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37)
※ 지도
* * *
당대 막부 정권은 연합 정권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연합 정권이란, 결국 그 정권을 구성하는 데에 협조하고 동의한 권력자들 간의 관계가 비록 수장과 그 가문이 존재하더라도, 비교적 수평적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연합 정권이라고 하더라도, 그 수장인 가문은 다른 가문에 비해 강대하긴 하겠지만, 왜국 전체를 아우르지 못할 따름인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연합 정권을 구성하는 권력자들이 수장 가문에 충성하고 복종하는 정도는, 수장 가문의 중심 지역과의 거리에 유관하다.
간단히 말해 거리가 멀수록 충성심은 약하고, 독립심은 강하다. 반대로 거리가 가까울수록 충성심은 높고, 독립심은 약하다.
이는 두 가지 기준에 따르는 것인데, 가까울수록 반항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가까울수록 협조의 대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즉, 가까울수록 반항하는 것보다 협조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이고, 반대로 말하면 어차피 별 이익도 못 받을 만큼 멀다면 독자노선을 따라 제 이익을 따로 추구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이해관계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건 결국 가문의 지속과 생존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오우치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간 오우치씨는 혼슈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 잡으면서 막부 정권을 구성하는 데 합의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막부에 충성하진 않았다.
이는 막부를 힘껏 따른다고 딱히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고, 따르지 않는다고 막부가 처벌을 하기도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오우치씨는 막부의 일원인 양 하면서, 막부에 보다 더 비협조적인 규슈 지역 가문들과도 교류하고, 교역하면서 이익을 얻었으니, 막부에서 보기에 오우치씨가 막부와 규슈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것과 같았다.
이런 이치가 규슈에서는 더욱 강하게 드러나는 건 당연했다.
규슈의 가문들은 소출의 일부를 바쳐 막부를 따라봤자, 막부가 그들을 보호해 줄 수도 없고, 반대로 막부에 저항해도 그들이 자신들을 처벌할 수도 없으니, 완전히 독자노선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왕실이 남북조로 갈린 것은 규슈의 가문들에게는 꽤 좋은 상황이었으니, 북조를 따르는 막부에 반하여 남조를 따름으로써 그들이 독자노선을 걷는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어차피 독자적으로 생존함에 있어, 중앙의 힘이 약한 것이 더 낫다는 판단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변한 것은 이마가와 료슌이 규슈탄다이로 부임하면서였다.
그가 규슈로 오면서 그의 명성과 외교력으로 규슈에서 전무하다시피 하던 막부세력을 크게 키운 것이었다.
이는 분명 료슌의 뛰어난 능력에 오롯이 기인한 것이었다.
역사에서 보자면, 사실 규슈탄다이라는 직위가 료슌이 오면서 새로 생긴 것도 아니었다.
이전의 많은 규슈탄다이들이 그저 유명무실하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다 료슌이 규슈를 일통한 것은 그만큼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었다.
특히 료슌은 고려와 조선에서는 더욱 각광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전기 왜구라 불리는 당대의 왜구가 근절된 건 바로 료슌의 공이고, 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에서 최무선이 화포를 개발하여 왜구를 박살 내고, 이성계를 비롯한 무장들의 역할도 대단했지만, 애초에 왜구가 발생하지 않게 제어한 건 료슌이었다.
