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50)
* * *
“아무래도 우선순위를 정해야겠군.”
눈을 감은 채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표정으로 몽주가 말하니, 총무회의에 임한 교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는 한없이 평화로웠으나, 제주가 한 발씩 걸쳐 놓은 곳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문제에 개입하여 해결할 역량이 제주에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으니, 선택과 포기의 과정을 통해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할 목표를 정해야 했다.
“아무래도 고려를 일단 두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하군. 그렇지 않은가?”
다시 몽주가 말하니, 이번에도 교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단지 현백의 말씀이라서 무조건 응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고려의 중란은 적어도 최악의 경우인 수시중 측이 승리하여 고려를 손에 넣는 것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 다들 동의하였던 것이다.
비록 최선이랄 수 있는 중란의 장기화는 이루기 어려울지언정, 차선이자 차악인 고려를 영공이 쥐고, 그 북방을 심양왕으로서 이성계가 다스릴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경우, 영공이 여유로워져 제주에 간섭할 수도 있겠지만, 수시중이 중란에서 이겼을 때에 비하면, 당장 크게 위태롭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총무회의의 주된 안건은 왜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다들 알다시피, 쇼니씨의 가독 후유스케는 규슈탄다이 료슌을 제거하고자 하오. 그는 나와 연합하여 그 일을 도모하길 바라고, 그 후 규슈의 북부 삼국을 쇼니씨가, 그 이하를 내가 장악하자는 제안을 하였소. 비록 북규슈 삼국이 규슈의 알토란이라고는 하나, 그 제안 자체는 그리 나쁘진 않소. 산이 많고 들이 적다곤 하지만, 비율적으로 그렇다 할 뿐, 실제 전체 넓이를 따지면 규슈의 중부와 남부의 평야가 더 넓을 것이오. 물론, 인구도 조금은 더 많은 듯하고. 만약 쇼니씨와 협상하여 일기도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비록 북규슈 삼국을 쇼니씨가 다스린다고 해도 실상 규슈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오.”
몽주가 쇼니씨와의 일이 잘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점에 대해 논하였으나, 교리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신중히 속으로 저울질을 하고 있거나,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오히려 그 이점에 혹하여 찬성하는 반응은 없었다.
이는 쇼니씨와 더불어 료슌을 제거하는 일 자체의 어려움과 그 이후 일어날 여파를 이겨 내는 것이 절대 쉬울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몽주는 그런 교리들의 반응을 보며 실소를 머금곤 다시 말을 이었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다들 이번 일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는 이는 없는 것 같군.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라오. 쇼니씨가 료슌을 제거하고, 다자이후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는 것도 어렵지만,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당장 오우치씨가 반발할 것임이 틀림없소. 특히 료슌과 손을 잡으면서 규슈 중부에 히고국을 얻은 오우치씨의 입장에서는 쇼니씨의 반란을 허하는 건 히고국을 잃을 수도 있는 위협이기 때문이오. 반대로 생각하자면, 오우치씨가 그 기회에 막부를 등에 업고 쇼니씨를 쳐서 북규슈에 발을 디디려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만약 운이 따라 억지로 오우치씨를 눌러 둘 수 있다고 해도, 규슈의 막부 세력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을 막부의 칸레이(관령)가 두고 볼 리도 없소. 무리를 해서라도 군력을 파견할 것이 틀림없으니, 그때는 오우치씨도 분명 개입하려 할 것이오. 이는 선후가 다를 뿐, 결국 막부와 오우치씨의 공격을 받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오.”
몽주는 잠시 말을 멈추곤 규슈 일대가 대략 그려진 지도를 펼치게 하였다.
큰 탁자 위에 규슈의 지도가 펼쳐지니, 몽주가 축후국부터 짚었다.
“축후국이 북규슈 삼국 아래에 있고, 동쪽으로 오토모씨의 분고국과 닿아 있으며, 아래로는 오우치씨가 점하고 있는 히고국과 닿아 있소. 결국 막부와 오우치씨의 공격을 받을 경우 축후국은 즉각 전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소. 이때, 규슈 남부의 시마즈씨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전란의 향방은 크게 달라질 것이오. 여전히 남조를 따르는 시마즈씨와 오토모씨가 그 기회에 남조 세력을 크게 키우겠노라 마음먹는다면, 오우치씨의 히고국을 칠 것이고, 만약 막부에 귀순하거나 오토모씨의 복수를 노린다면 축후국을 칠 것이오. 전자라면 한숨을 돌릴 만하겠으나, 후자라면 축후국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할 것이오.”
