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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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니씨의 멸문 과정은 잔혹했다.
지쿠젠국과 부젠국을 얻게 된 오우치씨는 북규슈에서 쇼니씨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버리길 바랐는데, 비단 쇼니씨뿐만 아니라, 쇼니씨를 추종하던 호족들까지도 도려내려 하였다.
보다 빠르게 북규슈의 새로운 영토를 장악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인 듯한데, 사실 이 시대 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보통 호족들은 슈고다이묘의 교체와 함께 말을 갈아타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오우치씨는 규슈의 토박이 가문이 아니기에 호족들을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 더 힘들 것이므로, 아예 전후 공포 분위기를 틈타 호족들의 힘을 빼 버리고자 하는 듯했다.
덕분에 지쿠젠국과 부젠국에서는 한동안 통곡과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힘 좀 쓰던 호족들일수록 가문의 사내들이 통째로 붙잡혀 살육을 당했는데, 정리정돈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한 몽주도 차마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의 학살이었다.
재산 또한 강탈하였는데, 특히 토지는 철두철미하다 싶을 정도로 빼앗았다.
명분이야 이적 행위에 대한 엄벌이라 하면 그만이긴 한데, 몽주가 보기에는 자칫 복수심을 불태우게 만드는 일로 보였다.
사실 오우치씨의 쇼니씨 지우기 작업은 비단 그들이 다스릴 지쿠젠과 부젠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다의홍이 슈고로 임명된 히젠국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는데, 히젠국도 일단 오우치씨의 군병에 의해 점령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몽주가 나서기도 전에 오우치씨의 마음대로 처단을 실시한 것이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몽주는 오우치씨의 처벌에 개입하는 시기를 조율하였다.
오우치씨 역시 일단 쇼니씨의 가신이라 할 수 있는 주요 호족들부터 족쳤기에 몽주는 축후국에 신경 쓰느라 바빠 모르는 척하며 그들에 대한 처단이 시행될 때까지는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굳이 멸문시킬 필요 없는 중소 호족들의 차례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안 것처럼 화급히 오우치씨의 처분에 개입하여 그들을 만류했다.
이는 부담스러운 대호족들을 오우치씨의 손을 빌려 지워 버리고자 함이었고, 살아남은 호족들의 선망을 얻고자 함이었다.
오우치씨 역시 쇼니씨에 크게 지원하던 대호족들을 죽여 분풀이를 하고 후환을 없앤 셈이었기에 뒤늦은 몽주의 만류를 못 이기는 척 받아주었다.
그 와중에 히젠의 대호족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 즉 동산(動産)에 해당하는 재물 대부분은 오우치씨가 가져갔는데, 몽주는 그 또한 그냥 두었다.
오우치씨의 행패(?) 덕에 대호족들의 것으로 남아 있을 토지를 압류할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했고, 한동안 오우치씨와의 관계가 중요한 만큼 괜한 시빗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몽주의 입장에서는 그깟 금은 몇 푼이야 조만간 자신의 것으로 돌아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몽주가 살아남은 히젠의 호족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들 가문의 젊은 일족들이었다.
각 가문마다 두 명씩 특히 그중 한 사람은 가문의 장남이거나 장손인, 15세에서 25세 사이의 사내들을 요구한 것이었다.
몽주는 그들을 제주로 데려갔다가 몇 년 후에 돌려보내겠노라 하였는데, 호족들은 제주현백이 인질을 요구한다 여겼고, 그럼에도 순순히 따랐다.
훗날 에도 시대에 실시된 산킨코타이(参勤交代)라는 일종의 볼모는 본래 가마쿠라 시대에부터 비슷한 제도가 있어서 왜인들에게는 나름 익숙한 것이었고, 몽주가 그것으로 보복 없이 사정을 마무리하려는 것에 오히려 안도한 이들도 있었다.
사실 볼모로서의 역할도 없진 않았지만, 몽주는 호족들이 내놓은 이들에게 도학생(渡學生)이라는, 명예직스러운 명칭을 붙여 주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제주에 건너가 배우는 자라는 뜻이었다.
즉, 몽주는 호족들의 일족을 제주에서 교육시켜 훗날 왜국에서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 속셈이었다.
그들이 반드시 친고려, 친제주 파벌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어차피 앞으로 관료 인재에 대한 수요가 폭증할 것이고, 서규슈에서 나아가 규슈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왜인들 중에서도 관리를 뽑을 수밖에 없었으니, 이참에 물질적 정신적 충격을 주어 몽주의 가치에 물든 관리들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이는 제주에서 슬슬 준비할 교육 제도와 발걸음을 맞춘 것이기도 했다.