어쨌든 료슌이 복잡한 왜국의 정세와 규슈만의 세력 다툼 속에서 그의 외교적인 능력으로 규슈 북부 특히 다자이후를 수복하면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오우치씨의 입장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대 가독인 히로요는 여전히 박쥐와 같은 행태를 유지했지만, 가문 내에 여러 이론(異論)이 있었으니, 장남 요시히로가 가독의 반대를 무릎쓰고 료슌을 따라 종군한 것이 그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차이를 보이는 건 결국 향후 정세에 대한 판단의 처이예 기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히로요는 여전히 료슌이 규슈를 석권하기 어렵고, 나아가 막부가 규슈에까지 영향력을 가지기 힘들다고 판단했던 것이고, 요시히로는 료슌이 기어코 규슈를 막부에 안길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본디 역사대로라면, 이런 상황은 1, 2년 안에 오우치씨 내부의 가독투쟁으로 이어지고, 몇 년 동안 이어지다가 히로요가 죽고 나서야 화의(和議)하게 되지만, 몽주가 왜국에 등장함으로써 역사는 차츰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변화가 만든 첫 번째 굵직한 마디가 바로 히로요가 료슌과 협조하고, 나아가 오우치씨가 막부에 귀의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것이 대단한 변화의 순간인 것은, 본디 히로요는 그가 죽은 1380년까지도 그의 노선을 바꾸지 않았던 것과 크게 비교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규슈의 상황은 료슌이 외교적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쇼니씨의 가독 후유스케를 죽이는 실수를 저지르면서 순식간에 그간의 외교적 성과를 잃었으니, 히로요가 료슌이나 막부의 규슈 복속 가능성을 높이 점치지 않았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나, 이제 역사가 변하여 료슌은 제주와의 교역을 통해 크게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무사정신에 입각해서 보자면 비겁한 술수, 즉 외교적인 방법으로 회유하는 대신에 실질적인 힘을 과시하여 비전국(히젠국)을 정복하는 성과를 거두자, 히로요도 료슌과 막부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오우치씨가 다스리는 주방국(스오국)이나 장문국(나가토국)보다 더 먼 규슈에서 막부의 세력이 크게 흥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예전과 같이 규슈의 독자적인 세력과 붙어먹는 것은 가문의 생존에 위태로움을 자처하는 짓이라 판단한 것이다.
결국 히로요가 노선을 바꾼 것 또한 그것이 오우치 가문의 지속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몽주가 실수한 부분이 바로 이점이었다.
몽주는 역사를 알고 있어, 히로요가 끝까지 료슌과 막부에 협조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료슌과 손을 잡고 막부에 귀의하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우치 미쓰히로(다의홍의 동생)가 비후국(히고국)을 정복하면 그 뒤를 쳐서 다의홍으로 하여금 축후국(지쿠고국)과 비후국(히고국)을 동시에 다스리게 만들겠다는 그의 의도가 당연히 료슌에게 통할 것이라 여겼다.
하나, 실제로는 히로요가 오우치시의 노선을 바꾸면서, 료슌에게는 다른 안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으니, 료슌은 오히려 오우치씨와 손을 잡고 아직 남조를 따르는 규슈의 가문들을 압박함과 동시에 다의홍을 통해 왜국의 정세와 경제에 개입하려는 제주현백의 의도 또한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이것이 오로지 몽주의 실수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우치의 가독 히로요가 다의홍(요시히로)의 제안 이후 료슌과 접촉한 것부터가 몽주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비후국(히고국)을 손에 넣은 것이니, 히로요의 능력을 높이 살 수밖에 없었다.
료슌도 비전국(히젠국)을 점령하면서 제주현백의 도움을 크게 얻은 탓에 자칫 그에게 끌려갈 수 있는 상황에서 히로요의 귀의를 전격 수용함으로써, 제주현백에게(정확히는 그를 따르는 다의홍에게) 비후국마저 허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오히려 제주현백을 제어하고, 나아가 규슈를 일통할 기회를 획득했으니, 료슌의 판단력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료슌이 그런 선택을 한 기반에는 제주와의 교역이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이익이며, 상호의존적이라는 깨달음이 있었고, 그것이 특히 몽주가 더 감탄한 이유였다.
만약 료슌이 어리석은 자였다면, 제주로부터 들어오는 여러 기물과 그것을 통해 얻는 이문에만 눈이 멀어 혹여 제주와의 교역이 끊어질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하나, 료슌이 이처럼 단호한 선택을 한 것을 보면, 그는 제주 또한 왜국과의 교역이 불가피한 상황임을 파악했음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제주현백이 왜국에서 구해 가는 물목을 살펴 그것이 제주나 다른 곳에서 구하지 못하는 것임을 짚어 낸 모양이었고, 그를 통해 왜국이라는 시장이 제주에 필수적이라는 점도 짐작한 듯했다.
