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51)
* * *
“나는 과연 옳은 길을 걷는 것인가.”
어두운 밤, 축후성의 성벽에 올라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문득 읊조리는 다의홍의 어조가 몹시 무거웠다.
오우치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독인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만 하였다면, 차기 가독직을 물려받았을 그였건만, 이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 시작은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고, 막부의 관리인 이마가와 료슌을 따라 북조의 편에 선 것이었고, 변화의 중대한 계기는 제주현백과의 만남에 이어 료슌에게 버려진 일이었다.
그렇게 그에게 연달아 닿아 있던 두 개의 끈이 모두 사라지면서 오직 제주현백과 닿은 끈만이 남아 있게 되었고, 그를 따라 축후국의 슈고가 되었으나, 사방이 적이었으니 상황은 그저 위태롭기만 하였다.
바로 남쪽에는 셋째 동생인 히로마사(弘正)가 오우치씨의 이름으로 히고국을 다스렸으나, 이미 가문과 척을 지은 다의홍의 입장에서는 분명 적국이었다.
동쪽 분고국의 오토모씨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오토모씨로부터 빼앗아 얻은 것이 축후국이었으니까.
그리고 더 남쪽에 남규슈 삼국을 다스리는 시마즈씨가 오토모씨와 연대하여 바다로 땅으로 견제를 일삼고 있었다.
북쪽에는 규슈탄다이가 힘을 크게 키워 장악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대적으로 변할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었다.
차라리 아버지에게 빌어 오우치씨로 돌아갈까.
의홍의 뇌리에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다. 아닌 게 아니라, 예전부터 그를 따르던 무사들 중에 그런 조언을 해 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미 가독직을 포기하겠노라 선언하였으니, 둘째 동생 미쓰히로도 마냥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고, 오우치씨의 입장에서는 가문의 영토가 늘어나는 것이니 눈총을 주되 못이기는 척 받아 주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확실히 오우치씨로 회귀한다면 지금의 난국도 해소될 것이었다.
이미 오우치씨가 규슈탄다이 료슌과 손을 잡았으니, 자연스레 규슈 전체가 친막부 세력화될 것이기 때문이었고, 지금의 구도가 크게 안정될 것이다.
하나, 그렇게 하면 당금의 난국은 사라지더라도 새로운 난국이 생길 것이니, 제주현백이 결코 그의 배신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주현백의 세력은 규슈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왜인들 중 누구보다 제주현백의 실력을 잘 아는 다의홍은 가능한 한 그와 대립하게 되는 선택을 피하고 싶었다.
막말로 제주현백이 현백군으로 규슈의 해안을 약탈하겠노라 작정한다면, 어느 누가 바다에서 그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가 규슈의 영토에 마음이 있어, 하지 않는 것이지 마음만 먹는다면 규슈의 누구도 감히 바다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제주현백이 규슈의 현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는 듯하니, 만약 그것이 통한다면, 자신은 배신당하고, 배신하다가 제주현백에 의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게 될 터였다.
다의홍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사실 그것이었다.
세상에 이름을 제대로 알려 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지는 것.
애초에 아버지의 뜻에 반하여 료슌을 추종한 것부터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오우치씨를 크게 흥하게 하겠다는 의지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제 오우치씨와 동떨어지긴 했으나, 여전히 그의 가슴속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은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오우치씨에 회귀하여, 그저 살아남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고, 제주현백과 척을 지고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게 충성하지 마라. 너는 충성할 자격이 없다. 그저 네가 해야 할 것에만 집중하라.”
지난날 료슌에게 버림받고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 제주현백이 해 준 말은 다의홍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닻과 같았다.
그가 해야 할 일.
료슌에게 복수하고, 오우치씨를 되찾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면, 자신의 이름도 희미하게나마 역사에 새겨지지 않겠는가.
다의홍은 문득 품에서 곱게 접힌 서찰을 꺼내 들었다.
다자이후에서 달콤한 혈연(血宴)의 소식이 전해지거든 즉시 군기를 올려라.