물론, 교육 제도 또한 몽주의 구상에서 시작된 것일 뿐, 제주의 백성들이나 교리들이 제청한 건 아니었다.
그들의 시야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제도화된 교육을 받는 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강제로 한글을 배우게 하고, 교리와 바치들에게 보급한 인도-아라비아 숫자가 알음알음 퍼져 나가 쓰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교육 제도에 관한 일은 몽주가 제주로 돌아간 이후에 해야 할 일이었고, 당장 시급한 건 히젠국을 안정시키고, 크게 무너진 축후국을 정돈하며, 이제 다의홍의 것이나, 지금은 시마즈씨가 강점하고 있는 히고국을 어찌 처리해야 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었다.
* * *
“하면 다른 자들은 모조리 도주한 것인가.”
“죄송합니다. 급하게 추포에 임하였으나, 전후에 군병의 수가 줄고 모두 지쳐 있어, 다수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축후성에서 만난 다의홍은 몽주의 물음을 추궁으로 이해하고 사과부터 하였다.
“자네가 미안해할 건 없지. 내가 도운 것이 없음에도 나를 배반하지 않고, 축후국을 끝까지 지킨 것은 물론, 이곳에 있던 현백군을 살리기를 각오하였다 하니, 그 배신자들이 도망치는 것을 다 막지 못하였다 해도 무슨 흠이 되겠는가.”
“송구할 따름입니다.”
다의홍이 놓친 자들이란, 축후국이 쇼니씨와 오토모씨에게 연이어 침략당했을 때, 배신하여 적국에 붙었던 호족들을 의미했다.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몽주나 다의홍이 그럴 이유는 전혀 없었고, 실제로 그 호족들도 축후국이 끝내 버텨 내고, 쇼니씨에 이어 오토모씨도 철군하자 급하게 가산을 챙겨 도주하였다. 몇몇 호족들은 뒤늦게 추격한 다의홍에게 붙잡혔지만, 대부분은 도주에 성공한 것이다.
아마 오토모씨에게 귀순한 것으로 보이는데, 몽주의 입장에서는 분명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가져갈 수 있는 가산을 모두 챙겨 달아났으니, 그만큼 축후국의 재력이 줄어든 셈이고, 쇼니씨와 오토모씨에게 사병을 대주어 싸우면서 줄긴 했지만, 엄연히 도합 1천 수백여에 이를 군병들도 사라진 셈이니, 축후국의 힘이 크게 쇠약해진 것이기도 했다.
하나, 몽주는 그저 배신자들을 처단하지 못해 다소 아쉬울 뿐, 그리 신경 쓸 일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도주 호족들의 대부분을 받아들였을 오토모씨는 당장 재물이 늘고, 쓸 수 있는 군병의 수가 늘어서 좋겠지만, 엄연히 일개 율령국이 유지할 수 있는 군병의 규모에는 한계가 있기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병의 수는 도로 원상복귀가 될 것이고, 그 와중에 재물도 군병을 유지하기 위해 소비되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 전에 오토모씨가 막부에 귀순하거나 무슨 일을 당한다면 오토모씨에게 귀의한 호족들은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거나 사로잡혀 죽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몽주나 다의홍의 입장에서는 꼭 나쁜 일도 아니었다.
배신했거나 다의홍에게 협력을 거부했던 많은 호족들이 도주하자, 자연 그들의 것이었던 토지를 압류할 수 있게 되었으니, 히젠국에서 그랬듯 피바람을 불러일으키지 않아도 절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게다가 끝까지 다의홍에게 협력한 소수의 호족들이 있었으니, 이참에 크게 쓸 가문을 추려 내는 효과도 얻게 되었다.
다의홍뿐만 아니라, 몽주도 그들을 초청하여 상찬한 후, 장차 서규슈를 다스리는 일에 그들 가문이 크게 쓰일 것임을 천명하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도박이 성공한 것에 기뻐하였다.
축후국은 두 번의 연이은 침략으로 엉망이었지만, 다행히 볍씨를 뿌리는 시기가 오기 전에 전란이 끝났고, 또 농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지역도 아니라 몽주와 제주와의 협력이 있다면 빠르게 정상을 찾는 것은 물론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다만, 문제는 히고국이었다.
