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42)
* * *
“어르신, 낚시 다녀오시는 길이십니까?”
“어허, 그러네.”
“많이 잡으셨습니까요?”
“껄떡이 두어 손 잡았네. 올해는 일찍 찾아온 모양일세.”
낚싯대와 갈대로 만든 바구니를 양쪽 어깨에 짊어진 해민은 말을 걸어오는 자들에게 너그러이 대꾸해 주며 집으로 향했다.
껄떡이(농어)가 벌써 제주 연안에 찾아와, 그다지 솜씨 좋은 낚시꾼이 아닌 자신에게도 잡혀 주니, 기분이 좋은 덕이었다.
물론, 기분이 나쁘다 한들 함부로 티를 내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하아부디―!”
가복에게 낚시 도구를 넘기고, 저녁에 껄떡이를 요리해 올리라 당부하고 나니, 어디선가 혀 짧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내 망아지!”
해민이 앉으며 양팔을 벌리자, 그의 손녀 강영이가 자박자박 걷는 건지, 뛰는 건지 가늠하기 어려운 걸음으로 할아버지에게 가서 폭 안겼다.
도톰하게 옷에 감긴 어린 손녀의 조그마한 체구를 양팔로 감싸 앉으며 해민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아부지, 안 추워?”
“춥지, 추워. 하지만, 내 망아지를 이리 안으니 추위를 모르겠구나.”
귀여움을 받는 걸 느끼는지 강영이가 헤실헤실 웃었고, 해민은 강영이를 안아 들고는 마당을 가로질러 걸었다.
강영이는 할아버지 품에 안겼다가 시선을 해민의 턱으로 향하더니,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그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허허, 신기한 모양이구나.”
“이거 왜 이써?”
“사내는 크면 다 나는 거란다. 네 아비도 나지 않았더냐.”
“몽건이도 나?”
“그럼, 몽건이도 나중에 크면 나지. 근데 삼촌이라 부르라 하지 않았더냐?”
“후잉…….”
강영이는 몽건이를 삼촌이라 불러야 하는 게 맘에 안 드는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손녀의 투정도 귀여웠는지 해민은 허허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어요?”
안방에 가니, 아내 주이가 품에 새록새록 잠이 든 몽건이를 안고 있다가 그를 맞이해 주었다.
“몽건이는 어떻소? 아직 열이 있소?”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요. 땀도 덜 흘리고요.”
“피, 몽거…… 삼촌 자꾸 아파. 나랑 안 놀아.”
해민이 앉으며 강영이를 옆에 내려놓자, 강영이가 자는 몽건을 빤히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가장 많이 같이 놀아야 할 삼촌이 툭하면 아파서 누워 있는 게 맘에 안 들었던 것이다.
아직 집밖에서 다른 아이들이랑 어울릴 나이는 아니었고, 또 어울리려고 해 봤자, 홍로현 사람들은 강영이가 누구의 딸인지 다들 알고 있기에, 몹시 조심스러워하는 터라, 다른 아이와 어울리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바빠서 얼굴 보기도 어려운 판이니, 자연 강영이는 늘 조부모의 손에 크고 있었다.
해민은 씁쓸한 미소를 띠며 강영이와 몽건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몽건이도 강영이만큼 건강했으면 좋으련만.’
강영이가 건강한 것에 비해, 몽건이는 잔병치레를 쉬지 않았다.
고뿔은 늘 달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조금 된 걸 먹기만 해도 토하기 일쑤라, 지금도 주식은 유모의 젖이었다.
그에 비해 강영이는 벌써 젖을 떼고, 잠시 유아식을 거쳐 요즘엔 된밥도 직접 씹어 삼키고 있었다.
신체 발달 자체가 생일이 두 달 가까이 늦은 강영이가 몽건이보다 훨씬 빨랐으니, 해민의 입장에서는 손녀가 쑥쑥 크는 것이 기쁜 만큼, 어린 둘째 아들이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할무이, 엄마 아빠 언제 와?”