제주현백이 보낸 서찰 중에 다의홍의 행동을 요구한 부분이었다. 때가 되면 즉시 움직일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다만, 그때를 가늠하는 표현이 무척 애매하였으니, 달콤한 혈연의 소식이라는 것이 가리키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혈연이라 함은 피의 연회라는 뜻일 터인데, 그것이 어찌 달콤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연회가 무슨 연회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다만, 문득 떠오르는 건 근래 북규슈를 들썩이게 하고 있는 규슈탄다이의 조카딸과 오우치씨의 차남이자 다의홍의 동생인 미쓰히로 간의 혼인이었다.
만약 서찰의 연회가 그 혼인식이라면, 그리고 그곳에서 달콤한 피의 냄새가 풍긴다면…….
절연하였으나 엄연히 같은 피를 지닌 다의홍의 심정이 복잡해졌고, 그 복잡한 시선으로 북쪽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 * *
쇼니 후유스케가 조금은 서두르는 느낌으로 몽주를 재촉한 이유를 몽주는 대마도에 도착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료슌의 조카딸과 차기 가독으로 유망한 오우치 미쓰히로 간의 정략결혼이 예정되었고, 그 준비를 쇼니씨가 전담하게 되었기에, 그때를 틈타 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얼마 전, 후유스케가 다시 서찰로 전하길 그에 대해 미리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지 기회가 좋다는 이유로 몽주가 그의 계획에 응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건 반대로 상황이 좋지 않으면 언제든 외면할 수도 있는 자이기 때문이니, 후유스케는 몽주와 대계의 시야에서 손을 잡길 바랐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전해 들으니, 몽주는 쇼니 후유스케도 과연 인물은 인물이다 싶었고, 그만큼 그와 손을 잡고 일을 도모하는 것이 믿음직해졌으며, 그만큼 그를 경계해야 한다는 마음도 품게 되었다.
이제 몽주가 쇼니씨와 함께 료슌을 치는 것에서 그가 걱정해야 할 부분은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과연 쇼니씨가 료슌을 도모하기 위한 준비를 비밀리에 잘 진행했느냐이자, 료슌이 아무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느냐가 바로 그것이었다.
쇼니 후유스케가 전한 바로는 혼인식에 쓰일 모든 인력을 그가 관장하고 있어, 당일 그가 부리는 자들을 배치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한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사람 중에 배신자나 첩자가 있을 수도 있고, 당일에 갑자기 료슌이 다른 명을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쇼니 후유스케의 시도는 성공과 실패, 그 사이 어디쯤에 놓여 있었으니, 몽주가 두 가지 경우를 다 염두에 두고 있는 건 당연했다.
“하면, 현백군은 일절 그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까? 후유스케가 저희가 소극적이라며 탓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탁기가 고하자, 몽주는 그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리 결정한 이유를 말하였다.
“우리가 나아가 직접 그 살계의 실행를 돕는다면 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만약 규슈탄다이가 눈치를 채고 역공한다면, 우리가 돕는 것과 무관하게 살계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현장에서 우리 군이 목격되거나 잡힌다면 시해 시도를 도운 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후유스케도 현백군이 뭍에서 돕기를 강하게 권한 것도 아닌 바, 우리는 바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수행하면 그만이다.”
물론, 쇼니씨의 음모가 실패할 경우엔 몽주와의 논의 또한 료슌에게 알려지겠지만, 그 자리에 있지 않는 이상 몽주는 얼마든지 개입 사실을 부정할 것이고, 그럴 수 있었다.
증좌라고 해 봐야 확답은 없는 애매한 내용의 서찰 정도일 테니 말이다.
게다가 몽주가 료슌과 본격적으로 충돌한다면, 그건 시해 시도 개입 여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시마즈씨와 오토모씨의 귀순에 대한 막부의 결정에 따라 변하는 규슈의 세력 구도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몽주가 그렇게 결정하고 말을 하자, 탁기도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이후 논의는 쇼니 후유스케와 약속한 대로 일이 발생한 후 즉시 간몬해협에 진입하여 오우치씨의 도해를 막고, 막부로부터 올 선편, 즉 시마즈씨와 오토모씨의 귀순을 승인하였을지에 대한 결정이 담긴 서찰을 전하는 배를 나포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한데, 논의가 끝날 무렵에 문득 회의석상 말석에 앉아 있던 창 선장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모두가 인지하지 못했던 한 가지 상황을 그가 언급하였으니, 몽주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일순 당황하였다.
“만약 그리된다면, 저희만 크게 당하지 않겠습니까?”
