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26)
* * *
“장상(將相)의 씨가 어디 따로 있더냐!”
“적어도 넌 아니다, 이놈아.”
퍽!
너저분한 꼴로 잡혀 온 왈짜패 두목이 소리치자, 몽주가 손에 쥔 몽둥이로 그의 어깨를 후려갈겼고, 놈은 나 죽네 하며 나뒹굴었다.
“원 참, 개나 소나 다 왕후장상의 씨 타령이야.”
몽주는 왈짜 놈들을 포박하게 명하고는 어이없어 하였다.
잡혀 오는 왈짜 놈들 중 십중팔구는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를 외쳐 댔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유행어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한 200년째 이어지는 유행어.
일자무식의 왈짜들도 쓸 줄 아는 거의 유일한 문자라 할 수 있는 그 말이 퍼진 건 무신정권 시절이라는데, 당시 천민 출신 무인들이 정권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문신들이 자조적인 의미로 쓰던 말이 신분이 낮은 계층에 흘러들어 가며 저항의 ‘캐치프레이즈’화한 것이었다.
몽주가 고교 시절에 역사를 배울 때, 그 말은 꽤 멋있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고려에서 듣자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 말을 입에 담는 놈들이 정말 그런 말을 쓸 만한 이유와 명분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그냥 고려판 ‘조폭’놈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현대에서 유흥가를 주름잡다가 붙잡혀 중형을 선고받은 조폭 두목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지금 몽주가 데려온 사병들에게 두들겨 맞아 굴비처럼 엮이고 있는 스무 명가량의 왈짜 놈들도 왕후장상 어쩌구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놈들이었다.
떠도는 유민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탈취하고, 그중 부녀자를 겁탈까지 한 놈들이었다.
당연히 그 와중에 살상 행위도 있었으니, 생각 같아서는 귀찮게 묶어 데려가느니, 이 자리에서 난자하여 죽이고 싶었다.
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건 당대에 어울리지도 않는 현대인으로서의 인권 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몸소 죽일 자들 앞에 데려가기 위함이었다.
또, 복수해 준다면 기꺼이 따르겠다는 유민 무리를 얻기 위함이기도 했었다.
“가는 길에 고신하겠습니다.”
수하들을 지휘하던 탁기가 다가와 고하자, 몽주가 ‘당연하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목 놈부터 손발을 묶어서 말에 매달아 한 1길미 정도 끌고 가 보게. 하면 석년 오늘에 먹은 것까지 다 발설할 것이야. 만약 안 하면 말할 때까지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 버리게.”
“알겠습니다.”
유민 무리들이 있는 곳까지는 족히 10길미쯤 되니, 지금 잡은 왈짜패들이 한 짓거리는 충분히 토설 받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몽주는 말에 올라타면서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누.”
그건 엉망진창인 세상을 향한 넋두리이자, 유민을 구하려다가 어쩌다 보니 왈짜놈들을 잡아들이고 있는 자기 신세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물론 후자의 경우에는 몽주가 사서하는 고생이었다.
영공으로부터 유민들을 제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받은 몽주는 그날로 황해도 지방의 유민 무리들의 위치를 수소문하였다.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거래하는 상인들에게만 물어도 어디서 봤다는 대답을 수시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적게는 수십 명부터 많게는 백 명이 넘는 유민 무리들이 수십 개나 되었으니, 황해도 지방에만 국한했음에도 그랬다.
그건 2년 전 즈음에 왜구들이 황해도 지방을 초토화하듯 약탈했던 여파였으니, 그 후 지금까지 인근 지방으로 넘어가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된 이들을 제하고도 그만큼이나 여전히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몽주가 유민들을 포섭하기 위해 직접 나선 건 일종의 견학(?) 차원이었다.
어차피 몰고 온 배들도 많지 않아, 이번에 데려 갈 수 있는 유민들의 수는 채 200도 안 될 것이기에, 데려온 사병들 중 일부를 남겨 그들로 하여금, 고려의 장정들을 고용하게 하여 ‘유민 추포단(流民 追捕團)’을 운용할 예정이었다.
