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4)
“산 높은 곳에 큰 바위가 있을 것이니, 근처 마음 닿는 곳에 부처님을 모시라고 하셨었네. 처음 들을 때만 해도 산에 큰 바위가 흔하게 있는 거지 싶었네만, 오늘 예까지 오르다가 내 신이 굴러간 곳에서 큰 바위를 보자마자 이곳이구나 싶더군.”
“아이고, 신통방통이네요. 그 스님이 참으로 큰 스님이신 모양입니다요. 한데, 그 스님의 법명은 무엇이셨습니까요?”
“모르네.”
“예이?”
“그때 물었지만, 훗날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날 것이라는 대답만 들었지.”
“허어, 진정으로 공명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설법을 펼치시는 분이셨나 봅니다요.”
“그렇……! 어이쿠!”
석삼이의 목갑에 대한 의문과 미련을 떼어 버리기 위해, 당시 불교와 풍수지리를 적당히 섞어 거짓을 꾸미다가 몽주는 미끄러운 돌부리를 밟아 크게 구르고 말았다.
“으윽!”
“도련님! 괜찮으십니까요?”
“아, 괜찮…… 으으!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요?”
몽주는 석삼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하나, 이내 오른쪽 발목에서 오는 통증에 신음하였다.
“크으! 이거 아무래도 걷기가 힘들겠어.”
“…….”
그 말에 석삼의 표정이 쌜쭉해지는 것을 느낀 몽주가 얼른 말을 이었다.
“엎어 달라는 말은 아닐세. 부축이나 계속 해 주면 어찌 내려갈 듯하네.”
“…….”
“소은병은 없던 일로…….”
“쇤네가 모십죠!”
슬슬 석삼이 사용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노비라곤 하지만, 몽린의 기억 속에 남은 석삼은 거의 친구나 다름없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신분의 차이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게 되자 공대와 하대로 말도 바뀌게 되긴 했지만, 어릴 적엔 그냥 편하게 말을 나누고 놀이도 같이하던 녀석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노비라는 게 현대에서 짐작한 노비와는 사뭇 달랐다.
노비나 노예나 같다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달랐다. 특히 외거 노비는 주인댁에 매인 몸이라는 걸 빼고는 양인과 별 차이가 없었다.
석삼이 같은 솔거 노비는 조금 더 낮게 보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가축과 동일시되는 노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심지어 몽린의 기억 속엔 면천을 넘어 벼슬까지 한 노비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으니, 노비라는 계층이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의 굴레에 얽힌 건 아님이 확실했다.
물론 노비에 대한 몽린의 정보는 엄연히, 노비에 너그러운 석 호장 가문의 분위기 덕이었다.
당장 같은 고을의 향리 중에서도 노비를 학대하다 죽여서 주현의 수령 앞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다가 뇌물과 보상으로 무마하는 일도 있었다.
어쨌거나 주인 잘 만난 걸 알고 있는 건가 싶은 석삼의 부축을 받으며 몽주는 힘겹게 하산 길을 재촉하였다.
석삼과 함께 넘어지고 구르길 몇 번이나 한 끝에 겨우 산세가 다소 약해지는 데까지 이를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저기, 저 돌들이 있는 데서 쉬자고.”
“헥, 헥, 알겠습니다요.”
근처에 보이는 제법 큰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하며, 몽주는 석삼의 부축을 받아 그곳으로 향했다. 적당히 엉덩이를 걸치고 쉴 만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데…….
“……!”
바위 가까이로 향하던 몽주의 눈에 어떤 이의 모습이 들어왔고, 순간 그는 몸을 움찔하며 얼어 버렸다.
석삼이도 몽주를 지탱하며 걷다가 주인 도령이 움직이지 않자, 이상함을 느끼고 몽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똑같이 얼음이 되어 버렸다.
‘대체 왜구가 왜 여기에…….’
엉망진창인 모습이었지만, 왜구라는 걸 못 알아볼 순 없었다. 이마를 훌떡 까 버린 모습이었으니까.
딱 한 명이었다.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 왜구는 갑자기 누런 이를 보이며 이를 갈더니, 쥐고 있던 칼을 세웠다.
“이아압!”
“으어!”
기합과 함께 칼을 높이 세운 왜구가 달려들었다.
몽주와 석삼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것뿐이었다.
죽는다.
여기서 칼에 맞아 죽는 거다.
그런 참담한 생각만이 온몸을 지배해 버렸다.
씽!
“컥!”
