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53)
* * *
당대 오우치씨의 주성은 스오국 이와키산(石域山)의 산성이었으나, 전란이 아닌 때에는 보통 다부세(田布施)현의 가택에서 지내고 있었다.
몽주가 스오국에 닿아, 오우치씨의 가독 히로요를 다시 만난 곳도 예전과 같이 다부세의 가택이었다.
다만, 분위기는 크게 달랐으니, 처음 몽주가 왜국에 나타나 오우치씨와 만났을 때는 조심스럽기만 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가독의 둘째 아들이자, 차기 가독감이었던 미쓰히로가 죽은 탓이었다.
미쓰히로를 죽인 자가 몽주가 아님에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이유는 미쓰히로를 죽은 건 쇼니씨이지만, 다의홍이 그의 죽음을 방조하였다는 소식이 때문이었다.
다의홍이 제주현백을 따른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므로 몽주에게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일 만했던 것이다.
오우치씨의 입장에서는 가독의 장남과 차남이 모두 제주현백과 얽히면서 잃었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런 사나운 분위기는 다부세의 포구에 닿자마자 체감할 수 있었고, 하여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배로 돌아가거나 이대로 떠나자는 의견이 수하들로부터 나왔지만, 몽주는 오우치씨와의 만남을 강행하였다.
아무리 감정이 좋지 않다 하더라도, 제주현백이면서 동시에 엄연히 막부의 사절이기도 한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다고 자신하였기 때문이고, 지금 오우치씨의 입장은 또 다른 충돌을 야기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쇼니씨가 지쿠고국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미쓰히로를 죽인 것이 알려지기 전에 시마즈씨가 오우치씨의 히고국을 공격한 것이 알려졌고, 그 전에는 료슌이 살해당하고, 다자이후에 난리가 났음이 알려졌으니, 오우치씨는 연이은 비보에 우왕좌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중에 막부의 사절이기도 한 제주현백과 갈등을 빚는다는 건 사방과 충돌하자고 나대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가신들이 사나운 시선을 던지는 것과 달리, 몽주가 대면한 히로요는 표면적으로는 굉장히 침착했다.
장남은 더 이상 오우치씨가 아니고, 차남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으며, 삼남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음에도 그는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몽주 또한 쓸데없는 위로를 던지지는 않고, 곧바로 용건에 임하였다.
먼저 다자이후에서 일어난 혈연에 대해 차근히, 그러나 막부에 고하였듯 거짓을 섞어 설명하였고, 미쓰히로의 비극과 히고국이 시마즈씨에게 침탈당한 과정을 추정해 주었다.
그러자 히로요는 고개를 끄덕여 이해하였음을 보여 주었고, 곧바로 막부의 결정을 물었다.
몽주는 그에게 자신이 칸레이와 논하여 합의한 것을 알려 주었다.
오우치씨에게 지쿠젠국과 히젠국, 즉 북규슈의 두 율령국을 다스리게 하고, 거기다가 히로요를 규슈탄다이의 직에 봉하기로 한 것과 다의홍에게도 지금 다스리고 있는 지쿠고국에 더해 북규슈 서쪽의 히젠국과 지금 오우치씨가 다스리고 있다 시마즈씨에게 침공당한 히고국의 슈고직을 내리기로 하였다는 것을 히로요에게 전하니, 그는 눈을 감은 채 심사숙고에 빠졌다.
사실 손익의 가감만을 단순히 논하자면, 오우치씨는 막부의 결정이자,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아마 시마즈씨에게 빼앗겼거나 곧 빼앗길 히고국을 포기하는 대신 규슈의 핵심 지역인 북규슈의 두개 국을 얻게 되고, 거기다가 규슈탄다이라는 관직까지 새로 받게 되니, 이익은 크고 손해는 작은 것이다.
하나, 막상 오우치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는데, 료슌과 손을 잡고 훗날을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모자란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본디 료슌과 손을 잡으면서 히고국을 얻은 것은 그곳을 시작으로 남규슈를 오우치씨의 것으로 하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이는 시마즈씨나 오토모씨가 막부에 귀순을 청한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료슌과 은밀히 합의한 것이고, 규슈의 일에 관해서 막부는 전적으로 료슌의 결정을 존중할 테니, 시마즈씨와 오토모씨가 막부에 귀의하든 말든 규슈의 세력 구도 변화는 결국 료슌과 오우치씨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일이 잘 진행되었다면, 료슌은 북규슈를, 오우치씨는 남규슈를 사이좋게 나누어, 서국의 양대 세력이 되었을 것은 물론, 서로 동맹하여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안정을 누렸을 것이다.
