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36)
* * *
“왔네! 왔어!”
잠결에 소란을 느낀 몽주가 눈을 떴다. 화극이 기쁜 낯을 보이며, 연신 왔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무엇이 왔다는 것일까. 아직 잠에 취한 머리를 힘겹게 돌리니, 기다리고 있던 오우치씨의 군병들이 왔다는 의미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몽주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의복을 갖추고는 선실을 나섰다.
히젠성을 함락한 이후, 현백군은 함대가 정박한 비전국의 어느 포구로 철수하였으니, 노리는 바가 있어 승전연회를 마다하고 몽주가 잠을 잔 곳은 기함의 선실이었다.
늦가을이자 초겨울의 싸늘한 새벽 공기가 내려앉은 갑판으로 나가자, 횃불이 가득한 수십 척의 배가 천천히 포구로 몰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배들마다 오우치씨의 카몬(家紋 : 가문의 문장)인 마름모 꼴 안에 꽃무늬가 있는 기하학적인 문장이 박힌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닻을 내린 오우치의 배들 사이로 현백군이 나룻배를 몰아갔다.
몇몇이 나룻배로 옮겨 탄 후, 몽주가 있는 기함으로 다시 올라왔다.
“제주현백을 뵙습니다.”
먼저 고려식으로 읍하는 자는 대내의홍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기함에 오른 무사 차림의 왜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왜국 무사식으로 가볍게 예를 표하였다.
“오우치 미쓰히로(大內滿弘)입니다. 백제의 후손으로서 제주현백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새로운 인물들 중 가운데 선 자가 스스로를 소개하니, 그는 대내의홍의 동생이자, 역사에서 아버지 히로요와 더불어 대내의홍(오우치 요시히로)에 대적하여 가독투쟁을 벌였던 자였다.
“반갑소. 이렇게 많은 배와 더불어 온 것을 보니, 요시히로의 제안을 오우치씨가 받아들인 듯하오?”
“어찌 호의를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제주현백과 더불어 우리 가문에도 큰 도움이 될 일이니, 마땅히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미쓰히로가 말을 하면서도 얼핏 그의 형을 곁눈질하며 냉소를 지었으니, 몽주는 대내의홍이 오우치씨를 어찌 설득했을지 대략 짐작이 갔다.
“자,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몽주는 대내의홍과 미쓰히로, 그리고 그의 가신 두 명을 데리고 선실로 들어갔다.
“새로 지은 배인 모양입니다.”
선실에 자리하고 찻잔을 내주자, 미쓰히로가 찻물을 한 모금 하곤 선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말하였다.
“배가 크고 튼튼해 보이니, 먼 제주에서 이곳까지 제주현백이 승승장구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리 봐 주어서 고맙소. 그건 그렇고, 데려온 군병이 몇이나 되오?”
“오천오백여 명입니다.”
“과연, 가독께서는 힘을 써야 할 때를 아시는군.”
축후국을 점하기에 충분한 병력이었다. 몽주가 만족스레 웃음을 보이자, 미쓰히로도 물었다.
“다만, 급하게 오느라 군량이 많지 않아 오래 싸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저 요시히로의 말대로 현백께서 화포를 동원하여 쉽게 싸울 수 있게 해 주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그건 걱정 마시오.”
“그리고 한 가지 더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만약 지쿠고국(축후국)을 점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내친 김에 히고국(비후국) 또한 도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리한다면, 요시히로가 홀로 고립되는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몽주는 시선을 돌려 대내의홍을 바라보았다. 그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그건 분명 그가 오우치씨를 설득하기 위해, 몽주가 허락한 것 이상의 ‘미끼’를 던졌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본디 몽주가 대마도를 떠날 때, 대내의홍을 주방국(스오국)으로 보내면서 그에게 조언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오우치의 분가로서 축후국에 오우치씨의 카몬(家紋)을 달 수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추후에 오우치씨의 가독을 노리지 않겠노라 약속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자는 대내의홍이 고려와 제주현백의 신하이면서 동시에 범(凡)오우치씨의 일원으로써, 오우치씨의 패권에 기여하겠다는 약조를 통해 오우치씨를 설득하라는 의미였고, 후자는 아무리 내쳐졌다고는 하나 엄연히 적장자인 그가 가독 자리를 공식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오우치씨들이 은근히 두려워하는 내분의 가능성을 지워 그들의 협조를 구하라는 뜻이었다.
