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25)
* * *
대서(大暑 : 7월 23일경)즈음은 태풍철이라 항해가 두려운 시기였다.
몽주는 그의 선원들 중 제주 어민 출신으로 바다 경험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날씨가 변하는 것을 관찰하게 하였는데, 인주(인천)가 가까운 곳에 이르자, 그들이 구름의 모양과 파도 끝의 날카로움 등을 이유로 곧 폭풍이 몰려올 것임을 예견하였다.
하여, 인주에 기항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나아가 예성강 어귀에 닿을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강행하기로 하였는데, 그 탓에 항해 막판에 고생을 해야 했다.
생각보다 날씨가 변하는 것이 빨라 급한 물결 위에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강화도에 이르러 석모로도(席毛老島 : 석모도)와 대운도((戴雲島 : 교동도) 등 여러 섬 사이에 들어가자 먼 바다에서 몰려오는 큰 파도를 섬들이 한 차례 걸러 준 덕에 아주 위급한 상황에 빠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몽주는 내심 흡족함이 있었으니, 그건 선원들이 거친 물결 속에서 힘겨워하면서도, 결코 혼란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원들 중 태반이 두 해 전에는 바다 구경도 못했던 자들임에도, 여기저기 쏘다닌(?) 덕에 이제는 바다 사람으로서 이력이 제법 생긴 모양이었다.
덕분에 상황이 곤란했던 것에 비해, 별다른 피해 없이 몽주의 다섯 배들은 예성강 하구의 수군진에 기항할 수 있었다.
다만, 포구에 닻을 내린 직후에 한층 폭풍이 거세진 탓에 하적 작업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군진과 그 근방 마을에서 머물며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렸는데, 쉽게 날이 바뀌지 않아 이틀이나 더 머물어야 했다.
그 이틀째 밤에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소생 하륜입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오랜만이오. 한데 여긴 어쩐 일이시오?”
수군진 내 별채를 빌려 머물던 몽주는, 삿갓에 가의(加衣 : 도롱이) 차림으로 등장한 하륜을 안으로 청하였다. 이 궂은 날씨 속 비바람을 뚫고 온 하륜의 등장이 의미심장하기도 했다.
잠시 따뜻한 차와 더불어 날씨 이야기를 하다가 이내 그가 찾아온 용건에 대해 말을 나눌 수 있었다.
“이미 아실 듯합니다만, 지금 고려는 중란(中亂)의 위기에 닿아 있습니다. 수문하시중과 영공께서 크게 갈등하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몽주는 고개를 가벼이 끄덕여 알고 있음을 알리자, 하륜이 말을 계속 이었다.
“이미 고려의 유력한 자들이 그것을 알고 서로 눈치를 보며 웃전에 선을 대느라 바쁘니, 나라 안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학리들은 착취하느라 활개치고, 탐관들은 구휼미마저 탈복하니, 원망을 품은 백성들이 밤을 틈타 도주하여 도적이 되길 마다치 않을 지경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오. 한데, 그것을 내게 말하는 연유가 무엇이오? 나는 제주의 현백일 뿐, 뭍의 사정에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소.”
“아닙니다. 남방백께서는 도움이 되실 수 있습니다. 영공을 따르는 많은 신료들이 있으나, 그중 남방백이야말로 영공께서 가장 믿고 크게 쓰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거기까지 들었을 때, 몽주는 잠시 실소를 보였다. 신돈은 그를 가장 믿지도 않았고, 가장 크게 쓰지도 않았으니까.
물론 몽주도 신돈이 자신을 믿고, 잘 쓰길 바라지도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떠할지 모르나, 신돈과 몽주의 관계는 그저 서로 도움이 되기에 아우르는 척하고, 따르는 척하는 사이일 뿐이었다.
어쨌든 하륜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러니, 감히 남방백께 청하고자 합니다. 부디 영공께 고하여 수시중과의 갈등을 끝맺게 해 주십시오.”
“…….”
진담인가 싶어 몽주는 하륜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는데, 정말이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그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으로도 쓸 수 없는 말을 전하니, 몽주가 외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청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통하겠소?”
“하시면 될 것입니다. 한 번에 통하지 않더라도 여러 번 시도하시면 될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통할 때까지 고해야 할 일입니다.”
“허허, 자기 일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 아니오?”
“어찌 남방백께만 부담을 씌우려하겠습니까. 소생 또한 수시중께 연신 청하여 영공과 화해하시기를 열심히 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시중께서 그 청원을 받아들이셨소?”
