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46)
“하여튼, 이제 나를 찾지 마쇼! 주인 도령님이랑 다니면 죄다 내 손해란 말이오!”
“크하하하, 똑같다, 똑같아!”
한 군병이 과장된 표정과 말투로 말을 뱉자, 갑판 위에 늘어져서 휴식을 취하던 선원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조타수 옆에 서 있던 창 선장마저도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다만, 갑판 선실문 옆에 기대고 있던 석삼만이 무안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조금 전 군병이 흉내 낸 말은 석삼이 현백에게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정신일 때 한 말은 아니었고, 석삼이 구조되어 정신을 잃던 중에 현백이 찾아왔었는데, 현백이 무어라 위로의 말을 전하니,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석삼이가 대뜸 그렇게 소리쳤던 것이다.
지금은 다들 웃고 있지만, 석삼이 그렇게 소리친 순간, 주변에 있던 자들을 몽땅 얼어붙었다.
과거에 석삼이 현백의 가복이었다는 건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제주의 하늘인 현백에게 대서는 양 목소리를 높이는 건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현백이 백성들에게 자비롭고 온화하다는 평과는 상관없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당장에라도 현백이 석삼이를 도로 바다에 처넣으라 하면 곧바로 실행할 준비를 했었는데, 현백은 실소하더니 죽지는 않을 것 같으니 몸이나 따뜻하게 해 주라는 명을 내리곤 그냥 돌아갔었다.
석삼도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난 후, 그가 현백에게 그런 헛소리를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아찔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 후에는 툭하면 놀림을 받았는데, 지금처럼 그때 입에서 나온 말을 흉내 내거나, 나름 점잔을 빼더니 원래 말투가 그랬냐며 시시덕거림을 당했던 것이다.
사실 석삼은 현백의 가복들 중 우두머리 노릇을 하면서 위세를 좀 부렸었고, 현백군에 들어와서도 점잖은 말투를 보이곤 했었는데, 막상 그가 과거에 주인 도령이었던 현백에게 하는 말본새를 들으니, 그게 다 가식이고 연기임이 탄로 나 버린 것이다.
“저는 과연 현백의 심복이시다 싶었다니까요. 현백께서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영민한 인재를 품으셨구나. 이제 그 인재를 군에 보내어 크게 키우시려는 모양이구나. 막 그랬다니까요.”
“어허허! 맞다, 맞아! 나도 그랬다니까.”
“…….”
믿었던 감태마저 신이 나서 군병들과 함께 자신을 놀려 먹는 데 동참하는 것을 보며, 석삼은 속내로 참을 인 자를 새겼다.
여기서 짜증난다고 반응해 봐야, 이제껏 힘들게 세운 품위가 거짓임을 다시 드러낼 뿐이었다.
“허허, 사람들 참…… 내 정신이 혼미한 중에 헛소리를 좀 했기로서니, 이리도 우스개로 쓰다니……. 뭐, 좋네. 나로 인해 다들 즐거웠다면 그게 좋은 것이겠지, 허허.”
석삼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범하게 행동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제 곧 사급 군병으로 진급할 입장에서 아량을 보이고자 한 것이었다.
석삼이 창 선장을 도와, 지난 전투에서 크게 기여한 것은 현백에게까지 전해졌다.
창 선장이 그가 돌출 행위를 한 것에 대한 전후 상황을 고하면서, 석삼의 조언이 크게 쓰였음도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사실 만약 현백이 창 선장의 이탈을 문제 삼아 벌하기만 하였다면, 석삼도 얼결에 같이 벌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상황이 오히려 반대였기에 석삼이 창 선장에게 조언한 것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여, 창 선장이 말하길 그가 석삼을 부관 겸 항해사로 추천할 것이라 하였는데, 부관이자 항해사는 사급 군병이 맡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진급 또한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이제 갓 하병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하사로서 항해사가 된다면, 여러모로 질시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겠지만, 석삼은 애초에 현백의 가복이었고, 또 실제로 공을 세운 것이라, 소문이 흘러나갔음에도 다들 축하하면 축하했지, 불만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이는 창 선장의 부관 겸 항해사가 그 임무에 적응하지 못하여, 뭍에서 일하길 희망하는 상황인 덕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선장이나 갑판장이 아닌 이상 다른 사급 군병과 병급 군병 사이에서는 크게 상하 관계가 없는 덕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돌아오긴 했구나. 기대했던 만큼 무사했던 건 아니지만…….’