다만, 그 운용의 방침을 명하기 위해서 직접 유민들을 확인해 보고, 포섭해 볼 필요가 있어 몸소 행차한 것인데, 역시나 현실은 언제나 상상보다 더 시궁창이었다.
그야말로 거지 떼나 다름없는 유민 무리들의 행색 자체만으로도 시궁창이었고, 그들이 겪은 고생을 들으면 시궁창만도 못했다.
지방 수령들은 그들을 무시하거나 적대하였으니, 그나마 한 끼라도 먹여 다른 곳으로 쫓아낸 수령은 관대하기 그지없는 자였고, 어떤 수령들은 군졸을 동원하여 마치 역질이 번지기라도 하는 양 잡아 죽이려 하기도 했다.
그건 당대 유랑민 무리에 대한 이미지가 도적 떼나 다름없었던 탓이었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나라의 구휼마저도 소속된 고을에 남은 백성들에게 돌아갈 뿐, 그렇지 않은 자들은 애초에 동정을 받을 자격조차 없었던 것이다.
현실을 보는 수령들도 그러하니, 도당의 높은 이들의 인식은 더 나쁜 것이었다. 이미 신돈으로부터도 들었지만, 유민은 역민일 뿐인 것이었다.
무시와 천시를 넘어, 아예 안중에도 없는 게 유민들이었다.
당연히 유민들은 온갖 위험과 범죄에 노출이 되었고, 왈짜패들의 먹잇감일 수밖에 없었다.
몽주가 왈짜패들을 ‘사냥’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처음 왈짜패를 때려잡은 건 우연이었다.
처음 조우한 유민 무리가 때마침 왈짜패들에게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놈들을 때려잡자, 유민들이 다들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는데, 몽주가 그들을 제주로 데려가겠다고,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겠다고 하자, 다들 기꺼이 따랐다.
다른 벼슬아치들이 다 그들을 무시하고 천시하는데, 몽주가 그들을 살려 주자 따르기를 거부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하여, 몽주는 유민들을 말로 설득하기보다는 그렇게 대신 복수를 해 주면서 마음을 얻는 것도 방법이겠다 싶었다.
거기엔 왈짜패들도 함께 제주로 잡아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노림수도 있었다.
사실 유민 무리들의 대부분이 여성과 노약자들인 터라, 당장 크게 필요한 남성 인력을 확보하는 것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혈기왕성한(?) 왈짜 놈들을 데려가 적당히 정신을 개조시키면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두목을 비롯한 우두머리들은 죽여 버리고, 떨거지 내지 단순 가담자급의 왈짜들만 골라 가고자 한 것이었다.
한데, 막상 몇몇 유민 무리들과 더 만나고, 또 그들을 괴롭힌 왈짜놈들을 접하다 보니, ‘남성 인력 추출’이라는 목적은 점점 희미해지고, 인간적인 분노만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고려 말의 ‘헬 게이트’는 당대의 악인마저도 지옥의 마귀 수준으로 타락시켰으니, 인력 추출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만이 남은 것이다.
조선시대에 검계(劍契)니 살주계(殺主契)니 하는 ‘깡패 집단’들이 ‘빼앗고, 죽이고, 강간하자.’를 강령으로 삼았다더니, 과연 그들의 조상님 격인 고려 말의 왈짜 놈들도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왈짜 놈들을 잡아 죽이는 게 목적이 되어 버렸고, 유민 무리 앞에 왈짜 놈들을 묶어 던져놓은 후, 살아남은 놈들만 거두기로 작정한 상태였다.
“이놈들까지만 데려다 놓고, 우리는 그만 철수하세.”
왈짜들을 끌고 가던 중에 몽주가 탁기에게 말하였다. 이미 닷새째 왈짜 사냥에 빠져 있던 중이라, 더 이상 고려에 남아서는 곤란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몽주의 정신마저 피폐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심연을 주시하면 심연도 그를 주시하는 법, 인심을 저버린 놈들을 대하는 것 자체가 정신적으로 지치는 일이었다.