“지금은 아니나, 언젠가는 제 뜻을 알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아…… 이거 참.’
몽주는 속으로 하륜의 미숙함에 탄식하였다.
그는 아직 역사에 기록된 탁월한 재상과 같은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현대에서는 어쩌다 보니 조금은 우스운 이미지를 가진 하륜이었지만, 그는 누가 뭐래도 조선의 기초를 닦아 낸 위인들 중 하나였다.
특히 조선 태종 대에 들어서는 재상의 반열에 올라 불도저와 같이 개혁을 밀어붙였으니, 그 모습은 결코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조금은 통하는 부분도 있긴 했다.
재상 하륜은 때에 따라 조정의 대세를 반하거나, 심지어 왕의 뜻에도 반하여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기도 했었으니, 지금 현실적으로 실행이 불가능한 말을 진심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몽주가 가만히 있자, 하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는 남방백께도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만약 당금의 사정이 악화되어, 수시중과 영공께서 서로 크게 충돌한다면 나라 안이 둘로 갈릴 것이니, 상인들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이곳은 정주 유씨(貞州 柳氏)가 크게 자리 잡은 곳과 가까우니, 만약 그들이 수시중의 편을 들어, 남방백의 행차를 막는다면 자연히 남방백께 큰 손해가 될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상인들이 활동을 줄이는 건 당연한 것이고, 또 예성강 하구와 개경 사이에 정주(오늘날 북한 개풍군)가 있으니, 권문은 아닐지언정 세족임에는 틀림없는 정주 유씨가 수시중의 편을 든다면, 신돈의 당여로 소문난 자신을 방해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나, 하륜이 알지 못한 것은, 애초에 신돈과 이인임이 충돌하길 바랐고,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 이가 바로 몽주라는 것이었다.
이미 왜국과 교역하기로 하였으니, 설령 고려와의 상행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위태롭지 않을 수 있었으니, 오히려 고려의 혼돈을 틈타 제주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몽주에게는 이익이었다.
“하나만 묻겠소. 그대가 지금 내게 영공을 설득하라 말하는 것은 백성들이 평온하길 바라기 때문이오?”
“남방백께서 알아주시는군요. 맞습니다. 정국이 혼란하면 백성들이 피폐해지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말인 즉, 영공과 수시중의 갈등이 백성들이 곤란을 겪는 근본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터?”
하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하자, 몽주는 다시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영공과 수시중 중 하나가 사라지면 될 일 아니오?”
“……!”
“당금의 고려는 영공과 수시중이 나란히 권력을 손에 넣은 것과 같으니, 이는 한 산에 두 수범(수컷 범)이 살고 있는 것과 같소. 시기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으나, 언젠가는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오. 종기가 생기면 차라리 빨리 곪게 하여 고름을 짜내는 게 나은 것처럼, 지금 급하게 영공과 수시중이 충돌하는 것은 크게 보면 더 나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오.”
“하, 하나, 그 와중에 죽어 나갈 백성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하륜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양 소리 높여 물었고, 그 말을 들은 몽주는 오히려 하륜이 안타까웠다. 세족의 일원임에도 세족답지 않고, 유학을 익힘에도 유가만을 좆지 못하니, 그 갈피를 잡지 못하는 순진함은 그냥 한심한 것만도 못할 뿐이었다.
몽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언제는 백성들이 평온한 적이 있었소? 그들의 힘겨움이 비단 영공이나 수시중 때문이고, 그 두 분의 갈등 때문이겠소?”
“…….”
지금 고려 백성들의 피폐한 것은 근본적으로 시대의 한계로 인한 것이지 않을까.
정치의 한계이고, 사회 문화의 한계이고, 지식과 교육의 한계이며, 산업과 상업의 한계이니, 나아가 시대에 함유된 모든 것들의 한계 탓이다.
누가 권력을 쥐든 말든, 권력자들이 내분하든 말든, 권력자가 선정을 베풀든 말든, 어차피 백성들의 삶은 시대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영공과 수시중이 다시 사이가 좋아진다고 해도, 백성들의 곤궁함은 같을 것이며, 둘 중 누가 홀로 권세를 쥔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일 것이오.”
“하면 백성들의 가여운 처지는 그저 운명이라 하시는 것입니까.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까?”
“아니오. 나는 권세를 다투면서, 괜히 백성들을 변명거리로 삼지 말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오.”
“……!”