그에 비해 지금 막부의 제안은 당장 가까운 곳에 두 개의 율령국을 받을 수 있지만, 서쪽은 제주현백의 지원을 받는 ‘집 나간 탕아’ 다의홍에 의해 막히고, 남쪽은 여전히 시마즈씨와 오토모씨가 견제할 것이니, 그 이상 더는 세력을 확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막부가 오우치씨로 하여금 지쿠젠과 부젠을 다스리게 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지금 그곳을 점하고 있는 건 쇼니씨이니, 그 과정에 가문의 힘을 얼마나 빼내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막부가 딱히 지원을 해 줄 리도 없지 않은가.
규슈탄다이라는 관직 역시 료슌이기에 그만큼 힘을 발휘한 것이지, 그가 아니라면 그저 명예직이나 다름없었다.
“하면, 막부의 결정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제주현백과 내가 힘을 합해야 하는 거겠군.”
히로요가 고심 끝에 한 말에 몽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우치씨가 힘을 합하지 않는다면, 막부의 결정은 그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칸레이가 사심을 동원하여 쇼니씨를 정벌하고자 하여도, 그 역시 오우치씨의 협력이 없다면 몹시 힘들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겠는가.”
“생각보다 어렵진 않을 것이오. 물론, 오우치씨가 지닌 저력을 모두 동원해 준다면, 쇼니씨를 압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현백은 화포를 지원하고?”
“물론이오.”
“이참에 화포를 우리에게 파는 것은 어떻소? 크게 값을 쳐줄 용의가 있소만.”
“어찌 응하기 어려운 제의를 하시오. 화포는 고려의 조정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인데, 고려인인 내게 왜국에 화포를 판매하라 청하는 건 무리가 아니겠소?”
“후후, 재밌는 말이군.”
히로요는 담담한 중에 비소를 보이며 중얼거렸다.
고려인임을 강조하며, 고려의 도당 또한 화포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외국에 화포를 팔 수 없다는 말은 얼핏 말이 되긴 하나, 현재 고려의 상황과 제주현백의 입장을 왜국에서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오우치 히로요로서는 몽주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제주현백은 화포를 독점하여 그것을 권세의 기반으로 삼고 있으니, 고려의 도당이 그것을 얻지 못한 것, 아니 정확히 말해 아예 화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도 못한 것은 그 때문이지 않은가.
어쨌든 화포를 사서 가지는 건은 불가능하다는 걸 확인한 히로요는 더는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하였다.
이는 중대한 논의에 새삼 새로운 갈등 요소를 만들지 않기 위함이었고, 이미 막부에서 화포를 만들어 그것의 실전화를 위해 노력 중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료슌과 친근해지면서 알게 된 것인데, 비록 그 성능이 크게 낮아 아직 제대로 쓰기 어렵지만 머지않아 왜국에서도 화포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 일은 아무리 나라도 독단으로 결정할 수는 없소. 가신들과 더불어 논하고자 하니, 제주현백은 기다려 주시오.”
히로요가 몽주와의 대화를 일단락하며 축객령을 내비치자, 몽주가 물러나다가 문득 그에게 말하였다.
“너무 늦지는 않길 바라오. 아직 히로마사가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않소?”
몽주는 히고국의 삼남 히로마사가 살아서 시마즈씨의 공세를 견디고 있을 수도 있으니, 그를 서둘러 구하기 위해서라도 결정이 빨라야 함을 강조했다.
하나, 히로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군력을 동원하고자 하여도, 먼저 쇼니씨를 쳐야 할 테니, 히고국까지 닿기에는 시일이 많이 걸릴 것이오. 이는 현백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소? 설마 우리 가문의 군력과 더불어 지쿠고국(축후국)부터 구원하러 가자고 할 생각이오?”
“……그건 아니오.”
“그러니 이 논의에 있어, 요시히로(다의홍)나 히로마사의 안위는 논할 거리도 아니오. 다행히도 내게는 아들이 많지 않소?”
히로요는 담담한 중에 냉정한 시선으로 말하였으니, 삼남 히로마사의 안위가 오우치씨에게 중요한 정도는 제주현백에게 다의홍이 중요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은근히 알린 것이다.
