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39)
“어쩌면 저 거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이순신과 세종이 있을지도 모르죠.”
두신의 말에 몽주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온사인이 가득한 밤거리에 많은 이들이 보였다. 유흥가였고 밤이 깊은 터라, 대부분 술에 취해 있었다.
“우리 충무공 님과 세종대왕 님들께서 많이 취하셨네요.”
두신이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는 알겠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들 중에 ‘영웅’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피식.
세 사람 사이에 웃음이 흘렀다.
“저도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죠. 고교 시절에 역사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이 반에 전쟁 영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하지만,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살다가 죽을 거라고도 하셨죠. 또 쓰레기 더미에서 영웅이 난다고 하지만, 쓰레기 더미니까 영웅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셨죠.”
재상이 덧붙인 말에 몽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송곳은 주머니 속에서도 튀어나온다고 하지만, 아예 송곳이 될 기회도 없다면 그 날카로움을 뽐낼 기회도 없는 법이다.
소위 지성사라 불리는 역사 분야에서는 18세기를, 정확히는 18세기 초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를 ‘천재의 세기’라고 부른다.
이 시대가 천재의 세기인 것은 그만큼 천재들이 활약하면서 세계의 문명과 사상을 드높인 덕인데, 그렇다고 이 시대에 유독 천재들이 많이 태어난 거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건 근대 사회가 형성되면서, 보다 많은 재능들이 꽃피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덕으로, 그것이 아니었다면, 그저 세상에 묻혔을 천재들이 근대 사회의 이점에 힘입어 존재감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교육을 받을 기회, 교육으로 성장한 재능을 발휘할 기회, 재능을 발휘하여 인정을 받을 기회 등등 전근대 사회였다면 신분의 고하나 재산의 유무 같은 제약으로 얻지 못했을 기회들을, 보다 많은 인재들이 얻을 수 있게 된 시기가 18세기였던 것이다.
“말씀을 들어 보면 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몽주 씨의 맘에 쏙 들 만한 인재가 눈앞에 등장할 리는 없을 겁니다. 제주나 몽주 씨가 확인할 수 있는 세상 어딘가에 천재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천재도 당대의 한계 안에 묶여 있을 테니, 몽주 씨가 보기에는 천재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제주에 제갈량이 환생한 것 같은 인물이 있다고 해도, 몽주는 그가 곧바로 맘에 들 것 같지 않았다.
나라를 경영하는 재주든, 음모와 책략을 꾸미고 그에 맞서는 능력이든, 또 다른 재능이든, 결국 그 근본에는 몽주가 만들길 바라는 세상에 대한 공유와 공감이 전제되어야 할 것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몽주는 역사를 통해 여말선초에 활약한 자들을 많이 알고 있고, 그중 다수와 안면이 있지만, 그들을 얻고자 하지 않고 오히려 거리를 두었다.
그들이 몽주가 만들고자 하는 세상과 동떨어진 이상을 가진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재상, 두신과 만나 회의를 하고 뒤풀이 삼아 마련한 술자리에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는 결국 앞서 회의 때 나눈 이야기의 되풀이였다.
몽주의 세상이 발전함과 동시에 얽히는 일들의 규모와 범위가 커지면서 인재를 구하는 문제가 회의에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는데, 결론은 결국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다시 어떻게 육성하느냐는 문제로 회귀하였으니, 그에 대한 대책은 어쩌면 비겁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 대책이란 목표치를 낮추는 것이었다.
“당장에 당대 인물들을 현대인의 사상에 걸맞게 키우는 건 불가능하죠. 그들이 자라고 보고 들은 세상이 현대와 수백 년이나 동떨어져 있으니까요. 그러니, 몽주 씨의 마음에 쏙 드는 인물을 키우려는 건 욕심일 겁니다. 몇 가지 핵심적인 사상만을 익히는 것에 만족하시고, 그 이상은 시간을 두고 발전하도록 두는 게 맞을 겁니다. 물론, 그 시간을 둔다는 의미는 몽주 씨의 천몽이 끝난 이후의 시간까지 포함하는 거죠.”
전쟁에 전략과 전술이 있는 것처럼, 경영이나 책략에 있어서도 전략과 전술이 있는 법이다.
그 전술에 해당하는 것은 고려 당대에 존재하는 지혜로부터도 끄집어낼 수 있지만, 전략에 해당하는 건 그럴 수 없었다. 물론, 그 전략이 몽주의 뜻에 맞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재상과 두신의 조언은, 처음부터 그 전략에 대한 기대치를 현대인 몽주의 수준에 맞추려 하지 말고, 소수의 핵심적인 가치에만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상과 두신이 제안한 가장 선행되어야 할 핵심 가치는 인본주의(人本主義)였다.