거기까지 설명에 가까운 발언을 잇던 몽주가 교리들을 훑어보며 말을 마무리하였다.
“지금 축후국의 다의홍은 시마즈씨가 축후국을 침탈할까 걱정이 크지만, 내가 유심히 살피니, 적어도 상황의 변화가 있기 전에 시마즈씨가 단독으로, 혹은 오토모씨와 연합하여 축후국을 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오. 축후국이 시마즈씨나 오토모씨의 것이 된다 하더라도, 료슌이 그것을 두고 볼 리 없으니, 그것을 모르지 않을 시마즈나 오토모씨도 어리석은 짓을 하진 않을 것이오. 결국 시마즈씨의 움직임도 쇼니씨가 료슌을 도모하는 일, 혹은 료슌의 의도와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자, 상황이 대략 이러하니, 여러 교리들의 생각이 궁금하군. 쇼니씨의 제안에 응할지 말지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 고립된 축후국의 상황을 타도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 우리 제주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기탄없이 해 보시오.”
“…….”
몽주가 멍석을 깔아 주었지만, 당연히 선뜻 말문을 여는 교리는 없었다. 그건 현백의 앞이라서 말문을 열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할 것이 많고 복잡한 상황을 풀 실마리를 궁리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한참이나 지나, 상무교리 고신걸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지금의 논의는 사실 현백께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해법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규슈에 영토를 얻어 지배하는 것에 뜻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규슈에서 물러나 료슌을 통해 교역의 이익을 노리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물론, 쇼니씨의 제안은 거절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 다른 생각을 품고 계시다면, 먼저 그에 대해 말씀을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옳은 말이었기에 몽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여 말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규슈를 원하오.”
“……?!”
몽주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니, 교리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이었다.
규슈의 영토를 원한다는 것으로 해석한 자들은 그렇구나 싶은 표정이었고, 남규슈나 북규슈를 제외한 규슈라고 지칭하지 않고, 규슈라고 통칭한 것에 주의한 자들은 현백의 진짜 속내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 규슈 전체를 원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고신걸이 놀란 표정으로 되짚어 물으니, 몽주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점을 짚지 못하였던 교리들마저 다들 놀란 표정을 지어야 했다.
“하, 하나, 현백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로, 규슈의 넓이는 고려 경상도의 넓이를 능가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제주가 크게 성장하고 있다곤 하나, 어찌 규슈 전체를 노릴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당장 축후국을 지키는 것도 가능할지 의문스러웠으니, 교리들은 다들 현백이 너무 무리한 욕심을 품고 있다 여겼다.
“처음부터 한 번에 규슈를 도모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오. 차근차근 진행해야 할 일이지. 하나, 장기적으로는 가능한 일이라 여기는 바이고, 사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일이기도 하오.”
“어째서 그렇습니까?”
물은 건 홍 교리였다. 그리고 그건 모든 교리들의 물음이기도 했다.
규슈를 얻었을 때 생길 이점은 그리 어렵지 않게 여러 가지를 언급할 수 있었다.
하나, 그중에서도 단지 상품을 가지고 시장에 진출하거나, 규슈의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얻을 수 있는 이점과의 교집합을 제외하면, 결국 주된 이점은 바로 인력이었다.
유아 사망률 하락과 유랑민 유입 등으로 제주의 인구가 많이 늘어, 어느덧 8만에 가까워졌음에도 인구가 아닌 인력의 관점으로 보자면 소폭 증가한 정도였으니, 부족한 인력은 몽주가 하고자 하는 일에 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당대 왜국의 인구는 대략 1,200만인데, 이중 규슈의 인구는 150만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었으므로, 만약 규슈를 얻고, 세력화하는 것에 어느 정도 성공한다면, 그 후에는 인력난이 크게 해소될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규슈를 얻는다면, 왜국과 크게 갈등하게 될 것이 분명했으니, 군병이 더욱 필요할 것이고, 늘어난 영토와 인구의 크기만큼 현상 유지에 투입해야 할 인력 또한 몇 배로 늘어나겠지만, ‘규모의 경제’에 입각하여 운영한다면 따로 여유로이 쓸 수 있는 인력은 크게 늘어날 것이다.