하기야 아들이 여섯인 히로요로서는 삼남마저 잃는다고 해도 아직 세 아들이 남아 있으나, 제주현백은 만약 다의홍을 잃는다면, 막부와의 합의에서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막부가 합의한 것은 다의홍이 서규슈 삼국의 슈고가 되는 것이지, 제주현백이나 그의 다른 수하가 규슈의 삼국을 다스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하면 부탁드리겠소. 부디 결단을 서둘러 주시오. 만약 다의홍이 죽었다는 소식이 내 귀에 들려오면, 그때는 내가 이번 일에서 다른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소?”
“…….”
이번엔 몽주가 담담한 어조 중에 냉정한 뜻을 담아 말하니, 히로요의 표정에 일순 긴장이 스쳤다.
오우치씨가 막부의 결정에 따르기로 결정하기까지는 한나절이 더 필요했다.
그들 내부에서는 여러 이론이 제기되었던 모양이지만, 그 어떤 제안도 막부의 제안보다 오우치씨에게 더 나은 이익이 될 수는 없었다.
몽주와 막부의 칸레이가 합의한 것이, 료슌의 죽음으로 무너진 오우치씨의 구상을 일부라도 살려 주는 것이었으니, 오직 막부나 제주현백에 끌려가고 싶지 않다는 강짜만 있을 뿐,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면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 * *
축후성은 오기와 악만이 가득했다.
삼 일간 이어진 쇼니씨의 공성에 저항하며, 수많은 무사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살아남아 싸우는 자들의 피로를 잊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분명 기적 같은 수성이었다.
첫날 6천 쇼니씨 군병의 공성을, 2천의 무사와 축후국에 파견되어 있던 3백여 현백군이 이겨 냈는데, 축후성에 배치한 화포의 위력에 기인한 것이었다.
성벽 위에서 쇄도하는 쇼니씨의 군병을 향해 천뢰탄을 쏘아 대니, 그 터지는 폭발마다 쇼니씨의 군병들 여럿이 박살 났다.
모르긴 몰라도 성벽 아래까지 다가오는 중에 쇼니씨의 군병들 중 1천 이상이 죽거나 곧 죽을 만큼 다쳤을 것이고, 공성이라는 어려운 싸움에 참여하지 못할 만큼 중상을 입은 자들의 수도 그만큼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나, 그럼에도 공성하는 쇼니씨의 병력은 수성하는 다의홍의 병력보다 두 배는 많았으니, 성벽을 넘고자 하는 병력과 직접 싸우는 중에 다의홍의 무사들도 적잖이 죽고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첫날의 공성은 그나마 쉬운 편이었다.
하나, 다음 날 쇼니씨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그 수가 오히려 7천으로 늘어났으니, 다시 화포가 일찌감치 불을 뿜으며 저항하였음에도 더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삼 일째에는 정말 오기와 악으로 버텼는데, 천뢰탄이 다 소비되어 적군이 성벽에 닿기 전에 미리 상하게 하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철구와 돌덩이를 쏘아 보았지만, 적군을 상하게 하는 수는 천뢰탄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다.
때문에 곳곳에서 성벽 위까지 쇼니씨의 군병이 범람하여 육박전을 벌여야 했으니, 성이 함락되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는데, 천만다행으로 마지막에 갑자기 쇼니씨가 퇴군하여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 천만다행한 그 퇴군은 실상 더 큰 위기의 전조였다.
쇼니씨가 물러난 이유가 동쪽에서 오토모씨의 군병이 새로 등장한 탓이었기 때문이다.
영토 회복을 명분으로 오토모씨가 그들의 전력(全力)이랄 수 있는 4천의 군병과 더불어 산과 계곡을 관통하는 좁은 소로로 넘어와 모습을 보였고, 쇼니씨는 자칫 앞뒤로 적을 두게 될 상황을 피하기 위해 물러난 것에 불과했다.
사실 쇼니씨의 입장에서는 지쿠고국이 다의홍의 것이기에 문제지, 그가 아니라면 다른 누구라도, 특히 오토모씨라면 크게 상관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당장은 쇼니씨도 북규슈 삼국을 완전히 장악하고, 안정시키는 것에 진력해야 할 때였으니, 만약 오토모씨가 축후국을 회복하여 다의홍을 축출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여겼다.
덕분에 오토모씨는 전력이 크게 떨어진 축후성을 도모할 수 있었는데, 비교적 느긋하고 침착하게 공성을 준비하였다.