이 두 가지 약속만으로도 오우치씨는 충분히 설득되리라 보았던 것이다.
내분의 가능성을 잠재웠으니, 이는 오우치씨의 정치적인 이점이고, 앞으로 축후국에 오우치의 카몬을 달고, 오우치씨의 일원으로 행동하는 것도 오우치씨의 경제적, 외교적 이점일 테니, 오우치씨가 거부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한데, 비후국(히고국)까지 오우치씨가 도모하는 건 달라도 많이 다른 문제였다.
“말하는 걸 들으니, 히고국의 슈고는 다른 이에게 맡길 생각인 모양이오?”
“그렇습니다. 가독께서는 제 동생 히로마사(弘正)를 슈고에 앉힐 생각이십니다.”
대내의홍만 동떨어진 곳에 두는 것이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자칫 본가가 분가로부터 발생할 이점은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정치적 부담만 질 가능성도 있었으니, 오우치씨가 그리 판단한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문제는 비후국(히고국)마저 오우치씨가 거둔다면 몽주가 생각한 규슈의 세력 관계가 완전히 뒤틀린다는 점이었다.
원래 몽주가 구상한 것은 오우치씨가 대내의홍을 통해 규슈에 진출하고, 그 이점을 누리기 위해 자연히 료슌 및 막부와 보다 유대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었다.
규슈 남조 세력의 중심인 키쿠치씨의 비후국(히고국)과 대내의홍의 축후국이 맞닿아 있는 만큼 자연스레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비후국마저 오우치씨가 확보한다면, 오우치씨가 오히려 규슈의 ‘왕’이 될 테고, 료슌이나 막부와 견제하는 일은 더 심해질 것이다.
당연히 이는 몽주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규슈가 안정되길 바라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대내의홍이 축후국에 자리 잡아 왜국의 권력자이면서 동시에 몽주 자신의 수하로서 활동하길 바라는 입장에서도 그랬다.
대내의홍이 축후국의 슈고가 되어 그곳을 다스린다면, 규슈는 료슌과 범오우치씨, 그리고 남조 세력이 삼분하는 형국이 되니, 굳이 막부에 의해 규슈가 일통되지 않더라도 누구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안정이 강제될 것임을 노린 것이었고, 몽주 또한 그 안정세에서 현재 료슌으로 일원화된 왜국과의 교역을 대내의홍을 통해 확장하면서 보다 자유로이 교역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오우치씨에게 비후국을 넘기는 건 우환을 키우는 일이었다.
“만약 오우치씨가 비후국을 치는 것을 내가 지원하지도, 지지하지도 않는다면 어찌할 것이오?”
미쓰히로가 입가를 실룩거리더니 답을 뱉었다.
“그리된다면, 아쉽게도 오우치씨는 이대로 물러나 규슈에 관심을 버릴 것입니다.”
규슈에 관심을 버릴 것이라는 말 자체가 거짓임이 분명했지만, 당장 축후국을 도모함에 있어 오우치씨의 병력이 필요한 점을 생각하면 비웃기 어려웠다.
“내가 료슌으로부터 얻은 것은 오우치씨를 축후국의 슈고로 임명하는 것이지, 비후국마저 주는 건 아니었소.”
“규슈탄다이의 임명이 그리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실제로 누가 비후국을 얻어 다스리는지가 중요한 것이지요. 게다가 만약 현백께서 협조하지 않으시고, 홀로 지쿠고국을 도모하신다면, 오우치씨가 요시히로를 축후국의 슈고로 천거하리란 보장 또한 없을 것이니, 현백께서는 이 점도 잘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알겠소. 잠시 숙고할 터이니 시간을 주시오. 결정하면 다시 그대를 부르겠소.”
미쓰히로가 물러나자, 선실에는 미안한 표정의 대내의홍과 선실 구석에 서서 오가는 말을 듣곤 혀를 가벼이 차고 있던 화극만이 남아, 고민에 빠진 몽주를 바라보았다.