몽주가 교리들에게 이를 말하니, 곧바로 몽주의 의도를 이해하고 동의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홍 교리도 의문을 여전히 품은 교리들 중 하나였다.
“규슈를 얻어 가질 수 있는 이점에는 이론이 없겠으나, 규슈에 사는 자들은 고려와는 전혀 다른 왜인들입니다. 쓰는 말이 다르고, 사는 양식이 다르니, 풍습이 완전히 다른 자들을 얻는다고 해서, 과연 현백께 필요한 인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고려를 탐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홍 교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교리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생겼다. 홍 교리의 주장에 일리가 있는지를 떠나, 그가 한 말에 역모의 뜻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주의 교리들은 사실상 스스로 고려의 신하라기보다는 제주의 백성이자, 현백의 신하라는 정체성이 강한 자들이기에, 당장 홍 교리를 타박하는 자는 없었다.
하나, 그럼에도 고려를 노리자는 것에 곧바로 동의하고 나설 만큼 고려를 완전히 다른 나라로 여기는 이도 없었고, 고려의 왕을 전혀 다른 나라의 왕으로 생각하는 자도 없었다.
다들 현백이 어찌 반응할지 주시하는 중에 몽주가 말문을 열었으니, 실소와 함께 말하였다.
“고려를 탐하면 고려의 백성들이 나를 역적이라 생각하지 않겠소.”
“처음에는 그런 오해를 살 수도 있겠으나, 현백께서 백성들을 평안하게 해 주신다면 그들 또한 현백을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럼에도 끝내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썩은 고려의 살점을 뜯어먹고 살던 구더기와 같은 자들일 것이니, 내치면 그만일 것입니다.”
“하하, 간단한 이치로군. 다만, 그 구더기들이 좀 많고, 힘도 세다는 게 문제라오. 내가 고려를 탐한다면, 영공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을 테고, 아마 경흥후마저 나를 치려 할 것이오. 그들을 말로 달랠 방도도 없을뿐더러, 만약 싸움이 생긴다면 현백군으로서는 고려의 땅 위에 서기 어려울 것이오. 물론 바다에서야 승승장구하겠지만, 그래서야 고려를 탐한다 할 수 있겠소?”
“그건 규슈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홍 교리가 조금 욱한 어조로 되묻자, 몽주가 정색하여 대답하였다.
“규슈는 쇼니씨와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소? 또, 세는 작으나 축후국을 다의홍이 다스리고 있으니, 그 도움이 적지 않을 것이오. 그에 비해 고려는 순전히 제주의 힘으로만 노려야 하니, 힘이 달릴 수밖에 없지 않겠소?”
“경흥후는 말이 통할 것입니다. 그를 심왕으로 봉하는 것을 제안하면 그가 혹하지 않겠습니까.”
그럴싸하나, 전혀 통할 리 없는 제안이었다.
이미 오래전 요동성에서 이성계와 그의 미래에 대해 논한 바 있던 몽주는, 그가 왕좌의 꿈을 꿈꾸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억누를 만큼 고려에 대한 충심을 가졌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이는 달리 말하면, 고려에 대한 충심만 아니었다면, 그는 분명 고려의 왕좌를 노렸을 것이라는 의미이니, 만약 경흥후에게 자신이 고려를 얻겠노라 밝히고 실행하려 든다면, 경흥후 또한 몽주 대신 자신이 고려를 얻지 못할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애초에 그가 심왕좌를 목표로 하고, 영공과 손을 잡으며 심양왕좌를 대가로 얻기로 한 것부터 고려를 배신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 아닌가.
당금에 영공과 경흥후 간의 약계만 보자면, 경흥후와 손을 잡고 고려를 노리는 것이 가능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경흥후의 속내를 잘 알고 있는 몽주로서는 전혀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몽주의 반론에 홍길도는 이해는 하는 듯하면서도 답답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였다.
“현백께서는 지금 제주 백성들이 누리는 삶을 고려 백성들 모두가 누리게 하시는 것에 욕심이 없으신 겁니까?”
“어찌 안 그렇겠소. 하나, 욕심이 난다 하여 상황의 여의치 못함을 무시하고 일을 도모한다면, 제주 백성들의 삶마저 피폐해질 것임을 왜 모르는 것이오? 더구나 규슈를 얻는 것에 성공한 후에 고려를 도모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니, 안달 나는 마음을 참는 것이 보다 현명한 선택일 것이오.”