사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축후국은 오토모씨의 것이었으니, 축후국의 호족들 중 여전히 오토모씨에 충성하는 자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앞서 쇼니씨에게 붙었던 구루메현의 호족들이 다시 오토모씨에게 빌붙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쇼니씨에게 대항하던 호족들 중에도 오토모씨에게 투항하거나 저항을 포기하려는 자들도 적잖이 나타났다.
덕분에 안 그래도 쇼니씨와 싸우면서 군력이 크게 떨어진 축후성의 수성 병력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채 1천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 살아남은 현백군과 다의홍의 무사들을 제외하면 축후국 출신 병력은 고작 4백에 불과했다.
1천도 안 되는 병력으로 오토모씨의 병력 4천에 배신한 축후국의 호족들의 병력에 저항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쯤 되자 다시 수하들 중에서 항복하길 권하는 자들이 나왔는데, 하나 그럼에도 다의홍은 거부하였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으니, 하나는 이대로 항복하는 건 살아남더라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현백군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배를 버리듯 포구에 두고, 축후성에서 함께 죽어라 수성전을 치른 현백군으로서는 감탄할 일었다.
하루가 지나 오토모씨가 슬슬 공성을 시도할 움직임을 보이자, 다의홍은 외성을 포기하고 내성으로 모든 군력을 옮기는 결단을 내렸다.
화약마저 떨어져 이제 더 이상 화포를 쏠 일이 없었지만, 단지 화포를 빼앗길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성으로 다 옮겼는데, 그로 인해 정작 식량을 제대로 옮기지 못해 아껴 먹는다고 해도 오 일을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하기야 오 일은커녕 하루를 버티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식량이 많고 적은 건 차후의 문제였다.
아껴 써서 남긴 2백 발 정도의 폭죽을 제외하면, 순전히 창과 칼, 그리고 얼마 없는 화살과 끓인 물 정도가 남아 있는 최후의 저항 수단이었으니, 오토모씨가 독하게 한 번 군력을 몰아서 성을 친다면 지는 게 어려울 상황이었다.
텅 빈 외성을 손쉽게 점령한 오토모씨의 군병들은 내성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외성의 성벽 위에서 내성을 향해 화살을 쏘며 조롱하였으나, 다의홍은 그저 몸을 숨기라 명할 뿐 일절 대응하지 못하게 하였다.
내성이 다소 높은 곳에 있어 성벽 위의 높이도 외성에 비해 조금 더 높았지만, 그런 공격에 일일이 대응할 만큼 화살이 많지도 않았고, 그런 중에 하나의 무사라도 죽거나 다친다면 그만큼 수성은 더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참함과 패배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간이 흘러간 후에 오토모씨의 군병이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다의홍과 축후성의 모든 군병들은 이제 죽을 시간이라고만 생각했다.
한데,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움직이는 오토모씨의 군병들이 내성을 향해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성을 빠져나가 철군하였다.
그제야 자세히 보니, 오토모씨의 군병들이 물러나는 모습이 다급하기 짝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다의홍이 물었으나, 누구도 답하진 못했다.
다만, 며칠 동안 득실거리던 적군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니, 허탈할 정도로 묵직한 안도감을 그제야 체감할 수 있었다.
다의홍이 피로 칠갑된 갑옷을 뜯어내듯 벗어 버리고 주저앉았다.
무사들도, 현백군도 저마다 주저앉아 살아남은 것에 기뻐하였다.
물론, 거기에 환호나 웃음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엉망으로 변한 상태였다.
* * *
홍로급 경함선 35척을 비롯한 40여 척의 함선에서 쏘아 대는 화포의 위력은 당대에서는 확실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쿠젠국의 포구에 있던 쇼니씨의 병력들이 폭발과 화염에 의해 삽시간에 무너져 저마다 살기 위해 내륙으로 도주하였으니, 오우치씨의 군병들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해안을 장악할 수 있었다.
오우치씨는 막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후, 하루 만에 군병을 출병시켰는데, 이미 히고국이 침공당했음을 안 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덕이었다.
물론, 지금 오우치씨의 군력은 북규슈를 돌아 히고국으로 가는 대신, 간몬 해협을 넘어 쇼니씨의 지쿠젠국을 침공하였지만 말이다.
두 번의 도해 작업을 통해, 1만 5천의 오우치씨 군병들이 화포의 엄호를 받으며 지쿠젠국에 쏟아져 들어갔으니, 쇼니씨가 할 수 있는 건 후퇴와 도주뿐이었다.
안 그래도 료슌이 사실상 슈고로서 다스리던 부젠국을 장악하기 위해, 그리고 축후국의 다의홍을 축출하기 위해 병력들이 나뉜 상태였으니, 당장 오우치씨에 대항할 수 있는 병력은 6천여에 불과했다.
