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43)
* * *
명국이 이미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은 몽주의 함대 내에 즉시 퍼졌다.
현백군 사이에서는 다들 괜히 먼 곳까지 왔다는 둥, 이제 수시중이 고려를 먹는 거냐는 둥 불평과 잡담이 오가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이건 딱 전쟁이네.”
“전쟁이야 이미 결정된 거잖아요. 명군이 출병했다는데.”
나란히 갑판 난간에 기대어 있던 석삼이 말하니, 감태가 그게 무슨 대단한 예측이냐는 양 대꾸하였다.
“그 전쟁 말고, 우리 현백군의 전쟁 말이야.”
“우리 전쟁요?”
감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봐라, 현백께서 이미 영공은 물론 경흥후와도 손을 잡고 있지 않느냐. 그렇기에 경흥후를 도와 포은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고. 하니, 현백의 입장에서는 고려의 중란은 영공이 이겨야 마땅한 것이다, 이 말이지.”
“그야 그렇죠. 그런데 지금은 수시중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판이고요.”
“그렇지. 명군이 고려에 닿으면 고려의 중란은 수시중의 승리로 끝이 날 것이 자명하지. 저 큰 나라가 적은 군사를 보낼 리도 없으니, 이 와중에 현백께서 택하실 수 있는 건 크게 두 가지뿐이야. 하나는 명군이 고려로 건너지 못하게 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로 돌아가 영공 측을 돕는 거지.
“그렇겠죠. 근데 당연히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지. 이대로 돌아가 명군이 고려에 닿으면, 우리 또한 뭍에서 싸워야 할 것인데, 현백군의 수를 생각하면 가능한 피해야 할 일이다. 또, 네가 아직 잘 모를 수도 있는데, 현백은 화포를 고려에 숨기시는 경향이 있거든.”
“아…….”
“결론적으로 명군이 고려에 건너가면, 고려 본토가 수시중의 것이 될 것이 터이니, 현백의 제주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것이야. 만약 고려를 쥔 수시중이 현백에게 적대하여 군병을 일으키고, 혹여 명군까지 가세한다면 제주가 위태롭지 않겠느냐.”
“만병(萬兵)이 온다 하더라도, 바다가 있는 이상 제주를 범하지는 못할 걸요?”
감태가 괜한 자신감을 보이자, 석삼이 피식 웃었다.
“결국은 싸우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어차피 싸울 것이라면, 나중에 우군을 잃고 홀로 싸우느니, 차라리 우군이 건재한 중에 우리가 먼저 싸우는 게 낫지 않겠냐?”
“음…….”
감태가 무어라 반박하려다 말문이 막히니, 석삼이 끌끌 거리며 말을 매조지었다.
“손자에 이르길 싸움을 피하되, 부득이할 경우에는 싸우라 하였다. 이미 명군이 출병 준비를 마쳤으니, 싸움은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면, 싸워야 하는데, 역시 손자에 이르길 싸움은 유리하게 만든 후 싸워야 한다 하였으니, 우리 현백군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이냐? 바로 바다에서 싸우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손자를 강조하신 현백께서 바다에서 명군을 맞서려 하실 것이 자명하다는 말이다.”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런 거다, 이 애송아. 후후.”
석삼이 감태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는데, 문득 등 뒤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 말이 그럴싸하군.”
놀란 석삼이 돌아보니, 창 선장이 제법이다 싶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기…… 헤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것입죠. 헤헤.”
“그렇다면 더욱 대단하군. 현백께서 속뜻을 확실히 밝히지 않아, 우리 선장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한 중이었는데, 자네의 말을 엿들으니 과연 그렇다 싶었네. 그런 안계(眼界)를 그저 별생각없이도 얻을 수 있다니, 더욱 감탄하게 하이.”
“…….”
석삼은 왜 창 선장이 자기를 이토록 칭찬하는 건지 몹시 불안해졌다.