“백 밤 지나면 온다고 했잖느냐?”
“이제 몇 밤 지났는데?”
“세 밤 지났지.”
“그럼, 이만큼 지나면 와?”
강영이가 서서 양손의 손가락을 쭉 펴서 보이자 해민이 웃으며 대신 답해 주었다.
“허허, 그래, 그만큼 지나면 올 것 같구나.”
“정말?”
“그럼, 네 엄마와 아빠는 꼭 올 게다.”
해민은 강영이를 당겨 다시 끌어안았다.
얼굴이 아비를 꼭 닮아서 며느리를 크게 안심시킨 강영이는 제주 현백의 딸이기에, 남들 보기에 부러울 것이 없는 아이었지만, 해민의 눈에는 안쓰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아비가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인 듯한 건 두말할 것도 없고, 어미도 남편을 돕느라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 강영이는 조부모의 손에 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조부모도 늦게 얻은 연약한 아들에게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으니, 어린 강영이는 벌써부터 종종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괜히 더 손녀가 안쓰러워진 해민은 강영이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손녀를 목마에 태워서 대문 밖으로 나서니, 제주현백의 가택이 언덕 위에 있는 터라 홍로현 남쪽 지역과 포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제주에 온 지도 벌써 2년에 이르니, 이제 더는 낯선 곳이 아니었다.
고향 땅이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제주는 생각보다 훨씬 살 만한 곳이었다. 그가 추대현 향리로 있으면서 여러모로 애쓴 것은 지금의 제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물론, 원래 그랬던 곳이 아니라, 아들 몽린이 그만큼 열심히 제주를 가꾼 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늦게 배운 낚시질이나 하러 다녀도, 현백의 아비라는 이유만으로도 양민들이 오히려 존경을 표하고,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녀석이 어쩌다 이리 큰 인물이 되었는지…….’
어릴 적에는 그냥 건강하게 커서 대나 잘 이어 주길 바랄 따름이었는데, 어느덧 현백의 직을 얻고, 수많은 백성들을 다스리며 중원과 왜국을 제 앞마당인 양 오가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제 스물셋밖에 안 되었음을 생각하자면, 아들이 자신의 나이에 이르면 얼마나 더 큰사람이 되어 있을지 그로서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너무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웅? 모가?”
해민이 중얼거리니, 목마 탄 손녀가 그 소리를 듣고 물었다. 해민은 대충 얼버무렸지만, 장남에 대한 걱정만큼은 진심이었다.
몽린이 자세히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도 현백의 아비로서 여기저기서 듣는 게 있으니, 아들이 고려에서, 왜국에서 일어난 큰 싸움에 끼어들었음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명국에 갔다가 죽을 고비도 넘겼었다.
아들이 현백이라는 높은 자리에 오른 만큼, 그 이상으로 더 위험하고, 더 군림하는 자들과 얽히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은 아들이 하고 펼치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냥 이대로만 두어도 제주는 수십 년은 평안할 듯한데, 늘 아슬아슬한 무언가를 시도하고, 도전하였으니, 가슴을 졸일 때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언젠가 아들과 산책하다가 인생이 길지 않음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로써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은 천 년을 논할 수 없음을 알리고 싶었다.
아들 몽린의 행보는 가끔 그의 삶 너머에까지 닿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할아부디, 저어어어기에 모가 이써?”
머리 위에서 손녀의 물음이 있었으니, 그녀의 앙증맞은 손가락이 남쪽 바다 먼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허허.”
해민이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손녀가 가리킨 방향과는 다소 다르지만, 제주 아래에 마라섬이 있음은 알고 있었다.
하나, 그 너머로는 뭐가 있을지, 계속 바다가 펼쳐질지, 또 다른 섬이나 육지가 있을지까지는 해민이 알지 못했다.
“저어어어기에 엄마랑 아빠가 가써?”