몽주의 지적에 하륜이 크게 움찔하였다. 하기야 몽주의 말은 바로 그를 목표로 한 말이기도 했다.
“지금 하 정랑(正郎)은 진정 백성들을 위해 내게 청하는 것이오? 만약 그렇다 한다면, 그건 자기 자신조차 속인 비겁한 변명일 뿐이오. 차라리 하 정랑의 처백부(이인임)처럼 권력을 쥐기 위해 애를 쓰시오. 그렇게 권력을 쥐고 난 후에 그 권력으로 백성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돕는다면 그게 그나마 덜 비겁할 것이오.”
그 말을 기점으로 하륜의 고개가 크게 꺾였다,
몽주는 잠시 숨을 골라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괜한 말을 길게 했다는 생각에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
뭐랄까 하륜을 보면서 소위 지배층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겨우 바랄 수 있는, 그 형편없는 수준을 목격한 탓일 것이다.
시대적 한계를 뚫거나 그 기준을 끌어올릴 생각은 일절 하지 못한 채, 권세를 다루는 것만으로 나라와 그 나라 안의 세상을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그 처참한 수준 말이다.
그런 한심함 또한 시대적 한계로 인한 것일 테지만.
“소, 소생은 그저 어찌하면…….”
하륜은 한참이나 뭐라도 고하려고 애를 쓰다가 끝내 실의하곤 물러났다.
다시 삿갓과 도롱이(가의)를 걸치고 부슬비 내리는 어 둔 밤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은 얼핏 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몽주도 밤이 늦도록 생각에 잠겼다.
하륜과 말을 하다 보니, 그가 현대와 고려를 오가면서 느끼던 것들 중 하나가 절로 정리가 된 까닭이다.
현대와 전근대 사이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과학의 발전? 합리성의 발견? 어마어마한 지식의 축적?
그런 답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몽주가 깨달은 건 조금 달랐다.
과학의 발전이든, 합리성의 발견이든, 지식의 축적이든, 여타의 모든 소소한(?) 차이들이 모여, 결국에 인간의 시대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달라지게 한 것이 전근대에 비해 현대가 나아진 점이라 여긴 것이다.
현대인도 현대라는 시대적 한계에서 살고 있지만, 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난 관점으로 현대를 직시할 수 있다. 물론, 현대인이라는 의미가 현대를 사는 모든 개개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현대의 인간들을 대표하여 통칭할 수 있는 수준의 현대인은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현대에서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영위하는 현대인은 현대적 상황에서 그것이 최선임을 인정하나, 미래까지 포함한 통시적인 관점으로, 그것이 영원불변하지도 않고, 진정한 의미의 최선이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몽주가 생각이 깊어진 것도 그와 관련이 있었으니, 그가 천몽 속에서 바꿀 역사에 속한 수많은 소분류 중에서 영토나 군사, 흑은 체제 등의 뻔한 분류에 속하지 않는 부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를 어림이나마 가늠할 수 있을 듯했던 것이다.
그 밤은 생각하느라 무척이나 길었고, 동시에 생각하기에는 너무 짧았다.
* * *
하륜과의 만남 중 우연히 얻은 깨달음은 아쉽게도 당장 몽주에게 도움이 될 건 아니었다.
그 깨달음을 담은 현실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수십 년, 어쩌면 현대와 맞물린 역사가 그랬듯 수백 년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몽주가 천몽을 마치기 전에 유효한 변화를 이룰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당장은 그런 거대한 변화를 위한 도전을 할 수 있는 그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만이 최선이었다.
몽주는 개경으로 가 영당각에서 신돈과 만났다.
신돈과의 대화는 순식간에 정국의 사정과 이성계에 대한 것으로 주제가 넘어갔다.
시전에서의 거래 같은 건 몽주가 채 고하기도 전에 신돈이 허하는 것으로 끝났으니, 그만큼 그의 마음이 급한 탓이었다.
“현백이 보낸 그 서찰들 덕에 수시중과 요동공이 감히 내게 대적하여 수작을 부리려는 것을 알아내었다. 하니, 현백이 큰 공을 세웠다 할 것이야.”
“그저 경흥후가 삿된 생각을 한다 여겨 살폈을 뿐이옵니다. 그 어두운 곳에서의 음모를 살피신 건 오로지 영공께옵서 영민하신 덕일 것입니다.”
“하하, 현백이 그리 말할 줄 알았네. 하나, 분명 공임에 틀림없으니, 내 후에 상황이 편해지면 반드시 상찬할 것이다. 문제는…… 상황이 편해질 날이 올 것이냐는 것이지.”
