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56)
* * *
오우치씨의 가독 히로요가 보낸 1만의 군병들은 기대 이상으로 정예였다.
철저히 무장되었고, 훈련도 제대로 받은 것을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 군병을 거느리고 온 장수가 몽주에게 공손히 말하기를, 반드시 히고국을 점령할 것이라 하였다.
몽주는 그 말의 진의를 어렵지 않게 이해했으니, 꼭 히고국을 점령하여 사탕 50상자를 마저 얻어 내겠다는 뜻이었다.
사탕 때문에 장수가 히로요 앞에서 승전을 단단히 다짐하였을 것이 안 봐도 훤했다.
몽주로서는 속으로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덕분에 정예 1만의 오우치씨 군병을 얻었기에, 몽주는 다의홍과 더불어 오우치씨의 장수와 전술을 논하였고, 다음 날 곧바로 히고국을 향해 출병하였다.
축후국에는 2천의 축후국 출신 군병들을 남겨 지키게 하고, 오우치씨의 1만 군병과 다의홍의 3백 무사들이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히고국으로 접근하였다.
몽주 또한 현백군 중 절반은 축후국에 남기되, 다른 절반과 함께 20척의 함선을 타고 다의홍의 진군 속도와 나란히 바다를 통해 히고국을 향했다.
본디 바다나 강을 따라 적국에 들어가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인데, 적의 기습을 받을 경우, 뜻하지 않게 배수진을 강요받아 몰살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몽주의 함대가 바다에서 화포로 엄호해 줄 수 있는 이점이 있어, 이 경우에는 오히려 더 안전하였다.
이제 관건은 시마즈씨의 대응이었는데, 몽주는 내심 시마즈씨가 순순히 물러나 주길 바랐다.
히고국을 정복하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 굳이 지금 시마즈씨와 크게 충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무리하여 시마즈씨를 몰락시켜도 몽주와 다의홍이 당장 남규슈마저 석권할 수는 없었다.
영토와 세력을 확장한다는 건 확장의 충격과 부담을 감당할 여력이 갖춰진 후에 시도해야 하는 법이다.
역사에 정복당해서 망한 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복한 것이 문제가 되어 무너진 나라도 많았다.
몽주가 가늠하기에 서규슈 삼국을 ‘소화’시키는 것도 당장은 벅찬 수준이었다.
시마즈씨의 율령국들은 언감생심이었고, 어차피 히고국만 얻을 상황이라면 싸움 없이 얻는 것이 더 나은 건 당연했다.
시마즈씨 역시 세작을 뿌려 상황이 돌아가는 소식은 알고 있을 테고, 적어도 축후국에 오우치씨의 지원군이 도착한 것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시마즈씨의 대응은 무엇일까.
싸움인가? 퇴진인가?
시마즈씨의 결정을 알게 된 건 출병한 바로 그날 밤이었다.
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군병들이 축후국과 히고국의 경계에 해당하는 작은 강을 건너 밤을 보내기 위해 군진을 펼치고 있을 때, 시마즈씨의 사절이 도착한 것이었다.
함대와 함께 있다가 그 소식은 들은 몽주는 작은 배로 뭍에 올랐고, 급히 마련한 군막 안에서 시마즈씨의 사절을 만날 수 있었다.
사절 중 한 사람이자 대표인 자는 약관의 젊은이었다.
“시마즈 고레히사(島津伊久)? 혹시 가독의 아들인가?”
“그렇습니다. 장남이지요.”
‘오호, 배짱 좋은데?’
몽주는 다의홍과 탁기 등을 훑어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며 미소를 보였다.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뻗대는 하룻강아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이 히고국을 점령하기 위한 군의 진지임은 알고 온 것인가?”
“물론입니다. 가독과 상의하여 온 것이니까요.”
“오호, 이제 보니 시마즈씨가 제법 패기 있는 가문이 아닌가. 죽을 수도 있는 곳에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나, 그것을 따르는 아들이나 참 대단들 하군.”
감탄 반, 비아냥 반의 느낌으로 말하니, 고레히사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하나, 저나 가독이시나 모두 제주현백께서 서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였기에 이곳에 온 것입니다.”
“확신?”
“그렇습니다. 제주현백께서 이곳 규슈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로 남긴 여러 행적들을 볼 때, 결코 이룰 수 없는 무리를 감행하지 않았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욕심을 부리셨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확신한 것입니다.”
“하면, 이번에 내가 어디까지 욕심을 부릴 것이라 생각하는가?”
“이곳 히고국까지가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그 이상을 노리신다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현백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몽주는 표정을 고쳐 웃음기를 지웠다.