“음, 네 엄마랑 아빠가 간 곳은 저쪽이겠구나.”
손녀를 목마 태운 해민은 몸을 서쪽으로 돌렸다.
서쪽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 바다가 있으니, 그 바다 건너에 명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 * *
천자의 부름에 발걸음을 옮겨 대전에 들어서는 태자 주표의 마음은 무거웠다.
지난 수십 일간 응천부 정가(政街)를 들썩였던, 고려의 중란에 대한 개입 여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던 논쟁은 태자의 패배이자 승상의 승리, 즉 고려에 개입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고려에 개입할 때가 아니라 주장한 유자들로 구성된 비주류 신진 세력과 이참에 요동을 되찾고 고려의 사대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회서파로 대변되는 귀족 세력 간의 의견 충돌은 태자가 신진 세력에 힘을 보태면서 의외로 승부가 길어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되었다.
사실 이미 회서파의 고려 개입에 대한 의지가 굉장히 크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태자도 결국 명국이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는 걸 막기 어려울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다만, 고려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이 있었고, 당대 명국 사정에서 선후를 논하자면, 북방의 원을 중원에서 물리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임이 분명하기에 이변을 노려보고자 하였다.
특히 회서파를 크게 등용하면서도 동시에 크게 경계하고 있는 천자의 알 수 없는 심리에 기대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 천자의 선택은 아쉽게도 결국 회서파였다.
이미 결론이 나, 승상 이선장의 주도하에 원정군이 급하게 조직되고 있었지만, 태자 주표는 마지막으로 천자를 설득해 보고 싶었다.
하여, 천자 배알을 청하였고, 허락을 받아 지금 그 앞에 나선 것이었다.
대전에서 천자를 뵈나, 대신들은 없이 그저 태감들 몇몇만이 천자를 지키고 있는 중에 태자가 천자 앞에 나아가 읍하니, 천자가 다소 피곤한 기색으로 장남을 바라보았다.
세상의 중심을 다스리는 자가 편할 리가 없겠지만, 지금의 천자는 더욱 바빴으니, 사방에서 외적과 다투느라 그러했고, 내정 또한 그가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직접 다루느라 그러했다.
근자에 한 차례 숙청의 폭풍이 있은 후, 숙청된 자들이 가졌던 권한마저 천자가 모두 거두었으니, 안 그래도 힘든 정무에 더욱 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고려의 문제로 나를 보자 한 것이냐?”
“그렇사옵니다.”
“이미 그 일은 결론이 나지 않았더냐.”
“그것이 사실이오나, 이 나라의 태자로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청하고자 하옵니다.”
옥좌에 앉아 태자를 내려 보는 천자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스친 후, 말해 보라 허하였다.
“고려의 중란을 통해 요동을 다시 얻는 것은 얼핏 나라에 큰 이익일 듯하나, 원과의 전선이 길어져 국력을 더욱 크게 소모하게 할 것이니, 이는 반드시 이익이라 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더불어, 요동의 원장(元將) 나하추를 설득한다는 것 또한 그 가능 여부를 짐작하기 어려운 술수에 의지한 것이니, 만약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면, 명의 군사들이 크게 위태로울 것이옵니다.”
태자의 말에 천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만, 딱히 그에 대해 무어라 말하진 않았는데, 그간 정쟁하며 이미 오갔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고, 그것을 감안해서 결론이 난 것이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는 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니, 이미 오간 논의를 다시 들먹이기 위해 태자가 그를 찾은 건 아닐 것이라 여긴 천자는 태자가 새로 할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실상 이 승상과 회서파 족속들이 요동을 얻기 위하여 고려에 간섭하려 함이 아닐 것이옵니다. 이미 응천부와 남직례의 저자에 회서파가 고려에 개입함으로써 천자의 눈총을 피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으니, 이는 그저 헛소문만은 아니옵니다. 저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천자이시며, 저들이 바라는 건 천자의 시선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미 고달픈 명군을 또 다른 전장에 보내는 건 피해야 할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태자 주표는 내심 마지막 반격의 수단이라 여기던 생각을 밝혔다.