잠시 웃던 신돈이 이내 진중하게 말을 하니, 그가 차라리 이성계와 손을 잡고 수시중과 최영의 연대에 저항하고자 함을 밝혀 왔다.
“실로 현명한 방책이옵니다. 수시중이 요동공과 손을 잡았다면, 그에 비견하여 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경흥후일 것입니다.”
“문제는 경흥후가 심왕위를 원한다는 것이지. 심왕에 얽힌 옛 사정을 생각하면 고려가 그것을 가납하기 어려움은 현백도 잘 알 것일세. 그러니 현백이 한번 말해 보게. 경흥후가 진정 심왕위를 염원하던가, 달리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인가? 직접 만나 보았을 터이니, 답해 보게.”
신돈이 기대 어린 시선을 던지며 물으니, 몽주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소신이 경흥후와 몇몇 인연이 있고, 지난번에 함주에서 다시 만나 말을 나누었으나, 그렇다한들 사람의 속을 어찌 함부로 단정할 수 있겠나이까. 다만, 드러난 것만으로 보자면, 경흥후가 왕작(王爵)을 원하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니, 만약 그가 그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결국 심왕위만이 그 길이지 않겠나이까.”
“흠…….”
신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침음하였다.
“어찌 고려의 신하가 되어서 함부로 왕칭(王稱)을 원한다는 말인가. 선왕께서 그를 경흥후에 봉한 것은 변방을 평안케 하고, 나아가 호인에게 넘어간 옛 고려의 땅을 회복하게 하고자 함이었거늘, 어찌 삿된 마음을 품었단 말인가.”
몽주는 잠시 신돈이 투덜거리도록 시간을 준 후에 다시 말하였다.
“경흥후가 그토록 왕작을 바라는 것은 얼핏 참람한 짓이기는 하나, 달리 생각하자면 오히려 고려의 품에 남고자 하는 마음을 엿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상황이 틀어졌을 때는, 경흥후가 함부로 봉기하여 사직을 따로 세우려할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신돈이 앉은 교상(交床)의 팔걸이를 내려치며 짐짓 분한 듯 소리쳤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옵니다. 하나, 이미 고하였듯 경흥후의 본뜻은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가 그걸 바랐다면, 경흥후에 봉해지기 전에 동북면에서 일을 꾸몄을 것이고, 악의적 괄시를 무릅쓰고 고려에 충성하여 험한 일을 감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몽주가 이성계를 위해 변명하니, 신돈이 조금은 진정한 양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하나, 그렇지 않더라도, 왕작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역신에 닿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심왕위는 고려왕위와 같은 위(位)임을 경흥후는 진정 모르는 것인가.”
신돈의 말투는 경흥후를 탓하는 것이기보다는,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 곤란함을 아쉬워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무리 그가 금상을 능가하는 권세를 쥐고 있다고는 하나, 왕위를 허락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건 자격의 문제이기 전에 자칫 그것을 허락했다가는 이인임이 고려 전체의 지지를 얻고 자신을 칠 명분을 줄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경흥후에게 심왕위를 약속하고 그와 손을 잡았다가, 그 소문이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이인임은 경흥후와 신돈을 한꺼번에 역당으로 몰아붙일 것이고, 그건 고려왕은 물론 대소신료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몽주는 다시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고, 그의 입에서 현대에서 강구해 온, 신돈과 이성계가 손을 잡을 수 있는 타협책이 흘러나왔다.
“하면, 경흥후에게 심양왕위(瀋陽王位)를 권하시지요.”
“심양왕?”
“심양왕은 심왕에 비해 격이 떨어지니, 이는 국왕(國王)과 군왕(郡王)의 차이에 비할 것입니다. 애초에 심왕이 심양왕에서 승작(陞爵)한 것임을 생각하면, 고려왕위와 비교해서도 심양왕위가 아래에 위치함을 알 수 있으니, 경흥후를 후에 심양왕에 봉하기로 약속한다고 하더라도, 범인들이 어찌 역모의 죄에 해당한다고 몰 수 있겠습니까.”
초대 심왕이었던 충선왕도 처음에는 심양왕이었다.
그 당시의 원나라는 물론, 역대 중화제국 내에서는 대체로 한 자로 명명된 왕위가 두 자로 명명된 왕위보다 우위였으니, 충선왕 또한 승작한 것이었다.