어려운 예상은 아니지만, 어린 녀석이 자신의 속을 다 꿰뚫고 있다는 듯 말하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런 몽주도 이제 겨우 23세로, 고레히사와 별 차이가 없었다.
괜히 없던 변덕이 가슴속에서 들썩이는 걸 애써 억누르며, 몽주는 차갑게 말하였다.
“네 말의 맥을 짚어 보고, 또 네가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다 여기는 걸로 봐서는, 시마즈씨는 히고에서 물러날 생각인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다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청? 정녕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있습니다. 군졸을 하나라도 아끼셔야 하지 않습니까?”
몽주는 그 말에 실소하였다. 몽주의 현백군과 다의홍의 주력 무사들의 규모가 작음을 두고 한 말인 듯했다.
참 얄미운데 틀린 말도 아니니, 짜증이 웃음으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일단 들어나 보지. 무엇을 청하려는 것인가.”
“화포의 시험 방포를 견학하고자 합니다. 그리해 주신다면, 방포 이후 히고에서 시마즈씨는 곧바로 물러날 것입니다.”
“……?”
몽주는 이것들이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잠시 혼란스러웠다.
혹시 시험 방포를 구경하는 것을 틈타 화포를 강탈하거나, 파괴하려는 속셈인가 싶었지만, 오우치군과 현백군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또 그런 일을 수행할 정도로 많은 자들을 견학에 참석시킬 것도 아니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화포를 가까이서 관찰하고, 시험 방포를 견문하여 시마즈씨에서 화포를 제작할 속셈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런 거라면 애초에 걱정할 거리도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 강철 화포의 제조가 가능했다면, 왜국에는 이미 강철 화포가 지천에 널려 있었을 것이다.
물론, 시마즈씨와 그 가신들이 단체로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설에 생각이 닿았으니, 몽주는 다시금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시마즈씨 내부에서 주전파와 주화파가 크게 다투고 있는 모양이군.”
“소문대로 영명하시군요. 하신 말씀에 틀림이 없습니다.”
고레히사는 곧바로 수긍하고는 말을 이었다.
“현백께서는 서국에서 종회무진하시며 여러 번 싸움을 하셨고, 그때마다 믿기 어려운 전공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현백께서 쓰시는 화포와 화약에 대한 소문도 널리 알려졌지요. 때문에 이미 가독께서는 규슈의 정국이 예상과 달리 흘러감을 느끼고, 우리 시마즈씨가 히고국을 계속 다스리기 어려움을 파악하셨습니다. 하나, 현백에 대한 소문을 그저 뜬소문만으로 치부하며, 끝까지 싸우길 주장하는 가신들이 적지 않고, 가독께서도 그들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어 순순히 히고성에서 나가고 싶어도 그러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니, 우리 군이 무력시위를 겸한 방포 시험을 통해 주전파의 의지를 꺾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건가?”
“바로 그것입니다.”
시마즈씨의 당대 가독 모로히사도 제법 영악한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가독이 결정을 강행한다면, 가신들 중에 싸우길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 하더라도 뜻대로 물러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그렇게 한다면 가독에 대한 주전파 가신들의 불만이 남을 수 있으니, 소문의 화포가 가진 위력을 보임으로써 주전파들의 기를 꺾고자 하는 의도인 것이 분명했다.
“내가 왜 시마즈씨의 가독을 도와야 하는지 모르겠군. 이대로 군을 몰아 싸운다면 시마즈씨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고, 운이 좋다면 가독과 가신들마저 죽이거나 사로잡을 수 있으니, 훗날을 대비해서라도 오히려 그러는 것이 이익 아닌가.”
몽주가 슬쩍 야심을 흘리니, 고레히사가 옅은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남규슈마저 노리실 마음이십니까?”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은가?”
“제가 보기에 지금 이곳에서 훗날을 대비하실 수 있을 만큼 빠른 시기에는 불가능할 겁니다.”
“가능할 수도 있지.”
몽주가 냉랭한 시선으로 압박하였으나, 고레히사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현백, 우리 시마즈씨가 사쓰마국을 비롯하여 남규슈의 여러 나라를 다스린 지 250년이 넘습니다. 규슈의 어떤 명문가보다도 오래전부터 우리만의 기반을 확립하고, 그 세력을 꾸준히 키웠지요.”
고레히사가 가문의 역사를 강조하며 말하니, 남규슈 삼국에서 시마즈씨는 완전히 토착화되었음을 강조하였다.
맞는 말이긴 했다. 가마쿠라 막부를 시작으로 무사 가문 위주의 봉건적 영주제가 시작된 일본 역사에서 시마즈씨는 숱한 역사적 변천을 이겨 냈고, 훗날 메이지 유신 때까지 그 가세를 이어 나간 얼마 안 되는 가문들 중 하나였다.
