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30)
개선 개선(改善 凱旋)
인천 어느 조개 구이집에 몽주가 재상, 두신과 더불어 음식을 탐하고 있었다.
“제철이라 그런지 살이 토실토실 올랐네요.”
몽주가 가리비의 살코기를 맛보며 말하자, 재상이 그건 아니라는 양 대꾸하였다.
“제철이라기에는 끝물도 아니고 좀 지났죠. 그리고 요새는 어차피 수입산이 대세라 제철이라는 의미도 별로 없고요.”
“…….”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거죠.”
왠지 얄미운 말에 몽주가 재상을 노려보니,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하곤 다시 조개를 열심히 구웠다.
세 사람은 인천 조선소에서 범선 건조를 살피기 위해 왔다.
범선의 건조 상황은 완성 직전으로, 전자 및 기계 설비 테스트 후, 도장만 하면 곧바로 진수할 수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었다.
“제주에서 부품 제작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두신의 물음에 몽주는 조갯살을 입에 가득 넣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냐음냐, 총 20척 분량의 목재를 다듬고 있고요. 그중 2척 분량은 세밀 공정까지 완성된 상태에요. 그야말로 곧바로 건조에 착수하면 되는 거죠. 그 두 척 먼저 해 보고, 만약 현대와 달리 고려에서 건조하는 것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차후 만들 범선에서는 수정할 생각으로 그 외의 부품들은 세밀하게 다듬는 건 보류해 두었죠.”
“전장 28미터에 전폭 6.5미터, 두 개의 주 돛대에 전방 보조돛도 있고, 상하 갑판에 걸쳐 최대 24문의 강철화포까지 있는 범선이라……. 첨원저형 배밑, 선체의 수밀 격벽이나 활수창과 수안, 그리고 타륜식으로 조종이 가능한 개공타 키 같은 걸 빼고 생각해도 당대에서는 겨룰 배를 찾기 어렵겠네요.”
“그렇죠? 후후.”
두신이 중얼거리며 통합 범선을 정리하자, 몽주는 마치 자기 자식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웃음을 보였다.
그간 몇 번의 설계 변경이 있으면서, 통합 범선의 크기는 약간 커졌고, 두신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선체 조립 방법도 바뀌었다.
목선의 선체 제작 방식은 크게 클링커 이음(Clinker Built)과 카벨 이음(Carvel Built)로 나뉘는데 그중 고려의 제작 방식은 클링커 이음에 가까웠다.
두 가지 방식의 차이는 선체 하부에 무을(무으다 : 짜서 맞추다) 판재들을 늑골에 고정하는 방법에 기인하는데, 카벨 이음은 판재의 접점끼리 맞대는 방식으로 표면이 매끄러워 보기에 좋고, 시공이 간편하되, 대신 내구성이 클링커 이음에 비해 떨어졌다.
반대로, 클링커 이음은 판재를 겹치게 하여 늑골에 고정하는 것으로 외관상 보기에 좋지는 않으나 내구성이 좋았다.
특히 한선에서 쓰인 클링커 이음은 서양의 클링커 이음보다 더 정밀하여 판재를 단순히 겹치는 것을 넘어, 턱을 따 짜 맞추어 나무못으로 고정시키는 방식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클링커 이음이 카벨 이음에 비해 시공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이 더 컸고, 한선은 한술 더 떴다.
처음 통합 범선을 설계할 때만 해도 고려식대로 클링커 이음을 쓰고자 하였는데, 도중에 카벨 이음으로 바뀌었다.
이는 지금 만들고자 하는 통합 범선의 규모에서는 클링커 이음 방식을 사용할 수는 있으나, 차후에 대형 범선을 제작할 때는 여지없이 카벨 이음 방식을 채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범선의 크기가 커질수록, 클링커 이음 방식은 시공하기에 난도가 높아지고, 시간과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 한선의 우수한 기술 중 하나인 ‘턱따기 이음’을 채용하지 못하는 것에 다소 아쉬움이 있었지만, 훗날을 위해서라도 미리 카벨 이음 방식을 선택해야 했다.
대신, 한중 범선에 보편적으로 쓰이는 수밀 격벽을 개량, 발전시켜 침수 방지 및 선실 벽에 이용하면서 동시에 늑골을 보완시키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카벨 이음 방식의 약점인 내구성을 최대한 보강하고자 하였다.