몽주와 사병들이 이번에 잡은 왈짜들도, 이전 여러 왈짜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였다.
유민들이 토굴을 파고 움막을 지어 머무는 산 아래에 닿아, 그들 앞에 그 왈짜 놈들을 묶어서 던져 놓았던 것이다.
“이들 중 너희를 괴롭힌 자가 있다면, 보복해도 좋다.”
처음에는 자기를 괴롭힌 놈에게만 보복하라고 했는데, 이제는 굳이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 유민 무리를 괴롭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무리를 괴롭혔을 게 뻔한 것이 왈짜 놈들이었다.
몽주가 명하자, 유민들이 웅성이다가, 점점 땅바닥에 널브러진 왈짜들에게로 몰려들었다.
어느 노인은 부들부들 떨면서 무딘 무쇠 낫을 들고 먼저 앞으로 나섰다. 일전에 몽주 앞에 엎어져 통곡하며 그의 딸이 왈짜들에게 겁탈당하고 사위와 더불어 죽임을 당했다고 고변했던 게 기억났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략 짐작했기에 몽주는 잠시 시선을 돌려 근방에 있는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햇빛에 물결이 보석처럼 빛나니, 그 호수의 이름이 광명(光明)인 것이 이해가 되었다.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다만, 귓가에는 연신 비명과 욕설 그리고 무언가가 찢어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한 놈이라도 살아남으려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몽주가 140여 명의 유민들과 18명의 살아남은 왈짜들을 데리고 예성강의 수군진으로 향한 것은 신돈과의 만남 이후 칠 일째 되는 날이었다.
거지 떼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구경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지만, 그렇다고 막는 자는 없었다.
신돈으로부터 3년 만기짜리 사령장(辭令狀)을 받은 것이 있어, 유민들을 데려가는 것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인임을 따르는 지방 세족들이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긴 했지만, 당금 신돈과 이인임이 표면적으로 충돌한 상태도 아닌 터라, 대놓고 방해하진 않았다.
그렇게 구경거리가 되어 길을 따라가는데, 문득 뒤에서 몇 필의 기마들이 쫓아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경계하는데, 그중 앞선 말에 탄 허름한 차림의 사내가 크게 소리쳤다.
“남방백, 잠시 멈춰 주십시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여 잠시 기다리니, 기마들이 먼지를 풀풀 일으키며 가까이서 멈췄다.
그중 앞서 고함을 질렀던, 삼십 대로 보이는 사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몽주에게 읍하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남방백,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인 남양 홍씨의 길도라고 합니다. 남방백의 위명을 잘 듣고 있었습니다.”
“위명이라니, 당치도 않소. 한데, 남양 홍씨라면, 그때 그 왜구의 침입으로…….”
그리 좋은 기억을 더듬는 것이 아니기에 뒷말을 생략했지만, 길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하였다.
예전에 왜구가 한양부까지 침탈하였을 때, 한양부의 서쪽에 나름 규모 있게 자리 잡고 있던 남양 홍씨 일가가 당하여, 가세가 크게 기울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본관이 같은 분을 뵈니, 반갑소.”
“제 기쁨에 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길도가 말하는 걸 보니, 단지 남양 홍씨가 남양 석씨를 만난 것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잠시 긴히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독대를 청하기에 몽주가 나란히 말을 움직여 무리와 동 떨어졌다. 탁기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주시하고 있었다.
길도가 잠시 주변을 살펴 가까운 곳에서 듣는 이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몽주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말문을 열었다.
“남방백, 혹시 저희도 제주로 갈 수 있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
뜬금없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그가 ‘저희’라고 말하는 게 무엇인지도 애매하였다.
“남양 홍씨가 제주로 넘어가고자 하는 것이오?”
“그러합니다. 더불어 저희가 데리고 있는 유민들이 오백여에 이릅니다.”