창 선장의 물음에 몽주는 눈을 감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가 언급한 하나의 가능성이 비교적 간단했던 현 상황을 다시 복잡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저 쇼니씨가 료슌을 도모하는 일의 성사 여부에 반응하여 움직이면 그만이라 여겼건만,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그가 선택해야 할 처신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었다.
그 고민은 결행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어질 정도로 무겁고 싶은 것이었다.
* * *
다자이후 규슈탄다이의 가택에 대문이 크게 열렸다.
평소에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관댁에 백성들도 기웃거리며 은근슬쩍 들어가 한자리에 끼어드니, 가복들이 타박하면서도 한 상을 차려 주기도 하였다.
그날은 그래도 되는 날이었다. 규슈탄다이를 대부(代父)로 둔 그의 조카딸이 오우치씨 장래의 가독과 혼인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혼례를 치르고, 이어서 피로연을 열었으니, 대문과 곳간을 활짝 열어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크게 대접하면서 축원을 쌓았다.
축원을 크게 받아, 새로 부부가 된 이들이 장차 번창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근래에 이르러 규슈탄다이가 크게 권세를 얻은 만큼 재물도 풍족하였기에 음식을 마구 만들어 내놓아도 모자람이 없었다.
게다가 이 혼인은 여염집의 혼인이 아닌, 규슈탄다이와 오우치씨의 동맹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니, 그 동맹의 의의에 만족한 만큼 베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사랑채와 연결되어 따로 세운 높은 마루에 가신들과 더불어 있던 료슌도 간만에 취하여 떠들썩한 잔칫날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절로 흥겨워졌다.
오우치 미쓰히로와 그녀의 조카딸이 나란히 앉아 있는 곳의 앞에서 북규슈의 호족들이 저마다 축원과 선물을 바치고 있는 것을 보자니 흡족하였던 것이다.
규슈탄다이에 봉해진 이래로 얼마나 많은 날을 긴장과 고민 속에 살았던가.
이제야 그 대가를 받는 기분이었다.
료슌은 문득 자신의 배를 손으로 문질렀다. 예전에는 없던 살집이 잡히니, 근래에 이르러 마음 고생이 사라진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다 미쓰히로가 문득 다정히 아내의 손을 잡아주는 게 얼핏 보이니, 료슌이 웃음을 살짝 터뜨렸다.
이 혼인이 비록 정략결혼임에 틀림없으나, 이왕지사 부부가 서로 화목하길 바라는 건 대부이자 백부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었고, 저 부부의 화목이 오우치씨와의 동맹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임이 틀림없었으니 한결 더 기꺼웠다.
그렇게 흐뭇하게 보는데, 문득 쇼니씨의 가독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료슌은 그를 보며 실소하였다.
‘어리석고 가엾은 자 같으니…….’
북규슈의 실세 가문이었던 쇼니씨의 가독이 마치 자신의 가신인 양 바삐 움직이는 걸 보니, 무시하고픈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이번 혼례도 그가 자신이 맡아 준비하겠노라 자청하기도 하였었다.
그 결과 실제로 료슌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화려한 혼례가 열렸으니, 혼례 때 그의 조카딸이 입은 순백의 혼례복은 물론이고, 지금 손님들의 인사를 받으며 입고 있는 오이로나오시(お色直し : 색색의 화려한 기모노) 또한 후유스케가 명국에서 들여온 비단을 비싸게 구하여 지은 것이었다.
아마도 료슌이 준 것보다 훨씬 많은 준비 자금이 들었을 것이다.
‘다 살아남기 위해 하는 짓이겠지.’
후유스케의 의도를 짐작하면서도 료슌의 마음은 이미 독한 결정을 품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입안의 혀처럼 처신한다고 해도, 료슌에게 있어 쇼니씨는 사라져야 할 가문이었다.
단지 허명뿐인 규슈탄다이의 자리를 넘어 실질적인 권세가를 세우고자 마음 먹었으니, 그 바탕은 쇼니씨의 것을 빼앗는 데 있었다.
이미 다자이후를 장악하면서 지쿠젠국의 알맹이를 빼앗은 상태였고, 지난 쇼니씨의 가독투쟁을 틈타 히젠국의 재산 또한 상당 부분 강탈하였으므로, 쇼니씨는 앞으로 한동안 그 명성에 걸맞은 힘을 내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서서히 밀어내면 그만이리라.
