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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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천부가 발칵 뒤집힌 것은 고려에서 선편으로 경력사(經歷司 : 종5품 무관 실무직) 곽만의 서찰이 전해진 후였다.
그 서찰은 명군이 시일이 지났음에도 고려에 닿지 않음을 알리며, 그에 대한 연유와 향후 그의 처신에 대한 질의가 담겨 있었다.
당연히 명군이 이미 고려에 닿았을 것이고, 군사에 임했을 것이라 여겼던 명 조정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 황당함은 이내 난리로 변하였으니, 천자가 발연대로하여 신하들을 닥달하였던 것이다.
당장 고려로 출병한 명군의 행방을 찾으라 하고, 만약 명군이 사라졌다면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내라 하며, 그러지 못하면 책임자를 반드시 처벌할 것이라 엄명하니, 안 그래도 서슬퍼런 천자가 두려웠던 명의 신하들은 분주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 열심히 움직인다고 해서 사라진 명군이 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었고, 명의 관리들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황해를 건너는 사이에 명군만 홀로 폭풍을 만났을 리도 없고, 설령 무슨 사고가 있었다 하더라도 80여 척으로 이뤄진 명군의 함대에서 단 한 척도 명국이나 고려에 닿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도저히 자연재해나 사고로 명군이 행방불명된 건 아니라는 확신이 서자, 조정의 추정은 명군이 도해(渡海) 중 습격을 당해 전몰한 것이 아니냐는 것에 닿았다.
물론, 80여 척의 대형 누선으로 이뤄진 함대를 누가 감히 공격하고, 또 단 한 척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시간이 며칠 흐르면서, 명군의 행방불명이라는 사건이 점점 정치적인 것으로 변해 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건의 전모를 모르는 사이에 큰 피해만이 남았으니, 그 책임을 가릴 일만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명군이 고려의 중란에 개입한 배경에 정치적인 노림수가 깔려 있었으니, 명군이 고려에 닿지도 못하고 사라진 결과 또한 정치적으로 파급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 파급력의 방향은 회서파였다.
공식적으로 3만의 군병으로 이뤄진 군대를 잃었다는 건 그 군을 이끈 장수의 목이 날아갈 일이었는데, 지금 그 장수라 할 수 있는 효유용조차 생사가 불분명했으므로 대신 책임을 질 자는 그를 추천하여 군을 맡긴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회서파의 지원으로 호유용이 명군을 이끈 상황이었으니, 회서파가 그 책임을 져야 했고, 그중에서도 그 천거를 대표한 승상 이선장에게로 그 책임이 쏠린 것이다.
그 또한 천자가 그것을 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승상이 은퇴할 시기가 되었고, 고려의 일이 끝나는 대로 물러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알려진 만큼, 만약 승상의 은퇴 정도로만 일이 마무리된다면 회서파의 입장에서 나쁠 건 없었다.
하나, 이는 문자 그대로 ‘은퇴’일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탄핵(彈劾)의 경우에는 달랐다.
다음 승상을 천거해야 할 이선장이 맥없이 물러나니, 자연히 회서파에서 다음 승상직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게 사라졌다.
실제로 이선장이 물러나면서 천자와 대면하였지만, 다음 승상에 대해서는 일절 말문을 열 수 없었고, 천자는 후임 승상을 임명하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리고 후에 승상이라는 직위 자체를 폐하였으니, 천자가 직접 육부(六部)를 지휘하는 체제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의 이야기였고, 당장은 이선장이 해임의 형태로 물러난 것으로 책임 추궁이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명군 3개 위가 사라진 것을 두고 떨어진 명국의 위신을 어찌 세워야 할지 그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기 시작했다.
하나, 그 논란은 끝까지 이어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명군이 사라진 것에 대해 고려에도 책임이 있음을 들먹이는 자들조차 고려에 압박할 여유가 지금의 명국에는 없음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3개 위에 달하는 명군을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기 위해 출병시킨 것조차 무리였다는 것이 도당의 중론이었는데, 이제 회서파에서 그 비용을 감당할 것도 아닌 상황에서 안 그래도 부족해진 군력을 섣부르게 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천자는 명군이 실종된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조사할 것을 명하되, 실질적인 처분은 없는 식으로 일을 유야무야 마무리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그럼에도 엄연히 공식적으로는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게 한 것은 그대로 피해를 감수하기에는 천자와 명국의 위신에 상처가 남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사안을 질질 끌며 나중을 기약하기로 한 것이었다.