길도가 이어 설명하길, 왜구의 침탈로 집안이 크게 기울었음에도 남양 홍씨는 유랑민으로 전락할 처지의 백성들을 모아, 함께 다시 일어서고자 노력하였다고 했다.
“하나, 소출은 적은데 먹일 입은 많아서 좀처럼 재기하기가 어려운 지경입니다. 게다가 근자에 정쟁의 조짐마저 있어 앞으로의 상황이 더욱 어두울 따름입니다. 한데, 때마침 남방백께서 유민들을 거두어 가시기로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이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비록 남방백께 큰 부담이겠으나, 유민을 거두시는 게 사실인 듯하니, 저희도 함께 거두어 주십시오.”
말을 들으니, 못할 건 없었다. 어차피 가까운 시일 안에 적어도 1만의 인구를 늘려 볼 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바로 허락할 수 없는 것은 그 제안을 한 자가 남양 홍씨의 일족이기 때문이었다.
남양 홍씨가 비록 당대에는 큰 세가가 아니고, 급기야 왜구로 인해 크게 망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고려 개국 공신이 세운 문벌세족 출신으로 가문의 이름만큼은 제법 알려져 있었다.
이는 이인임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니, 혹여 길도가 이인임의 사주를 받아, 제주에 해를 끼칠 일을 행하려 들 수도 있다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몽주는 잠시 고심하는 양 하다가 하답하였다.
“가능한 일일 것이오.”
“그렇습니까? 아, 진정 감사합니다.”
길도는 성급하게 허리를 굽히며 고마움을 표했다.
“하나, 지금 당장은 곤란하오. 이번에 데려갈 수 있는 수는 많지 않아, 지금 거둔 유민들도 겨우 데려갈 수 있기 때문이오.”
“하면, 언제 다시 오실 수 있는지……?”
“정확한 시일은 알려 드릴 수는 없으나,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내 다시 유민을 거두게 된다면, 먼저 남양 홍씨에게 연락을 넣을 것이니, 조금 더 기다려 주시오.”
“아…….”
길도는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안색을 회복하고는 기다리겠노라 말을 남겼다.
“하면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희도 이주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돌아가서 연락을 받는 대로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길도가 크게 읍하고 다시 돌아가자, 몽주도 유민들을 데리고 예성강 수군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보게, 탁기.”
“예.”
“고려에 남을 수하들에게 일러, 남양 홍씨에 대해 은밀히 알아보게 하게. 특히 근자에 수시중이나 그의 당여들과 교류가 있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일세.”
“알겠습니다.”
유민 추포단을 구성하기 위해 남을 사병들에게 할 일이 하나 더 생긴 참이었다.
몽주는 길도의 제안을 되씹으며 안장 위에서 흔들거리다가, 문득 그의 이름이 익숙함을 느꼈다.
‘길도. 홍길도. 홍길도……? 홍길동하고 관련이 있는 자인가.’
피식, 그 우스운 생각에 실소가 절로 나왔다. 그는 소설 속 인물이지 않은가.
* * *
길도에 대한 소식을 들은 건 의외로 빨랐다. 몽주가 제주로 돌아온 지 불과 오 일 만에 노꾼이 모는 선편이 바다를 건너 제주에 와서 서찰을 전한 것이었다.
고려에 남은 수하들에게 조사하여 추후에 몽주의 선단이 다시 고려로 가면 전하라고 시켰음에도 먼저 서찰을 보낸 것이었다.
소식을 예정보다 먼저 접하게 된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빨리 소식을 전하게 된 연유에 문제가 있을 터였다.
하여, 몽주는 급하게 그 서찰을 확인하였는데, 한 장이 아니라 두 장이었다.
의아해하며 먼저 한 장의 서찰을 읽던 도중에, 몽주는 표정을 굳히고, 다른 서찰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앞선 서찰은 몽주의 수하들이 보낸 것이고, 뒤의 서찰은 홍길도가 보낸 것이었다.