“요즘 세상이 워낙에 이념에 질려 하는 터라, 인본주의라는 말도 고루하게 느껴지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인본주의는 모든 변화의 핵심이었죠.”
“어려울 건 없어요. 인본주의란 결국 인간을 중요시하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니까요.”
두신과 재상이 해 준 말은 인간을 중시하는 사상이 어떤 결과를 도출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졌다.
인간을 중시한다는 생각은 개인을 재발견하게 만들고, 개인에 대한 발견은 그 개인의 능력과 성품, 그리고 그의 현세적 소망과 행복을 귀중하게 여기는 정신으로 이어진다.
“사상만으로 세상이 변하는 건 아니지만, 인본주의에 눈을 뜬 선구자가 있다면, 그는 인본주의가 귀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위해 노력하겠죠. 몽주 씨가 해야 할 건 바로 인본주의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일 테고요. 좀 단순하고 과장된 논리일 수도 있지만, 인본주의는 근대 이후의 정치, 경제 사상의 모태가 되기도 해요. 개인의 능력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여러 사람의 권력과 재산에 대한 갈증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태동하게 만드니까요. 물론, 이런 사상과 체제의 전개는 충분한 경제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을 때 가능한 거겠죠. 당장 밥 먹기 힘든 상황이라면 다 탁상공론 같을 테니까요.”
“인본주의에 기반하여 육성한 여러 전문가들은 그들의 전문 분야에 있어 인본주의에 걸맞은 발전에 기여할 겁니다. 아, 굉장히 이론적인 이야기들이죠.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으니까요. 한국 정치인들 중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이론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그들이 모두 민주주의에 걸맞은 활동을 하는 건 아닌 것처럼요.”
결국 몽주는 ‘전략’적인 면에서 인본주의를 널리 퍼뜨리고, 인본주의에 기반한 정치가, 기업가, 군인 등은 ‘전술’적인 차원에서 당대의 지혜를 통해 키우라는 의미였다.
더불어 몽주가 할 일은 그런 발전이 가능한 경제적 기반을 유지해 주는 것이고, 인본주의에 반동하거나 배신하는 자들을 솎아 내는 것이리라.
“아마도 전형적인 위로부터의 개혁이 될 겁니다.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거죠. 그나마 다행인 건 적어도 제주에서는 몽주 씨에 대항할 다른 권력이 없다는 점이고, 조직화된 사상도 별로 없다는 점이죠. 무속신앙은 조직화되지 않았을 거고, 불교가 있긴 하겠지만, 제주에는 조직된 승려 계급이 있는 것도 아니니, 적어도 유교보다는 나을 겁니다. 대승불교 특유의 왕즉불(王卽佛) 사상 외에는 기본적으로 신분 질서를 강조하는 종교는 아니니까요. 물론, 불교 특유의 내세지향적인 교리는 다소 방해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현세의 행복을 거부할 사람은 많지 않겠죠.”
몽주는 제주에서 봐 온 백성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의 사상은 무엇일까.
사상이라고 하니, 너무 고차원적인 물음 같지만, 결국 제주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냐는 물음이었다.
만수무강. 답은 간단했다.
솔직히 말해서 백성들은 그들의 안위 이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사실 밥 굶지 않고, 애들 키우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상황에서 만수무강 이외의 것에 신경을 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다만, 지금 제주의 상황이 적어도 밥 먹고, 육아하는 것 때문에 곤란하진 않음에도 백성들의 시야는 먹고 사는 것 이상으로 확대되지 않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지배받는 자로서의 정체성에 익숙한 일반 백성들인 만큼, 설령 그들 중에 무엇이 부족하다거나, 더 개선할 수 있다 여기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디 웃전이 그것을 깨닫고 고쳐 주길 바라지, 스스로 나서지는 않았다.
반대로 잘 몰라도 웃전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만 하니, 다스리는 입장에서는 편한 면도 있긴 했다. 그러나 세상 만사는커녕, 제주와 근처 몇몇 지역에 발을 뻗는 것만으로도 과부하가 걸릴 몽주의 입장에서는 백성들이 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이길 기대해야 마땅했다.
이는 어느 정도 깨친 인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홍길도가 ‘호민’을 깨우치긴 했지만, 그의 호민은 역사 속 허균의 호민론의 호민처럼 결국 봉기하되, ‘복구’에 만족하는 자들에 불과했다.
호민론이 혁명의 개념과 닿아 있긴 하나, 그 혁명은 무너진 체제를 복구하는 정도의 한계에 담겨 있다는 의미였다.