지쿠젠국의 해안에 상륙한 오우치씨의 군력은 다자이후를 먼저 쳐서 순식간에 점령하였고, 히젠국으로 도주하는 쇼니씨의 군병을 추격하였다.
현백군 또한 절반은 상륙하여 오우치씨의 군병과 함께하였고, 다른 절반은 간몬 해협을 다시 통과하여 부젠국의 해안을 포격하여 그곳에 있는 쇼니씨의 군병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부젠국에 대한 견제 작업은 자연히 바로 아래 위치한 오토모씨의 분고국에 전해졌으니, 오토모씨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우치씨가 지쿠젠국을 침공하였고, 동시에 막부가 오우치씨와 다의홍으로 하여금 북규슈와 서규슈를 나누어 다스리게 명하였다는 소식도 곧 알게 되자 오토모씨는 결단을 강요받는 상황이 되었다.
즉, 끝까지 축후국을 쳐서 회복하고 이후 제주현백에 저항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물러나 분고국을 지키는 것에 집중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고민을 오래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토모씨는 결국 후자를 선택하였으니, 축후성에서 다의홍과 현백군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던 오토모씨의 갑작스런 철군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오토모씨의 입장에서는 비록 당장 축후국을 회복하고 다의홍을 죽이거나 인질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오우치씨와 연합한 제주현백의 공격에 버틸 수 없다고 여긴 것이었다.
이는 다의홍이 죽을 경우 제주현백이 규슈에 개입할 여지가 좁아지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탓이었는데, 워낙 지쿠젠국을 침공한 오우치씨와 제주현백의 공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놀란 마음에 생각이 좁아진 탓이었다.
그리고 오토모씨가 강요당한 선택은 얼마 후 시마즈씨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다른 점은 시마즈씨는 이미 오우치씨의 히고국을 점령하고, 슈고였던 오우치 히로마사를 전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시마즈씨 내의 갑론을박은 오토모씨에 비해 훨씬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오토모씨처럼 히고국에서 물러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는 의견부터, 히고국에서 버티는 것은 물론, 미리 선수쳐서 축후국마저 점령하고, 그로 인해 크게 늘어난 군력으로 오우치씨와 제주현백에 대항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주전파와 주화파가 서로 목소리를 크게 높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시마즈씨의 결정은 크게 늦어졌으니, 오우치씨의 군력 1만과 현백군이 쇼니씨가 최후의 저항을 감행하고 있는 히젠국에 공성을 시도할 때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 * *
히젠성은 본디 견성(堅城)이었으나, 쇼니씨 내 가독투쟁 중에 이미 공성당하며 크게 상한 적이 있었기에 지금은 수성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반년 만에 다시 화포의 포격을 받은 성벽은 금세 금이 가거나 허물어졌고, 성문은 일찌감치 박살 나 버렸다.
“끌끌끌…….”
쇼니 후유스케는 천추각의 내실에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북규슈의 일통을 이루었건만, 정말 꿈이라도 꾼 것처럼 지금은 히젠성에 갇혀 버렸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꼬…….”
술 한 모금 후에 문득 중얼거리니, 후유스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축후국에서 잃은 4천이 넘는 병력들이었다.
고작 2천여에 불과한 축후성을 함락하는 데 그렇게 많은 군병들을 잃게 될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함락조차 하지 못했으니, 더 우스울 뿐이었다.
물론, 다의홍이 제주현백의 지원을 받아 화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도합 8천이 넘는 병력을 두 차례에 걸쳐 보냈음에도 함락시키지 못할 줄은 몰랐다.
그곳에 보낸 군병들 중 절반이 죽고 크게 다친 탓에, 그만큼 쇼니씨가 오우치씨와 제주현백의 침공에 저항할 여력은 사라졌다.
“아니지. 군병이야 사실 더 징발할 수도 있었으니, 크게 문제는 아니었지. 그럼 화포를 경시한 탓인가?”
다시 중얼거리니, 제주현백이 쓰는 작지만 위력적인 화포가 떠올랐다.
화포만 아니었다면 오우치씨가 아무리 정예를 동원하였다고 하더라도 다자이후를 그렇게 허무하게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지쿠젠국에 상륙하는 일도 어려웠을 것이고, 호족들이 겁에 질려 징병에 응하지 않고, 앞서 징발해 둔 농민군들이 도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어려움에는 제주현백의 화포가 기여한 바가 크다 할 수 있었다.
