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28)
위난세기(危難世紀)
“야야, 키를 왜 그렇게 많이 꺾냐! 이게 자동차 운전이야?!”
“형이 돛을 너무 많이 회전시켜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덜 꺾어야지!”
웅성웅성, 우왕좌왕.
재단 직원들이 두엇 무리로 나뉘어 모여 있었고, 그들 중에 의자에 앉은 두 직원은 아옹다옹하면서도 열심히 그들 앞에 놓인 부스를 조작하고 있었다.
전면 벽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있는데, 그곳에 바람의 방향과 해류의 흐름, 그리고 범선의 모습이 그래픽스로 비추고 있었다.
두 직원이 부스를 조작할 때마다 돛의 방향이 바뀌고, 또 다른 직원의 조작에 의해 키의 방향이 바뀌면서 범선의 방향과 속도도 바뀌고 있었다.
몽주는 그 모니터를 보며 흐뭇하게 웃음 짓다가 자리를 떠나 그의 집무실로 걸음하였다.
엊그제 질란트-판 담 사에서 설치해 준 시뮬레이션 시스템은 게임하듯 즐거웠지만, 게임과는 달리 조작이 어려웠다.
실제 항해 시 범선에서 조작할 시스템을 그대로 옮겨 연습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몽주도 처음 그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설치한 후에 가장 먼저 만져 보았다.
다만, 다른 건 부스를 직접 조작하는 대신, 컴퓨터에 설치된 마스터 스티어링 프로그램을 사용한 터라, 순식간에 적응할 수 있었다.
사실 적응이랄 것도 없는 게 그냥 방향타만 입력하면 바람 방향과 세기에 따라 자동적으로 돛과 키가 조작되도록 되어 있어 쉬워도 너무 쉬운 일이었다.
다만, 해류의 흐름은 자동으로 파악하기 어렵기에 실제 항해에서는 해류의 영향을 생각하면서 조정해야 하기 때문에 조작자의 감과 판단력이 필요했다.
하나, 해류가 굉장히 급물살을 만들지 않는 이상, 바람만 파악해도 90퍼센트 이상 최적화된 운영을 할 수 있기에 크게 신경 쓸 건 아니었다.
반면에 지금 직원들이 하는 건 마스터 스티어링 프로그램에 의한 자동 운영이 아닌, 돛과 키를 직접 운전하는 기계식 부스에 의한 시뮬레이션으로써 각각의 조정자들이 호흡을 맞춰 운영해야 했기에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자동 시스템이 있으면서도 기계식으로 운영하는 걸 연습하는 이유는 컴퓨터 마스터 스티어링 프로그램은 쉽지만, 실제 항해 때는 환경에 따라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파도가 거칠거나 바람의 방향이 수시로 바뀐다면, 오작동을 일으키거나 시스템이 다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배가 흔들리는 중에 디지털식 조정이 쉬울 리도 없었다.
급발진 사고로 대변되는 디지털식 운전의 오류 가능성은 비단 자동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분명 기계식으로 조작해야 할 상황이 올 것이기에 몽주는 바당보름 출신 직원들에게 기계식 부스를 조작하는 훈련을 시킨 것이었다.
“세상 참 좋아졌지.”
전근대 시대의 범선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배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엄청난 수의 선원을 필요로 했지만, 현대에 제작된 범선은 통합 시스템만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혼자서도 운영이 가능했다.
돛과 키가 자동으로 조정되니 키보드와 마우스만으로도 운영이 가능한 것이다.
또, 컴퓨터로 조작하기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엔진 동력을 이용하여 돛과 키를 조작할 수 있어 돛의 수에 키를 담당할 사람까지 더한 만큼만 있으면 충분히 운영이 가능했다.
몽주의 ‘통합 범선’에도 질란트-판 담 사의 시스템이 설치될 것이기에 평상시에는 1인이 홀로 운영할 수 있고,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3인, 즉 두개의 돛과 하나의 키를 조종할 자들로도 운영이 가능할 예정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20명 정도의 탑승원을 갖출 예정이었다. 긴 항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극소수의 인원으로 항해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몽주가 집무실로 들어가자, 안에 있던 방지영 이사 겸 비서가 막 전화를 끊고 있었다.