료슌은 오우치씨와 혼인 동맹을 맺었고, 남부의 오토모씨와 시마즈씨 또한 막부에 귀순하여 자신을 따를 의사를 전하였으니, 쇼니씨를 지우는 것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때, 료슌의 머릿속에 문득 옛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苅萱に身にしむ色はなけれども、見て捨て難き露の下折.
솔새(여러해살이풀)에 빠져들 생각은 없었건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슬에 꺾인 줄기.
200여 년 전, 일세를 풍미한 가인 후지와라노 이에타카(藤原家隆)가 지은 시였는데, 지금 료슌의 마음이 딱 그와 같았다.
본디 그는 친우이자 막부의 관령인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도와, 규슈의 남조 세력을 누르고자 규슈탄다이에 임했다.
원래 다른 목적은 없었으나, 규슈의 혼란에 뛰어들어 그 면면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이슬에 꺾인 줄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인생이란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가. 부처에 마음을 준 자에게도 이처럼 다채로울 수…….”
료슌이 분위기에 취해 읊조리는데, 문득 시야에 들어온 잔치의 풍경이 더욱 북적이는 느낌을 받으면서 동시에 싸늘함이 뒷덜미에 감돌았다.
늘어난 사람들 중 단정한 복장을 하였으나, 체구가 좋고 눈매가 날카로운 자들이 차츰 신랑신부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는데, 그들의 허리춤에 무언가가 감춰져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무언가 수상하다 싶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려는데, 술에 취한 탓에 일순 비틀거리고 말았다.
주저앉은 몸을 바로 세우느라 잠시 시선을 떼었다가 다시 신랑신부 쪽을 바라보자, 믿기지 않은,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신랑신부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리던 사내들이 갑자기 품에서 단도를 꺼내 신랑신부에게로 달려든 것이었다.
그중 한 자가 그 단도를 료슌의 조카딸에게 휘두르니, 목이 베인 조카딸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핏물이 터져 나오는 목을 부여잡고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녀의 경악한 시선이 료슌에게 닿을 때, 다시금 단도가 그녀를 범하였으니, 가슴과 배를 수차례나 찔렸다.
조카딸의 눈에서 생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그녀의 몸이 뒤로 쓰러지는 것을 본 료슌도 그제야 이 악몽 같은 상황이 실제라는 걸 체감하며 크게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 하였다.
하나, 갑작스러운 충격이 그를 덮치니, 료슌의 몸에서는 소리지를 힘마저 쑤욱 빠져나가 버렸다.
칼날이 그의 등을 파고들어 첨단이 배에 튀어나와 있었고, 그 주변으로 피가 번지는 게 보였던 것이다.
“이 칼은 고려의 것이지요. 규슈탄다이께서는 고려인에게 죽은 것입니다.”
이미 목소리를 들어 아는 것이지만, 료슌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애써 지탱하며 고개를 돌려보았다.
역시나 쇼니 후유스케였다.
료슌에겐 그가 한 말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후유스케가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조카딸을 이미 죽이고, 모든 것을 망치고 있다는 것에 분노할 뿐이었다.
물론, 분노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네, 네놈이……!”
“다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요.”
후유스케가 말을 마친 다음 순간, 손목에 힘들 주어 료슌의 등 뒤에 박힌 칼을 비트니, 상처가 크게 벌어지며 핏물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거대한 고통이 료슌을 덮쳤고, 그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경직시켰다가, 그를 꿰뚫은 칼날에 힘이 사라지는 순간, 제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외로 쓰러져 어둑해지는 시야에 신랑 오우치 미쓰히로가 괴인의 칼에 목이 겨눠진 채 끌려가는 것이 들어왔고,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인지 칼을 든 무사들이 난입하여 자신의 가신과 무인들을 마구 해치는 것이 보였다.
잔치는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고, 여기저기서 비명과 함께 우르르 사람들이 도망치는 것도 보였다.
하나, 그도 잠시 서서히 귀에 들리는 것이 없어졌고, 시야도 사물을 가늠하기 어려워질 정도로 깜깜해졌다.
‘마치 솔개숲과 같구나…….’