멀리 수평선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땅덩어리를 보며 석삼은 안도하였다.
11번 함과 명 누선의 돛줄이 얽히는 바람에 그것을 풀어내고, 그런 11번 함을 다른 배가 끌어서 오는 바람에 갈 때보다 절반의 속도로 느릿하게 오느라 7일이나 걸리긴 했지만, 제주의 함대는 제주에 다다르고 있었다.
* * *
수시중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해풍군(海豐郡)의 어느 저택에 들어서는 하륜의 뺨은 붉게 변해 있었다.
며칠째 예상강 수군기지에서, 늦겨울 날선 바닷바람을 맞기를 반복한 탓이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바다에서 소식이 오길 기다리다 돌아오니, 그의 안색이 어두운 것을 보면 그 날도 공을 친 모양이었다.
“이러다 이 집을 내 집처럼 여기게 될까 두렵구나.”
작은 문으로 사랑채 마당에 들어서자, 그곳에 이미 나와 있던 수시중이 나뭇잎 하나 없는 목련 나무를 바라본 채 그렇게 말을 던져 왔다.
하륜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으니, 그게 주도한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일단 들어가지.”
수시중 이인임이 먼저 사랑채 안으로 향하자, 하륜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일촉즉발의 고려 상황에서 영공의 세력이 더 큰 개경에 머물기 곤란하여 수시중 이인임과 몇몇 세가들이 경기 지역(수도 개경 근방을 의미)으로 거처를 옮겼으니, 벌써 한 달은 족히 된 일이었다.
사랑방에 들어온 수시중이 보료 위에 앉고, 하륜이 그의 건너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미 곽 장수를 만나 오늘도 명군이 도착하지 않은 것은 알고 있네.”
“그러셨습니까.”
하륜이 물으며 머릿속으로 예성강 기지에서 같이 명군을 애타게 기다리다 돌아간 명의 곽만이라는 장수를 떠올렸다.
그는 명 조정이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여 수시중을 돕기로 결정한 후에 하륜과 더불어 먼저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고려로 건너온 장수였다.
같이 오면서부터 상전인 양 위세를 부리던 자였는데, 명군이 오기로 약속한 기일을 길게는 닷새, 짧게는 사흘이나 넘은 지금, 그의 거드름은 신경질로 변하고 있었다.
오늘도 함께 예성강 수군기지에 있다가, 술을 퍼마시던 곽만이 기어이 분통을 터뜨리며 먼저 돌아갔으니, 만약 수시중이 그를 만났다면, 예를 갖춘 만남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네가 보기에 명군이 약속을 어겼다고 여기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천자는 물론 명의 승상마저 적극적으로 임한 일이니, 어찌 식언하려 하겠습니까.”
“하면, 명군이 오는 중에 풍랑을 만나 봉변을 당했다고 여기느냐?”
“명국이 가깝지는 않으나, 그사이 황해는 이곳과 같은 하늘 아래 있으니, 만약 황해에 거친 풍랑이 있었다면, 이곳에서 모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수시중과 하륜이 있는 해풍군은 개경의 서쪽 예성강 하구에 닿아 있었으니, 바다에 큰 풍랑이 있었다면 분명 모를 수가 없었다.
“하면, 명국에 따로 급작스런 사태가 있어, 군을 보내지 아니하였을까?”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으나, 만약 그랬다면 따로 소식을 전하려는 자가 왔을 것입니다.”
하륜이 담담히 수시중의 예상을 연이어 부정하자, 수시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마저도 아니라면, 대관절 명군이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남은 건 수전(水戰)이 있었을 가능성이 아니겠습니까.”
하륜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하니, 수시중의 이맛살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바다에서 과연 그 많은 명군을 도모할 자가 있겠느냐? 물경 여든 척이 넘는 큰 배를 몰아온다 하였는데, 그 무도한 왜구마저도 피해야 할 게 아닌가.”
“말씀대로 왜구는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근자에 이르러 왜구들이 남쪽에도 출몰하지 않고 있으니, 서쪽에서 갑자기 명군과 충돌했을 리는 없습니다.”