막부에 의해 다의홍이 히고국의 슈고로도 임한 것도 그렇지만, 서규슈를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히고국은 반드시 얻어야 했다.
규슈의 모양이 사다리꼴인 중에 옆구리가 움푹 파인 생김새였고, 다의홍이 슈고로 임명된 삼국이 그 움푹 파인 곳을 감싸고 있었는데, 히고국이 그 움푹 들어간 부분의 동쪽 대부분, 즉 유명해의 동편을 크게 차지하고 있어, 맞붙은 축후국은 물론, 그 좁은 바다를 통해 언제든지 히젠국, 아니 이제 비전국도 노릴 수 있었다.
따라서 서규슈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히고국은 반드시 얻어야 하고, 히고국을 얻지 못한다면 사실 서규슈를 다스린다고 할 수 없었다.
또 천초탄, 도원만, 유명해로 이어지는 서규슈의 해로를 안정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히고국은 반드시 얻어야 했다.
그러나 히고국을 강점한 시마즈씨는 물러나지 않았다.
다의홍이 얻어 온 소문에 의하면, 몽주와 오우치씨가 연합하여 쇼니씨를 무너뜨리고 그에 놀라 오토모씨가 축후국에서 물러난 후, 시마즈씨 내부에서도 히고국을 두고 논쟁이 제법 크게 있었던 모양인데, 그들의 결정은 결국 히고국에서 버티는 것이었다.
탐보를 실시하니, 히고국에 1만이 넘는 시마즈씨의 군병이 지키고 있었다.
반면 축후국에서 당장 군병다운 자들을 끌어모으면 2천 정도일 것이고, 거기에 현백군 1천 5백 정도가 더해질 뿐이었다.
만약 히고국을 치려 한다면 시마즈씨가 군병을 추가로 보낼 것이니, 아무리 화포가 있다고 해도, 지금 몽주와 다의홍이 가진 군력으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히고국을 포기할 수는 없지. 일단 말로 설득해 보고, 거부한다면 결국 싸울 수밖에 없지 않겠나.”
축후성의 내실에서 몽주와 다의홍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니, 자연 히고국에 대한 처리 방법이 화두가 되었다.
“만약 히고국을 치고자 하신다면, 서둘러 농민들이라도 징집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싸움터에서 도망치지 않게 만드는 데만 한두 달은 족히 필요할 테니까요.”
“어찌 일반 백성들을 그 험한 곳에 보내겠는가. 게다가 징발된 자들이 전장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겠는가?”
“하면 지금 현백이 부리실 수 있는 군병만으로 히고국을 치실 생각이십니까?”
다의홍은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전란 이후 자신에게 충성하게 된 축후국의 분위기가 내심 만족스러웠는데, 만약 제주현백이 히고국을 무리하게 치려 한다면, 축후국이 크게 피폐해질 것이고, 그에 따라 민심이 그에게서 이반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의홍이 우려하는 민심이란 그를 지지해 준 호족들의 여론이었다.
연고도 없는 다의홍이 축후국을 다스리게 되었음에도 그를 따라 준 호족들에게 연이어 노고를 강요한다면 그 지지를 잃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만약 히고국을 무리하게 쳤다가 일이 잘못되어 반격을 당한다면 축후국까지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했다.
몽주는 그런 다의홍의 생각을 표정에서 읽고 실소를 머금었다.
“나를 따랐다가 자네를 따르는 자들을 잃을까 우려하는 모양이군.”
“어, 어찌 그런……! 애초에 축후국의 슈고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제 비전국과 히고국의 슈고에까지 임한 것도 모두 현백의 은혜 덕이니, 어찌 감히 제 사사로운 이익을 두고 현백의 결정에 다른 생각을 하겠습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 제 풀에 놀라 서둘러 변명하는 다의홍을 보며 다시 말하였다.
“맞다. 나는 너를 서규슈 삼국의 슈고로 만들어 주고자 하였다. 하나, 지금 네가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비전국과 축후국뿐이니, 아직 내 뜻을 다 이루지 못한 것이지 않은가.”
“…….”
다의홍은 두 개의 율령국도 감읍할 따름이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대체 어째서 제주현백은 자신을 이처럼 크게 쓰려는 것일까.