몽주와 홍길도 간의 논쟁 아닌 논쟁이 일단락되는 사이, 교리들도 생각한 바가 있었는지, 다시 주제가 규슈를 얻는 일로 돌아서자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나왔다.
차현유가 차라리 료슌에게 쇼니씨의 음모를 고하고, 그를 통해 신뢰를 구한 뒤, 따로 시마즈씨를 도모하여 남규슈부터 얻는 방도를 고하였다가, 몽주가 반박하기도 전에 교리들의 집중포화에 얻어맞았다.
규슈를 세력화하려는 료슌의 의도를 생각하면 절대 가능하지 않다고 비판당한 것이다.
이어서 화극이 굳이 복잡하게 쇼니씨와 료슌 사이의 일에 개입하지 말고, 축후국의 무사들을 서둘러 연병하여 일당백의 군력으로 키운 뒤, 그 전력으로 규슈를 석권하자고 주장하였다가 화포가 전가의 보도가 아니라는 탁기의 반론, 그리고 전비 문제와 화포 관련 기술의 유출 등을 짚은 점녀의 조곤조곤한 이의에 결국 물러나야 했다.
그렇게 교리들 간에 갑론을박이 이어지니, 자연 그 논의의 방향성은 쇼니씨와 손을 잡아 료슌을 도모하되, 향후 오우치씨와 막부의 반격에 철저하게 대비하는 방도로 흘러갔다.
다만, 그 회의에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였으니, 회의가 너무 길어져 다음에 다시 논하기로 한 탓이었다.
몽주도 아직 시간이 있다 여겼으므로, 안 그래도 다들 바쁜 중에 무리할 필요는 없다 여겼다.
하나, 고작 이틀 만에 임시로 회의가 다시 소집되었으니, 쇼니씨로부터 다시 온 서찰 때문이었다.
지난 서찰에 대한 답을 아직 보내기도 전에 새롭게 온 그 서찰에 담긴 내용은 간단하면서도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궁서//시마즈씨와 오토모씨가 규슈탄다이를 통해 막부에 귀순할 뜻을 표명하였습니다. 다만, 그 대가로 축후국을 오토모씨에게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으니, 규슈탄다이는 고민 끝에 그에 대한 결정을 막부에 문의하기로 하였습니다. 만약 이 일이 성사된다면, 규슈탄다이는 사실상 규슈를 일통하는 셈이며, 축후국의 다의홍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시마즈씨의 막부 귀순은 규슈의 당대 구도가 장기화되면 언젠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여긴 일이었다.
본래 역사에서도 료슌이 다자이후를 얻어 북규슈에 막부세력을 흥하게 하였을 때, 규슈 남조 세력의 중심인 키쿠치씨를 치기 위해 여러 슈고들을 소집하자, 가장 열심히 응한 곳이 바로 시마즈씨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때는 료슌이 실수하여 쇼니 후유스케를 살해하는 바람에 시마즈씨를 격분하게 만들고, 막부에 돌아서게 했지만, 어쨌든 시마즈씨는 언제든 막부의 북조로 갈아탈 만한 가문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매우 빠르게 시마즈씨가 결단을 내린 것이었지만 말이다.
상황이 전보다 어려워진 것은 분명했으나, 몽주의 마음은 오히려 후련한 느낌마저 있었다.
이제 더는 복잡하게 재고 따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몽주는 군무교리 탁기를 통해, 현재 동원 가능한 군력의 현황을 확인하였다.
을묘년(1375년) 3월 하순 현재, 현백군에 속한 선박의 수는 55척으로 그중 37척이 홍로급 경함선이었고, 나머지가 이제는 연안함선이라 불리는 기존의 대선과 소선이었다.
연안함선들은 이제 제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고, 모두 대마도와 축후국에 있는 것으로, 그것들도 경함선으로 하나둘씩 교체되고 있는 중이었다.
제주에 있는 경함선은 모두 25척으로 나머지 12척 중 4척은 축후국에, 나머지는 대마도에 파견되어 있었다.
현백군의 현황 또한 비슷했으니, 총원 약 2천 명 중 제주에 있는 자들은 1,300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대마도와 축후국에 나아가 있었다.
