡고 권력을 손에 쥐려 할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은 신돈은 그럼에도 한동안, 적어도 겉으로는 평상심을 유지하였다.
하나, 그가 요동으로 보낸 첩자가 요동공이 근래에 군병들을 직접 조련시키고 있는데, 그 훈련 방법이 기마를 다루는 호인들을 상대하는 것이기보다는 보병 위주의 적군을 상대하는 쪽이라는 내용을 보고하자, 평정심으로 유지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신돈이 보기에 최영이 보병 위주의 적을 상대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고려로 군병을 몰아 와 싸울 때를 대비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요동이 비단 호인만 접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와도 닿았으니, 명군을 상대로 가정하고 한 훈련일 수도 있고, 그런 것 없이 그저 일반적이고 기초적인 훈련일 수도 있었다.
하나, 이미 이인임에 대한 의심을 품고, 그와 최영이 작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머릿속에 뿌리박힌 신돈으로서는 도저히 좋게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신돈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먼저 금상(왕우)에게 친근히 다가가 조언하며, 이인임의 당여들을 권력의 핵심에서 슬슬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이인임 또한 그런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할 수 없었으니, 그가 직접 신돈을 청하여 만나 어찌 된 일인지를 묻기도 하였다.
하나, 신돈은 아무렇지 않게 모른 척하는 이인임에게 더욱 괘씸한 마음만 더 품게 되었으니, 그 대화가 잘 진행될 리가 없었고, 이인임도 신돈의 태도 변화에 위기감만 높이 살 뿐이었다.
이에 이인임도 신돈을 감시하였는데, 신돈의 당여 중 염흥방이 동북면으로 수차례 행차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자연히 신돈과 이성계 사이에 모종의 교감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날, 그의 조카사위 하륜이 제주현백으로부터 수시중만을 믿다가 크게 당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는 말도 떠올랐으니, 정말로 자신을 대상으로 어떤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이인임 또한 본격적으로 신돈을 견제하고 자기 세력을 구하려고 움직였다. 그중엔 최영과 의견을 나누는 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 일 또한 신돈이 주시하던 중이라 알아차리게 되었고, 신돈은 과연 자신이 의심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단정하였다.
그렇게 오해(?)가 오가고, 의심이 깊어지면서, 서로 상대의 당여들을 권력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애를 쓰니, 그저 어린 금상은 두 명의 섭정 사이에서 ‘새우등’이 터지는 불쌍한 상황에 놓일 뿐이었다.
국정은 소리 없는 정쟁에 파묻히기 시작하였고, 지방 관직들 또한 각기 닿은 연줄이 요동칠 때마다 임하고, 면하기를 수시로 반복하니 행정이 제대로 시행될 리가 없었다.
어지간한 벼슬아치들과 호족들은 그저 영공과 수시중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고, 살아남기 위해 도박에 가까운 선택을 하여 연줄을 만드는 데 급급하였으니, 나라 안 사정이 더욱 문란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이성계로부터의 서찰이 당도한 건 바로 그 즈음으로, 몽주가 쓰시마섬, 아니 이제 대마도(對馬島)로 공식 명명한 섬에서 돌아온 지 보름 만이었고, 동시에 현대에서 다시 천몽으로 들어온 지 나흘 만이었다.
대마도의 체제를 정비하고, 한글과 한국어를 교육시키기 위해 제주 4성 출신 교리(敎吏)들과 논의를 하던 중에 선편이 도착하여 서찰을 받았는데, 몽주는 그 서찰의 발송인이 누군지를 확인하고 급하게 행재청의 집무실에 홀로 들었다.
그리고 서찰을 펼쳐 훑은 직후, 몽주는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며 기뻐하였다.
……염 제학이 벌써 세 번이나 찾아와 영공에 대한 좋은 말을 하며, 나로 하여금 그와 친분하길 유도하고 있으니, 지난날 현백이 내게 청한 것과 닿은 일이라 생각하고 있소.
현백이 직접 영공에게 청하여 그가 나를 찾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먼저 생각해 나를 가까이하고자 하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오.
어느 쪽이든 영공이 나와 더불어 국사를 논의할 마음을 품었다면 솔직히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도리는 없소. 하나, 현백이 알고 있듯 나는 이미 따로 세운 뜻이 있으니, 내가 거동하는 바는 그 뜻에 부합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오.
다만, 그 뜻이 자칫 고려왕실에 반하는 것으로 호도될 수가 있어, 함부로 밝히지 못하니, 만약 현백이 영공을 배알할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곡해됨 없이 전할 수 있지 않겠소?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소리 없이 환호하던 몽주는 다시 한 번 이성계의 서찰을 정독하며 그의 생각을 파악하였다.