물론, 그가 한 말이 그냥 내키는 대로 지껄인 건 아니었다. 명군이 이미 출정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후, 나름 고민하고 궁리하여 얻은 결론이었다.
하나, 누구에게 그걸 자랑하기는커녕, 밝히는 것도 꺼려졌으니, 자칫 말이 씨가 되었다고 타박을 받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현백군이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싸움을 치르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전투가 즐겁고 신이 나는 일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갓 들어온 신병들 중에서 현백군의 승장을 전해 듣고, 그것을 부러워하며 자신도 전투에서의 승리를 맛보고 싶노라 말하는 놈이 있으면, 중병이나 사급 군병들이 크게 혼을 내곤 했다.
진짜 사람이 죽고 다치는 전장에서의 경험이란, 설령 일방적으로 승리하여 스스로는 물론 아군의 피해도 일절 없다 하더라도, 죽고 다친 적군을 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아찔하고, 다리가 떨리는 것이라는 엄중한 충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대범한 자라 하더라도, 아무리 잔인한 경험을 가졌다 하더라도, 전혀 상관없는 원초적인 두려움이라 하니, 속으로는 공감하지 못하는 자가 있을지언정, 전쟁과 전투를 바라는 의미의 발언은 현백군 내에서는 금물이었다.
특히 현백군 내 사급 군병 이상이 손자를 익히면서, 싸움은 철저히 대비하되, 반드시 피할 수 있을 때까지는 피해야 함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후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기에 석삼이도 자신이 감태에게 한 말이 다른 경험 많은 군병들에게 전해진다면 크게 혼이 날 것이라 여겼고, 만만하면서 믿을 만한 감태에게만 슬쩍 말한 것이었는데, 웬걸, 석삼이 직접 대면할 만한 상급자들 중에서 최상급자에게 딱 걸리고 만 것이었다.
“석삼 하병은 잠시 선장실로 따라오게.”
“……네.”
석삼은 풀이 죽어 창 선장을 따라갔다. 아무래도 크게 혼이 날 것 같다 여긴 탓이었다.
한데, 정작 선장실에 들어가니, 창 선장은 그를 작은 상 앞에 앉게 하고는 맑은 물 한 잔을 내주며 뜻밖의 말을 하였다.
“자네의 의견에 흥미가 생겼기에 하는 말이네만, 자네가 보기에 장차 상황이 어찌 돌아갈 것 같은가. 물론, 이미 자네가 앞서 한 말을 듣긴 했네만,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말일세.”
“어찌 저 같은 말단 군병에게 그런 어려운…….”
그러자 창 선장은 양손을 들어 흔들면서 부담스러워하지 말라 하였다.
“절대 자네가 현백을 오래도록 모시고 있었고, 그래서 현백의 의중을 남보다는 잘 짐작할 수 있겠다 싶어 묻는 건 아닐세.”
“…….”
석삼은 어째 방금 창 선장의 진심을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자네가 의외로 영민한 구석이 있다 싶어, 두루두루 이야기를 들어 보려 함이니 맘 편히 하여도 좋네. 내 약조도 함세. 절대 어디서 자네의 견해를 발설하지 않을 것이야.”
몇 번이나 창 선장이 비밀 유지를 확언해 주니, 석삼도 슬슬 입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상황을 예견하고 그에 대응책을 구상하는 건 의외로 재밌는 일이었다. 소문을 듣고 망상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석삼의 머리는 꽤 먼 시간 후까지 짐작하기에 이르렀으니, 사실 감태에게 말한 건 그 시작에 불과했었다.
속내에서 기꺼운 맘이 솟아 선뜻 응하고 싶었지만, 석삼은 아주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무어라도 말씀을 드려야 함이 마땅합니다만, 대뜸 전부를 여쭈신다면 제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작은 질문을 던져 주신다면, 그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옳거니. 하면, 내 하나씩 물어보지. 음, 뭐가 좋을까……. 아, 자네가 보기에 명군이 고려로 가는 항로는 어찌 될 것 같은가.”