실제로 주표는 남직례(南直隶)를 다스리며 떠도는 소문을 전해 듣고, 이를 확인하여 사실이라 결론을 내렸다.
참고로 응천부 주변에 천자가 직접 경영하는 지역을 직례(直隶)라 하였는데, 그중 현대의 강소성과 그 주변에 해당하는 남직례는 태자가 다스리며 후계를 위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회서파의 실제 의도가 그러하였으니, 만약 천자가 이를 알게 되면 분명 다시 생각하실 것이라 여겼다. 그만큼 천자의 회서 족속들에 대한 견제 심리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하나, 천자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짐이 그것을 알지 못했을 거라 여긴 것이냐.”
놀란 태자가 고개를 들어 보니, 천자가 실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회서의 무리가 나라보다 저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바, 이번 고려의 중란에 대해 저들이 그토록 한마음 한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어찌 내심 노리는 바가 있음을 짐작하지 못하였겠는가.”
“하오시면, 어찌……? 만약 저들이 고려에서 모의하여 황망한 일을 꾸밈으로써 고려와 악연이 생긴다면, 후에 폐하의 위신 때문이라도 고려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리된다면 폐하께옵서도 회서의 무리를 누를 여지가 없을 것이옵니다.”
“그리되지 않게 하면 될 것 아닌가.”
태자의 말을 가볍게 누르며 천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띠곤 태자를 가르치듯 말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천자의 표정은 태자에게 ‘아직 애송이로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회서의 무리가 노리는 바가 있다하더라도, 그들이 직접 창과 칼을 들고 나아가 싸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그 순간 태자 또한 천자가 어찌 금번 일을 다루고 있는 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회서의 무리가 작당하여 고려로의 원정군을 조직하고는 있지만, 결국 그들이 바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군병을 다루는 건 원정군 장수의 몫이었다.
만약 천자가 그 장수를 구슬린다면, 회서의 무리는 노리는 바를 얻지 못함은 물론, 원정군의 전비만 쓰고 요동을 천자에게 돌려주며 그 위신과 권력만을 높이는 꼴이 될 것이었다.
“하, 하오시면 이미…….”
태자는 중서성(中書省)에 속한 한 인물을 떠올렸으니, 이번 고려 원정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된 호유용(胡惟庸)이 바로 그였다.
호유용은 회서파에 속한 자로서, 승상 이선장의 측근이었으니, 천자가 어찌 그를 구슬릴 수 있었는지 궁금했고, 설령 구슬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심인지 어찌 확신할 수 있을지 의아했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낼 시기가 아니더냐.”
“…….”
그 말에 태자는 대략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미 승상 이선장이 퇴진할 때가 되었고, 아마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여 마무리하는 것과 함께 그가 물러날 것이 분명하니, 그 후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호유용은 이 승상의 측근 중 측근이라 새로 승상의 지위에 천거될 인물 중 하나임에는 확실하였으나, 실제로 임명되는 건 천자의 마음에 달렸으니, 만약 천자가 승상의 지위를 두고 호유용을 구슬렸다면 통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상황이 정리가 되자, 태자는 내심 한숨을 토하였다.
그것은 천자가 회서파 무리에게 농락당하지 않음을 깨달아 안도하는 한숨이자, 고려에 개입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아쉬워하는 한숨이었다.
“폐하의 현명하심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나이다.”
태자는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고려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나, 이제 그에게 그 이유로서 남은 건 고려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뿐이었으니, 더는 무어라 반대를 표하기 곤란했다.