“태자 전하,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후에 천자께서 이를 아시면, 크게 경을 치실 것이옵니다.”
소태감이 안절부절못하며 태자 주표에게 고하였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를 천자께 고하면, 오히려 천자께서 곤란해지실 것이오. 게다가 확실한 증좌라고도 할 수 없지 않소.”
“그래도 태자 전하께서 관리들의 입을 막으셨다는 걸 천자께서 아신다면…….”
“그들이 입을 다문다면 아무런 일도 없을 것이오. 이 몸이 태자인 것을 두고 저들도 저울질을 한 결과, 입을 다물기로 하였을 터이니, 쉽게 입을 열지는 않을 것이지 않겠소.”
소태감을 걱정하게 만든 일이자, 태자가 작정한 일은 남직례의 몇몇 관리들이 올린 장계를 그의 선에서 자른 것과 동시에 그 관리들을 따로 불러 그 장계의 내용에 관해 함구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 장계에는 대한(大寒)쯤 남직례에 속한 세 곳의 포구에 고려의 상인들이 각각 방문했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고려의 상인들이 명국에 들린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훗날의 명국과 달리 당대의 명국은 아직 사무역을 강하게 억압하지는 않고 있었으니,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삼 일 동안 세 곳의 포구에 각각 다른 고려의 상인들이 들러, 별다른 거래도 없이 물러난 것 자체는 분명 눈에 띄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태자 주표가 주목한 것은 그 세 고려 상인들이 타고 온 선박이 고려의 선박과는 사뭇 다른 생김새에 크기도 훨씬 컸다는 점이었고, 그중 한 포구에서 그 상인들이 객점에서 수문장과 어울려 술을 나누다가 고려의 제주라는 곳에서 왔다는 말을 흘린 점이었다.
태자는 직관적으로 어쩌면 이번 사건에 석몽린이 개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가 고려 비노와 고려 선로는 물론, 근자에 소량 들어온 백묵과 흑판을 만든 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남달라 보였다는 선박 또한 석몽린이 건조한 것이라는 추정에 닿은 것이었다.
물론, 이를 두고 석몽린이 명군을 공격하여 전몰시켰다는 결론으로 잇기에는 수많은 억측이 필요할 것이다.
하나, 지금 명국의 입장에서는 그런 억측이라도 필요했으니, 만약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진다면, 분명 고려에 혐의를 두려 할 것이 분명했다.
태자가 그것을 방지하고자 한 이유는 그가 석몽린에게 친근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크게 감탄하고,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상대라도, 명군 3개 위를 몰살시킨 자라면 명의 태자로서 원수라 칭해야 마땅했다.
하나, 단지 고려의 상인들이 등장했다는 것으로 증좌를 삼기에는 부족한 데다가, 그 일로 말미암아 고려의 죄를 추궁해야 한다는 조정의 여론이 들불같이 일어난다면, 천자께서 크게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천자께서는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는 형식으로 회서파를 억누르고자 하였고, 비록 명군 3만이 실종되는 피해가 발생하였으나, 그 뜻을 거의 이룬 셈인데, 지금 다시 고려에 대한 혐의가 두드러질 경우, 천자의 위신 때문이라도 다시 군을 일으켜 고려를 압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결코 천자께서 바라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태자는 미리 손을 써 그 사실을 봉인한 것이었다.
태자 주표는 소태감을 타일러 보낸 후 홀로 태자전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 생각의 대부분은 명군이 사라진 사건에 대한 것이었으니, 자연히 석몽린에 대해서도 생각이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진정 그리했을까? 고작 섬 하나를 다스리면서 80여 척의 누선을 전몰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아무리 생각해도 부정적이었다.
그가 석몽린을 높이 사고 있기는 하나,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그 가능성을 아주 무시하지는 않았는데, 뭍에서 일당백의 싸움이 없지 않은 것처럼 물 위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석몽린이 명군을 치는 결심을 감행했을지에 대한 가능성까지 따져 보면, 그가 명군을 쳐서 전몰시켰을 확률은 더더욱 낮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든 혐의에 불과하든, 태자는 오늘의 일을 머릿속에 담아 두려 하였다.
“언제고 이를 두고 쓸 일이 있겠지. 이 나라가 진정으로 천하의 중심이 된다면, 오늘의 이 일을 다시 꺼내 들 수 있을 것이야.”