“고려에서 그 배를 만든다면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처음 두 척은 그래도 한 달 이상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빨리요? 여기서 건조하는 것도 거의 두 달 가까이 필요했는데요?”
재상이 놀란 반응을 보였지만, 사실 당연히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야 여기서는 부품 가공부터 전자 기계 설비까지 다 쳐서 그 정도 걸린 거니까요. 고려에서는 이미 부품을 대부분 준비해 두었고, 전자 기계 설비를 설치하는 일도 없으니까요. 현대에서 고려 수준의 배를 만들었다면 훨씬 기간이 줄어들겠죠. 게다가 검사 및 감수에 관한 행정 절차 같은 것도 없고요.”
“아, 그렇겠네요. 그럼, 고려에서 쓸 삭구는 다 마련해 두었나요?”
“일단 고려에서 쓰던 걸 써 보고 개량할 건 개량해야겠죠. 근데, 지난번에 대형 수차 설치하면서 쓴 기중기 덕에 장인들이 도르래에 눈을 떠서 그걸 이용할 것 같기도 해요.”
고려에서 건조 중인 배의 설계는 기본적으로 현대에서 짓고 있는 배를 본 땄지만, 완벽하게 같은 건 아니었다.
현대에서 만드는 범선이야 전자 기계 설비가 포함되어 있어, 그것이 필요 없는 고려에서는 설계도 다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고려에서는 인력으로 배를 다룰 삭구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본래 고려 당대의 배들은 순수한 인력으로만 배를 다루었다.
그런데 지난 수차 공사 때 기중기를 만들면서 복합 도르래, 즉 고정 도르래와 움직도르래를 이용하여 적은 인력으로 같은 힘을 낼 수 있음을 알게 되자, 배바치들도 도르래를 통해 인력을 아끼는 방법에 골몰하게 된 것이었다.
단순히 하나의 고정 도르래와 하나의 움직도르래만으로도 들이는 힘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모르긴 몰라도, 돛을 펼치거나 닻을 오르내리는 데에는 도르래가 쓰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세 사람은 조개 구이와 소주를 먹고 마시며 범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두신이 물었으니, 그 범선을 어디다 쓸 거냐는 물음이었다.
“상선으로도 쓰고, 군선으로도 써야죠.”
“아뇨. 제 말은 어느 곳이랑 교통할 때 쓸 거냐는 거죠. 고려는 아무래도 좀 자제해야 할 것 같으니, 지금으로서는 대마도와 일본뿐이잖아요.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소용이 있다 싶지만, 그래도 이왕 나름 오버테크놀로지 급 범선을 손에 쥘 판인데, 더 넓게 써야죠.”
“중국이나 동남아와 교역하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그에 몽주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하였다.
“사실 명나라라는 시장이 탐이 나긴 해요. 특히 일본과 교역도 뚫었겠다, 두 나라 간의 금은 시세 차익을 얻는 걸 생각하면 빨리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근데 당장은 좀 여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져요. 범선 스무 척을 새로 만들고, 또 추가로 계속 만든다고 해도 군용으로 쓰고, 또 제주와 일본 간의 무역을 잇는 것에 투입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다 싶거든요. 무작정 배를 만든다고 해도 그에 투입할 인력이 부족하니, 제대로 돌릴 수 있는 선박의 수가 한정될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중국과의 교역도 시도하기 애매한데, 다른 곳을 개척하는 건 더 어려울 수밖에 없죠.”
“유민을 들이는 데에 문제가 없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뭐, 유민들이야 시간을 들여 데려오면 수만 명까지 들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말했듯 성인 남성의 수는 사분의 일이 될까 말까 한 정도고 그중에서 청장년층은 절반 정도에요. 열 명의 유민이 들어오면, 그 중 쓸 만한 남성 인력은 한두 명에 불과하단 거죠. 지금까지 천 명 좀 넘게 들어왔는데, 뱃일을 할 만한 노동 인력은 겨우 백오십 명 정도에요. 게다가 노동력이 필요한 데가 뱃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새로운 범선의 기본 운항 인력은 기존 고려 대선에 필요한 수와 비슷했지만, 여기에 화포 운영 요원을 더하면, 최소 30명에서 최대 54명이 필요했다.