“아니, 나는 오히려 화포를 너무 경계하였으면 했지, 화포를 경시한 적은 없었지…….”
왜국에서 제주현백이 쓰는 화포의 위력을 가장 먼저 접한 이들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가독투쟁 때, 그의 아우 쇼니 요리즈미가 이곳 히젠성에서 저항했으나, 몇 문 되지 않은 화포로 제주현백이 삽시간에 성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격했고, 그에 크게 놀라워했었다.
그러니 그의 마음에 화포를 경시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실제로 제주현백을 기만하면서 쇼니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막부에 선을 대는 것이었으니, 제주현백의 도발을 걱정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것이 성공하였다면, 제주현백이 료슌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을 명분 삼아 막부의 지원을 얻고, 아마 오우치씨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제주현백을 기만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는 것이군. 끌끌, 차라리 그에게 제안했던 대로 했어야 했나?”
술이 묻은 입술을 움직여 자문하니, 후유스케는 절로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가 제주현백에게 제안할 때부터 그를 기만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으니, 그의 구상에 제주현백과 더불어 규슈를 나누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제주현백이 세력을 갖출 경우, 얼마나 무서워질지 가장 잘 아는 이 중 하나인 그로서는 바로 곁에 제주현백의 세력을 둘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제주현백과 규슈를 나누었다면, 달리 충돌이 없었다 해도, 쇼니씨는 제주현백에 자연히 구속되었을 것이고, 더 시간이 흐른다면 규슈 전체가 제주현백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오우치씨는 이를 모르는 것인가? 내가 이를 깨닫게 해 준다면 오우치씨가 제주현백의 손을 놓을까?”
찰나지간 구사일생의 길이 얼핏 보이나 싶었지만, 쇼니씨는 이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오우치씨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우치씨가 제주현백과 나란히 쇼니씨를 침공했다는 것은, 이미 쇼니씨가 료슌을 살해하고, 오우치 미쓰히로도 죽였다는 사실이 들통났다는 뜻이니, 말 한 마디 붙이는 것도 불가능할 게 뻔했다.
쿠구궁!
이미 두 시진 전부터 계속된 폭음이 문득 크게 들리더니, 천추각 건물 자체가 들썩거렸다.
지난 가독투쟁 때 지붕이 불탄 후 제대로 복구되지 않았기에 더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그때, 그의 장남이 달려와 그에게 소리쳤다.
“아버님, 피하셔야 합니다! 천추각이 불타고 있으니, 언제 무너질지 모를 일입니다.”
아들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가득했으나, 후유스케는 말없이 술만 마시고 눈을 감은 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님!”
“……여기서 피하면 살 수 있겠느냐?”
“…….”
후유스케가 처연히 물으니, 그의 아들은 대답할 수 없었고, 그 침묵에 후유스케의 마음이 한결 더 무거워졌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으니 항복해야 마땅하나, 항복한다고 해도 살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는 후유스케 본인의 목숨을 구하고자 함이 아니라, 쇼니씨 가문의 명맥에 관한 걱정이었다.
오우치씨든, 제주현백이든 누구도 쇼니씨를 남겨 두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으니, 항복을 하든, 끝까지 싸우든 쇼니씨의 멸문은 기정사실이었다.
“아들아, 일족에게 일러 저마다 흩어져 도주하게 하여라. 도주에 성공하거든 성과 이름을 바꾸고, 죽은 듯이 지내라고, 어리석은 가독을 끝까지 원망하며 그 힘으로 살아남으라고 전하여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후유스케가 손짓을 하며 장남에게 물러나라 하니, 장남이 붉어진 눈으로 아버지를 응시하다가 천추각에서 뛰쳐 나갔다.
과연 쇼니씨의 일족 중 누구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후유스케는 그 암담한 생각 끝에 비통한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히젠성이 함락된 건 포격을 시작한 지 한나절 만이었다. 최후의 순간에 쇼니씨의 잔당이 성을 뛰쳐나와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그건 발악에 불과했고, 곧 오우치씨의 군병에게 도륙되고 말았다.
다만, 그 혼란 중에 쇼니씨의 일족들이 탈주를 시도하였는데, 대부분 죽거나 추포되었지만, 극소수는 행방이 묘연했다.
그들이 탈주에 성공한 것인지, 아니면 붙잡힌 일족의 증언대로 가독 후유스케와 더불어 불타 무너진 천추각 안에서 함께 죽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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