당연히 몽주는 현백군 대부분을 동원해야 할 때라 여겼다.
하여, 제주에서 20척의 경함선으로 이뤄진 함대를 이끌고 대마도로 직접 가기로 하였으니, 5척을 남긴 것은 제주의 안위를 위해서라기보단 훈련병과 부상병 등을 제외하자, 배를 몰 군병의 수가 모자란 탓이었다.
쇼니씨로부터 새롭게 서찰을 받은 지 사흘 후 현백군이 출항하니, 대마도에 경함선 27척과 연안함선 11척으로 이뤄진 함대가 새로이 편성된 건 다시 나흘이 지났을 때였다.
축후국에 파견되어 있는 함선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현백군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이었다.
* * *
하륜은 구사일생하였다.
그야말로 목에 칼날이 박히기 직전에 구원을 받은 것으로, 경흥후가 처단하라고 명을 내리려는 참에 함주에서 목은 이색의 서찰, 제자 하륜을 살려 달라는 청이 전해진 덕이었다.
아마도 경흥후를 따르는 장령들 중 유자들과 가까운 누군가가 알린 모양인데, 이색이 모르면 모를까, 그가 알고 있는데도 그의 제자를 단칼에 쳐 죽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방면한 것은 아니고, 그를 죽일 마음을 고쳐먹은 것도 아니었다.
도로 옥에 넣고, 이색을 설득하여, 그를 죽여도 된다는 동의를 얻고, 사형을 집행하려 한 것이었다.
이색의 동의를 구하고자 한 이유는, 그가 경흥후에 속한 유자들 대부분의 스승으로, 경흥후의 영내 경영에 유자들이 크게 이바지하고 있으니,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목은의 청을 무시하였다가 유자들이 반발심이라도 품는다면 경흥후도 곤란했다.
하여, 다시 서찰에 자세한 내용을 써, 하륜이 불충하고 역심을 품었음을 인지하게 하였는데, 며칠 후 이색이 제자들을 이끌고 몸소 군영에 이르렀다.
물론, 이색이 하륜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색이 기어이 사형 집행을 반대하니, 경흥후는 속으로는 분개하였으나, 결국 하륜을 죽일 마음을 돌려야 했다. 대신, 하륜은 따로 연금하고, 정사에 일절 개입하지 못하게 명하였다.
한데, 재미(?)있는 것은 이색이 하륜을 죽이지 말라 청하였음에도, 유자들 모두가 그의 뜻에 동감하는 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중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자는 모두 셋이었는데, 삼봉 정도전, 동정 윤소종, 그리고 우재(吁齋) 조준이 바로 그들이었다.
본래 역사에서 조선 개국의 핵심 공신 중 하나인 우재 조준은 본디 이색의 제자는 아니었고, 고려 말 조정이 더럽다 하여 고향인 서경(평양)에 와 있다가, 우연히 이색 일파의 유자들이 경흥후에게 있음을 알게 되어 내친김에 경흥후에게 귀의한 자였다.
그런 우재인 만큼 이색의 뜻에 반하는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삼봉과 동정은 상황이 달랐음에도 반대하였으니, 경흥후로서는 그들이 다른 뜻을 가진 이유가 궁금하였다.
“스승께서 하륜을 살리고자 하신 것은 외람되오나, 욕심 때문입니다.”
윤소종이 냉랭한 어조로 말하니, 말은 공손해도 스승에 대한 비난이 스며들어 있었다.
“……욕심?”
“하륜은 세족의 일원으로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만약 그를 살려 둔다면, 후에 중란에서 이긴 후, 그 토지에서 나오는 이문을 얻을 수 있다 여긴 것이지요.”
그 대답에 경흥후는 속으로 냉소를 품었다.
하기야 충(忠)의 가치를 높이 사는 유자임에도, 목은이 굳이 하륜을 구하고자 한 것을 보고 비단 제자에 대한 애착 때문만은 아닌 듯하였는데, 역시나 본심은 따로 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중란에서 이기면 수시중 이인임의 가문은 몰락할 것이니, 나라에 귀속되는 중에도 잘하면 하륜에게 유산의 일부가 흘러들어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까지 따지면, 하륜을 더욱 죽이게 내버려 두어선 아니 되었겠지요.”
윤소종의 말을 듣고 있던 경흥후는 한숨과 함께 세 사람을 살피며 물었다.