상황이 이러니 몽주로서는 무어라 추가적인 방법을 강구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드러난 형국만 보자면, 몽주는 얻을 만한 것을 다 얻은 셈이긴 했다.
오우치씨가 보다 막부에 친하게 만들고자 하였는데, 본의는 아니나, 그것을 초과하여 달성하게 되었고, 축후국(지쿠고국)을 얻어 다의홍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고자 한 것도 이루었다.
다만, 얻은 것들을 얻은 것에 반해, 얻어서는 안 될 것도 얻게 되었으니, 이제 축후국을 다스리게 될 다의홍이 규슈에서 고립될 처지라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었다.
게다가 이미 오우치씨가 비후국을 도모하면서 오우치씨와는 틀어진 사이가 된 것에 더해, 료슌에게 보낸 서찰의 내용이 오우치씨에게도 전해졌다면, 이제 몽주나 다의홍과 오우치씨 사이의 관계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료슌은 몽주의 제안을 거부하고 오우치씨와 손을 잡으면서 자연히 그와도 견제 관계가 진해졌다 해야 마땅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제 더 이상 범오우치씨라 할 수 없게 된 다의홍의 축후국은 규슈의 일통을 노리는 료슌의 입장에서는 제주현백의 ‘괴뢰국’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언젠가는 축출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축후국(지쿠고국)을 빼앗으면서 이미 오토모씨와는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으니, 이제 다의홍은 사방이 ‘라이벌’인 곳에서 축후국을 지켜야 하는 처지였다.
외교적으로 볼 때, 이제 몽주와 다의홍이 규슈에서 고립을 피하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 규슈 남부 세 개의 율령국을 다스리는 시마즈씨와 통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마땅치 않았으니, 시마즈씨 또한 왜구의 발원 중 하나이기에 그와 협조하는 것이 몽주의 입장에선 께름칙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이제 사실상 얼마 남지 않은 남조 추종 세력인 만큼 가문의 지속과 생존을 위해 언제 막부를 따르기로 마음먹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마즈씨까지 막부에 귀의한다면, 규슈는 사실상 일통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때부터는 료슌이 언제 몽주에게 견제를 넘어서 적대감을 보일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마 제주와의 교역으로 얻는 이익을 잃는다 하더라도, 규슈를 일통하는 것에서 얻는 이익이 크다고 판단한다면, 료슌은 단호하게 축후국(지쿠고국)에서 다의홍과 제주 세력을 축출하려 들 것이다.
그 싸움의 결과가 어찌 될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분명한 건 피해가 크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몽주의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당연했다. 오우치씨를 ‘변수’가 아닌 ‘상수’로 생각하고 궤도를 꾸민 것을 후회하는 것을 시작으로, 후회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차라리 처음 료슌이 제안한 대로 그저 군수만 지원하고, 료슌과의 관계를 돈독히하면서 대마도를 통해 교역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근본적인 후회는 스스로 너무 성급했다는 점이었다.
강철 화포가 있다고는 하나, 외부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채 천오백도 안 되는 상황에서 규슈의 율령국을 탐한 대가이자, 료슌의 오만함을 꺾는다면서 오히려 더 거만하게 화포와 천뢰탄을 자랑하여 료슌의 견제심을 돋운 대가인가 싶었다.
다의홍에게 축후국(지쿠고국)과 비후국(히고국)을 함께 다스리게 하겠노라 성급하게 자신한 것도 창피했다.
그렇게 축후국에서 후회와 창피함을 뒤짚어쓰고 며칠을 보내던 몽주는 그 후에 료슌으로부터 온 서찰을 받고 다자이후로 향했다.