“이 또한 계륵이 아닌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몽주가 탄식하니, 화극과 대내의홍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바라보았다.
“축후국이 계륵이라는 겐가?”
화극이 물으니, 몽주가 고개를 저었다.
“축후국이야 살코기라 해야지, 계륵일 수는 없지요.”
“하면, 무엇이 계륵이라는 겐가.”
“오우치씨가 계륵이 아니겠습니까. 손을 잡자니 오우치씨의 욕심이 과하고, 버리자니 아깝지 않습니까.”
오우치씨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규슈삼분지계가 무너지고, 오히려 전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아지며, 나아가 몽주가 대내의홍의 축후국을 통해 얻고자 할 이익도 혼란속에 파묻힐 테니 오우치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나, 그렇다고 거부하자니, 오우치씨와 연이 끊어지는 건 차치하더라도, 당장 축후국을 얻기 곤란해지니 버리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오우치씨가 계륵이라 하시면, 결국 버리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대내의홍이 어수룩하나마 천천히 고려말로 뜻을 전하니, 몽주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계륵은 버려야 마땅하나, 그냥 버릴 수 있겠는가. 그에 붙은 작은 살점까지 쪽쪽 빨아먹고 버려야지. 안 그런가?”
“…….”
화극이나 대내의홍이나 몽주의 진의를 짐작하지 못하고,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몽주는 손바닥으로 앞에 놓인 상을 가벼이 치며 몸을 일으켰다.
“자네 동생을 다시 데려오게. 이제 결론을 지어야지.”
대내의홍이 의구심을 지우고, 선실을 나가 갑판에서 시퍼렇게 물드는 하늘 아래에서 배를 살피고 있던 미쓰히로를 데리고 돌아왔다.
“어찌 결정하셨습니까.”
미쓰히로는 선실로 들어오자마자 급하게 물었다. 겉으로는 제주현백이 제안을 거부할 수 없을 거라 자신하는 듯했으나, 내심 혹시나 거부할까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오우치씨의 입장에서도 규슈에서 가장 소출이 큰 율령국인 히고국(비후국)을 점할 기회를 놓치기는 싫었던 것이다.
“오우치씨가 히고국을 치는 것을 공식적으로는 돕기로 결정하였소.”
몽주의 대답을 통역 받은 미쓰히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걸 보곤, 몽주의 말에 담긴 ‘뉘앙스’가 잘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돕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쿠고국을 점한 후, 오우치씨가 히고국마저 노리고 출병한다면, 이를 지지하기는 하겠다는 의미요. 다만, 실제로 우리 군이 오우치씨의 싸움을 돕지는 않을 것이오.”
이에 미쓰히로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몽주의 말이 그에게는 오우치씨와 손을 잡지 않겠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몽주는 미쓰히로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히고국은 나와 바다에서 싸우다 크게 패하여, 군력을 제대로 부릴 수 없소. 기껏해야 일이천의 병력으로 농성하는 것이 전부일 터이니, 지금 그대가 부릴 수 있는 오우치씨의 가병만으로도 충분히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그게 정말입니까.”
“어찌 거짓을 말하겠소? 이는 그대가 제안한 바를 가납하겠다는 의미이니, 나는 요시히로를 지쿠고국의 슈고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그대가 히고국을 점하기를 바라야 하지 않겠소?”
“하나, 지쿠고국을 도모하는 중에 우리 군병들이 많이 상한다면, 히고국을 칠 여력이 부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쓰히로가 미심쩍어하며 묻자, 몽주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없소. 지쿠고국의 오토모씨 또한 나와 바다에서 싸우며 군력을 적잖이 소모한 바, 비록 히고국의 키쿠치씨에 비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크기는 하겠지만, 우리를 막지는 못할 것이오.”
“이기고 지는 것을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긴 후라도 병력이 소모되면 히고국을 도모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하면 이럽시다. 만약 지쿠고국을 함락한 후 오우치씨의 병력이 열에 한 사람 이상 상한다면, 그때는 그대가 히고국을 도모하는 것을 내 전력으로 돕겠소. 물론, 그게 아니라면 내가 말한 바대로 나는 말로만 도울 것이고. 어떻소?”