“내 생각 또한 그러하다. 한데, 어째 수전이 있었을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냐?”
“왜구보다 강대한 것은 물론, 무도한 면도 있는 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하륜의 되물음에 수시중이 그런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싶은 표정을 짓다가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제주현백을 말하는 게냐?”
“그렇습니다.”
“당치도 않다! 제주현백이 능력이 출중하다 하나, 제주는 작은 곳이다. 제주의 백성들을 모조리 배에 싣고 가서 싸워도 수가 밀릴 텐데, 어찌 명군을 쳐서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냐?”
수시중이 그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조차도 불쾌하다는 양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주 인구를 염두에 둔다면 당연한 반론이었다. 물론, 실제 늘어난 제주의 인구를 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나, 이미 제주현백이 화약을 능히 써서 왜구를 물리친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폭죽이 쓰임새가 좋은 무기라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느냐. 하나, 그 또한 상대가 어느 정도일 경우에야 통하는 법이다. 네가 제주에 가 보았으니 잘 알 것이다. 제주현백이 쓸 수 있는 배의 수는 많아야 마흔 척이고, 그중 대다수인 소선은 말할 것도 없고, 대선조차도 명의 누선에 비하면 어린아이와 같다 하니, 어찌 싸움이 될 수 있겠느냐.”
이미 고려에서도 폭죽을 만드느라 난리였다. 중란이 가시화되면서 각각의 세력이 싸움을 준비하는 중에 화약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고을마다 군병들이 돌아다니며 함토를 구하기 위해 난장을 피우고 있었고, 의원을 찾아다며 한 움큼의 유황마저 취하고 있어 백성들의 원성이 커지는 중이었다.
어쨌든 폭죽을 생산하면서 그 위력이 나쁘지 않음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중과부적의 적을 이길 수 있게 만들 리는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저는 이미 제주현백의 배에서 화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어 보였고, 시험 중에 크게 터져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 또한 목격한 바가 있으나, 그래도 화포는 화포이니, 혹시 제주현백이 기상천외하게 용병하였다면, 바다에서 별다른 무장을 갖추지 못했을 명군이 크게 곤경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그것이 명군이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못할 정도로 대패하게 만들 만큼 큰 곤경일 것이라 믿는 것이냐?”
“…….”
수시중의 물음에 하륜이 답하지 못했으니, 그건 그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화포의 위력은 하륜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분야였다. 화포가 천둥 소리를 일으키며 큰 쇳덩이나 돌덩이를 먼 곳까지 발사할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결과가 어떨지, 특히 수전에서 효용성이 있는지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제주현백을 통해 고려에 화약의 제조법이 알려지면서, 당시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도당에서 화포의 제조를 논한 바가 있긴 하지만, 이후 선왕이 죽고, 고려가 중란의 위기에 빠지면서 지금은 유야무야된 상태였다.
누구도 성공 여부와 그 위력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힘을 낭비할 화포 제조를 시도하지 않고 있었으니, 고려의 중란이 끝나기 전에는 화포 제조는 물 건너간 셈이었다.
하여, 하륜 또한 이론적으로만 이해하고, 위력을 짐작할 뿐, 실제로 그 효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니, 제주현백이 화포를 통해 명군을 크게 패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을 강하게 제시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주현백이 어찌 명군이 오는 것을 알았을 것이며, 안다 한들 감히 명군을 상대로 싸우려 하였겠느냐. 만약 그랬다면 이는 무모한 것을 넘어 미친 것이라 해야 맞다.”
수시중이 연이어 반론하니, 하륜은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내심 수시중이 명군에 조력을 청하는 것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기계(奇計)는 아니라고 여겼고, 만약 제주현백에게 바다에서 명군을 모조리 수장시킬 자신이 있었다면, 명군을 괴멸시킨 후 모른 척하면 그만이다 싶긴 했으나, 입 밖으로 낼 말은 아니었다.
하륜은 그쯤에서 명군이 오지 않는 이유를 캐내는 것을 멈추기로 하였다.
그것에 미련을 갖기에는 지금 고려의 상황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요동공이 군병 1만과 더불어 북계에 나와, 경흥후의 함주를 견제하고 있었으니, 요동의 북동에 나하추의 군병이 준동함에도 요동공 최영은 명군의 도착과 더불어 군사(軍事)를 함께하기 위해 몰래 군력 일부를 빼낸 상태였다.