이는 일종의 ‘전후 협상’을 위해서였으니, 공식적으로 ‘승전국’이라 할 수 있는 료슌, 쇼니, 오우치, 제주현백이 모여 이해관계를 매듭짓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 딱히 전리품을 논할 리 없었다. 그저 규슈의 변화된 세력 구도를 확정짓는 자리에 불과할 것이다.
여러모로 껄끄러운 자리가 될 터였지만, 그럼에도 몽주와 다의홍이 다자이후로 간 것은 다의홍의 축후국 슈고직을 확정받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뜻한 바 없던 가능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다.
* * *
예상대로 다자이후에서의 만남은 몽주로서는 참 불편한 자리였다.
료슌이 쇼니씨의 가독인 후유스케와 더불어 그 만남을 이끌었고, 오우치씨를 대표하여 차기 가독이라 할 수 있는 차남 미쓰히로는 몹시 만족한 표정으로 종종 몽주와 다의홍을 향해 비웃음을 던졌다.
몽주 또한 표면적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였지만, 료슌이 앞으로도 크게 교역을 하자고 청하거나, 미쓰히로가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고맙다고 진심 한 푼 보이지 않는 감사를 보낼 때, 그리고 료슌이 장차 규슈에서 남조세력을 축출하는 데에 힘을 합치자며 술잔을 들며 제안했을 때는 이게 대체 무슨 꼴인가 싶어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불편한 심정이었기에 몽주는 쇼니씨의 가독 후유스케가 틈틈이 그를 보며 눈짓을 보내며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뒤늦게 그 시선을 알아차린 몽주는 측간을 간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와 잠시 기다렸고, 곧 후유스케가 따라 나왔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몽주를 스쳐 지나간 후, 그를 따르는 가신이 고려말로 그렇게 말하니, 몽주 또한 잠시 밤하늘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다가, 은근슬쩍 후유스케가 사라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몽주의 뒤로 탁기와 앵도가 호위로 따른 것은 당연했다.
잠시 걸으니, 본청 정원에 있는 큰 나무 아래의 그림자 속에서 몽주를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곳에 후유스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할 말이 무엇이오?”
나무 아래서 후유스케와 마주하자마자 몽주가 물었다.
무슨 이유에서 따로 할 말이 있다 청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쇼니 후유스케는 엄연히 료슌을 따르는 인물이었기에 먼저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그는 왜구의 주요 배후였던 쇼니씨의 가독이었으므로, 몽주의 경계심이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데, 후유스케의 입에서 나온 첫말부터가 무척 의외의 것이었다.
“쇼니씨의 가독으로서 이제껏 고려를 침탈한 것에 대해 사죄합니다.”
말을 하며,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니 몽주는 느닷없는 사과에 속으로 당혹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겉으로는 냉정한 시선을 유지한 채 대꾸하였으니, 그것이 진심이냐고 물었다.
“지난날 전대 가독께서 고려를 침탈하기로 마음먹으신 것은 당시 저희 가문의 상황이 위급하여, 어디서라도 가세를 키울 재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안계가 넓지 못한 전대 가독께서 수적이 되기를 감수하였으니, 오늘에 이르러 참으로 큰 죄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죄를 알기에 저는 더 이상 고려를 침탈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으나, 부덕한 나머지 가문이 분열되어 그 뜻을 모두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려를 침탈한 죄에 더불어, 그 죄를 알고도 막지 못한 저의 죄까지, 진심을 담아 사과드립니다.”
조상을 욕되게까지 하면서 죄를 짚어 말하는 것을 보니, 진심이긴 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 진심이란 진심을 보일 필요가 있기에 선보이는 것이리라.
그러니 문제는 그 필요가 무엇이냐는 것이었으나, 그것에 대해 묻기 전에 몽주는 그의 사과를 보다 확실히 해야 한다 여겼다.