왕이라는 의미가 희미해진 현대에서는, 황제든 왕이든 단지 세력의 크기만을 두고 판별되는 것이라 여기나, 실제 왕정의 세상에서는, 특히 중국이 중심이 된 동아시아에서는 왕위란 세력만 있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원의 제국을 포함한 주변국의 인정을 얻음과 동시에 그 왕위의 역사와 전통에 유래가 있어야 했다.
때문에 참칭(僭稱)으로 격하됨을 피하면서, 왕위를 얻고자 한다면 고려와 그 주변에서는 심왕위만이 유일하였는데, 몽주가 심왕이 그 전에는 심양왕이었음을 지적하며 심양왕위로 이성계가 원하는 심왕위를 대신하라 권한 것이었다.
똑같이 심양을 중심으로 요동을 세력으로 하는 왕위이나, 심양왕과 심왕은 분명 그렇게 다른 것이었다.
“심양왕의 위를 생각하면, 결국 그 제안은 경흥후에게 최영이 가지고 있는 요동군공(郡公)의 작위를 주고 이어, 요동군왕으로 승작시키겠다는 약속을 권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구나.”
“바로 그것이옵니다. 그럼에도 소인배들 중에 함부로 곡해하는 자들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결코 겉으로 표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신돈은 눈을 감은 채, 몽주의 타협책에 대해 한참이나 골몰하였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로 교묘한 수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왕위를 바라는 자에게 왕위를 주면서도, 금상의 권위와 정통성에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번왕(藩王)을 삼음으로써 그 권위에 힘을 더하는 것이라 여길 수 있으니, 금상을 구워삶고 일을 추진하는 건 오히려 쉬울 수도 있었다.
그 후에 있을 상황도 맘에 들었다. 이인임과 달리, 이성계는 함께 고려를 얻고도 권세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심양왕으로서 북방에 머물게 된다면, 각자의 산을 가진 두 호랑이가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그에 생각이 닿자, 신돈은 미소를 띠며 다시 눈을 떴다.
“현백은 언제나 놀랍군. 내 지난 공을 후에 상찬하겠노라 약조한 것이 조금 전인데, 다시금 상을 내릴 공을 세우지 않았는가.”
“황공한 말씀이옵니다. 그저 단순한 방책에 지나지 않으니,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생각만으로 공을 인정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하나, 심왕위를 언급하기가 어려워 경흥후와 중대사를 논할 수도 없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방법을 일깨웠지 않은가. 경흥후와 논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현백은 공을 세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야.”
굳이 그렇게 공을 세웠다고 확인해 주니, 몽주는 지금이 신돈으로부터 ‘콩고물’을 얻어먹을 때라 여겼다.
“갑작스러운 청이나 긴히 드려야 할 말이 있사옵니다.”
“응? 무엇이냐?”
“제주에 역질이 돌아 초상을 치른 집들이 많으니, 밭을 고르고 말을 키울 이들마저 크게 줄었나이다. 사람은 말과 달리 한두 해에 키울 수 없으니, 소신이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여, 고심 끝에 혹여 뭍에서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궁리하였는데, 고려에 유민(流民)이 제법 생겨 곤란한 곳이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면, 유민을 데려가게 해 달라는 것이냐?”
몽주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조아리며 그렇다고 고하였다.
혼란한 정국과 왜구의 침탈로 더는 살던 곳에서 살 수 없던 많은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 떠도니, 그들은 걸인이 되고, 화적이 되어 흘러들어가는 군현마다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유민이 된 자들은 감히 나라의 다스림을 벗어난 역민(逆民)이니, 데려간다 한들 오히려 현백의 부담이 될 것이다. 차라리 노비를 사서 급한 손이나마 대신하는 것이 어떠한가.”
“그 또한 가능한 일이나, 고려에 유민이 떠도는 것은 나라에 큰 부담이니, 그를 감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나이다. 만약 그들이 제주에서도 함부로 떠돈다면 그때는 채찍으로 다스릴 것이니,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서 그들이 감히 채찍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몽주의 진정한 의도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데려가기 위함이었다.
노비를 구하는 것은 그 비용도 비용이지만, 제주로 넘어가는 수가 드러날 가능성이 컸다. 하나, 유민은 나라의 관리를 벗어난 자들이니, 보다 많은 이들을 데려가도 표시가 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허허, 거참…….”
몽주의 말에 신돈이 털털 웃음을 지었다. 그가 몽주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찌 언행하는 바 모두가 이리도 귀여울꼬.’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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