요동을 당장 회복하긴 어려워졌지만, 원의 장수 나하추를 투항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만약 그를 회유하는 데 성공하고, 원을 더욱 몰아 북방으로 완전히 쫓아낸다면, 천자든 태자든 명군 3개 위가 사라진 것을 두고 고려에 책임을 추궁할 날이 올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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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래쉬가드는 누가 발명한 거야. 현대 문명 최악의 발명품이잖아.”
“내 말이…… 흠흠.”
현대에서 건조한 범선 ‘양진이’의 호위함(?), 즉 ‘어미새’라 명명된 ‘Mangusta-165H’에서 재상이 투덜대고, 두신이 그에 얼결에 동조하다가 헛기침하였다.
몽주도 말은 안 했지만, 재산의 투덜거림에 일리가 있다 여겼다.
어째서 여성들이 비키니 대신 전부 래쉬가드를 입었단 말인가.
몇 번의 시험 운행을 거쳐, 양진이의 기초적인 항해 기능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후, 몽주는 본격적인 원양 항해를 시도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그 전에 그간 수고한 몽린 재단의 직원들과 바당보름 회원들을 위해 크게 한 턱 내기로 하였는데, 바로 어미새에서 휴양 파티를 즐기기로 한 것이었다.
2박 3일간 남해안을 돌면서 선상 파티를 즐기며 나름 기대했던 것은 바로 비키니였다.
바당보름은 물론, 몽린 재단의 직원들도 대부분 젊은이들이었고, 도합하여 여성들도 30퍼센트쯤 되니, 여름철 해안에서의 휴양에 그들이 입을 비키니를 기대하는 건 남자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 가장 기대한 것은 황진주와 방지영이었다. 황진주야 워낙에 쭉쭉빵빵한 수퍼 모델 같은 몸매로 유명했고, 방지영도 상당한 미녀라서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하나, 두 사람을 포함한 여성들 모두가 래쉬가드를 입었으니, 남성들이 다들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이 호화 요트에 딸린 풀(pool)을 보고 가지는 로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아, 래쉬가드는 저 자식이나 입지…….”
문득 재상이 한 번 더 투덜거려서 그의 시선이 향한 쪽을 보니, 삼각 팬티 수영복만 입은 강지혁이 있었다.
복근이 선명한 멋진 몸매를 가진 그가 비치 체어에 누우니, 순식간에 주변에 여성들이 득실거리기 시작했다.
“달덩이 같은 배를 하고 그런 말을 하면 질투한다는 소리밖에 못 들어요.”
몽주가 피식 웃으며 말하니, 재상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변명하며 양손으로 배를 가렸다. 어차피 티셔츠를 입고 있어 가려진 상태였음에도 그러는 걸 보면 찔리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두신 씨도 벗으면 폼이 좀 날 것 같은데, 왜 여기 계세요?”
이어 몽주가 재상 곁의 두신을 보며 물었다.
언제나 터질 것 같은 근육을 자랑하는 그였음에도, 지금은 막상 재상과 더불어 선내 라운지에 앉아만 있었다.
“마누라가 밖에서 웃통도 벗지 말라고 해서요.”
“에? 바다에서도요?”
“정확히 말하면 여자 있는 데서는요.”
“……공처가셨어요?”
“애처가로 하죠.”
뭔가 덩치와 안 어울리는 면을 점점 많이 본다 싶을 때, 문득 까르르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 일어나서 보니, 강지혁이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막상 바다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영락없는 개헤엄이었던 것이다.
“아, 저 자식이 못하는 것도 있었네. 하하, 수영은 내가 더 잘…….”
재상이 속시원하다는 양 낄낄 대며 웃는데, 강지혁이 갑자기 자세를 바꿔 멋지게 자유형으로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잘 하는데요. 수영 선수 출신인가 싶을 정도로요.”
“에이씨.”
재상은 짜증을 내며 도로 라운지 의자에 앉았고, 몽주는 잠시 더 강지혁이 바다 위에서 수영하는 걸 보았다. 아니, 강지혁을 본다기보다는 그가 수영하는 걸 구경하는 여자들을 훑어보았다.
그중에 황진주가 없는 걸 확인한 몽주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까 강지혁에게 몰려간 여자들 중에도 황진주는 없었다.
몽주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무 관계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마음에 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환호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황진주는 어디 있나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어디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풀가에 앉아 발장구를 치며 햇볕을 쬐고 있었는데…….
“뭘 그리 두리번거리고 있어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잠자리 선글라스를 쓴 황진주가 어느새 곁에 와 있었다.
“아, 뭐 다들 잘 놀고 있나 싶어서요.”