“그대가 사과를 하는 것은 당연한 바, 다만, 그 사과의 상대는 내가 아닌 고려의 백성들이오. 그러니 단지 그 말을 하기 위해 불렀다면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오. 또, 그대의 가문이 지은 죄는 그저 말만으로는 갚기 어려운 것이니, 사과의 방법 또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오.”
몽주가 그리 말하곤 잠시 불쾌한 양 헛기침을 하자, 후유스케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그렇기에 제주현백을 따로 청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가능한 일이라면, 가문의 재산을 헐어서라도 재물을 빼앗기고, 가족을 잃은 고려의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배상을 해야 마땅하나, 지금 고려가 중란에 빠졌다 하니, 아예 시도하기조차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것과 나를 따로 청한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제가 알기로 현백께서는 고려에서 어려운 지경의 백성들을 구하여 제주에서 풍족히 살 수 있게 하신다 하니, 이는 현백께서 고려를 구하고자 하는 큰 뜻을 지닌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만약 현백을 도와서 그 뜻을 이루는 것에 한 손을 거들 수 있다면, 그것이 고려 백성들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사죄가 아니겠습니까.”
“…….”
몽주는 말없이 후유스케를 바라보았다. 속으로는 내심 놀란 맘이 없지 않았으니, 그가 고려의 사정과 자신의 뜻을 크게 짚고 있는 것 때문에 그랬고, 무엇보다 그가 자신을 돕는다는 말을 했다는 것 자체에 놀랐다.
“지금 나를 돕겠다 하였소?”
“그렇습니다. 사실 현백께서는 지금 도움이 절실하지 않으십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만.”
몽주는 짐짓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였지만, 후유스케는 잔잔히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규슈탄다이와 오우치씨가 손을 잡고 규슈를 일통하고자 하고, 오우치의 장남인 요시히로(다의홍)는 가문에서 버려져 이제는 현백의 수하로서만 지쿠고국(축후국)을 다스려야 하니, 위로 아래로 고립되는 길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규슈탄다이 또한 현백의 기물이 필요하기에 본색을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나, 언젠가 규슈가 일통될 시기가 되면, 지쿠고국 또한 그의 노림수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하니,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아니 그런 상황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따로 방도를 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몽주는 후유스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것은 그의 말이 가당치 않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보다 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머릿속으로 골몰한 것은 왜 후유스케가 지금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는 것이었고, 혹여 이 또한 료슌이 부리는 궤도의 일부가 아닌지에 관한 것이었으며, 만약 정녕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후유스케가 자신을 도울 방법이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대가 그런 말을 하니 당황스럽소. 그대는 규슈탄다이를 따르고 있으니, 지금 하는 말은 규슈탄다이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오?”
“맞습니다. 저 또한 규슈탄다이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인답지 않게 대놓고 인정하니, 몽주는 새삼스레 후유스케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두운 그림자 안이라 그의 안색을 정확히 살필 수는 없었다.
다만, 자신을 직시하는 그의 시선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으니, 후유스케 또한 큰 도박을 감행하는 중임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가 말한 그늘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지금 료슌의 영역권이랄 수 있는 규슈 북부의 풍전국(부젠국), 축전국(지쿠젠국), 비전국(히젠국) 중 풍전국을 제외한 축전국과 비전국은 모두 쇼니씨의 것이었다.
하나, 쇼니씨가 내분에 빠진 후, 가독 자리를 얻기 위해 각각 막부와 남조를 따랐고, 후유스케는 료슌의 힘을 통해 쇼니씨의 온전한 가독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역사에서 보면 후에 료슌이 기쿠치씨를 도모하기 위해 그를 따르는 가문들을 소집하였을 때, 쇼니 후유스케만이 처음에는 응하지 않다가 나중에야 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후유스케는 료슌에게 살해당했다.