복구를 넘어 체제가 무너진 이유, 그 근본적인 원인을 고쳐 보다 나은 체제를 추구하는 사상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 또한 수동적이고, 피지배적인 백성의 한계에 불과한 것이니, 만약 몽주가 당대 제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한계를 넘어서게 하고자 한다면, 인간이 중심이고, 백성들 하나하나가 바로 그 인간임을 알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다시 말하지만, 휘하 세상이 조용하길 바라고, 다스리기 편하길 바란다면, 해서는 안 될 일이겠죠. 하지만, 몽주 씨가 당대의 발전을 넘어서 천몽 이후에도 그 세상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승승장구하길 바란다면, 가급적 빨리 추진해야 할 일일 겁니다.”
“인본주의는 자유와 평등에의 추구로 이어지니, 그 가치들을 얻고자 하는 와중에 정말 많은 소란들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일종의 사회적 성장통이라 할 수 있겠죠. 인간 사회의 발전이라는 건 결국 그런 성장통의 연속일 거고요.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라는 세상이 우습게 보일 수는 있어도, 그런 수많은 성장통을 이겨 내고 한 꺼풀씩 허물을 벗어 내며 달성한 세상이죠. 우리를 포함해서 이 거리의 많은 이들 대부분은 전근대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진짜 혁명을 몇 번이나 거쳐야 했고, 정치사상, 경제 제도, 과학 기술 등등 모든 면에서 혁명 같은 변화를 겪었죠. 아니, 현대인이 누리는 모든 것이 그렇죠. 저기 저 아저씨가 저러는 것도 현대의 특권일 테고요.”
창밖에서 고주망태가 된 중년의 사내가 아까부터 비틀거리면서 마구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그 욕설의 대상 중에는 대통령도 있었다.
정말 욕할 만한 이유가 그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화풀이를 하다 보니 덤으로 욕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몽주는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 자체가 참 대단한 것이라 여겨졌다.
아닌 게 아니라, 몽주가 다스리는 제주에서 백성 중 누군가 저런 식으로 몽주를 욕하다 현백군이나 다른 수하에게 걸린다면, 몽주가 그러라 명한 바가 없음에도, 당장 그는 붙잡혀 크게 경을 칠 것이다.
분명 몽주에게 편한 것이겠지만, 몽주가 만들고자 하는 세상에서는 없어야 할 일이었다.
몽주는 잠시 제주를 떠올리다가 소주잔을 들어 재상, 두신과 잔을 부딪쳤다.
쨍!
쭈욱.
쓴 소주가 뱃속으로 들어간 후, 몽주가 문득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하나의 문제에 대해 상담하면 이상하게 이야기가 확장되네요. 오늘도 어떻게 하면 인재를 빨리 구할 수 있을까를 물은 것이었는데 말이죠.”
“하하, 그런가요. 하지만, 모든 것은 다 통하는 법이니까요. 만류귀종이라잖아요.”
술자리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어차피 다들 다음 날 함께 할 일이 있기에 누구도 자리를 파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세 사람은 다음 날 일이 있을 때까지도 술기운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그 함께할 일이란 바로 현대에서 통합 범선의 진수를 하는 것이었으니, 술에 취해 어영부영 지나간 진수식 이후, 세 사람이 범선에 올라서 나란히 한 짓은 뱃전에서 구토를 하는 것이었다.
“우욱!”
덕분에 황진희를 비롯한 바당보름 출신들의 따가운 시선을 많이 받아야 했다.
* * *
왜국에 갔다가 근 두 달 만에 돌아온 제주에는 이미 홍로급 경함선이 여섯 척 건조되어 있었다.
철로 위에 지은 덕에 전보다 훨씬 쉽게 진수에 성공하였고, 몽주는 한 척을 난방 시설을 비롯하여 몇몇 개선해야 할 부분을 바치들에게 개조하게 명하고는 남은 다섯 척은 항해 연습하게 하였다.
포구에 서서 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연안에서 시범 운항하는 배들을 바라보던 몽주는 문득 주변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세상의 중심이 무엇이라 여기시오?”
“…….”
몽주가 물은 말에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자기들에게 한 질문이 맞는지부터 헷갈려 하였고, 그에 대표로 화극이 되물었다.
“지금 우리에게 물은 겐가?”
“그렇습니다. 어르신을 포함해서 제 말이 들리는 모든 분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허어, 뚱딴지같고 어려운 질문일세. 세상의 중심이 무엇이냐니…….”
“어려워도 다들 답해 보시죠.”