몽주가 정리하며 묻자, 미쓰히로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고, 같이 온 무사들과 연신 귓속말을 나누었다.
그들 또한 천초탄과 도원만을 거쳐 유명해에 접어들기까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으면서, 제주현백이 비후국의 키쿠치씨와 축후국의 오토모씨를 바다에서 격파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축후국과 비후국의 군력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제주현백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미 서국(西國)에 제주현백의 화약과 화포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오우치씨 역시 지난날 제주현백으로부터 폭죽을 전해 받은 바가 있어, 제주현백의 군력이 대단함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말 손쉽게 지쿠고성을 점령한다면, 너덜너덜해진 히고국은 그의 병력만으로도 도모할 만할 테고, 설령 다소의 희생이 있더라도 제주현백을 끌어들여 히고성을 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라 결론지을 수 있었다.
미쓰히로는 짧은 논의 끝에 마른침을 삼키며 말하였다.
“혹시 폭죽을 더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해 주신다면 현백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음, 우리도 원정길에 많은 군수를 가져오지는 못했으나, 폭죽은 많이 쓰질 않았으니 삼백 정 정도는 내줄 수도 있을 것 같군. 이 정도면 되겠소?”
미쓰히로의 표정에 득의가 스쳤다.
잠시 후, 미쓰히로가 양양하게 선실을 떠나 출병 준비를 하러 나가자, 몽주는 대내의홍을 향해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네 성을 바꿔야겠다.”
“……?”
“축후국의 슈고가 되는 대로, 네 왜성은 타타라(多多良)로 돌아가고, 고려에서는 축후를 본관으로 하는 다(多)씨가 될 것이다.”
“알겠……!”
본디 왜국의 풍습에서는 성은 물론, 이름을 바꾸는 것도 흔한 일인 터라, 그저 오우치씨로부터 분가하기에 성을 바꾸라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대내의홍은 이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놀란 눈으로 현백을 쳐다보았다.
“계륵의 살점을 빨아먹고 버린다 하신 것이 혹시……?!”
“너는 축후국과 비후국을 같이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이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몽주가 냉정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묻자, 대내의홍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본가와 완전히 척을 지고, 나아가 북부로부터는 규슈탄다이, 그리고 남부로부터는 남조 세력의 압박에 버텨야 하는 자리였다.
하나, 동시에 규슈의 강자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충성…… 현백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대내의홍이 이를 악물어 각오를 보이며 대답하였다.
* * *
반 시진 후, 이른 아침에 몽주의 함대가 오우치씨의 함대와 더불어 출항하니, 그곳에 함께 있던 료슌의 무사가 놀라 몽주를 찾았다.
이미 새벽에 괴선박들이 찾아와 경계심을 높이고 규슈탄다이에게도 그 일을 보고하여 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차에 제주현백이 그들과 더불어 나가니, 다급하게 몽주로부터 설명을 듣고자 한 것이다.
“이 서찰을 규슈탄다이에게 전하게.”
하나, 몽주는 그에게 그저 한 통의 서찰을 주고, 곧바로 출항을 강행하였다.
좀 전까지 배들로 바글거리던 포구가 텅 비었으니, 료슌의 무사만이 서찰을 쥔 채 발만 동동거렸다.
* * *
“우와아아!”
지쿠고성에 백기가 휘날리니, 본격적인 공성을 위해 막바지 화포 공격 중이던 현백군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직 해는 중천에 떠 있으니, 본격적으로 공성이 시작된 지 불과 한 시진 만에, 그리고 오우치씨의 병력이 지코구강(築後江) 하구에 상륙하고, 몽주의 함대 중 소선으로 이뤄진 분함대가 지코구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오우치씨의 병력을 엄호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불과 채 세 시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에, 지쿠고성이 항복한 것이었다.
포격을 멈추자, 무너진 성문으로 어린아이가 상자를 들고 울먹이면서 걸어 나오니, 그의 뒤에는 노인 하나만 따를 뿐이었다.