석삼의 머릿속에 곧바로, 아마도 정답일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이미 중원과 고려가 소통한 지 오래 되었으니, 그동안 따랐던 뱃길을 이번에도 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면, 역시 산동으로 올라가 고려로 넘어간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다만, 만약 명군의 장수 중에 해로에 익숙한 자가 있다면, 명의 해안을 따라오르되, 백해(白海)에까지 나아가 북상하려 할 것입니다. 이는 이미 현백께서 기록으로 남겨 두신, 지난 사신행차 때 벌어진 침몰 사건에서도 언급된 바 있으니, 명군이 머저리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면 분명 백해로 나와 북상할 것입니다.”
석삼이 언급한 기록이란, 몽주가 대명 사신단의 일원으로 명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일에 대한 것을 의미했다.
몽주의 제주는 그 행정이 무르익음에 따라, 무슨 일이든 기록하는 것을 필수로 하였는데, 비단 기술이나 제도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사고나 사건에 대한 것도 빠짐이 없었다.
하여, 몽주 또한 비밀로 정한 것을 제외하고, 그가 겪은 일에 대해 기록을 남기어, 누구든 열람이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아직은 그런 기록에 관심을 가지고 열람하는 것은 몽주와 그의 측근들에 불과했지만, 어찌 되었건 어러모로 다양한 기록을 남겼으니, 종종 그런 기록들이 어디선가 쓰이곤 했다.
몽주의 익사 위기에 대한 기록 또한 현백군의 신병을 교육할 때마다 쓰였기에 석삼이 잘 알고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몽주에게 직접 들은 바가 있었다.
그중에 명의 선박이 고려로 넘어갈 때 백해(白海), 즉 황해의 중심부로 나와 북상하였다 하면서, 그 이유로 해류를 논하였는데, 석삼이 지금 창 선장에게 그것을 일깨워 준 것이었다.
“현백께서 기록하시길, 황해의 해류는 고려와 중원 양쪽 해안에서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그 사이 백해에서는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하시면서, 북풍이 부는 겨울에는 백해의 남북 해류를 이용하고, 남풍의 여름에는 양쪽 연안의 해류에 의지하여 역풍을 이기는 것이 옳다 하셨습니다. 특히 여름과 겨울에 미묘한 차이가 있으니, 여름에 비해 겨울에는 백해를 따라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해류가 중원 쪽에 더 가까이 지나간다 하였습니다. 여름과 겨울의 차이는 모르더라도, 그간의 항해 경험이 명국에도 남아 있을 것이니, 십중팔구 명군의 항로는 중원 쪽에서 북상하되, 해안을 바짝 따르는 대신에 백해로 멀리 나올 것입니다.”
석삼의 설명을 듣다 보니, 어느새 창 선장의 입이 동그랗게 모이며 ‘오―’하는 감탄이 슬쩍 흘러나왔다.
그건 단지 석삼이 해류까지 생각하며 경로를 추정한 것에 대한 감탄만은 아니었고, 내심 속으로 께름칙했던 부분마저 해소됐기 때문이었다.
“내 자네에게만 말하는 것이네만, 현백께서 선장급 이상만 모인 자리에서 슬쩍 그 속내를 비치신 것이 있었네. 포은 영감을 선실에 두게 하신 후에 명군을 수몰시킬 수도 있다 하시며, 바다 한가운데에서 은밀히 일을 치를 경우를 언급하셨지. 나는 그 말을 듣곤, 명군이 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산동에서 고려 사이의 짧은 바다로 건너면 어찌 은밀히 그 일을 행하실 수 있을까 의아했었는데, 자네 말을 들으니 현백께서 노리시는 것이 가능할 법도 하군.”
“아마 현백께서도 명군의 배들이 백해로 떨어져 북상할 것이라 예상하셨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석삼이 그리 말을 하고 나니, 괜히 우쭐한 마음마저 들었다. 주인 도령이었다가 이제는 제주에서 하늘처럼 높은 위치에 오른 현백과 같은 판단과 생각을 자신이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그만큼 자신이 달라졌음을 느낀 것이었다.