“피이, 여기서 제일 못 노는 사람들이 이사장님하고 저기 저 선배들이거든요?”
진주가 각자 아이스티를 홀짝이고 있는 재상과 두신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근데요,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 저 선배들하고 몽주 씨는 대체 뭐하는 거예요? 듣자 하니,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만난다고 하던데.”
“……뭐랄까, 건설적인 미래를 구상하죠.”
몽주의 애매한 대답에 진주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건설적인 미래요? 사업 구상이라도 하세요?”
“그것보다 훨씬 큰 구상이죠.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네에, 대단들 하시네요. 기대해 볼게요.”
“진짠데…….”
“예예.”
피식.
몽주도 더는 말없이 웃었다. 누구에게 밝힐 일도 아니었고, 밝힌다고 해서 믿어 줄 이야기도 아니었다.
“저는 이 세상 바다 끝까지 가 볼 겁니다. 양진이를 타고요. 뭐, 나중에는 더 큰 범선으로 갈아타기야 하겠지만요.”
몽주가 진주 쪽을 바라보되, 정확히는 그녀 뒤쪽 창으로 보이는 수평선에 시선을 두며 말하자, 그녀도 같은 쪽을 보며 물었다.
“왜죠?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사실 지금 하려는 일은 단지 취미 삼아 할 만한 일은 아니잖아요?”
“바다에서는 제가 강해지는 기분이거든요. 정말 왕이 된 기분 같다고나 할까요. 누구도 밟지 못한 바다까지 가 볼 겁니다.”
진주가 몽주에게 시선을 돌리곤 선글라스를 내려 맨눈으로 새삼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아직 인간이 닿지 못한 바다가 있을까요? 한국인으로 한정해도 없을 것 같은데요.”
“아뇨, 저한테는 있어요. 하하.”
천몽이 이어질수록 몽주는 고려의 자신과 현대의 자신을 구분해야 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하나, 기분 자체가 영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80여 척으로 이뤄진 명의 함대를 무너뜨리고 돌아온 현대에서 몽주의 마음만큼은 이미 바다의 왕이었다.
* * *
왕성에 불이 나, 지키는 자들은 물론이고 침범한 자들마저 황망하여 크게 당황하였던 그 시간, 하륜은 산중에 있었다.
“헉헉!”
그의 발걸음이 크게 무거워진 지는 이미 한참이 지났다. 숨이 가쁘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기도 했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기 위해 평지에서도 달려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그로서는 지금 산속을 달리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게다가 등에는 10살 먹은 사내아이도 업혀 있었으니, 배로 힘들었다.
그럼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것은 한 번 쉬면 다시는 발을 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혹여 추적하는 자들이 있어, 그들이 몰려오기 전에 더 먼 곳으로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필사적인 이유와 더불어 한 가지 이유를 더 꼽자면, 하륜의 머릿속에 연신 울리는 승려의 말 때문이었다.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시는 것이오? 모셔야 할 왕께 대적하고 있지 않소?!”
“무학…….”
한낱 중 따위의 훈계가 계속 머릿속에서 감도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지만, 사실인 것을 사실이 아니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륜이 발걸음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궁극의 이유는 왕에게 가기 위함이었다.
“……목이 마르구나.”
등 뒤에서 사내아이가 칭얼댔다. 말투는 궁중의 그것이었으나, 하륜에게는 한낱 칭얼거림으로 들릴 뿐이었다.
하기야 처음 업힐 때처럼 반항하기에는 아이도 이미 지쳤을 것이다.
“참으…… 십시오.”
‘참아라.’라고 가벼이 대꾸하려던 것을 겨우 돌려 존대하였다.
말을 하며 등 뒤의 존재를 인식하니, 하륜은 문득 힘든 와중에도 실소를 머금었다.
왕을 업고 왕에게 가고 있는 자신 때문이었다.
물론, 등 뒤의 어린아이는 하륜에게는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선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마저 붙은 힘없는 왕은 그에게 왕이 될 수 없었으니, 등 뒤의 사내아이는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하륜이 바라는 왕은 나라의 모든 힘을 한 손에 움켜쥐고 진정으로 군림하는, 그 어떤 세도가도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인 권위의 소유자였으니, 아직 고려에는 존재하지 않는 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마음가짐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 처음 처백부를 도와 그를 왕으로 만들 작정을 한 것이 그러했다.