그 아이는 지쿠고의 오토모씨 슈고의 독남이었고, 노인은 그 아이의 숙부로, 항복의 증표로 관인을 바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어째서 슈고가 아닌 그의 아들과 동생이 나온 것인가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현백군의 화포 공격 중에 슈고가 폭사당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오토모씨의 항전 의지가 쉽게 꺾였고, 이내 항복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사실 끝까지 버텼다고 해도, 오우치씨와 현백군의 연합에 비해 군세가 확연히 떨어지고, 화포에 대응할 방도도 없는 그들로서는 그대로 죽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몽주가 관인을 받아 주자, 어린아이는 눈물을 마구 흘리며 통곡했고, 노인은 무릎을 꿇은 채 제발 어린아이들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규슈에 오토모씨가 지배하는 곳은 축후국 외에도 풍후국(豊後國 : 분고국)이 있었으니, 아이들만이라도 그곳으로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풍후국과 축후국은 지도상에서는 동서로 맞붙어 있긴 하였으나, 지형상 그 사이에 험준한 산맥이 자리하고 있어, 육상으로는 교통하기가 힘들었으니, 특히 군력이 가로지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몽주가 다자이후에서 출항할 때를 기준으로 보아도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그 안에 축후국의 오토모씨가 풍후국의 오토모씨와 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몽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정하였다.
“너희들 모두가 살 수도 있다. 후에 분고국(풍후국)과 소통하여, 만약 분고의 오토모씨가 지쿠고에 대한 타타라 요시히로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면, 너희는 모두 살아서 분고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분고의 오토모씨가 이를 거부하고, 나를 적대한다면 너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몽주가 결정하니, 노인도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진심인지는 모르겠으나 감사를 표하였다.
“저 어린아이가 후에 우환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모두 제거하심이 낫지 않겠습니까.”
범무교리 홍길도가 묻자, 다른 이들도, 심지어 앵도마저 동의하는 표정들이었다.
“내 병사들이 상한 후에 항복했다면 용서하기 어려웠을 것이나, 그 전에 항복했으니 어찌 자비를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저들을 몰살시키면, 훗날의 우환 이전에 당장 풍후의 오토모씨가 복수하려 들지 않겠는가?”
“이미 오토모씨는 우리에게 복수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홍길도가 다시 말하니, 몽주의 시선이 대내의홍, 아니 다의홍에게로 돌아갔다.
“고작 어린아이를 살려 두었다고 후에 당할 자라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겠지.”
“심려치 마십시오.”
다의홍이 몽주의 시선을 받고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였다.
물론, 몽주는 오토모씨의 어린아이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클 때쯤이면, 몽주의 세상은 더 넓고, 강대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가 오토모씨의 가족을 살리고자 한 것은 차마 어린아이까지 죽일 마음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건 현대인의 심정이기 전에 당장 제주에서 석해민 부부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을 강영이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라도 그럴 수 없었다.
어쨌거나 축후성을 손쉽게 손에 넣어 오토모씨 일가를 억류하고, 전후 정리를 하니, 공성 중에 죽은 자는 하나도 없었고, 다친 자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며, 그 다친 것도 비전투 중의 부상일 뿐이었다.
“이제 약속대로 나는 그대가 히고국을 도모하는 것을 말로만 도울 것이다. 아, 물론 폭죽 삼백 정은 내줄 것이고.”
“하하, 이를 말입니까. 이미 지쿠고의 오토모씨가 허약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니, 더 크게 상한 히고의 키쿠치씨는 우리를 보자마자 꼬리를 내리지 않겠습니까.”
미쓰히로는 자신만만하게 대꾸하니, 손쉬운 승리 후에 거만해진 것이 눈에 보였다.
물론 지쿠고의 오토모씨를 항복하게 하는 데 오우치씨의 병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현백군은 뛰어난 화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병력은 1천여에 불과하였으니, 오우치씨의 병력이 없었다면, 축후의 오토모씨는 요격을 시도하면서 거세게 항전하였을 것이었고, 그랬다면 현백군이 크게 상하거나 자칫 패퇴했을지도 몰랐다.