이미 지난번에 고려 사신들과 과한 친분으로 문제가 있었으니, 다시 같은 우를 범했다가는 천자가 태자를 달리 생각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명군이 고려로 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당대의 동중국해안선은 현대의 그것과는 다소 달랐다. 수백 년간 중원에 흐르는 수많은 강들이 토해 내어 만든 퇴적지, 특히 황하가 바다마저 누렇게 만들 정도로 쏟아 낸 퇴적물들이 그 시간만큼 없었던 시대이기 때문이었다.
황해로 흘러가는 강의 수로가 현대와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컨대, 현대 황하의 하류는 태산(泰山)의 북쪽으로 흘러 산동성 북부를 통해 발해로 나가지만, 당대의 황하는 태산의 남쪽으로 흘러 산동성의 남부를 통해 황해로 흘러가거나 회수(淮水 : 황하와 장강 사이의 강. 북중국과 남중국의 전통적 경계)와 합류하였다.
장강은 황하에 비해 유역 변동이 심하진 않았지만, 하류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중에 수 갈래의 지류가 흩어지니, 그 지류의 변천으로 인한 변화는 늘 있었던 것이다.
하여, 황해와 닿은 동중국의 해안 근처에는 현대에서는 볼 수 없는 섬들이 몇몇 있었는데, 근방 주민들이 창도(槍島)라 부르는 창날 모양의 길쭉한 무인도도 그중 하나였다.
몽주의 함대가 창도 해안에 정박한 것은 제주를 떠난 지 사흘 만이었다. 제주에서 거의 정서로 항주하면 닿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곧바로 창도에서 불과 십 길도 안 떨어진 남직례의 포구에 닿거나, 남쪽으로 내려가 장강 유역에 들어가지 않고 창도에 일단 멈췄으니, 이는 미리 사정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영공 신돈이 개경을 손에 넣고 있어, 포은이 왕명으로 공식적인 사신으로 임명받았기에, 몽주의 함대 역시 공식 사신단이랄 수도 있지만, 커다란 군함 열두 척으로 이뤄진 터라,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고, 또 명국에 온 목적을 생각할 때, 미리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창도에 몸을 숨기듯 함대가 정박하고, 한 척만 따로 먼저 보내어 사신의 행차를 알리고자 하였다.
한데, 그 배가 불과 한 시진여 만에 돌아왔으니, 몽주가 놀라 선장을 그의 선실로 불러 연유를 물었다.
“염성에 속한 포구에 닿으니, 주변이 소란스러웠습니다. 하여, 포구의 관리를 기다리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고려로 갈 명군을 위한 군량을 선적하는 작업 중이라 말하였습니다.”
“이미 명군이 고려로 가는 것이 확정되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후에 포구의 관리를 만나 고려에서 온 상인인 척하며 물었는데, 저희를 경계하여 다 말해 주진 않았지만, 명군이 이미 구성되어 출정하기 직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하의 말에 몽주는 인상을 일그러뜨렸고, 같은 선실에 있는 이들 중 포은은 특히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이 고려의 중란에 개입할 수 있음을 알았고, 그렇기에 포은과 더불어 온 것이나, 설마하니 벌써 명의 조정이 이미 결정하여 군사까지 조직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보시오, 현백. 사정이 급하게 되었으니, 나를 서둘러 데려가 주시오.”
포은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하였지만, 몽주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고심을 멈추지 않았다.
“이보오, 현백! 내 말을 어찌 듣지도 않는 것이오?”
“지금 포은 선생이 간다 한들 상황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않소?”
“……그야 그렇지요.”
몽주가 뜸을 다소 들이며 인정하였다.
“하면, 서둘러 주시오. 당장 응천부로 가서 명의 천자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명군이 고려에 닿았다 하더라도 회군시킬 수 있을 것이오.”
“…….”
포은의 말에 몽주는 동의할 수 없었다. 포은이 아무리 명나라에서 명망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출병한 명군마저 회군시킬 가망성은 없었다.
이는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려는 명국의 결정이 매우 빠르다는 것에서 기인한 판단이었다.