“아, 조율이 방금 끝났어요.”
몽주를 보곤, 방 비서가 곧바로 보고하였다.
“내달 20일부터 연간 54억 원에 1년간 대여하기로 하였고, 20억 원에 6개월 단위로 연장이 가능하고요. 연료비를 비롯한 감가상각비는 저희가 부담하되, 8인의 선장과 선원 및 기술자는 그쪽에서 해결하기로 했어요.”
“구난 전문가도 포함된 거겠죠?”
“네, 물론이죠.”
지영의 대답에 몽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위에 놓인 팸플릿을 펼쳤다.
외국계 선박 대여 회사의 한국 지점에서 발간한 것으로, 조금 전 지영이 보고한 것도 선박 대여에 대한 것이었다.
몽주가 펼친 페이지에 나온 선박은 ‘Mangusta-165H’라는 호화 요트로 국내에서 빌릴 수 있는 것 중에는 최고가의 것이었다. 슈퍼 요트급은 아니더라도 그 바로 밑이랄까.
슈퍼 요트 중 하나인 Mangusta-165를 기반으로 개량된 모델로 전기 모터 하이브리드 엔진을 사용하여 최대 항주 거리를 2배가량 늘렸고, 본격적인 원양 항해를 즐길 수 있도록 보조 연료 탱크를 설비하는 대신, 선내 럭셔리한 편의 시설은 다소 줄인 것이었다.
보통 일주일 단위로 빌리면 2억 원가량 지불해야 하는데, 장기 임대식으로 하여 거의 절반의 가격으로 빌린 셈이었다.
전장 약 49미터에 최고속도 42노트, 일반 순항 속도(경제 속도) 33노트 그리고 하이브리드 순항 속도 18노트에 달하는 M-165H는 최대 1500해리(약 2,700킬로미터)의 거리를 항해 할 수 있었다.
이는 조금 무리한다면, 제주도에서 일본 훗카이도 남단까지 한 번에 왕복할 수도 있는 성능이었다.
“그러면, 연간 100억 안에서 유지가 가능하겠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아슬아슬하게 가능할 거예요.”
“좋습니다. 그러면 그걸로 결정하죠.”
일 년에 100억이 소모될 일치곤 다소 성급한 결정이긴 했지만, 시일상 촉박한 상황이었다.
통합 범선이 다다음주 내에 완성될 예정이고, 진수 후 곧바로 시험 운항을 할 예정이었는데, 연안을 벗어나는 시점에서는 현대 요트의 ‘호위’를 받으며 운항하길 원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질란트-판 담 사가 시뮬레이션 시험으로 통합 범선의 안정성이 확보되었다고 판정하였지만, 그건 설계상의 성능에 의한 판정이고, 실제 제작하여 운항할 때는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원양에서 사고가 있을 경우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고, 사고는 아니더라도 휴식을 취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면 배 이름은 어떻게 할까요? 그쪽에서 도장해 준다더군요.”
“어미새라고 하죠, 뭐.”
“……좀 정성껏 지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하, 어미새 좋잖아요. 범선 이름이 양진이니까, 양진이를 보호할 배의 이름은 어미새. 음, 아무리 생각해도 딱 좋은데요?”
결국 몽주의 뜻대로 대여한 요트의 이름은 어미새, 영문으로 ‘Mother Bird’로 정해졌다.
그 이름의 이유가 된 범선의 이름 ‘양진이’는 참새과의 새 이름으로, 몽주가 고려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새였는데, ‘꼇꼇’거리는 울음소리가 귀여운 놈이었다. 등 쪽은 갈색이고 배 쪽은 붉은색이라 시각적으로 예뻤고, 몽주의 범선이 목조선인 데다가 황포돛을 쓰기에 전체적으로 갈색이되, 선체 하부를 붉은색 도장을 할 예정이라 딱 어울리기도 했다.