현백은 자신에게 충성조차 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런 자에게 현백이 다스리는 제주보다 훨씬 크고 많은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는 이유를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그에게 이로운 일일지라도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곳이 왜국에 속한 곳이고, 현백께서 고려인이시기 때문에 저를 앞세우신 것이라면, 실상 저에게 실권을 주지 않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데, 이미 축후국을 주셨을 때부터 도와주시기만 할 뿐 간섭은 적으시니, 저로서는 현백의 뜻을 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의홍의 솔직한 물음에 몽주는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강아지에게 밥을 주었더니, 어째서 밥을 주냐는 질문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물론 다의홍을 개 따위로 여기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미안하지만, 서규슈는 너의 것이기 전에 나의 것이다.”
“……그, 그렇습니다.”
웃음을 그친 몽주가 그렇게 단언하자, 다의홍이 일순 당황하다가 뒤늦게 수긍하였다.
조금 전에 그가 현백에게 한 물음의 바탕에는 내심 서규슈를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마음이 있었고, 실제로 현백의 처사가 그와 같다고 판단했었는데, 현백의 첫 대답부터가 그것을 거부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주는 그런 다의홍을 향해 실소를 머금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너로 하여금 서규슈를 다스리게 하고자 한 것은 네 말대로 이곳이 왜국에 속한 곳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허수아비를 세워 두고 직접 이곳을 통치한다 하더라도, 이곳이 곧바로 고려의 땅이 되지는 않는다. 같은 말과 같은 풍습을 가진 왜국의 본토와도 합하기를 거부하는 곳이 이곳 규슈인데, 하물며 고려나 제주에 쉽게 응하겠느냐? 그럼에도 나는 언젠가 이곳 서규슈를, 아니 장차 규슈 전체를 진정한 나의 영토이자 고려의 땅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저 성급하게 굴지 않고 길게 보아 도모하고자 할 뿐이지.”
“…….”
“네게 다씨 성을 내리고, 이름도 의홍이라 부르게 한 뜻을 잊지 마라. 너는 왜국에서 태어났으나, 그 피는 고려로부터 왔고, 이제는 고려의 사람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울 것 없다. 너와 너의 후손들이 규슈에서 크게 서고자 한다면 고려인이 되어 나를 따르는 것이 유일한 길일 것이다.”
“제가 오만한 생각으로 현백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음은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서규슈의 삼국만으로도 규슈에서 위태롭지 않을 수 있을뿐더러 제주에 비하면 거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으니, 만약 제게 사심이 깃든다면 현백을 외면하고 독단으로 세력을 세우려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법 속 깊은 생각까지 나오고 있었다. 몽주로서는 내심 반가운 모습이었다. 지금 정말 배신할 계획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위태로운 질문은 오히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몽주는 겉으로는 표정과 말투를 무겁게 하며 대답하였다.
“그야 네가 결정할 일이겠지. 다만, 조언을 하나 해 주마. 만약 정말 나와 연을 끊고 홀로 서고자 한다면, 가급적 빠르게 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규슈와 제주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될 테니까.”
“……?”
다의홍은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홀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오히려 커지는 게 맞다 싶었던 것이다.
그가 고립되어 축후국을 다스릴 때는 분명 제주의 도움이 절실했고, 그 도움이 없었다면 일찌감치 무너졌을 것이다.
하나, 서규슈 삼국을 다스리는 것이 안정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무엇이든 부족함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제주현백이 석상으로서 탐나지 않을 수 없는 기물을 교역하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나, 그것들 대부분이 있으면 좋은 것일 뿐, 통치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니, 얼마든지 끊고자 하면 할 수 있다 여겼다.
그가 보기에 교역이 필수인 것은 제주이고 현백이지, 규슈가 아니었다.
설령 교역의 이문이 아쉽다고 하더라도, 그건 규슈 전체의 손해일 뿐, 다의홍 개인으로서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판단한 것이다.
“후후, 독립의 가능성을 가늠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몽주는 다의홍이 재차 당황하는 걸 보며 다시 실소를 지었다.
시민 계급이 성장하고, 민족주의가 창궐하기 전에 특정 지역의 소속 국가는 그 지역 지배자의 결정에 따랐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그 경향성에 약간 차이가 있고, 동양의 경우 예외적인 현상이 좀 더 많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서양과 비슷한 봉건적 영주 제도가 발전한 왜국의 경우에는 거의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하나, 이는 시민 계급의 성장 이전의 일이니, 만약 시민 계급이 일정 수준의 힘을 얻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지역의 정치적 지배자들의 선택만으로 소속이 바뀌기 어려워진다.