“한데, 문득 든 생각이네만, 자네의 말투가 왠지 현백과 닮은 듯하군.”
“…….”
이상하게 움찔한 석삼이었으나, 창 선장과의 이야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 * *
하루에 한 번씩 두 차례 더 한 척의 배를 다른 포구에 보내 명군의 움직임에 대해 소식을 구하였다.
이미 처음 갔던 홍로급 경함선이 그러했듯, 화포를 치우고, 고려 상인의 상선으로 위장하였다.
두 번째 탐보선이 가져온 소식은 그다지 쓸만한 것이 없었지만, 세 번째 탐보선이 하룻밤이 지난 후 가져온 소식은 훌륭한 것이었다.
그 배의 선장은 몽주가 목호를 토벌하러 올 때 모집했던 사병 출신으로, 고려군병으로 몇 년 일한 경험이 있었던 덕인지 좀 더 눈에 띄어 선장으로 임명된 자였다.
그는 장강 하류 유역 양주(揚州)에 가서 탐문하였는데, 붙임성이 좋은 성격을 바탕으로 주점에서 만난 그곳의 수문장과 금세 친해져 밤새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많은 정보를 캐 왔다.
“세 개의 위가 동원되었다는 것이냐?”
“그러합니다. 다만, 모두 완편된 건 아닌 터라, 그 수는 다소 모자람이 있을 것이라 합니다.”
보고를 받은 몽주는 고심을 이어 갔다.
그 고심은 이미 삼 일간 진행 중인 것으로, 바다에서 명군을 습격할 것인지, 아니면 고려로 물러나 영공과 경흥후를 도와 싸울 것인지에 대한 고심이었다.
명군 3개 위(衛)라 함은, 형식상 3만의 군병이라는 의미였고, 모두 완편된 것은 아니라 하니 2만 5천 안팎이라 추정할 수 있었다.
본디 사천 지방의 원나라 잔여 세력과 싸우는 중에 소모된 군병에 새로 신병을 더하여 재편 중이던 위라 하니, 정예는 아닐 것이나, 고려의 중란을 끝장내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 3개의 위가 80여 척의 누선을 통해 고려로 향할 것이라 하는데, 날이 험하지 않다면 삼 일 후에 남직례 남부에서 출항할 것이라 하였다.
비교적 구체적인 정보를 얻고 나니, 몽주의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2만 5천이라 추정하고 생각해 보면, 겨우(?) 80여 척의 누선으로 고려로 간다는 것은 양초(糧秣)를 충분히 가져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명군이 동원한 누선(樓船)은 명 건국을 위해 다른 한족 세력과의 패권 싸움 중에 건조한 것이었으므로, 주로 강과 내륙의 호수에서 쓰기 위해 흘수선이 얕게 만들어져, 상당한 크기에 비해 구조적으로 많은 무게를 지탱하기는 어려운 배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마(騎馬)는 없이, 거의 모두 보군(步軍)으로 구성된 것이라 여겨졌고, 또 고려의 중란 중에 쓰일 군량 중 많은 부분을 수시중 측에서 제공하기로 약조한 것이라 짐작이 가능했다.
다만, 어쩌면 명군이 고려에서 식량 문제를 겪을 수도 있을 것이라 판단되기도 하였다.
고려에서 대단위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방도는 시전을 통하는 것뿐인데, 시전은 영공 신돈의 손아귀에 있으며, 모르긴 몰라도 영공이 시전의 유통을 철저히 틀어막고 물산을 움켜쥐어 고려 소비의 주체인 세족들을 압박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시중이 군량을 준비할 방도는 그와 손을 잡은 여러 세족들로부터 십시일반 모으는 것뿐이었는데, 그것이 원활이 이루어질 것이라 여기기는 어려웠다.
명군의 참여로 중란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고 세가의 운을 거는 족속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분명 가문의 재산을 가능한 아끼고자 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짧은 시간에 모으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도전거리가 될 터였다.