그렇게 양진이를 보호할 ‘어미새’의 이름을 확정하자, 지영은 관련 업무를 마무리하러 나갔고, 몽주는 홀로 남아 팸플릿을 치우고 다른 서류를 펼쳤다.
그 서류의 이름은 ‘상도(商道)와 병도(兵道)’였다.
* * *
몽주가 현대에서 잠이 깨기 직전에 길도가 제주에 도착했다.
그는 진도에서 탁기가 남겨 둔 소선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제주까지 오라는 뜻임을 알아차렸다.
다만, 진도에서 닷새 이상 머물렀는데, 그건 소선을 다루는 연습을 한 탓이라고 했다.
사실 배를 남겨 두면서도 길도가 배를 다룰 줄 알지 의문이었다. 소선은 노를 저어 쓸 수도 있지만, 제주까지 항해하기 위해서는 돛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배 안에 ‘교본’을 남겨 두기도 했었다. 간단한 그림과 설명을 담아 돛과 키를 다루는 방법을 알린 것이었는데, 의외로 길도는 배를 다루는 법을 대략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몽주를 주시한 이래, 배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져 열수(한강)에서 야거리를 다루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다만, 바다에서의 항해는 강에서의 항해와 다소 달랐기에, 길도는 일족과 더불어 바다에서 배를 다루는 연습을 한 후에야 제주로의 도해를 시도하였다고 했다.
성급한 줄만 알았더니, 의외로 진중한 면도 있었던 것이다.
그와 만난 뒤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잠에서 깨었기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몽주는 이미 그를 받아들인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가 제주로 오자마자 먼저 도착했던 유민들이 길도에게 모여들어 환영했기 때문이었다.
몽주가 개경에 보냈던 8척의 배를 통해 온 유민들이었는데, 대부분 남양 홍씨가 보살피고 있던 자들로서, 길도의 조언에 따라 몽주를 따라 제주로 건너온 것이었다.
남양 홍씨의 많지 않은 토지에서 다 함께 살려고 애를 써 주었으니, 다들 남양 홍씨를 따르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남양 홍씨의 현 가주라 할 수 있는 길도를 주인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몽주가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재물들, 즉 이춘부의 저택에서 탈취하여 배포했던 재물들마저 길도에게 도로 바치는 걸 보면서, 길도가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가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여, 탁기를 비롯한 몽주의 수하들은 오히려 길도를 경계하는 분위기마저 짓고 있었으나 몽주로서는 그저 흡족할 따름이었다.
단지 수하로서 뿐만 아니라, 믿고 맡길 동지를 얻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재밌는 건 몽주가 현대로 돌아와 재상, 두신에게 고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하자, 그들이 크게 놀라워한 것이었다.
몽주는 몰랐는데,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었고, 남양 홍씨였던 것이다.
즉, 홍길도는 홍길동의 조상님이었다.
다만,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의적인 것에 비해, 실존 인물 홍길동은 잔악한 인물로 추정되었다.
기록이 드물어, 정확한 인물됨을 살필 수는 없지만, 기록된 것만 살펴도 의적과는 거리가 먼 자였던 것이다.
하나, 설령 그가 의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공식 기록에 의적으로 기록되었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어쨌든 홍길도가 홍길동의 조상이라는 걸 확인하자, 남양 홍씨의 핏줄에는 도망쳐야 하는 운명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후에 길도가 해남에서 성공적으로 탈주한 방책에 대해 대략적으로 들었는데, 그가 해남현 옆 도강현에서 화계(火計)로써 혼란을 조장하고, 그 틈에 어선을 탈취하여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다고 하여 감탄했었다.
현대에서 그가 홍길동의 선조라고 확인하니, 자연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관군을 따돌리고, 또 따돌리다 못해 농락하기도 한 모습이 절로 연상되었던 것이다.