물론, 그와 함께 영공과 경흥후의 움직임도 따랐으니, 마치 호저(豪豬 : 고슴도치처럼 가시털이 있는 쥐)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며 반격의 기세를 드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중에 만약 수시중이 명군을 청하였다가 얻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여러모로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명군을 청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미 천자가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여 나를 돕기로 하였으니, 천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명군은 새로 군병을 보내 줄 것이다.”
“저는 어려울 것이라 봅니다.”
하륜은 수시중의 낙관적인 예상을 부정하였으니, 이미 그가 명국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명국에서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는 것을 두고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거셀 때, 반대 측 주장의 기본은 지금 명국이 고려에 개입할 여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크게 호응을 받았었다.
실제로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도 신병 위주로 원군을 보내고, 그 비용 또한 귀족들이 따로 각출하기로 한 덕이었다.
당시 하륜의 입장에서는 명군이 수만 넉넉히 채워서 보내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기에 상관없었다.
명군이 조력한다는 것만으로도 아직 미적대는 고려 내의 세족들이 수시중의 편으로 기울 것이고, 영공 측에서 배신자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3만의 명군은 그것대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데, 만약 그렇게 보낸 3만의 명군이 홀연히 사라졌다면, 그것을 두고 명국이 어떤 감정을 표현할지는 몰라도, 추가로 군병을 보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짐작은 가능했다.
“어찌 대국이라 자신하고, 천하의 중심이라 목소리를 높인 명국이 고작 3만의 군병을 보내지 못한다는 겐가.”
“천하의 중심이라 하나, 북방의 원이 아직 강대하고, 사천과 그 서역에도 명국에 저항하는 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많은 군병을 가진 명국이나 그만큼 많은 적국을 가진 것을 잊으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륜의 말에 수시중의 수심이 더 깊어졌는데, 하륜은 이참에 그보다 더 큰 일마저 언급하였다.
“지금 수시중께서 크게 걱정하실 일은 명군이 올지 말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명군이 오지 않으면 중란이 길어질 것이고, 중란의 결과 또한 반드시 이로울 것이라 여길 수 없지만, 적어도 당장에 위기를 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 문제는 요동공입니다.”
“요동공? 어째서냐. 이미 요동공은 호인이 방해하는 것을 무릅쓰고 나를 도우려 고려에 나와 있지 않느냐.”
“만약 요동공이 수시중께서 명군을 청하며 제시한 대가가 요동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그가 어찌 반응하겠습니까?”
“……!”
“제가 명국을 떠날 때, 이미 응천부에 명군이 고려의 중란에 개입할 것이고, 그 대가로 요동을 회복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으니, 그 소문이 언제고 요동에도 닿지 않겠습니까.”
하륜의 말에 수시중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만약 요동공이 그 소문을 듣고 믿기라도 한다면, 수시중과 요동공 사이의 연대는 끊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저 같은 적을 가진 수준의 미약한 연대일 뿐, 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신돈과의 대치에 크게 부정적일 수밖에 없으니, 중란에 패배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 뻔했다.
“지금 제가 위태로운 마음을 품는 것은 단지 명군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오히려 요동공이 격분하여 신돈과 화의하고 우리를 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처백부,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올 가능성도 별로 없는 명군을 기다리는 것은 크게 망하는 길이니, 요동공이 소문을 듣기 전에 서둘러 군사를 도모하여 신돈과 충돌해야 합니다. 그래야 요동공이 후에 소문을 듣더라도 처백부와 잡은 손을 쉽게 놓지 못할 것입니다.”
“…….”
수시중 이인임은 하륜의 말이 일단락된 후에도 따로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안색이 창백해지고, 보료 자락을 뜯는 손끝이 떨릴 뿐이었다.
하륜은 대문을 나서며 다시 몸을 돌려 그 안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사실 전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온 백성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강대한 왕을 세울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
하륜이 몸을 돌리기 전에 중얼거린 말이었다.
* * *
몽주는 제주에 닿자마자, 강영이와 잠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다시 일해야 했다.