그때, 왜구가 터뜨리는 신음이 들렸다. 눈을 꽉 감고 다가올 운명을 기다리고 있던 몽주는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세 걸음 앞에서 왜구가 칼을 늘어뜨린 채 왼손으로 오른 어깨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 어깨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구원자가 있구나! 살았다!’
“네 이놈!”
아니나 다를까 우렁찬 고함과 함께 건장한 남자가 나타났다.
바위들 뒤쪽에서 바위 위로 뛰어올라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활을 착용하지 않고 있었기에 화살을 쏜 사람은 아닌 듯했지만, 간출하게 무장을 갖추고 있어 분명 군병처럼 보였다.
그는 바위 위에서 뛰어내리며 왜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서걱, 퍽!
눈앞에서 얼결에 칼을 막은 왜구의 손이 잘리고, 손이 잘림과 동시에 왜구의 목을 칼이 반쯤 가르고 들어가는 게 몽주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직후엔 뿜어진 피가 그에게까지 튀어 뜨끈한 혈향을 느낄 수 있었다.
털썩.
목이 반이나 잘린 왜구가 쓰러졌다.
“이보게, 괜찮……?”
무인은 칼에서 피를 털곤 몽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물으려 하였다.
하나, 남자가 채 말을 마치기 전에 무언가를 보고 놀란 석삼이 그의 뒤쪽을 가리키며 어버버거렸고, 남자가 몸을 돌리기 직전에 그의 가슴을 무언가가 뚫고 나왔다.
“안 돼!”
뒤에서 누군가의 비명이자, 고함이 터지면서 화살 몇 대가 아마도 화살을 쏜 또 다른 왜구를 노리고 매섭게 날아갔다.
이어 그 뒤로 몇몇 무인들이 칼을 들고 달려간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화살을 쏘고 도망치는 다른 왜구를 쫓아가는 듯했다.
하나, 몽주의 시선은 그저 화살에 맞은 무인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화살촉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몽주와 시선을 마주하였다.
의외로 그의 표정은 담담했고, 눈빛도 따뜻했다. 마치 너무 놀라지 말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쿨럭!”
하나, 등에 박힌 화살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고, 그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음성 대신 핏물을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다.
몽주는 얼어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곤 쓰러지는 남자의 몸을 받아 내었다.
아니, 그의 몸을 받다가 오히려 뒤로 넘어졌고, 석삼이 급히 도와 겨우 무인의 몸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다시 일어나 석삼이와 함께 쓰러진 무인을 눕히려고 하다가 등 뒤에 박힌 화살 때문에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 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비켜라!”
소리치며 달려온 무인이 석삼이를 밀쳤고, 밀린 석삼이와 부딪친 몽주는 또 뒹굴었다.
“말두야! 말두야, 정신 차려 봐라!”
검은 머리띠를 쓴 또 다른 무인이 외로 쓰러진 무인의 뺨을 때리며 소리쳤지만, 쓰러진 무인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검은 머리띠의 무인이, 말두라 불린 무인의 맥도 짚고 숨도 확인하더니, 이내 낙심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동시에 먼 곳에서 한 줄기의 단말마도 작게 들려왔다.
“이런, 썅!”
욕설과 함께 검은 머리띠의 무인이 주먹을 움켜쥐며 몽주와 석삼을 향해 내지를 듯 자세를 취하였다.
하나, 그 전에 누군가의 명이 그를 자제시켰다.
“멈추어라!”
그러자 몽주와 석삼을 두들겨 팰 듯 거친 기세를 보이던 검은 머리띠의 무인은 곧바로 주먹을 내리고 공손하게 뒤로 물러났다.
몽주의 시선에 그가 물러나자 그 뒤로 세 명의 무인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중 가운데 서 있는 무인이 이 무인들 중 대장인 듯했다. 좌우로 시위를 두고 있는 것도 그렇고, 차림새도 다른 무인들과 비슷하게 단출한 듯하면서도 좀 더 고급스러웠다.
또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상당한 체격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인 말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뺨을 손으로 매만지다가 채 감지 못한 두 눈을 살며시 감겨 주었다.
합장을 하며 명복을 비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더니, 다시 눈을 떠 몽주에게로 굳건한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 검은 머리띠의 무인과 달리, 동료 혹은 부하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몽주와 석삼에게 돌릴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시선이 상냥하진 않았다.
잠시 몽주와 석삼을 번갈아 보던 그는 몽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차림새가 엉망이나, 보아하니 평범한 양인은 아닌 듯하군. 나는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겸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 이성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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