당대에서만 봐도 규슈의 다른 율령국들은 여러 가문의 손에 오고 갔으나, 남규슈의 삼국인 사쓰마국, 오스미국, 휴가국은 대대로 시마즈씨의 것이었다.
잠시 흔들린 적은 있었어도 언제나 금세 시마즈씨의 것으로 회복되었다.
250여 년 동안 지방 호족과 연이 얽혀 범시마즈씨를 형성하였을 것이고, 이해관계 또한 정리되어 공동 운명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일반 백성들 또한 지배 세력의 변화가 빈번한 다른 지역의 백성들과는 달리, 시마즈씨에 대한 친근함과 안정감이 클 것이니, 아마도 충성심과 유사한 형태의 심정을 띠고 시마즈씨를 따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마즈씨로부터 남규슈를 빼앗고자 한다면, 둘 중 하나는 가능해야 했다.
시마즈씨가 절로 허리를 굽히고 복속할 정도로 거대하고 강력한 세력을 만들든지, 아니면 일거에 시마즈씨를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도려내 버리든지.
어느 쪽이든 지금 몽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리 빠른 시기에 가능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물론, 그 빠르고 늦음에 대한 기준은 몽주와 고레히사 사이에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몽주는 이제 괜한 기싸움 따위는 그만두어야 할 때임을 느꼈다.
어차피 고레히사가 전해 온 시마즈씨의 뜻은 몽주가 바라던 것과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좋다. 시험 방포를 해 주지. 보고 난 후에는 저항할 의지가 일절 남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보여 주마.”
“하면, 견학을 오고자 하는 자들을 몇 명까지 허락하실 것입니까?”
“얼마든지 오라 하라. 많이 오면 올수록 나 또한 다른 생각을 품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화포의 방향만 틀면 꽤 큰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터이니.”
몽주가 실소를 머금으며 말하니, 고레히사 또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레히사가 돌아가고 밤이 지나 날이 밝자, 현백군이 머물고 있는 군진 앞으로 스무 명가량의 인물들이 다가왔다.
그들의 면면을 살피니, 몇몇은 가신이라 할 만한 자들이었으나, 대부분은 시마즈씨를 위해 일하는 관리들이거나 장수들이었다.
물론, 시마즈씨의 가독 모로히사나 직계 가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제 몽주가 막판에 슬쩍 흘린 말에 경각심을 크게 가진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견학하려는 자들이 도착하자, 현백군은 미리 준비한 대로 시험 방포를 해 주었다.
해안 가까운 곳에 정박한 홍로급 경함선 한 척에서 일제히, 견학자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해안에 천뢰탄을 장전한 화포를 방포하니, 해안에 모래 분수라도 터진 양 모래와 흙더미가 허공으로 연달아 치솟았다.
그렇게 총 마흔 발 정도 쏜 후에 한 화포가 슬쩍 포구를 비틀어 방포하였으니, 화승이 짧게 조절된 천뢰탄 하나가 허공 높은 곳에서 폭발하였다.
그 터진 허공이 견학자들의 바로 머리 위는 아니었으나, 앞선 탄착 지역보다 훨씬 가까운 곳의 상공이었기에, 공중에서 터진 천뢰탄의 파편과 철편이 후두둑 견학하던 자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물론 수백 미 위에서 터진 터라, 지면에 떨어질 때는 이미 살상력을 잃었지만, 시마즈씨의 견학자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안 그래도 해안가의 땅가죽을 벗길 듯한 화포의 기세에 몸이 움츠러들었는데, 하늘에서 터진 천뢰탄의 파편이 머리 위에 떨어지니 기겁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뒤쪽 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던 몽주는 그쯤에 견학자들에게 다가갔다.
“지금 본 것을 모로히사와 고레히사에게 그대로 전하라. 그리고 다음 번에 다시 시마즈씨와 대적하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 너희가 그랬듯 맘 편히 방포를 구경할 수는 없을 것임도 분명히 전하라. 알겠느냐?”
몽주가 뒷짐을 지고 오만한 태도가 가르치듯 말하자, 견학자들 중 다소 발끈하는 기색을 보이는 자도 있었지만, 그조차도 딱히 말문을 열진 못하였다.
몽주와 다의홍이 히고성에 무혈입성한 것은 견학자들이 돌아가고 두 시진이 지난 후였다.
입성하면서 스친 마을에서 본 왜인들이 새로운 지배자를 향해 몸을 조아렸지만, 간간이 고개 숙인 중에 눈을 올려 몽주와 다의홍을 살피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두려움과 경계가 가득했으니, 그것을 충성과 지지로 바꾸는 것이 앞으로 몽주와 다의홍이 해야 할 일이었다.