수시중이 명과 접촉하여 지원을 청한 것은 아무리 빨라도 두 달보다 전일 리 없었다. 그런데 길어도 고작 두 달 만에 명의 천자가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는 것을 결정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도 명국이 원이라는 절대적인 대적과 맞서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 그리고 고려의 중란에 개입해 봐야 고려의 신하국 자처 정도의 이익밖에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빨라도 너무나 빠른 결정이었다.
몽주는 머릿속이 간질거렸다. 그와 경흥후 등이 짐작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해관계가 숨겨져 있음을 직감하였던 것이다.
“대체 무엇일까, 설마하니 나라를 통째로 바치는 것도 아닐 터인데…….”
“이보오, 현백! 대체 무얼 꾸물거리는 게요?”
몽주가 중얼거리며 계속 생각에 빠져 있으니, 포은이 답답함을 숨기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제 생각에 포은 선생께서는 명국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하면, 나더러 명을 설득해 보지도 말라는 말이오?”
“그런 셈이지요.”
“현백! 어찌 국난의 고비 앞에서 이처럼 쉽게 포기하려는 것이오! 현백이 나를 보내지 않겠다면, 나는 섬에서 쪽배라도 기워 바다를 건너갈 것이오!”
포은은 정말 뗏목이라도 만들어서 갈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하나, 몽주가 눈짓하여 선원들로 하여금 선실을 나가지 못하게 하였고, 문이 막히자 포은이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몽주를 돌아보았다.
“이 무슨……!”
“실례이나, 선생의 신병을 잠시 억류하겠습니다. 탁기, 포은 선생을 정중히 모시게.”
“현백, 대체 이 무슨 행패인 것이오! 현백! 현백! 놔라, 이놈들아!”
탁기가 수하들과 더불어 포은을 끌고 가, 그가 본래 그의 일행과 쓰던 선실에 연금시키니, 포은을 수발하던 다른 일행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몽주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대들도 포은 선생과 함께 있어야겠소. 포은 선생께는 오늘의 일에 대해 차후에 설명해 드리겠노라 전해 주시오.”
몽주가 그들 또한 연금하기로 결정하니, 그들은 저항하는 대신 순순히 선원들을 따라 선실로 향했다.
그렇게 외부인들이 나가자, 몽주의 선실에 남은 자들은 모두 현백군 내 측근들뿐이었다.
“대체 왜 포은 영감을 구속하신 거예요?”
앵도가 서둘러 물으니, 선실 안의 모든 이들이 몽주를 주목하였다. 그들 또한 포은을 보내지 않고 묶어 두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포은이 명의 영토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의 신변이 위험할 것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라오. 이미 명국이 출병을 결정한 중에 그들이 손을 잡은 수시중과 다른 노선을 걷고 있는 고려의 신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은 당연한 바, 자칫 해를 당할 수도 있을 것이오.”
“하나, 포은 선생 또한 그것을 잘 알고도 가겠노라 청한 것 아닌가, 더구나 지금은 그렇게 무리라도 해야 할 판이 아닌가?”
화극이 끼어든 말에 다들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포은이 명국에 모습을 드러내면, 그가 소수의 일행만 대동하고 있다 하더라도, 명에서 따로 사신단이 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떻다는 겐가?”
“만약 우리가 명군을 수몰시킨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일일지라도, 포은으로 인해 영공 측에 의해 명군이 사라졌다 추궁하지 않겠습니까?”
“……!”
몽주의 말에 담긴 뜻에 화극은 물론이고, 귀가 있는 모든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면, 명군과의 싸움에 대비하여 포은을 보내지 않았다는 겐가?”
“조금 더 상황을 살펴야겠으나, 그럴 가능성이 적진 않을 것입니다.”
몽주가 담담히 ‘가능성’을 밝혔으나, 듣는 이들은 모두 표정이 아연해졌다. 그만큼 방금 현백이 한 말은 가벼이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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