시야가 완전히 사라지는 그 순간, 세상이 바람에 휘날리는 솔개수풀처럼 보였다.
* * *
32척의 홍로급 경함선을 포함한 일단의 함대가 간몬 해협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미 다자이후에 한바탕 소란이 있었고, 료슌이 절명하였음을 바다에서 전해 들었으니, 몽주의 함대는 쇼니 후유스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간몬 해협을 틀어막고자 한 것이다.
다만 쇼니씨에게 알린 것과 달리 간몬 해협 안으로 더 들어와 함대를 셋으로 나눠 넓게 포진하였다.
몽주가 있는 기함은 그중 중간에 위치한 분함대에 속해 있었는데, 간몬 해협 쪽과 세토 내해 쪽의 분함대로부터 소식을 빠르게 전해받기 위함이었다.
“네가 짚은 대로, 만약 쇼니씨가 나에게 누명을 씌우고자 한다면 오늘 밤에 쇼니씨의 선편이 막부로 향하겠구나.”
“그렇지요. 그, 근데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쇼니씨가 반드시 현백께 누명을 씌울 것이라고 한 건 아닙니다요.”
몽주와 나란히 갑판에 서서 조심스레 말하는 이는 석삼이었다.
그가 항해사로 있는 배에서는 나름 허세 좀 부린다고 하였는데, 자신의 앞에서는 도로 가복 석삼이로 변하는 걸 보니, 몽주는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라. 설령 쇼니씨가 약속한 대로 이행한다고 해서, 너를 탓하지는 않을 것이니.”
몽주는 손을 뻗어 석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추대현에 있던 시절부터 석삼이의 수단이 좋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투덜거림이 많아서 그렇지, 일단 시키는 건 제법 효율적인 방도를 구해서 해내곤 했던 것이다.
한데, 이제 보니 의외로 그런 잔머리(?)가 대국적인 면에서도 효용을 발휘하고 있었다.
지난번, 명군과의 싸움에서도 한 건 하더니, 이번에도 몽주를 포함하여 제주교리 및 현백군 내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짚어 주었다.
지난 대마도에서의 군무회의 때, 창 선장이 제기했던 또 하나의 가능성, 즉 쇼니씨가 료슌을 살해한 후, 막부에 제주현백이 그를 죽였다고 거짓을 고할 경우를 짚어 준 것이 바로 석삼이였다.
쇼니 후유스케가 음모 아래 또 다른 음모를 꾸밀 수 있음은 늘 염두에 두었지만, 료슌을 살해한다는 것 자체에 큰 인상을 받은 탓인지, 쇼니씨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워 막부와 친해질 수도 있음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 일단 그 점을 짚고 보니, 쇼니씨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바다에서 막부와 오우치씨의 공세를 막아 준다고 해도, 자신과 교역하는 이점을 얻는다고 해도, 결국 쇼니씨의 상황은 한마디로 고립일 뿐이었다.
더구나 규슈 전체를 아울러 방어할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엄연히 남규슈에 시마즈씨 등이 기세등등하게 남아 있었으니, 자신만 믿고 고립을 감수하기에는 앞으로 쇼니씨에게 다가올 미래가 밝다고만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몽주는 자신과 제주의 실력, 비단 군력뿐만 아니라 앞선 기술과 제도를 통한 총체적인 실력을 잘 알기에 쇼니씨에게 충분한 이점을 줄 수 있다 자신하였다.
하나, 쇼니씨는 정작 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런 판단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 중에 차라리 막부를 속여 나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고 적대하면서, 료슌의 위치를 쇼니씨가 대신 얻는 것이 최선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
몽주가 한숨과 함께 말하니, 석삼이가 곁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기다리면 쇼니씨의 선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기다림 중에도 몽주의 머릿속은 고민을 이어 가고 있었으니, 만약 쇼니씨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고자 하였다면 쇼니씨를 어찌 처리해야 할지 쉽게 결론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을 기만하는 선택을 하였을 경우, 그 대가로 쇼니씨를 몰락시키고 축출해야 마땅하겠지만, 그것이 쉽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쇼니씨와 손을 잡고 일을 치르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힘으로 축후국의 다의홍을 지원하여 규슈를 직접 도모하였을 테니까.