다만, 미쓰히로가 착각하고 있는 건 비후국의 키쿠치씨는 축후국의 오토모씨와는 달리 항복할 여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축후국의 오토모씨가 풍후국의 본가에 의탁할 수 있는 것에 비해 키쿠치씨는 비후국이 그들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곳을 잃는다는 건, 곧 가문의 몰락을 의미하였으니, 적이 아무리 많다 하여도 저항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몽주는 속으로는 달리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미쓰히로를 응원하는 말을 남기며 오우치씨의 병력이 비후국으로 향하는 것을 환송하였다.
“언제 뒤를 쫓을 겐가?”
오우치씨의 병력이 배에 올라 비후국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화극이 물었다.
이미 현백군의 주요 인사들은 몽주가 오우치씨를 버리기로 작정하였음을 알고 있었다.
“너무 급할 필요는 없지요. 한데, 규슈탄다이로부터 연락이 너무 늦는군요.”
몽주는 료슌에게 남긴 서찰에 적었던 것을 떠올렸다.
……만약 요시히로가 지쿠고와 히고 양국의 슈고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나는 히고를 포기하고 오우치씨가 히고국을 점령하는 것을 방관할 것이오. 이는 오우치씨가 규슈에 깊이 개입하고, 그들이 패권을 잡기 위하여 규슈탄다이에게 대적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니, 당장 괘씸한 마음에 그릇된 결정을 하는 것만은 피하길 바라오.
몽주는 료슌에게 그가 축후국(지쿠고국)을 쳐서 다의홍(요시히로)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겠노라 밝히면서 동시에 요시히로가 성을 바꿔 오우치씨와 결연할 것임도 알렸다.
이는 다의홍에게 주어지기로 약속된 명분상의 축후국 슈고직을 실제화시킴과 동시에, 료슌이 오우치씨 때문에 다의홍을 배척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더구나 오우치씨가 비후국을 노리고 있음을 알렸으니, 아마도 료슌은 한층 놀라고, 오우치씨에 대해 격분했을 터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료슌에게 주어진 길은 오우치씨에게 비후국을 허락하든지, 아니면 오우치씨와 결연한 다의홍에게 축후국과 비후국을 모두 허락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어느 쪽이든 료슌에게는 짜증이 나는 결과였으니, 그가 앞뒤 가리지 않고 군을 몰아서 올 수도 있었다.
하나, 몽주가 아는 료슌은 그렇게 막무가내도 아닐뿐더러, 만약 그가 그리 행동한다면, 이후 료슌은 제주와의 교역을 포기해야 함은 물론이고,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우려해야 하는 처지가 될 뿐이었으니, 그런 선택은 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남은 두 선택 중 료슌에게 어느 쪽이 그나마 유리한 것인지는 분명했다.
막부와 남조 사이에 줄타기를 하며 료슌의 신경을 거슬리던 오우치씨를 동쪽과 남쪽, 동시에 두고 싶진 않을 것 아닌가.
그렇기에 몽주는 내심 자신하며 료슌의 서찰이 당도하길 기다렸다.
하나, 료슌으로부터의 연락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오히려 미쓰히로가 격전 끝에 간신히 비후성을 함락하고 남은 키쿠치씨를 소탕하고 있다는 소식이 먼저 도착하였다.
그 후에야 겨우 전해진 료슌의 서찰을 펼쳐 본 몽주는 서찰을 내려놓은 후, 눈을 감은 채 침음을 옅게 흘려야 했고, 한참 후에야 다시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홍 교리.”
“예, 현백.”
“내가 궤도(詭道)를 꾸미는 것처럼, 적이든 우군이든, 누구라도 따로 궤도를 꾸밀 수 있음을 명심하라 기록해 주게.”
궤도, 즉 기만책이었으니, 몽주가 료슌과 오우치씨를 상대로 펼친 궤도가 있는 만큼, 료슌과 오우치씨도 저마다 궤도를 꾸미고 있었다.
오우치씨가 이미 막부에 귀의한 바, 제주현백이 타타라 요시히로와 더불어 오우치씨의 히고국을 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소. 만약 그럼에도 그대가 섣부른 짓을 한다면, 제주와 대화 간의 교역은 끊어질 것이며, 나와 오우치씨는 합심하여 지쿠고국을 칠 것이오. 이미 그대는 요시히로를 통해 규슈에 한 발 디디어 이익을 얻었으니, 더는 욕심을 부리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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