이는 군선으로 쓸 때와 상선으로 쓸 때 화포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어떤 쪽이든 기존의 고려 대선에 비해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지난 근 두 달 가까이 유민들을 받아들였음에도, 선원으로 쓸 수 있는 남성 인력을 생각하면 고작 군선은 3척, 상선으로 하면 6척 정도 더 운용할 수 있는 셈이었다.
“역시 인구가 제일 문제죠. 안 그래도 저도 생각을 해 봤는데 인력 문제를 다소나마 해소할 방법이 있긴 해요.”
문득 재상이 한 말에 몽주와 두신이 모두 그를 주목했다. 인력 문제를 해소할 방법이 있다면, 뭐든 동원해야 했다.
“여성 인력을 쓰는 거죠. 뭐, 남성에 비하면 몇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인력에 도움이 되겠죠.”
“아, 근데 그렇다고 제주의 여성들이 편히 노는 건 아니거든요. 다들 저마다 일을 하고 있어요. 가정이 있는 집의 여성이면 주부의 역할을 기본으로 하면서 농사를 짓고 있기도 하고, 해녀 일을 하는 분들도 꽤 있거든요. 편모 가정이라면 완전히 가장 역할을 해야 하기도 하고요. 제 가복들 중에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 많은데 다들 일하느라 바빠요.”
몽주의 가복들 대부분이 목호 일족들인 만큼, 목호 토벌 중에 노동 연령의 사내들이 거의 죽어 여인과 자식만 남은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가복으로서 일을 하면서, 자연히 편모 가정의 가장 같은 상황이 되어 있었다.
몽주가 그리 효과 있을 것 같지 않아 하자, 재상이 손가락을 저어 보이며 다시 말하였다.
“지금 당장의 상황에서만 보면 그렇죠. 사실 여성의 인력을 쓰자는 건 결국 여성도 직업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여성이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된 건 결국 산업 구조의 발달과 관련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가정에서 알아서 구해야 하는 것들을 시장에서 구할 수 있게 되면서 가정에서 부업을 하느니, 차라리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버는 게 더 나은 상황이 될 때 비로소 여성들도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거죠. 집안일 하면서 텃밭을 일구는 대신, 텃밭에서 얻을 농산물을 시장에서 구할 수 있게 되면, 텃밭을 일구는 시간만큼 다른 일을 할 시간을 얻을 수 있고, 그 다른 일의 보상이 텃밭에서 구했어야 할 농산물을 구입하는 비용보다 더 크다면 자연 일자리를 원하게 되는 거죠.”
“그야 그렇겠지만, 문제는 결국 가정이라는 거죠. 인구 증가를 위해서라도 여성들이 혼인하여 아이를 많이 생산해야 하는데,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게 되면 그만큼 아이를 많이 낳아 기를 수가 없게 되잖아요.”
몽주가 다시 반론했지만, 재상의 주장은 여전했다.
“그것도 결국 산업 구조의 변화와 함께 개선돼야 할 문제죠. 탁아업이라는 산업을 육성하면 여성도 육아에 있어 어느 정도 자유를 가질 수 있으니까요. 물론 복지라는 현대적 시점에서 보자면, 탁아업은 공공의 지원이 필요한 것이겠죠. 어쨌든 육아 문제를 해결하면, 여성들도 충분히 일을 할 수 있어요. 임신 시간 몇 년을 제외해야겠고, 아이가 있는 여성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먼 곳을 오가는 일은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남성 인력이 굳이 필요 없는 일을 여성 인력이 대체할 수 있게 되죠.”
재상의 말이 일단락되자, 내내 듣고 있던 두신도 한마디 끼어들었다.
“이참에 화폐도 유통시키시죠.”
“화폐요?”
몽주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언젠가는 화폐를 도입해야 함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고 여겼고, 재상과 두신도 그에 동의하던 바였는데 갑자기 화폐가 언급되니 의아했던 것이다.
“재상의 제안을 실행하고자 한다면 산업 구조의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하고, 산업 구조를 개편하게 된다면, 자연히 시장에서 거래해야 할 물품의 수가 증가할 테고, 그렇다면 기존의 물물 교환 형태의 거래 방식으로는 한계를 맞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건 그렇겠네요.”