몽주가 다시 재촉하니, 곤란한 중에도 대답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부처였고, 부처가 나오자 천지신명을 말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다 홍길도인 듯한 목소리가 한 대답에 몽주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세상 만물의 존재와 움직임이 기(氣)에 의한 것이며, 기는 이(理)에 근간하고 있으니, 세상의 중심이 세상의 근본과 같다면 이가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홍길도는 어디서 유학 경전을 읽은 모양이었고, 그래서 소름이 돋았으니, 홍길도를 조금 더 내버려 두었으면 그가 유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던 것이다.
홍 교리의 대답에 화극이 크게 감탄하였다.
“역시 홍 교리가 배운 사람이라 남달라. 난 세상의 중심이라고 해서 중원 어디쯤에 있는 지명을 답해야 하는 줄 알았거든.”
주변의 다른 교리들도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심지어 과묵한 탁기마저 감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원 참…….’
몽주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하고 다른 이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탄식했다.
고려 말 유학이 퍼지면서 그에 대한 선망도 함께 있었으니, 유학의 이치를 잘 모르는 자들도 그로부터 나온 설을 들으면 일단 그것이 옳다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정말 몇 십 년만 뒤늦게 천몽이 시작되었다면, 몽주는 유학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이겨 내기 위해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사문난적으로 몰려 진짜 죽었을 수도 있고.
속으로 거듭 한숨을 내쉰 몽주가 고개를 살짝 돌려 홍 교리를 보며 물었다.
“이(理)가 기(氣)의 근원이라면 이는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근원은 근원일 뿐, 무엇으로도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천지(天地)가 날 때부터, 아니 천지 자체의 탄생부터가 이에 의한 것이니, 그것은 실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이라 보셔야 할 것입니다.”
“하면 이는 신(神)인가?”
“그것이 아니라…….”
홍 교리는 문득 할 말이 궁한 듯 대답하지 못했다. 그에 몽주는 내심 안도하였는데, 만약 홍 교리가 조금 더 유학에 능통한 자였다면 이 질문에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학에서 이(理)는 존재 자체가 존재할 뿐, 증명의 대상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것과 그 운행을 기로 상정한 후, 기를 움직이는 바탕이 있을 것이라 추정하여 그것을 이라 칭한 것이니, 기가 존재하는 이상, 즉 세상이 존재하는 이상 이는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이와 기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성리학이 출발하는 것이니, 성즉리설(性卽理說)이 곧 성리학이었다.
인간의 본성(性)을 이(理)에 따르게 하는 학문이 성리학인 것이고, 당대의 유학인 것이다.
굉장히 많은 것을 생략하고 도식하자면, 이와 기의 구분은 학문적으로 이를 중시하는 주이론(主理論)과 이에 못지않게 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주기론(主氣論)으로 나뉘고, 이런 학문적인 구분은 후에 정치적인 구분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의 안타까운 정치 상황마저 만들었다.
어쨌든 고려에 유입된 유학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아, 포은처럼 대단한 위업을 이룬 유자도 있음과 동시에 전반적인 수준은 깊지 않았으니, 홍 교리는 이의 존재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아무래도 아직 고려가 불교의 나라인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니, 불교에서 간단히 부처의 존재를 상정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신을 부정하는 유학에서는 같은 그와 방식으로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불교적 가치관 속에서 자란 사람인 만큼 아무리 경전을 익혔다고 해서, 가치관마저 한순간에 바꿀 순 없는 것이다.
“나는 유자들이 말하는 이가 가짜라고 생각하네.”
“……?!”
“대저 세상 만물을 이루고, 운행하는 이치라는 것을 음양(陰陽)이나 오행(五行) 따위로 모두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음양이나 오행과 같은 말은 이(理)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으로, 석몽린이 공부하던 시절에 익힌 것이며, 그 단어들 자체는 고려 사회에 퍼져 있는 것이기도 했기에 그것을 언급하며 이(理)를 부정하였다.
다만, 몽주의 머릿속에 어디서 주워들었던, 현대 과학이 추구하고 있다는 ‘통일장 이론’이 스쳤지만, 슬쩍 무시했다.
그건 언급하기엔 너무 먼 이야기였으니까.
“돌을 이루고, 물을 이루고, 불을 이루는 이치는 저마다 달라야 옳은 것이 아니겠는가. 바람이 불고, 산이 솟고, 해가 뜨는 이치가 어찌 같은 것일 수 있겠는가. 난 차라리 만물마다 이루고 움직이는 이치가 따로 존재하다 여길 것이니, 그 각각의 이치야말로 진리(眞理), 즉 참된 이치에 가까울 걸세.”