이익에 따라 시민들 나름의 선택이 있고, 그것을 요구할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시민(市民)의 첫 번째 사전적 정의는 도시에 사는 사람이지만, 인문사회적인 지평에서 시민은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 다양한 시민의 의미 중 몽주가 염두에 두는 시민의 뜻은 그리스 아테네의 시민 이후, 그리고 민주주의의 보편화 이전 시기의 시민으로, 결국 부르주아지(bourgeoisie)와 대동소이한 것이다.
이를 달리 유산 계급(有産 階級)이라 칭한다면, 상공업을 통해 부를 쌓은 자들을 의미하니, 이들은 자신들의 부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후에 아예 정치적 권력을 손에 넣기에 이른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혁명들은 바로 유산 계급의 힘에 의해 생기고, 성공했으니, 그때는 이미 나라 자체를 뒤집을 만큼 힘을 얻은 것이고, 그보다 훨씬 전부터 정치적 지배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힘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몽주가 서규슈에서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시민의 육성, 즉 제주와의 교역을 통해 부를 쌓는 자들을 키우려는 것이었다.
그는 다의홍과 직접적으로 교역하지 않고 그저 상인들에게 세금을 얻게 할 것이니, 교역의 영향력에 크게 눈뜨지 못한 다의홍은 단지 손쉽게 통치 자금을 얻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하나, 그사이 서규슈에서 성장하는 시민들의 이익은 제주와 합치하게 될 것이니, 다의홍이나 다른 지배자가 시민의 힘을 체감하게 될 때는 이미 다른 선택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거기에다 몽주는 서규슈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몽주식 ‘산킨코다이’를 실시하여 지속적으로 문화적 침략을 도모할 것이니, 만약 다의홍이 홀로서기를 도모하고자 한다면 시민과 백성들로부터도 고립되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 시간이 적잖이 필요하기에 다의홍에게 만약 그로부터 독립하고자 한다면 일찍 하라고 조언 아닌 조언을 한 것이었다.
물론, 형성되고 육성된 시민들이 반드시 몽주의 뜻에 부합하게 움직이리란 보장은 없었고, 다의홍이 의외로 빠르게 시민의 정체에 눈을 떠 그들의 대변자가 될 수도 있었다.
계급적 피지배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시민들이 정치적 지배자에게 굴복할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하나, 몽주는 시민의 형성과 그들의 경제적 성장, 그리고 정치적인 권력의 획득은 역사적인 흐름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는 몽주가 살고 있는 현대에서 바라보는 역사가 그러함은 물론, 공부 안 하던 ‘중고딩’ 때라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으나, 첫 천몽 이전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는 정도는 알기에 보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시민을 육성하고, 그들의 선택을 받는 것.
이는 비단 규슈에서만 진행시킬 일은 아니었으니, 제주와 장차 자신의 세상이 될 모든 곳에서 일어날 일이고, 그래야 하는 일임을 몽주는 새삼 실감하였다.
당대 세상의 구태를 이겨 내는 힘은 단지 군사력으로 점령하고, 그 점령지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니, 스스로 구태에 저항하고, 더 나은 체제와 이익을 선택할 수 있는 자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훗날 지금의 구태를 뒤집어엎은 그들이 클래식한 자본주의의 끔찍한 폐단을 일삼는 새로운 구태의 장본인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기에 그에 대한 안배 또한 강구해야겠지만, 몽주에게는 아직 너무 먼 미래의 일이고, 어쩌면 그의 손에는 쥐어지지 않을 문제일 수도 있었다.
몽주와 다의홍은 한참이나 말없이 술잔만을 들었다 놓으며 저마다 생각에 빠졌다.
다의홍은 제주현백의 뜻한 바를 가늠하느라 바빴고, 몽주는 그의 세상을 확장하고, 견고하게 구축하는 방법을 깨달은 듯하여 그것을 정리하느라 입을 열 틈이 없었던 것이다.
“현백…….”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다의홍이었다.
그는 생각에 빠진 현백을 잠시 기다려 주다가 그를 현실로 불렀고, 지금은 다급히 정해야 할 일이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그 다급히 정해야 할 일이란, 만약 히고국을 무력으로 얻고자 한다면 군력을 어디서 구하느냐는 것이었다.
몽주는 딴생각이 깊었던 것에 멋쩍어하다가 다의홍의 물음에 답하였다.
“만약 시마즈씨가 끝내 물러나길 거부한다면, 군병을 빌려서라도 싸워야겠지.”