즉시 총무회의를 열었으니, 보름 가까이 제주를 떠난 사이에 쌓인 일을 서둘러 처리하고, 그가 황해에서 명군을 몰살시킨 일의 여파에 대해 논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을 논하기에 앞서, 놀라고 기겁하는 반응을 정돈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같이 명국으로 가지 않았던 대부분의 교리들은 현백이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돌아올 줄은 꿈에서도 몰랐으니까.
몽주 대신 홍길도 교리가 상황의 전후를 설명하여 사태의 전모를 이해시키고 난 후, 몽주가 회의석상에 던진 건 가장 단순한 문제였다.
“다들 이제 고려의 중란과 더불어 명국에서 어찌 나올지 말해 보게.”
몽주가 가늠한 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언제나 총무회의에서는 그의 생각이나 결론을 언급하기에 앞서 교리들의 생각을 묻곤 하였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몽주가 교리들을 육성하는 방법이었다.
당연히 선뜻 대답을 하는 이는 없었다.
한참이나 눈알이 구르고, 머리가 회전하는 소리 아닌 소리만 들리다가 이번에도 홍 교리가 먼저 말문을 열려 하였다.
“자네는 나중에 말하게. 자네는 이미 나와 논한 바가 있으니, 지금 자네가 생각을 말한다면, 자연히 나와 논한 것을 밝히게 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몽주가 교리들을 훑어보니, 다들 압박감에 헛기침만 하였다. 내심 홍 교리가 말문을 여는 것을 보고, 그에 동의하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현백이 그것을 막고 각자의 생각을 요구하니, 마치 시험을 받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래도 여러 번 묻고, 질문을 바꿔 하나씩 캐물으니, 슬슬 답하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하면, 명국은 분개하더라도 당장은 고려에 군병을 파병하지는 못하지 않겠습니까.”
몇몇의 의견이 나왔다가 서로 격파하고, 때로는 몽주에 의해 반박되면서 방향이 정리되어 가자, 상무교리 고신걸이 그리 말하였다.
그에 몽주가 다시 물었다.
“만약 명국이 당장 군병을 동원치 못한다면, 고려의 중란은 어찌 될 것 같은가.”
“……아무래도 당금의 상황이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수시중이 노리던 수가 사라졌으니 움직이기 어렵고, 영공 저하 측도 수시중의 움직임에 대응코자 한다면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고신걸이 조심스레 답하니, 몇몇 교리들이 동의하는 양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나, 그 와중에 재무교리 점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소녀의 생각에 관건은 요동에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오호, 요동?”
“그렇습니다. 이미 명국의 수도 부근에 요동을 대가로 명군이 고려의 중란에게 개입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니, 그 소문은 언제고, 아마 그리 오래 되지 않아 요동에 닿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요동공과 수시중 사이에 갈등이 크게 빚어질 터, 영공과 경흥후가 그것을 알아차린다면 그 틈을 노리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네 생각에 일리가 있구나.”
몽주가 점녀의 생각에 손을 들어 주자, 교리들 중에서 성급하게 질문이 나왔으니, 범무교리 중 하나인 차현유라는 자였다.
“그러면 이제 고려의 중란이 종결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입니까?”
걸걸한 목소리의 차 교리가 묻자, 다들 정말 그렇게 되느냐는 표정으로 몽주를 주시하였다.
하나, 몽주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되물을 뿐이었다.
“자신이 토사구팽당할 뻔하였음을 안다면, 최영 장군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분명 격분하여 이인임을 치려 하거나 신돈과 손을 잡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몽주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차현유라는 자가 그의 성격에 걸맞은 예상을 하고 있다 싶었던 것이다.
그는 본디 역사에서 목호의 난 이후, 혼란한 제주 상황에서 마적(馬賊)의 우두머리가 되어 난장을 피운 자였다.
한데, 지금은 오히려 교리에 임하고 있었는데, 이는 몽주의 명에 따라 제주에 여러 일이 진행되면서 자연히 백성들 앞에 나서 일을 이끄는 자가 생겼고, 그중 눈에 띠는 자가 바로 차현유였기 때문이다.
마적의 우두머리가 될 법했던 성품과 능력이 나름 좋은 방향으로 드러난 경우라고 평할 만했다.
“영공과 경흥후의 연대가 경흥후에게 요동을 주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졌음을 안다면, 요동공 또한 그리 쉽게 수시중과 손을 놓기 어렵지 않겠나.”