생각해 보면 바다에서 현백군 홀로 명군과 대적하는 것보다 고려로 한 발짝 물러나 영공 및 경흥후의 군력과 힘을 합하여 싸우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나, 이내 그 생각에 대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된다면 영공과 경흥후, 나아가 고려에 제주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 너무나 많이 알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신형 함선이야 그렇다 쳐도, 당장 강철 화포의 성능부터 드러날 것이니, 일이 잘 진행된다 하더라도, 훗날 영공과 경흥후가 제주를 견제하려는 마음을 품는 것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뭍에서 싸우는 건 현백군의 장기가 아니었다. 현백군은 뭍에서는 사실상 포병과 그 호위대 수준에 불과하였으니, 대적하는 것 자체는 영공과 경흥후에게 맡겨야 했는데, 화포와 더불어 싸운 적도 없는 그들과 함께하는 건 너무나 많은 불안 요소를 떠안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왜국에서 뭍에서 왜병과 더불어 싸운 적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때는 그저 왜병의 위세를 빌려 소수의 적이 쳐들어올 마음을 품지 못하게 막는 수준의 협조만 얻었을 뿐이었다.
만약 이번에 고려에서 싸운다면, 오히려 더 많은 군사를 가진 적과 크게 교전할 것이 자명한 바, 자칫 아군이 실수하거나 무너지기라도 하면 수가 적은 현백군은 화포와 더불어 증발해 버릴 수도 있었다.
몽주가 고심에 고심을 더하니, 절로 결론은 한 곳으로 모아졌다.
마침내 그가 결심하니, 직후에 그가 한 일은 연금되어 있는 포은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그가 탁기와 더불어 포은이 있는 선실 안으로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포은의 고함 소리가 들렸고, 그에 못지않은 몽주가 항변하는 소리도 연이었다.
* * *
지나치게 날씨가 좋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이 없었고, 파도는 잔잔했으며, 바람은 사람이 기분 좋을 만큼 솔솔 불었다. 물론, 항주하는 배에서 맞이하는 바람은 조금 더 거세긴 했다.
“좌범조(右帆組) 해삭(解索) 둘 하오!”
갑판장이 소리쳐 명하니, 좌측 조범수들이 돛을 지탱하고 있는 밧줄이 감긴 목주(木柱)를 두 바퀴 돌려 줄을 풀었다.
그로 인해 삼각돛처럼 활대가 크게 기울어져 있던 돛이 이완되면서, 북서로부터 부는 역풍을 조금 더 흘려 보내었고, 당연히 배의 속도는 조금 더 느려졌다.
기함으로부터 속도를 늦추라는 신호에 이어 종대의 대형을 남향의 횡대로 바꾸라는 신호가 있으니, 이미 정해진 순서에 따라 기함부터 차례대로 함대가 도열하였다.
진형을 갖추자마자 선수(船首)에서 거측기를 들어 남쪽을 겨누던 창 선장은 거측기를 조절하곤 그 눈금을 확인하였다.
거측기(距測器)는 긴 막대자 위에 원형의 고리를 부착시켜 움직이게 만든 측정기로, 한쪽 끝을 눈 밑에 대고 원형의 고리를 움직여 먼 곳의 사물이 그 고리에 딱 들어오게 하면, 대략적인 거리를 잴 수 있는 기물이었다.
현백이 근자에 새로 명하여 만들게 한 것으로, 미리 거리를 잴 대상의 크기를 알고 그에 맞춰 고리를 달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만 측정할 수 있으며, 측정 환경이 안정되어야 한다는 등의 단점이 있었지만, 지금은 충분히 쓸만 했다.
바다가 평안하고, 측정할 대상의 크기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략 삼 길이군.”
“하면, 곧 명군도 보이겠군요.”