지난번 함주에서 이야기할 때는 신돈과 손을 잡는 것을 그렇게나 꺼려 하더니, 두어 달 사이에 생각이 많이 바뀐 듯했다.
그 변화의 이유가 무엇인지 서찰 속에서 찾을 수 있을까 살펴보니, 대략 그 이유 중 일부가 될 만한 것이 눈에 띠었다.
……이러니, 나로서는 솔직히 답답한 마음이 없지 않소. 차라리 지난날 궁벽했던 시절일지라도 현백과 더불어 속내를 털어 논하던 게 그리울 따름이오.
특히 목은 선생(이색)은 그의 뜻이 고상하고 선의를 따름을 인정하나, 아쉽게도 너무나 이상만을 추구하니, 내가 하려는 일마다 함부로 간섭하기를 쉬지 않고 있소.
근자에는 내 사병들 중 호인의 피가 섞인 자들을 솎아내라 요구하니,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호통을 칠 뻔하지 않았겠소.
또, 동북면의 힘든 사정을 뻔히 알면서 서원을 짓게 토지를 내어 달라고도 하고, 나로 하여금 금상에게 주청하여 섭정들을 파하게 하라며 거듭 요구하니, 마음속으로 그저 기가 찰 따름이오…….
넋두리 같은 이성계의 말 속에는 유자들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그가 그의 영지를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받아들인 유자들이지만, 그리고 실제로 경영에 도움이 되긴 했겠지만, 그 방향성은 유가 사상 일변도였을 터이니, 현실을 다스리는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포은 정몽주나 삼봉 정도전 같은 경우라면, 좀 더 현실을 직시할 줄 알겠지만, 당장 그들의 스승이 직접 나서서 유자들의 의견을 통틀어 대변하고 있으니, 다른 말을 하기 어려울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니 이성계는 그가 심왕위를 노린다는 속내를 눈곱만큼도 내비치기 힘들었을 것이고, 자연 그런 답답한 마음은 그로 하여금 심왕위에 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 다른 방법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몽주가 전날에 권하였던 신돈과의 연대였을 것이다.
몽주는 아무래도 자신이 조만간 개경으로 가서 신돈과 만나야겠다고 여겼다.
신돈과 이성계의 연대가 성사되도록 ‘기름칠’도 해야겠고, 그 과정에서 콩고물도 얻어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몽주는 은근 급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집무실을 나가 교리들과 더불어 밤새도록 일에 매진하였다.
개경으로 가기 전에 제주에서 처리할 일도 많았던 것이다.
왜국에 가 있는 동안 쌓인 일이 산더미 같은 건 기본이었고, 현대에서 베껴 온 범선 설계도를 마무리하면서 그 건조를 위한 준비 작업도 지휘해야 했으며, 석황촌의 산업 상황도 살펴서 조절하기도 했다.
더구나 개경으로 가는 참에 고려와 교역하기도 해야 했으니, 그에 대한 준비까지 하느라, 칠 일 동안 제주의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하며 스스로를 학대하듯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죽어요.”
늦은 밤에야 일을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온 몽주가 앵도에게 다음 날 아침에 출항할 것임을 알리자, 그녀가 조금은 화가 난 표정으로 만류하였다.
“하하, 걱정 마시오. 나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소.”
……라며 퀭한 눈으로 웃음을 지어 주었으나 앵도에겐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복을 불러, 출항을 삼 일 미룬다고 전하도록 대신 명하였으니, 몽주가 말릴 새도 없었다.
“어허, 휴식이야 배에서 취하면 그만인 것을…….”
“저도 배를 많이 타 보았으니, 그게 거짓임을 잘 압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말하지만, 내가 보기보다 튼튼해서…….”
“하면, 잘되었군요.”
“……?”
무슨 뜻인가 싶었는데, 앵도가 몽주의 손목을 잡고 안방으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자, 잠깐, 나더러 쉬라고 하지 않았소? 이게 어찌 쉬는 것이오?”
“튼튼하다 하셨잖아요? 자내는 안 죽어도, 제가 죽을 지경이거든요!”
“자, 자내, 이러지 마시…… 헉!”
* * *
삼 일 후, 출항하기 위해 배에 오른 몽주의 눈매는 한층 더 까맣게 꺼져 있었다.
일하느라 체력이 떨어져 있었기에 익힌 기술로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쯔쯧.”
화극이 몽주가 겪은 고생(?)을 아는지 불쌍한 양 혀를 찼다.
어쨌거나 다섯 척의 배는 순풍을 받아 개경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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