“누구로부터 빌린다는 것입니까.”
“지금 우리가 군병을 빌릴 곳이 한 곳뿐이지 않은가.”
몽주가 의미한 곳은 오우치씨였고, 다의홍도 바로 알아들었다.
“하나, 오우치씨가 군병을 쉽게 보내 주겠습니까? 가독의 삼남이 시마즈씨로 인해 죽었음에도, 현백께서 히고국마저 얻는 것이 내키지 않아, 복수를 포기한 게 오우치씨 아닙니까.”
다의홍의 말대로 오우치씨는 쇼니씨를 몰락시킨 후 동원한 군력으로 지쿠젠국과 부젠국의 장악에 진력할 뿐, 히고국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가 다의홍이 추측한 것과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오우치씨가 군병을 쉽게 빌려 주지는 않을 것임은 분명했다.
“대가를 치르면 빌려 주겠지.”
“…….”
몽주의 말에 다의홍은 오우치씨가 엄청난 대가를 요구할 것이라 걱정하였는데, 몽주는 그다지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 * *
이틀 후에 시마즈씨가 최후의 설득마저 거부하자, 몽주는 곧바로 오우치씨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군병을 빌려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한 것으로 사절에게 쥐어진 것은 작은 상자 하나였다.
다의홍은 그 작은 상자 안에 귀중한 보석이라도 잔뜩 들어 있나 싶었지만, 몽주는 장난스럽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오우치씨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사절을 보낸 다음 날 곧바로 사절이 돌아왔으니, 오우치 히로요의 서찰이 있었다.
그 서찰에 담긴 내용은 몹시 간단했는데, 그것을 본 몽주는 파안대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탕 100상자를 준다면, 1만의 군병을 보낼 수 있소.’
앞뒤의 쓸데없는 말을 자르면 핵심은 딱 그것이었다.
“그, 그 상자에 든 것이 진정 사탕이었습니까?”
“하하, 그렇지. 하얗고 고운 사탕이었지.”
“세상에…….”
다의홍은 반응은 1만의 군병을 빌리는 대가로 사탕 100상자는 결코 적지 않다는 쪽에 가까웠다. 몽주로서는 다시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몽주가 함대에 실린 사탕 상자들 중 하나를 다시 가져오게 하여 다의홍에게 보이니, 그의 눈이 뒤집힐 것처럼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하얀 황금’의 위력이랄까.
사탕, 즉 이 시대의 설탕은 단순한 감미료를 넘어, 마치 영험한 비약과 같은 취급이었다.
특히 정말 새하얗지는 않지만, 충분히 눈처럼 하얗게 보일 만큼 깨끗하고, 고운 설탕은 생전 처음 보았으니, 더욱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번 맛을 보겠나?”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좋아하는 것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반응으로 되물은 다의홍에게 몽주가 고개를 끄덕여 주니, 그가 조심스레 엄지와 검지로 설탕 가루를 약간 집어 들고는 한 톨이라도 떨어뜨릴까 다른 손으로 받쳐 들어서 입 안으로 가져갔다.
그러곤 혀에서 녹여 그 맛을 보더니, 다의홍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본 몽주가 웃음을 애써 참고, 같이 있던 교리들도 고개를 돌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어야 했다. 사실 교리들도 처음 사탕무에서 설탕을 뽑아내었을 때 이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지, 진정 천상(天上)의 맛이 이와 같을까 싶습니다!”
“하면, 사탕 백 상자로 일만의 군병을 빌리는 것이 이상하진 않겠지?”
“오히려 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음, 그런가? 하하.”
몽주는 다시 실소하였다.
그 역시 사탕으로 군병을 빌릴 수 있을 것이라 여기긴 했다. 다만, 사탕의 교역을 요구하는 정도를 예상했는데, 고작 100상자에 1만의 군병을 보내 준다니,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다의홍은 오히려 사탕 100상자가 과하다 하니, 몽주는 자신이 설탕이 가진 위력을 너무 과소평가하였나 싶었다.
하여, 다시 오우치씨에게 사절을 보내길 50상자를 먼저 주고, 만약 히고국을 점하면 50상자를 마저 주겠다고 하였는데, 오우치씨의 대답은 당일 밤에 도착할 정도로 더 즉각적이었다.
물론 대답은 ‘좋다!’였다.
몽주는 마치 유리 구슬을 비롯한 몇 점의 물건으로 맨해튼 섬을 얻었다는 네덜란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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