두신의 제안도 받아 두고, 몽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재상의 말대로 여성 인력을 쓰고자 한다면, 얼마 정도의 노동 인력을 얻을 수 있을지, 산업 구조의 변화까지 감안하여 따져 보고자 한 것이다.
일단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들은 양민이든 노비든 이미 노동 인력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각 산업 자체의 인력 사용 효율성이 갑자기 크게 늘지 않는 이상, 이미 일하고 있는 여성을 다른 일을 하게 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미혼 여성과 가정주부의 경우에는 인력을 쥐어짜 낼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했다.
사실 고려에서 앵도와 같이 특출한(?) 문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성인 여성 중에 미혼 여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미혼 여성들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들을 쓰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관직을 제외하면 여성들의 참여 자체가 문제되지 않는 것이 고려 사회의 얼마 남지 않은 장점 중 하나였다.
특히 여초 사회인 제주의 경우에는, 혼인하지 못한 여성들이 제법 있어 문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들을 그저 방치하는 것보다는 전문직(?)에 종사하게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상업과 관련된 일을 맡기면서, 고려 본토나 외국으로 돌리다가 남자라도 덥석 물어 오면 몽주로서는 그야말로 ‘땡큐’한 일이었다.
몽주는 지난번 인구 조사를 떠올리며, 젊은 미혼 여성의 수를 따져 보았고, 그중 절반만 전문 인력화한다 해도 백 명은 더 확보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고, 다음으로 일반 양민 주부의 경우를 따져 보기 시작했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세상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극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면 모든 가정이 부모는 물론이고, 어느 정도 성장한 아이들까지 모두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다만, 제주의 경우에는, 특히 홍로현을 비롯하여, 몽주의 통치 이래로 많은 것이 달라진 고을들의 경우는 좀 달랐는데, 몽주가 제주에서 일으킨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이 있어, 그들은 몽주가 제공하는 임금, 즉 삯으로 받은 양곡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다.
그 임금의 수준이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한 편이었는데, 5인 가족을 가정하면, 굳이 아내와 아이들까지 일하지 않더라도 먹고 사는 데에 지장이 없을 정도였고, 부양가족의 수가 더 많으면 조금씩 더 배려해 주기도 했으므로, 가족 부양 면에 문제가 없는 건 다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아내들이 일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건 식자재 중 주식 외의 것은 대부분 알아서 구해야 했고, 그 역할을 보통 아내들이 책임지기 때문이었다.
텃밭을 일구고, 해산물을 채취하고, 혹 잉여 식량이 있을 경우 다른 산물과 바꾸는 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일상생활을 위해 날품을 팔아야 하는 건 일상생활을 위한 산업이 없기 때문이며,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탓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상과 두신의 말대로, 산업 구조를 혁신하여 세분화하고, 화폐 경제를 도입하여 거래의 편의를 높인다면, 유휴 여성 인력이 생길 수 있을 것이고, 그들로 하여금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게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강권하여 직장에 배치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환경이 받쳐 줘야 정착될 것이니 변화와 더불어 행해야 할 것이다.
물론, 유휴 여성 인력이 생기는 것과 여성 직업인이 생기는 건 선후 관계가 있는 변화가 아니라, 동시에 변해야 하는 문제였다.
몽주가 어림짐작으로 따져 보니, 여성 인력을 쓰기 위한 기초 지원에 드는 인력을 제외하고도, 최대 5천 명 안팎의 인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여러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가정 하에 대중 잡은 계산이라,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만약 5천 명의 인력을 더 구할 수 있다면, 몽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5천 명이 아니라 5백 명뿐이라도 탐이 나는 게 지금 몽주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간 몽주 씨가 홍로현 일대를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제주를 변화시킨 건 고려의 간섭이 우려되기 때문이었잖아요? 한데, 이제 고려가 내분으로 어지러워졌으니, 이참에 제주를 한번 크게 뒤바꿔 버리시죠. 그간 남들 시선 때문에 자제했던 인구가 많은 북제주에도 산업을 일구고, 일본 외에 중국과도 교역로를 뚫어 보고요.”