“하면, 그대들은 하륜을 살려 얻을 수 있는 이문에는 욕심이 없는 것인가? 목은 선생은 그 재산으로 사원을 크게 지어 유학을 내 영토에서 중흥시키고자 하는 듯한데, 그대들 또한 그에 혹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유학이 흥하는 것이 어찌 사원의 유무와 크기에 따라 달라지겠습니까? 그저 경흥후의 영토에서 유자들이 노력하여 나라와 백성을 평안케 하면, 자연히 유학의 가치가 드높아지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우재 조준의 대답이었으니, 그의 괄괄한 성미만큼 단호한 말이었다.
경흥후는 그 말에 감탄하면서 유자들 중에서도 이 세 사람들을 눈여겨보아야겠노라 다짐하던 중, 문득 삼봉의 태도가 달라보였다.
세 사람 중 가장 경흥후와 가까운 삼봉이 정작 이 자리에서는 침묵하고 있었으니, 뭔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쁜 것 같기도 하였다.
“삼봉,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가.”
“……하륜을 반드시 죽일 방도를 강구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린 삼봉이 말하니, 듣던 경흥후와 다른 두 유자들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이색의 고집으로 하륜을 죽이는 건 물 건너간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하륜을 죽일 방도를 구하고 있다 하니, 이는 스승의 의도에 반대하던 윤소종과 조준을 능가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흥후는 이미 삼봉이 하륜과 같은 뜻을 청한 바가 있음을 알기에, 그가 이처럼 하륜을 죽이는 것에 골몰할 줄은 전혀 몰랐던 탓이었다.
“하면, 그럴 수 있는 방도를 구하셨소?”
경흥후가 물으니, 삼봉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만약 경흥후께서 스승의 뜻에 상관치 않으신다면, 당장에 끌어다 목을 베면 그만이겠으나, 아니시라면 당장은 힘들 것입니다. 다만, 스승께서 연로하시니 하륜이 비호를 받을 날이 그리 길지마는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
듣던 자들의 놀라움이 한층 더 커졌다. 스승의 죽음을 염두에 둔 발언도 그렇지만, 훗날을 기약할 정도로 하륜을 죽이고자 하는 의지가 큰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 삼봉의 충심이 그처럼 큰 줄은 몰랐소.”
경흥후는 새삼스레 삼봉을 보며 말하니, 그가 하륜과 뜻이 같다고는 하나, 결정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한 가지에 주목한 탓이었다.
하륜은 경흥후로 하여금 고려의 왕이 되라 직언하였고, 그에 비해 삼봉은 왕을 두고 심왕으로서 고려를 쥐라 하였으니, 고려의 왕조를 살려 두느냐에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경흥후는 바로 그 점에서 삼봉이 고려에 대한 충심이 깊다 여겼는데, 사실 삼봉의 속내와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절대적인 국왕이라니…… 하륜이 어찌 그런 무모한 생각을 품게 되었단 말인가.’
지난 날, 경흥후가 홀로 금상과 하륜이 있던 군막 안에 들어갔을 때, 삼봉은 바로 바깥에 서서 그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기에 하륜이 경흥후에게 권한 말들을 속속들이 알아들었으니, 삼봉으로서는 가히 경악할 만한 주장이었다.
삼봉은 왕이 국권을 쥐되 그 경영은 재상에 의해 실현되는 나라를 이미 꿈꾸고 있었으니, 나라 안에서 홀로 무쌍한 임금을 권하는 하륜의 생각과는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경흥후가 하륜이 품은 역심에 노하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하륜의 생각에 그가 미혹당하였다면, 삼봉으로서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하륜이 살아 있는 한 언제라도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악몽과도 같았으니, 삼봉으로서는 사제일지라도 하륜을 죽일 마음을 품은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아직 경흥후에게 밝힐 수 없었다. 경흥후와 그가 나란히 성장하면서, 정치적 동업자로서 인정받는 것과 함께 차근히 추진해야 할 일이었다.
“당장 죽일 수 없다면, 죽은 것과 다름없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연금하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으니, 그와 접촉하는 자들마저 역심을 품은 것이라 천명하시어, 그가 품은 역심이 다른 자에게 옮겨 가는 것을 막으십시오.”
삼봉이 문득 읍하며 진중하게 고하니, 경흥후가 미소를 띠며 그리하겠노라 대답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