그건 실존 인물인 홍길동도 좀처럼 붙잡히지 않았었고, 붙잡힌 후에도 탈옥했을지도 모른다는 역사적 추정과도 닿아 있었다.
사실 길도의 경우에는 홍길동만큼 완벽한 도망자는 아니었다.
이미 보고 받았듯 일족 중 몇몇을 잃었고, 고생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의 여동생이라는 길선이라는 처녀는 그들의 고생을 몽주의 탓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 마구 따지고 들어 길도가 몹시 곤혹스러워하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길도의 등장은 재상과 두신에게도 흥미로운 것이었고, 자연 그를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사실 몽주가 길도를 맞이하면서 생각했던 건, 후에 그에게 한 지역을 맡겨 통치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언젠가 대만이나 필리핀을 정복하게 된다면, 먼 곳인 만큼 상당한 자치권을 가진 통치자가 필요할 테고, 길도가 그에 합당하다 여긴 것이었다.
하나, 재상과 두신의 생각은 다소 달랐다.
그들은 정말 몽주의 증언대로 길도가 남다른 생각을 가진 자라면, 그에게 보다 큰 역할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큰 역할이란 바로 교육이었다.
글을 가르치고 수를 셈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국가 통치 철학을 다듬고, 그것을 전파하는 역할을 길도에게 맡기자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논의는 자연히 몽주의 영토에 세울 통치 철학이 무엇이냐는 것으로 흘러갔고, 그때 재상과 두신이 그에게 건넨 것이 지금 몽주가 펼친 서류였는데, 오래 전부터 천천히 준비해 왔던 것이었다.
상도(商道)와 병도(兵道).
상도는 관자, 즉 관중의 사상을 기반으로 내치(內治)의 도(道)를 의미했으니, 농상공병립(農商工竝立)의 이치를 의미했고, 병도는 손자(孙子) 즉 손자병법의 저자로 ‘추정’되는 손무(孙武)의 사상을 기반으로 외치(外治)의 도(道)를 의미했으니, 신전(愼戰 : 신중한 전쟁)과 전쟁불가피론의 이치를 의미했다.
동시에 병도로서 위세(危世)와 난세(亂世)를 극복하고 상도로서 평세(平世)를 이루자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상도와 병도는 서로 통하는 것으로, 그저 집중하는 방법론이 전쟁과 상업이라는 것만 다를 뿐인 것이었다.
현대에서 손자병법이 일종의 처세술적인 의미로, 경제계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높은 수준의 병법은 단지 병사와 전술을 다루는 이치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상을 다루는 법과 통한다.
또한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전쟁을 다룸에 있어 전비(戰備)는 필수인 만큼, 경제를 다스리는 건 전쟁을 다스리는 것과 통하였으니, 상도와 병도는 연관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였다.
천몽에서 몽주가 겪고 있는 때는, 불교의 교리와 왕도로 경영된 고려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통치 철학이 요구되는 시대였다.
역사에서는 유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지만, 몽주는 유학의 병폐를 역사로 배웠기에 그것을 배척하는 편이었다.
이는 단지 유학을 통치 사상으로 한 조선이 훗날 일제에 잡아먹힌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마가 게르만에 의해 멸망했다고 해서 로마의 위대함이 퇴색되는 건 아니듯, 조선이 일제에 의해 멸망했다고 조선이 별 볼 일 없는 건 아니며, 동시에 조선의 통치 철학을 무조건 후진적으로 여길 것도 아니다.
사실 몽주도 유학을 꺼리면서도 그 이유를 정확히 제시하진 못했는데, 재상과 두신이 준 그 보고서 ‘상도와 병도’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짚을 수 있었다.
그건 유학이 기본적으로 ‘성세(聖世)’의 도(道)이기 때문이었다.
유학이 생기고 발전하던 제자백가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로서, 대표적인 난세였음에도 유학은 기본적으로 성세를 위한 학문이었다.
이는 난세 자체를 비정상적인 상황이자, 일시적인 현상으로 간주한 것에서 기인했다.