재상의 말에 몽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고려 내 내분을 조장한 것도 제주가 자유로워지기 위함이었으니, 그건 비단 일본과의 교역이나 대마도 경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외적으로는 또 다른 곳으로 진출을 염두에 둔 것이었고, 내적으로는 ‘시스템’ 자체를 당대의 수준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함이었다.
여성 인력을 쓰는 걸 넘어 제주의 수준을 전체적으로 바꿀 때가 온 것이었다.
“아, 근데 고려의 내분을 언급하니까, 또 머리가 복잡해지네요. 게다가 왜놈들 문제도 있고…….”
두신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그들에게 고려에서 있었던 두 가지 상황, 즉 고려 내분의 고조와 왜구로 인한 쓰시마 분함대의 피해에 대해 알려 주었으니, 그 문제들에 대응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언제나 고민은 끝이 없었다.
몽주도 가벼이 한숨을 내쉬더니 젓가락 끝으로 상을 툭툭 두드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보다 지금 당면한 가장 큰 문제가 있는데 말이죠.”
“또 문제가 있습니까?”
“……조개 구이가 다 타게 생겼다는 겁니다.”
“어엇!”
지글지글 소리를 내던 조개들이 어느새 찌글찌글 탄내를 풍기고 있었다.
* * *
‘내달 초하루를 기하여, 나 제주현백 휘하의 모든 소(所)에서 지불할 삯은 모두 미찰(米札)로 대신한다. 미찰은 청동으로 된 원형의 형태로써, 나 제주현백의 인장이 새겨져 있으니 모두 일견(一見)으로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미찰은 제주현백의 여러 창름에서 하나당 일백 구람(그램)의 미곡과 교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간 삯으로 미곡을 나누어 주던 불편함을 덜기 위함이니, 이와 같은 변화에 백성들은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미찰을 위조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만약 미찰을 본떠 위조하는 자는 죽음으로써 벌할 것이니 이를 명심하라.’
천몽으로 고려로 간 몽주는 가장 먼저 화폐 경제를 구현하기 위한 변화에 착수하였다.
교리들을 불러 모아 생각을 밝히자, 의외로 반대하는 자가 없었는데, 그건 비단 몽주의 눈치를 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몽주의 제안에서 ‘돈’을 사용한다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 탓에 가까웠으니, 그저 삯을 양곡으로 주던 불편함을 더는 것에만 주안(主眼)할 뿐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기존에 양곡을 가져가 직접 나눠 주던 것을, 미찰을 통해 백성들이 직접 창름으로 가서 받아 오게 하는 것이니, 그저 삯을 나눠 주는 형식만 바뀐 것으로 단정한 것이다.
하나, 미찰은 진정한 화폐 경제를 시도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도입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니겠으나, 자연히 점차 미찰이 화폐처럼 쓰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찰 하나당 일백 구람의 미곡과 교환이 가능하니 동등한 가치로 여겨질 것이고, 점점 그 가치를 기준으로 중간에 미곡이 쓰이는 일 없이 다른 상품과 미찰이 직접 교환될 것이다.
식권이 화폐처럼 쓰일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일종의 ‘쌀’ 본위제(本位制) 화폐 경제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화폐를 다른 상품(보통 금은 등의 귀금속)의 가치와 연동하는 본위제 화폐 경제에서, 쌀을 기준으로 삼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으나, 화폐 경제가 자리 잡은 역사가 없는 곳에서는 쌀만큼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물품이 없었다.
이는 미찰을 씀으로써 화폐를 이용한 거래 방식에 사람들이 익숙해지게 만들기 위함이고, 미찰과 미곡 일백 구람을 교환하는 경험을 통해 가치를 확신시켜 주면서 훗날 진짜 화폐를 도입하였을 때 그 화폐의 가치에 대한 ‘정부’의 보증에 신뢰를 빠르게 얻고자 함이었다.
미찰은 공고한 대로 청동으로 된 ‘엽전’의 형태로, 크기는 현대의 백 원짜리 동전 정도였고,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나 있었다.
몽주가 급히 명하여, 공소에서 대략 시험적으로 생산해 보니, 평범한 자들이 쉽게 위조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가공하는 것이 가능할 듯했다.