“진리…….”
홍 교리가 골몰하며 진리라 중얼거렸고, 주변의 다른 이들도 몽주의 말을 이해하느라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몽주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그 진리들은 저마다 이루고, 움직이는 것이 한정되어 있으니, 그 진리들을 세상의 중심이라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겠지.”
“하면, 현백께서 생각하시는 세상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홍 교리가 물으니, 몽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겠는가.”
“……?!”
뒤통수 너머로 뜨악 하는 반응이 여실히 전해졌다. 이 무슨 ‘천상천하유아독존’식 발언인가 싶은 모양이었다.
“다시 말하겠네. 세상의 중심은 나일세. 그리고 화극 어른이기도 하고, 홍 교리이기도, 탁 교리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기도 하네. 심지어 저기 저 아이들도 세상의 중심이겠지.”
몽주가 외로 고개를 돌리며 말하니, 새로 넓히고 있는 포구 건설 현장에, 쌓여 있는 목재 더미 위에 앉아 현백 일행을 구경하고 있던 어린아이들이 깜짝 놀라 우르르 도망가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일행들이 대체 무슨 소린가 싶은 중에 화극이 답답한 듯 말하였다.
“대체 지금 무엇을 말하려는 겐가? 하면, 세상사람 모두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인가?”
“맞습니다.”
“엥? 맞아?”
얼결에 묻다가 맞는 말이라는 대답을 들은 화극은 깜짝 놀란 듯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고, 사람 하나하나가 이 세상의 중심입니다. 세상의 진리라 함은 결국 사람에 의해 보이고 쓰이니, 사람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결국 사람이 없다면 진리도 무의미한 것이니, 진리는 마땅히 사람을 위해 쓰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몽주의 말이 일단락되었음에도 반응이 없이 조용했다. 포구에 출렁이는 파도 소리와 겨울 갈매기가 스치며 끼룩대는 소리가 유난히 잘 들릴 정도였다.
그 조용한 중에 모든 이들이 고민하고 있었으니, 어떤 이는 몽주의 말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고민에 빠졌고, 어떤 이는 왜 현백이 저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몽주는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함을 느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는 세상 전체가 인간이 중심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 세상부터 인간을 중심에 두려 합니다. 이는 신분의 고하도 없으며, 재산의 유무 또한 상관이 없이, 인간의 존재 자체가 행복해야 할 권리와 같은 것이니, 그 행복을 위해 각각의 사람이 저마다 능력을 펼치고, 현세의 소망을 이루게 되길 바랍니다. 나는 그것을 위해 살 것이니, 여러분이 나를 따른다면, 마찬가지로 같은 목표를 가지길 원합니다.”
몽주가 다시 말을 마치자,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현백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 수긍의 대답은 몽주가 말한 생각에 대한 동의이기 전에 제주를 다스리는 현백이 그리한다면 따르겠다는 권력관계에 대한 복종이었다.
다만, 오직 홍 교리만이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여전히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고, 몽주가 이만 돌아가자고 말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몽주는 걸음을 옮기다가 홍 교리가 정신없이 생각에 빠진 것을 보고는 그를 불렀다.
“이보게, 홍 교리.”
“……예? 아, 부르셨습니까.”
“조금 전 내가 한 말과 그에 대한 자네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것을 마치면 내게 보여 주게.”
“알겠습니다, 현백.”
대답하는 홍 교리의 표정이 마치 만인의 적을 홀로 상대해야 하는 장수의 표정과 같았다.
후에 ‘만행지론’에 기록된 포구에서 현백이 한 말과 그에 대한 홍길도의 생각이 정리된 부분에 홍길도가 다음과 같이 주서하였다.
그날, 현백의 말은 바람에 흘러가듯 가벼웠으나, 그 의미는 몹시 무겁고 깊어, 그것을 정리하고, 다시 깨닫기까지 칠 일 밤낮 식음을 전폐하며 고심하고도 모자람이 있었으니, 지금 이 책을 펼치는 와중에도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어리석은 신하가 깨닫길, 만약 세상에 절대적인 옳음이 있다면, 그 옳음을 실천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닌가 하며, 그 실천을 위해서라도 실천의 주체가 되는 인간의 능력을 드높이고 인간의 삶을 보장해 주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너희 세상의 중심인 자들이여, 진리를 위해 너희 스스로를 고양시키고, 다른 이들 또한 이끌어라.
그것이 인간 모두를 세상의 중심이게 하고, 다시 더 큰 진리를 얻게 할 것이며, 상도(商道)와 병도(兵道)를 따라 부유하고, 강대해지는 것의 이유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