유자들은 조만간 치세가 도래할 것으로 여긴 것이고, 그만큼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본 탓이었다.
그 때문에 덕치(德治)를 좇고, 그에 기반한 통치를 지향한 것이다.
하나, 몽주의 시야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난세가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세가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닐까.
실제로 역사에서 진정 성세라고 할 수 있는 시기는 많지 않았다.
그 길고 긴 중국의 역사에서도 당태종의 정관의 치(貞觀之治)나 청대의 강건성세(康乾盛世) 정도만이 인정할 수 있는 성세였다.
그렇다면 국가의 통치 철학은 기본적으로 성세를 가정할 것이 아니라, 위세와 난세를 기본으로 하면서 그에 회복된 평세를 가정해야 함이 마땅했다.
게다가 유학의 경우에는 통치의 주력인 사대부에 의해 그들의 세상을 성세로 미화하는 경향마저 있었으니, 이는 태생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성세로 미화된 난세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조선 선조의 목릉성세(穆陵盛世)일 것이다.
왜란으로 현세의 지옥이 되었던 그 세상을 성세로 미화하고 자찬한 이유는 그렇지 않고 난세임을 인정하면, 그들의 통치가 정당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몽주도 유학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고, 고려 말을 기준으로 하여도 무려 2천 년 동안 연마된 유학 사상에 스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만큼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여겼다.
하나, 고려 말의 난세에서 세상을 뒤집어 보려는 몽주로서는 도래하기도 어려운 성세를 바라고, 그에 맞춰 통치하려는 유학보다는 위난세를 위난세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회복하려 노력하는 보다 실용적인 통치 철학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의 발전이 그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 그를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한 나라도, 또 한 세상도 부족함을 알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몽주는 그렇기에 상도와 병도가 맘에 들었고, 그것이 해결책이라 여겼다.
사실 재상과 두신이 그에 대한 보고서를 주기 전에 몽주 또한 어림잡아 깨닫고 있는 부분이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상도와 병도로 제시된 건 의미가 있었다.
그저 몽주가 홀로 상도와 병도를 따른다고 해도,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잡혀 있지 않다면, 몽주를 따르는 수하들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제주처럼 작은 세상에서야 몽주가 직접 확인할 수 있지만, 후에 그의 세상에 더 커진다면 절대 가능할 리 없었고, 그때부터는 통치 철학이 더 절실해질 것이다.
뚜렷한 통치 철학이 있어야, 몽주의 구체적인 명령이나 지휘가 없더라도, 몽주의 뜻에 맞춰 통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통치 철학을 세우고 그것을 전파하여, 관리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었고, 그건 통치 철학이 필요한 시점보다 더 빠르게 시행되어야 마땅했다.
바로 그 점에서 길도의 등장이 환영받을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호민’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난세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그로부터 회복하기 위한 노력과 도전을 담은 것이니, 그것을 스스로 깨달은 길도야말로 위난세의 통치 철학을 가꾸어 나갈 만한 인물이었다.
몽주가 상도와 병도로써 길도의 ‘호민’을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여 가르친다면, 길도를 통해 통치 철학을 보다 가꾸고, 그것을 세상에 전파시킬 수 있으리라 예상한 것이었다.
물론, 아직은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재상과 두신이 만든 ‘상도와 병도’는 짧은 보고서로서 대략적인 개념을 정리한 수준에 불과하여, 몽주가 좀 더 보완해 줄 것을 요구한 상태였고, 길도의 성품과 기량 또한 더 확인해야 하니, 후에 부족하다 판단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몽주는 내심 기꺼운 중이었다.
상도와 병도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그가 어림잡던 것과 맞아 떨어졌기에 그랬고, 길도 또한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눈 것을 비추어 생각하면, 분명 출중한 자였기 때문이었다.
몽주는 크게 미소 지으면서 ‘상도와 병도’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임기(臨機)만 가득한 중에 마침내 정석(定石)을 얻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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