진정으로 강대한 왕을 섬기는 길은 작금의 왕씨 왕조를 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왕씨 왕조는 힘을 다하였으니, 새롭게 고려를 움켜쥔 강대한 권력자가 왕이 된다면, 그를 통해 절대적인 왕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나, 처백부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명국의 조력을 얻어 고려를 일통하고, 동업자이나 경쟁자이기도 한 요동공마저 폐하려 했던 계획은 고려로 오던 명군이 바다에서 사라진 것과 더불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이제 요동공 또한 그가 토사구팽당할 뻔했음을 알게 될 것이니, 처백부의 앞날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하륜 또한 겉으로는 아닐지언정 속으로 크게 낙심하였다.
고려를 일통한 후, 명국에서 직접 확인한 그들의 부족한 틈을 노려 명국의 영향력까지 배제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마저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문득 찾아온 중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울렸다.
네가 따라야 할 왕이 따로 있다는 말.
이미 썩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창창한 나라를 일으켜 세울 국조(國祖)가 이미 있다는 말은, 평소 승려의 말 따위는 귀에 담지도 않았던 그마저 혹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니, 절대 혹하지 않았다.
그저 무학이 말하는 그 왕이 경흥후 이성계임을 깨달았을 때, 경흥후가 자신이 꿈꾸던 왕일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했을 뿐이었다.
백성들의 칭송과 경외를 한 몸에 받는 무적의 장군이 지금의 중란을 통해 심양왕이 될 것이라 하니, 그것을 이룬다면, 고려땅의 왕 또한 되지 못할 리 없을 것 아니겠는가.
하륜은 자신이 그를 돕는다면 더욱 확실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만약 스스로의 가능성을 억누르고 있다면, 그것을 풀어 야망을 가지게 만들 것이며, 지금 고려를 양분하고 있고, 중란 후에 고려를 쥐게 될 영공 신돈 따위는 일거에 무너뜨릴 것이다.
“흐흐…… 흐하하하!”
가파른 계곡을 내려가며 흙이 튀어 옷이 엉망진창이 되는 가운데 하륜이 대소하였다.
그는 경흥후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리 없다고 여겼다. 절대적인 왕권을 손에 쥐는 것을 거부할 자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잠시 동안이라도 대화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에게 새로운 야심을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적이었던 자신에게 대화의 기회를 줄 것이냐는 것이지만, 하륜은 그것 또한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 등 뒤에 쓸모없는 생명을 매달고 가는 것 아니겠는가.
“왕우야, 진정한 왕께서 높이 서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냐! 하하하!”
비례(非禮)를 접한, 등 뒤에서 어린 것이 분기에 주먹을 움켜쥐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래서 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작 한 사람의 무도한 언사마저 막지 못하는 왕이 어찌 왕이겠는가.
비소가 가득한 얼굴을 한 하륜은 다시 힘을 내어 발걸음을 옮겼다.
이 산 아래 말을 준비해 둔 심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진정한 왕에게 헌신할 시간이 더욱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 * *
요동공 최영이 개경의 북쪽을 공격하여 영공과 경흥후의 시선을 빼앗은 사이, 개경에 세도(勢道)가 남아 있는 덕에 미리 잠입할 수 있었던 수시중과 세족들의 사병이 일제히 왕성을 침범하였으니, 월담하는 자들을 이끌었던 하륜은 침전(寢殿)마저 가장 먼저 범하였다.
궁을 지켜야 할 용호군이 오히려 침범한 자들을 안내하였으니, 힘없는 내관과 궁녀만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중란지경에 저마다 연줄을 찾아 흩어진 터라, 얼마 남지 않은 용호군(龍虎軍) 중에 금은으로 유혹하여 배신하게 할 자들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정작 침전에 들어가 왕의 신변을 확보하였을 때부터 하륜은 그가 처백부 이인임에게 밝힌 계획과는 달리 움직였다.
매수한 용호군으로 하여금 그의 사병마저 처리하게 만들고, 침전을 비롯한 궁의 여러 곳에 불을 지른 후, 그들마저 따로 도주하였으니, 오직 홀로 왕을 끌고 움직인 것이었다.
난리 중에 생긴 여러 시신들이 한꺼번에 불탔으니, 후에 당도할 이들은 왕이 화마에 당하였다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애초에 수시중과 요동공이 무리하여 개경을 급습한 것은 왕을 수중에 넣고자 함이었는데, 하륜의 배신으로 인해 힘겹게 싸운 것이 무위로 돌아간 셈이었다.
이제 수시중과 요동공이 얻을 건 왕을 시해하였다는, 억울한 누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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