“아…….”
몽주가 하나를 지적하니, 차 교리가 큰 손으로 자기 머리통을 퉁퉁 치면서 생각이 짧았던 벌을 자진하였다.
“때문에 향후 고려의 중란이 반드시 어찌 돌아간다 예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저 명국의 개입으로 단시간에 고려의 중란이 결판이 나는 것만 피했을 뿐이지. 이쯤에서 내 밝히니, 나는 고려의 중란이 빠르게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몽주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 자도 있었고, 예상했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현백이 영공과 친한 것에 중점을 둔 자들은 놀랐고, 그럼에도 현백이 영공을 열심히 돕는 건 아니라는 점에 착안한 자들은 예상했던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다들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야.”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넘어가려는 참에 다시 차 교리가 다급히 말문을 열어 소리치듯 말하였다.
“호, 혹시! 현백께서는 따로 독립하시려 하십니까?!”
“…….”
그 말에 다들 경기하여 차 교리를 바라보니, 차 교리가 자기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은 표정을 지었다.
몽주는 실소하면서도, 그가 그래도 머리를 굴려 몽주가 고려의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려 함을 이해한 것에 대견하다 싶었다.
“차 교리는 말을 중히 여길 필요가 있겠군. 세상이 하수선하여 미래의 일을 단정할 수 없으니, 크게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은 조심하게.”
“네…… 송구합니다!”
다시 총무회의가 진행되는데, 마무리가 될 무렵에 화극이 포은의 처분에 대해 물었다.
“나더러 그를 맡으라 하였는데, 나로서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구먼. 내가 하는 일에 유자가 쓰일 곳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맡긴 것이죠.”
“에…… 하면…….”
화극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니, 몽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화극 어른께 포은을 맡기면서 일을 시키라 한 것은 그의 장기를 살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경전은 한 줄도 읽지 못하게 하십시오. 몸이 크게 고단하면 공맹을 입에 올리지도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포은 영감인데…….”
“유자일 때나 포은 영감이지, 쇳물과 망치 앞에서는 일개 일꾼일 뿐입니다.”
화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작게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가.’라고 중얼거렸다.
몽주도 딱히 노림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유자에게 경전 외의 세상을, 그것도 그가 상상하지 못했던 세상을 보여 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다만, 그 전에는 그것을 강요할 수 없었는데, 이제 포은을 제주에 억류하게 되었기에 한번 실험해 보고자 한 것이었다.
포은의 이야기가 나와, 총무회의는 잠시 더 이어졌다. 경흥후에게 무어라 연락을 할지 그 내용을 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포은을 제주에 묶어 두는 것에 대한 핑계를 짓는 것과 동시에, 명군을 몰살한 것을 사실대로 밝히기는 어려우니, 이를 어찌 포장해야 할지도 정해야 했던 것이다.
(전략)……이에, 크게 놀라 포은과 어찌해야 할지를 논하였는데, 포은이 위험을 무릅쓰고 천자 앞에 나아가 명군의 회군을 설득하겠노라 말하였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포은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일을 선뜻 정하지 못하여 며칠을 두고 고민하였는데, 문득 명국에 소문이 돌 길, 고려를 향해 출병한 명군이 고려에 닿지 못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다시 며칠을 두고 살피니, 명군이 명국으로 돌아온 것도 아닌 바, 만약 명군이 고려에 도착하지 못하였다면, 바다 중에서 봉변을 당하여 모두 수장된 건 아닌가 추측할 따름입니다.
……(중략)……
오는 중에 포은에게 병이 생겨 거동하지 못하니, 긴 항해로 인해 지치고, 명국에서 긴장함이 커서 몸이 이겨 내지 못한 듯합니다. 지금 제주에서 요양하고자 하니, 포은이 함주로 돌아가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영공과 경흥후가 명국의 사정과 제주의 움직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여 변명하고, 포은을 칭병하여 제주에 묶어 둔 서찰이 막 선편으로 제주를 출발하였을 무렵, 고려의 중란에 큰 전기가 있었다.
수시중이 그의 사병과 세족들의 사병, 그리고 요동군의 군병을 몰아 일제히 개경을 침탈하여 왕성의 담마저 넘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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