창 선장의 말에 석삼이 곁에서 반응하였다. 본디 갑판원으로 한창 일해야 할 그였지만, 창 선장이 따로 명해 그를 곁에 두었는데, 일이 석삼의 조언대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 선장이 말한 3길의 거리는 명군의 함대와의 거리가 아니라, 현백의 함대 중 따로 뒤에 쳐져 있는 홍로급 경함선 한 척과의 거리였다.
그 배의 뒤로 7길 정도 떨어져 명군의 함대가 북상하고 있을 것이니, 지금 창 선장이 있는 곳으로부터 10길 정도 떨어진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이곳이라면, 분명 쥐도 새도 모르게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석삼이 다시 말하니, 창 선장도 고개를 끄덕이곤 석삼에게 믿음직한 시선을 건네었다.
전날, 창도에서 출항하기 직전에 현백으로부터 작전의 대강을 들으며, 창 선장은 홀로 크게 감탄하였는데, 현백이 말한 것이 석삼이 말한 것과 일치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더 놀란 부분은 명군의 함대를 뒤에서 쫓지 않고, 오히려 먼저 앞선다는 것이었으니, 앞서 석삼이 그에 대해 말할 때는 진정 그럴까 싶었던 대목이었다.
싸울 때를 생각하면, 먼저 앞서 있다가 반전하여 순풍을 받고 싸우는 것이 낫기는 하지만, 명군의 항로를 확신할 수 없는 중에 그러는 것은 자칫 명군의 행방을 잃는 사태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데, 현백은 한 척의 배만 늦추어 그 배로 하여금 명군 함대의 가시권에서 앞서게 하였고, 그 앞으로 함대를 배치해 뒤로 처진 함선의 움직임에 반응하게 함과 동시에 명군의 시계(視界)에서는 벗어나며, 앞서서 나아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명군의 입장에서는 멀리 떨어진 앞에 괴함선이 보여도, 겨우 한 척의 배를 경계하여 항로를 변침하지는 않을 것이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렇게 추격이라는 말이 무색한 형태로 앞서던 현백의 함대가 이른 곳은 백해의 중앙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북서쪽으로 산동 반도의 남면을 두고, 중원의 땅이 움푹 들어가 해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현백군의 선장이 소지한 지도로 보자면, 가장 가까운 중원의 땅과도 100길은 족히 떨어져 있었으니, 이곳에서 포성을 토하며 싸운다 하더라도, 중원에서 이를 알기는 불가능할 것이 분명했다.
“이제 곧 싸움이겠군. 한데 포은 영감은 아직 겁에 질렸을까?”
“화포의 성능을 모르니, 그럴 만하지 않겠습니까.”
석삼의 대꾸에 창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실소를 흘렸다.
삼 일 전에 현백과 포은이 선실에서 크게 말다툼을 했다는 소문이 함대에 쫙 퍼진 상태였다.
현백이 명군과 바다에서 싸우는 방책을 밝히자, 포은이 싸움에서 져 자신마저 죽을 것을 걱정하며 화를 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백수십 척의 적과도 바다에서 싸워 일방적으로 이긴 바가 있었던 현백군의 입장에선, 전투를 경시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실소하게 할 만한 것이긴 했다.
왜국에서 상대한 배와 달리, 명군의 배는 크고 육중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굼뜬 면이 있었으니, 현백군은 내심 더 상대하기 쉽다 판단하고 있었다.
게다가 현백군은 화포로 싸울 것이고, 명군은 이미 화포를 싣지 않았음을 확인하였으므로, 더욱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포은 영감이 크게 놀라겠군.”
* * *
포은은 선실 연금에서 풀려 나와 갑판 위에서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은 몹시 창백하고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는데, 그건 겁을 먹은 탓이 아니었다.
그 한 몸이 죽어 명군을 수몰시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여겼으나, 다만 그것은 명군을 수몰시키는 것이 옳은 것이라 동의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제주현백이 명군과 바다에서 싸운다 하였을 때, 그가 격분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 생길 여파 때문이었다.