그냥 들으면 그러려니 했을 흐름이었으나, 지금 후유스케가 료슌에 반기를 들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고 다시 생각하니, 역사에서도 후유스케는 료슌의 영향에서 벗어 내고 싶어 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후유스케가 료슌에 반기를 들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했다고 섣부르게 확신하지는 않았다. 이미 오우치씨의 노선과 관련하여 역사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잘못 짚은 경험이 있었으니, 조심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 또한 이해하기 어렵소. 그대는 엄연히 쇼니씨의 가독이고, 지쿠젠국과 비젠국의 슈고요. 아무리 규슈탄다이라고 해도 도움을 청하면 청했지,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오. 게다가 그대를 온전히 쇼니씨의 가독으로 만들어 준 것이 규슈탄다이의 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에게 협조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니오?”
“현백께서 저를 의심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럴만 하지요. 하나, 료슌은 비단 규슈탄다이에 만족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장차 규슈의 슈고다이묘가 되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료슌이 규슈 막부 세력의 지지를 얻는 정도를 넘어, 규슈를 기반으로 하는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고자 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미 사실상 풍전국의 슈고를 겸임하고 있습니다. 요시히로(다의홍)를 버린 후, 슈고를 따로 임하지 않고 그가 스스로 부젠국(풍전국)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를 돕는 것을 명분으로 다자이후 또한 장악하였으니, 제가 슈고인 지쿠젠국(축전국)의 핵심은 제 것이 아닌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제 히젠국(비전국)을 도모한 후에는 그곳에서 얻은 쇼니씨의 재물마저 전리품이라는 명분으로 그가 소유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움직임 모두 규슈탄다이가 지금의 자리에 만족할 인물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후유스케가 한 말의 진위 여부는 후에 확인해 봐야겠지만,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쇼니 후유스케의 입장에서는 료슌에게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몽주는 여전히 속으로 거짓일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하면 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저는 이제부터 규슈탄다이의 가복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해야 한다면, 그의 발가락이라도 빨 것이니, 후에 그가 저를 믿어 의심치 않을 때, 그에게 비수를 꽂을 것입니다.”
“…….”
왠지 비수를 꽂는다는 말이 과장된 비유가 아닌 것 같았다.
“……규슈탄다이를 죽이겠다는 말이오?”
긴장한 목소리로 몽주가 나직이 물으니, 후유스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노력하겠으나, 아예 의심을 피하지는 못할 테고, 그것만으로도 저는 막부의 추궁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때, 현백께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나는 그대가 나를 돕겠다 들었기에 그 방법을 물었지, 내가 그대를 돕는 것을 듣고자 한 것이 아니오.”
“저를 돕는 것이 곧 현백을 돕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욕심이 과하지 않습니다. 영토는 그저 규슈 북부의 삼국(三國)만으로도 충분하고, 재물도 현백의 기물을 교역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대신, 현백께서는 남은 규슈의 땅을 다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저희 쇼니씨가 적극 지원할 것이니, 후에 규슈의 북과 남에서 서로 조력한다면, 막부의 공격 또한 막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말을 듣고 나니, 몽주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자기는 북규슈를 얻고, 몽주에게는 그 아래를 가지라 하니, 얼핏 규슈의 태반을 몽주에게 양보하는 것 같았지만, 현대와 마찬가지로 당대에도 북규슈가 알토란임을 생각하면 참 계산적인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가 훗날 료슌을 도모한 후, 막부가 이를 벌하려 할 때 얼마나 많은 병력을 보낼지, 또 얼마나 많은 가문들이 그에 협조할지, 특히 규슈 남부의 시마즈씨를 너무 ‘핫바지’로 보는 건 아닌지 고민되었으며, 만약 정말 규슈의 중부와 남부를 얻게 된다면, 어떤 이점이 있고, 그를 기반으로 무엇을 시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도 마구 솟았다.
물론, 그보다 먼저 든 생각이자, 마지막에 다시 든 생각은 그저 감탄이자, 탄식이었다.
‘이놈의 세상은 정말…….’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할 곳이 아닌가.
몽주가 후유스케의 음습한 제안에 무어라 대꾸하기까지는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