다만, 걱정되는 건 미찰을 만드는 데에 드는 청동의 가치가 미곡 100구람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몽주가 도래한 이후, 제주에 양식이 부족한 적은 없었으나, 아직 제주에서 양식, 특히 쌀의 가치는 실재보다 더 크게 여겨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한동안은 백성들이 청동보다 쌀을 더 선호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계속 양식의 부족함이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 슬슬 미찰에 쓰인 청동의 가치에 눈을 떠 미곡으로 바꾸는 대신 청동 자체를 모으려하거나, 미찰이 가진 가치 이상으로 평가하여 다른 상품과 교환하려 들 수도 있었다.
만약 이런 가치의 혼동이 발생한다면, 일종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상황 또한 불러올 수 있었으니, 그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미찰을 종이나 나무로 만들 수는 없었다. 위조가 너무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또, 미찰을 철로 만들지 않은 건, 당대 제주에서 철의 가치가 구리나 주석 이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강철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철의 소용성이 급격히 올랐고, 일본과 교역하면서 구리를 비롯한 비철 금속도 상당량 들여올 수 있었기에 현대의 상식과 달리 가치가 오히려 역전되는 경향마저 있었다.
결국, 해결책은 일단 미찰을 100구람의 미곡 이상의 가치로 쓰는 것을 단속하되, 하루 빨리 진정한 화폐 체계를 제주에 구현하는 것뿐이었다.
교리들에게 일러 미찰의 사용을 도입하게 명하면서, 몽주는 한 가지 인사(人事)도 실시하였다.
그건 점녀를 면천하고, 그녀를 교리로 임한 것이었다.
이 또한 다른 교리들의 반대가 없었는데, 이미 점녀가 꽤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몽주가 제주로 왔을 때, 석삼이와 더불어 점녀가 몽주의 창고를 관리하였는데, 이제 제주의 산업이 발달하고, 교역이 커지면서 드나드는 물품의 수와 가치가 증가하니, 창고를 관리하는 역에 권력마저 붙은 것이었다.
이것은 절대 우스울 수가 없었다. 몽주가 보기에 지금 점녀는 제주에서 현대의 ‘재경부’가 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었고, 실제로 점녀는 그 막중한 업무를 누구보다도 잘 수행하고 있었다.
아직 개념도 없는 재정 정책씩이나 쓰는 건 아니었지만, 꼼꼼하게 관리하여 물자의 유통을 상세히 살필 수 있게 정리했던 것이다.
몽주가 일군 산업이 제주 경제에 주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자연히 창고 관리를 하는 점녀를 단순히 가복으로만 여길 수 없게 된 건 당연했다.
그렇기에 그녀를 면천하고, 교리로 임하는 것에 다들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몽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안 그래도 장차 여성 인력을 대대적으로 쓰려고 마음먹은 그로서는 여성 관리의 전례를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점녀를 불러 그녀에게 면천함을 고지하고, 교리로 임명하여, 창고 관리에 더해 미찰의 유통을 담당하게 하였다.
물론, 그녀가 부릴 수하를 많이 늘여 주기도 했다.
‘재경부’에 ‘중앙 은행’마저 안겨 준 셈인데, 임명받는 점녀나 다른 교리들이나 아직 그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후에 체제를 정비하면서 분리해야겠지만, 그를 위해서라도 점녀 휘하에 일을 배울 자들을 두는 것이 옳다 여겨 그리 행한 것이었다.
다만, 점녀는 몽주의 명을 받고서 문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그녀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석삼이도 면천하게 해 달라는 말이냐? 대체 무슨 이유로?”
몽주가 캐묻자, 절대 안 그럴 것 같았던 점녀가 금세 얼굴을 붉혔……?!
“당장 석삼이 놈을 잡아 오너라!”
심복이랍시고, 가복들의 수장처럼 굴면서 처자들에게 치근댄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아무래도 점녀마저 건드린 모양이었다.
당대는 고려 시대였고, 특히 제주는 여초 사회에 섬인 탓에 남녀의 연애에 매우 관용적이라,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그냥 봐주었는데, 점녀를 건드린 건 아주 특별한 문제였다.
‘이 난봉꾼 자식이 내 소중한 브레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