그러니까 몽주의 사병들이 남양 홍씨를 감찰하다가 들켰고, 그에 길도가 스스로 서찰을 써서 보낸 것이었다.
길도는 몽주가 그를 믿지 않음을 짐작하고 있었다면서, 자신과 집안을 알아볼 자가 있을 줄 알아 대비하였고, 그 덕에 몽주의 수하들을 잡을 수 있었다면서 수하들을 탓하지 말라는 말부터 전하였다.
몽주는 길도가 어찌 자신이 그의 말을 믿지 않음을 알아차렸는지 궁금했다. 아니, 잠시 생각해 보니, 그날 만났을 때 자신이 보인 태도와 표정에서 어쩌면 드러났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갑작스런 제안에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고, 만약 그의 말을 믿는다면 분명 따로 청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어야 마땅하였으나, 짧은 대화를 끝으로 돌아가게 했으니, 눈치가 있는 자라면 알아차렸을 만했던 것이다.
몽주는 경솔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길도의 서찰을 계속 읽었다.
……저희 가문이 한때 고려에서 내로라하던 가문이었던 바, 그 이름은 가세가 한미해진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여, 남방백께서 제 말에 의구심을 품을 만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소인이 감히 하늘에 맹세컨대, 저희는 권문세족과 인연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가세가 기울어 배척받은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권문(權門)에 든 세족을 오히려 저희가 멀리한 탓입니다.
거기까지는 흔한 변명(?)이었다. 설령 이인임의 사주를 받았다 한들, 그랬다고 스스로 고할 리가 없었다.
하나, 그 후에 나온 말들이 슬슬 몽주를 진중하게 만들었다.
대저 권문들이 만든 고려의 현실이 어떠합니다. 그들은 토지를 넓히고 노비를 늘리는 것에 열중할 뿐이니, 나라의 기둥이 썩어 가는 것을 방치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방조하였습니다.
그들의 안중에 백성들은 그저 언제나[恒] 따르고, 복종하는 자들일 뿐이니, 그런 괄시가 백성들의 원성[怨]조차 듣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나라 안의 사정은 원망을 품은 백성들 중에 호걸[豪]이 나타나 세상을 뒤집길 바라게 만들었으니, 학정과 왜구에 신음하는 양민들과 더불어 살고자 버둥거리는 저희 또한 그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은근히 무서운 글이었다. 그 내용은 이미 역심을 고백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그 명분을 세우는 글이었다.
왕후장상 영유종호 따위의 유행어에 비하면 진심과 의지를 진하게 느낄 수 있는 데다가 심지어 그를 받칠 이론마저 간략하게나마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복종하는 항민(恒民), 원망을 품은 원민(怨民), 그리고 항거하는 호민(豪民).
길도의 글에 명백히 그 단어들이 쓰인 것은 아니나, 분명히 그 의미가 드러나 있었다.
이는 본디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에 나오는 것으로, 몽주는 예전에 전근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민란과 농민 봉기에 대한 책에서 호민론을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천몽에 본격적으로 임한 이후, 주입한 수많은 정보 속에 묻혀 있던 ‘호민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길도 때문이었다.
호민론의 저자 허균이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였으니, 자연히 홍길동과 유사한 이름인 홍길도의 편지를 읽으면서 연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소름마저 돋았다.
200년 후에야 세상에 나올 허균이 말년에 주창한 호민론의 내용을 200여 년 앞서 홍길도라는 이름을 가진 ‘호민’으로부터 들은 셈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분히 중의적인 놀라움이었다.
본디 고려에서 호민은 ‘귀인(貴人)’을 뜻하는 말로 쓰이는데, 호(豪)자의 의미가 비단 귀인뿐만 아니라 ‘호걸’을 뜻하기도 하니, 길도는 그 의미를 비틀어 원망하는 걸 넘어 분연이 떨치고 일어서는 호걸 같은 백성을 정한 것이었다.