당장 고작 12척의 배로 그 예닐곱 배의 명군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을지부터 부정적이었지만,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명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과 두려움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분명 천자는 대로하여 고려를 적대할 것이니, 이 일로 인해 고려에서의 중란을 영공과 경흥후가 이긴다 하더라도, 그때부터는 명국을 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할 터였다.
사실 포은은 명군의 개입으로 인해 중란에서 패배할 위기가 된다면, 경흥후에게 권하여 먼저 항복함으로써 지금의 지위와 세력만이라도 유지하는 방도를 택하려 하였는데, 명군과 크게 싸운다면 그마저도 불가능해지리라.
현백은 명군을 모조리 수몰시켜, 누가 명군을 괴멸시켰는지 모르게 하겠노라 장담하였지만, 그것이 가능할 리가 있겠는가.
정말 하늘의 운이 따라 가능하다 하더라도, 명국은 그 혐의를 고려에 둘 것이고, 그중 영공과 경흥후 쪽을 의심할 것이다.
아무런 증좌가 없다 하더라도, 명국이 위신을 세우고, 분노를 풀기 위해 얼마든지 위력을 동원하려 들 것임은 매한가지였다.
‘현백이 이토록 무도한 자였던가, 이것이 그의 진면목이란 말인가!’
포은은 함주를 떠나기 전에 무학으로부터 들은 말을 떠올렸다.
패배할 가능성이 큰 무모한 싸움을 걸고, 나아가 나라마저 크게 위태로워질 짓을 저지르려 하다니, 포은은 자신이 현백을 그간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선수에서 현백군 측근들과 더불어 한참 논하던 현백이 문득 고개를 돌려 포은을 바라보았다.
잠시 시선이 마주친 뒤, 현백이 포은에게 다가와 담담히 말을 건넸는데, 그 내용은 마치 포은이 무슨 걱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하였다.
“명은 아직 그리 강성하지 못합니다. 지금 분노한다 하더라도, 그 분을 풀기 위해서는 십 년의 시간도 짧을 것입니다. 북쪽에 원과 대적하느라, 세 개의 위도 겨우 짜낸 것이 지금의 명국입니다.”
“……십 년 후에는 나라가 망해도 좋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료.”
“십 년 후라…… 후후.”
현백의 웃음에는 얄미울 만큼 쾌활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일까, 포은은 욱하는 마음에 빈정거림을 담아 말을 토하였다.
“하기야, 당장 이 바다에서 죽을 상황이니, 십 년 뒤를 생각할 필요가 있겠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면, 저와 내기를 하시지요.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포은 선생께서는 오 년간 제주에서 제 뜻에 따라 일해야 합니다.”
“싸움에서 지면 다 죽는 것 아니오? 그것이 어찌 내기가 될 수 있겠소?”
“아, 그렇긴 하군요. 한데, 이미 내기는 진행 중입니다. 오늘 이후, 저는 무조건 포은 선생을 제주에 묶어 둘 것입니다.”
현백의 말에 포은이 눈을 크게 뜨며 어이없어 하였으나,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현백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십시오. 그 이유는 이제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현백은 말을 마치자마자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려 다시 측근들에게로 돌아갔다.
포은은 기가 막힌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 * *
명군의 함대를 주시하며 뒤처졌던 경함선이 1길쯤에 이르자, 진을 이루고 대기하고 있던 경함선들이 일제히 돛을 펼쳤다.
이미 명군의 함대가 보이고 있으니, 그들을 향해 횡으로 도열하여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뒤처졌던 경함선도 반전하여 그 열에 어깨를 나란히 하니, 총 12척의 경함선들이 명군 함대의 거대한 군세를 향해 쇄도하였다.
이미 사각돛처럼 크게 펼쳐진 돛은 북서에서 부는 바람을 품고 배를 힘껏 밀어 주었으니, 명군의 함대는 시시각각으로 가까워졌다.
명군의 함대에서도 괴선박들이 질주해 오는 것을 이미 파악했겠지만, 아직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괴선박들의 수가 그들에 비해 너무나 적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들이 당황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니, 어디 비단 당황하는 정도뿐이었으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