하나, 현백군은 훈련병까지 다 합해도 2천에 불과하고, 그 위력의 대부분은 화포에 있었으니, 공식적으로 2개의 율령국을 지배하고 있는 쇼니씨의 군력과 대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긴다고 하더라도 피해가 클 것이고, 다의홍의 군병을 동원하여 싸운다면 상황이 낫겠지만, 그때는 일단 축후국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후에도 숱한 적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쇼니씨의 잔당들이나, 남부의 슈고다이묘들은 물론이거나와, 막부에서도 토벌군을 보낼 가능성도 높았다.
이는 끝없는 전쟁의 수렁에 빠지는 길이었으므로, 차라리 물러나면 물러나지 절대로 끌려 들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저기, 현백…….”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석삼이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몽주가 왜 부르느냐며 시선을 돌리니, 석삼이는 머리를 긁적거리면서도 문득 떠올린 생각을 말하였다.
“그 마쓰히로였던가요, 오우치씨의 차남 말입니다. 차기 가독이라던…….”
“미쓰히로 말이구나. 신랑이었다가 이번에 쇼니씨에게 잡힌…….”
몽주는 담담히 대꾸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며 말을 줄였다.
그러자 석삼이는 현백도 자신이 짚은 부분에 생각이 닿았다 여긴 듯 좀 더 자신 있게 말하였다.
“쇼니씨가 그를 살려 두었다고 하였지 않습니까? 후에 오우치씨의 공세를 두고 그를 인질 삼아 피해 보겠다면서요.”
쇼니씨가 혈연 이후 바다에 있던 몽주에게 소식을 전하면서 오우치 미쓰히로를 잡아 두었다고 전하였다.
한데, 만약 쇼니씨가 몽주에게 누명을 씌우려한다면 그 연회에서는 료슌 측 인사 중 누구도 살아 있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혹시 쇼니씨가 나와 약속한대로 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좋겠습니다요. 한데, 생각해 보니, 미쓰히로를 살려서 써먹을 데가 있긴 합니다요. 그는 다의홍의 동생이지 않습니까요.”
“……!”
몽주는 석삼이의 지적에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쇼니씨의 이중 음모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느라, 다의홍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쇼니씨의 입장에서 만약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다면, 대적해야 할 적은 몽주 휘하의 현백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쇼니씨의 영지 바로 아래, 축후국의 다의홍이 있었으니, 그에 대비를 해야 마땅했다.
그럴 때, 다의홍의 앞에 미쓰히로를 두고 그를 협박함과 동시에 투항한다면 대우해 주겠노라 구슬린다면 다의홍은 과연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역사에서 훗날 오우치 요시히로라는 이름으로 오우치씨를 대흥하게 한 인물이었던 다의홍은 아직 19살에 불과한 청년이었고, 혈연마저 외면할 만큼 철혈의 간담도 갖추지 못하였다.
몽주는 새삼 마음이 급해졌다.
만약의 경우에 또 만약이 더해져 다의홍이 자신을 배신하고 투항한다면, 그와의 인연을 끊고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다의홍을 돕기 위해 나아가 있는 현백군이었다.
투항의 대가로 다의홍이 현백군을 속여 쇼니씨에게 바친다면 경함선과 화포가 넘어가는 건 차치하더라도, 축후국에 파견되어 있는 현백군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군병이 전쟁에서 죽는 일이야 다반사이겠으나, 그런 식으로 현백군이 희생되는 건 몽주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하나, 이 또한 쇼니씨가 자신을 기만하였을 경우에 한한 이야기였으니, 마음이 안달나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대처할 수는 없었다.
“현백! 제삼 분함대에서 신호가 오고 있습니다.”
선원의 고함에 몽주가 급히 세토 내해 쪽을 바라보니, 먼 곳에서 불빛이 규칙적으로 깜짝이고 있었다.
“이곳엔 절반만 남기고 나머지는 기함과 더불어 제삼 분함대로 향한다!”
몽주가 고함쳐 명하자, 기함이 밤바다를 가로질러 제3 분함대로 향하였다.
그 후, 반 시진쯤 시간이 흐르자, 몽주는 제3 분함대에 나포된 한 척의 왜선을 볼 수 있었고, 동시에 쇼니씨의 선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몽주는 물론 현백군의 모든 장병들이 분노에 휩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