그건 단지 한자의 중의성을 이용했다는 것이 놀라운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하여 항민과 원민을 넘어 호민이라는 개념을 깨달은 것이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 통찰을 위해서 길도가 얼마나 세상을 탐구했을 것이며, 만약 왕실이나 권세가들이 알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비난하고, 역심이라 탄압할 만한 마음을 얼마나 깊이 품었을지 생각하니, 그가 결코 딴마음으로 몽주에게 접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몽주는 왠지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길도의 서찰에 다시 집중하였다.
하나 소인은 홀로 일어설 용맹과 능력이 없으니, 스스로를 기탁할 호걸을 기다린 바, 소인의 눈에 남방백이 들었던 것입니다.
세인은 남방백을 두고 영공의 당여가 된 덕에 출세한 운 좋은 자라 폄하하나, 소인이 멀리서 남방백의 행동함을 지켜본 바, 그것이 제주에서 홀로 일어서시기 위해 굴욕을 감수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몽주로선 뜨끔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저 그런 가문이 있다고만 알고 있었을 뿐, 교류가 일절 없었음에도 남양 홍씨의 어느 인물이 자신을 두고 ‘호민’임을 단정 지을 정도로 꿰뚫고 있었으니, 과연 그만이 자신의 목적을 알아차렸을지 두려움마저 있었다.
물론 당장은 신돈의 당여임이 널리 알려져 있기에 의심이 있다하더라도 면피할 수 있을 것이고, 특히 이인임과 갈등이 깊어진다면, 정적의 이간질 내지는 음모로 치부될 것이라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어쨌든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을 훔쳐본다는 것 자체는 서늘한 감정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몽주의 시선은 길도의 서찰 중 마지막에 닿았고, 거기에서 놀라움을 넘어 기겁하기에 이르렀다.
삼 일 후에 소인은 저와 뜻이 맞는 이들과 더불어 이춘부, 이옥 부자의 집을 습격할 것이니, 이 서찰을 받으실 때는 이미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이춘부와 이옥은 한양부에 머물며 권세를 등에 업고 착취하길 일삼은 바, 그 원성이 하늘에 닿아 있습니다. 이에 소인은 그들을 도모하고 재산을 강탈하여, 제 뜻을 하늘에 고하고, 남방백께 증명할 것입니다.
이후, 해남현(전남 해남군)에 몸을 숨길 것이니, 만약 남방백께서 저와 한 뜻이시라면 구원하여 주시고, 아니라면 차라리 이 서찰을 영공에게 고하여 뜻한 바에 도움이 되게 하십시오.
“후우…….”
놀란 마음을 한숨으로 달래니, 다음 순간 몽주의 심정이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홍길도, 참으로 성급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진짜 홍길동이기라도 한 자인가, 어찌 함부로 위태로운 중에 의적 행세를 하려 든다는 말인가.
이춘부가 지난 한양부 왜구 습격 이래 한양부에 눌러앉아 영공의 당여로서 행세함을 알고 있고, 그의 아들 이옥이 크게 권세를 부리는 것 또한 몽주가 익히 아는 바였다.
당연히 그들은 권세로 구한 사병들을 부려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할 것이니, 한미한 가문의 홍길도가 그들을 범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해당하는 짓이었다.
몽주는 고민에 빠졌다.
만약 홍길도와 그의 일당들이 일을 저지르고 도주에 성공하였다면, 그들을 구해야 할 것인가 모른 척해야 할 것인가.
머리는 무시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여전히 길도가 함정을 파는 것일 가능성은 남아 있었고, 설령 진심이라도 그런 위험한 인물과 함부로 인연이 맺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에 비해 가슴은 그를 구하라고 시키고 있었다. 그건 그의 의지와 생각이 진심이라면, 어쩌면 고려에서 구할 수 있는 몇 명 안 될 동지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 이전에,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 탓이었다.
“나를 믿는 마음이 있었다면, 먼저 밝히고 행할 것이지, 어찌…….”
몽주는 안타까움을 품은 채 한참이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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