* * *
몽주가 다의홍과 더불어 히고성에 입성한 후, 며칠 동안 앞으로 서규슈를 다스리는 문제를 논의하며 제주와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계획을 세울 무렵, 고려의 중란도 일단락되고 있었다.
그 마무리의 발단은 물론 요동공이 그의 군을 몰아 요동으로 돌아간 것이었고, 전개는 수시중을 돕던 세족들 중 여러 가문들이 영공에게 항복하고, 귀순하길 청한 것이었다.
전체 세족들의 수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수였으나, 대부분 중란의 전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대형 가문들이 먼저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려는 움직임이었으니, 그 파급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기울어진 전세(戰勢)를 바쳐 세우는 역할을 해야 할 동량 같은 세족들이 먼저 발을 빼고 제 살 길을 도모하니, 중소 세족들도 덩달아 영공의 당여들에게 선을 대려고 난리를 치게 된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위기는 오직 수시중만의 것이었으니, 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의 군진에서 도주하는 세족들의 사병이 늘어만 갔다.
그 일련의 흐름들을 모를 수가 없는 영공과 경흥후가 최후의 일격을 위해 출병한 것은 물론이었다.
백주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수시중을 한 차례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수시중의 군대를 박살 내었고, 그렇게 흩어진 군대는 그대로 사라져 다시 뭉치지 못했다.
연합군이 워낙에 콩가루처럼 단합되지 못한 데다, 이미 그 사병들의 주인인 세족들이 수시중으로부터 도주하라 명을 전한 탓이기도 했다.
그렇게 군대가 사라지자, 수시중은 사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망쳐야 했는데, 막상 수시중이 거느린 사병들 중에서도 도망친 자들이 적지 않아, 소수의 심복과 당여들만 데리고 도주하는 셈이었으니, 수시중의 꼴이 참으로 볼품이 없었다.
백주에서 서북으로 달려, 그들이 장연군(현 룡연군과 장연군)의 해안에 닿았으니, 그곳이 바로 장산곶이었다.
“다행히도 배를 준비해 두었구나…….”
며칠 사이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수척해진 수시중 이인임이 어느 작은 포구에서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세태가 수상하기 그지없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고자 당여를 보내 그곳에 배를 준비해 두었는데, 천만다행으로 당여가 배를 마련한 것이었다.
문제는 당여가 마련한 배가 단 한 척뿐이고, 크기도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고작 당도리 한 척으로는 수시중과 더불어 도망쳐 온 이들을 모두 싣지 못하였다.
혹 다른 배를 더 구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중란으로 어지간한 배는 모두 징발해 간 터라, 어민들이 생계를 이을 어선도 없는 상황에서 큰 배를 또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추격당하는 와중이라 다른 고을에까지 가서 배를 구해 볼 여유조차 없었으므로 당여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수시중의 곁에 배를 마련한 당여가 다가왔다.
그는 바로 이곳 장연군의 세족인 노숙진이라는 자였다. 장연 노씨(張淵 盧氏)는 본래 황해도 일대에 제법 세력을 갖춘 세족이었는데, 몇 년 전 왜구가 황해도를 크게 침탈하였을 때, 거의 망할 뻔했다.
그때 노숙진이 장연 노씨의 가주로서, 이인임을 찾아가 충성을 맹세하며 가문을 살려줄 것을 청하였기에 장연 노씨의 토지를 얼마간 받는 대신 그의 가문을 연명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때의 인연으로 노숙진은 이인임을 따르게 되었으니,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 연을 맺은 당여는 아니었다.
하나, 그의 세족이 이곳 장연군에 뿌리가 있는 터라, 그나마 배를 구하기 쉬울 것이라 여겨 일을 맡겼는데, 비록 한 척이었지만, 다행히도 어려운 중에 배를 구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무척 대견하였다.
하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니, 노숙진이 은밀히 말하길,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하였다.
“배는 좁고 사람은 많으니, 마땅히 훗날을 함께 도모할 자들만 선택하시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노숙진의 조언에 이인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모두들 같이 생사를 넘었던 당여들이건만 이중 누구를 선택한단 말인가.
하나, 그것이 의롭지 않다 여기면서도 이인임의 머릿속에서는 선별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선별을 하니, 이인임의 심복들 외에 배에 탈 수 있는 당여들은 고작 열에 불과했고, 심복들로 하여금 그 당여들에게만 은밀히 배에 먼저 짐을 실으라 전하였다.
하나, 그 움직임은 이내 다른 당여들의 눈에 포착되었고, 그들은 크게 분노하여 이인임에게 따졌다.
“우리를 두고 가시려는 겁니까? 저희는 신돈에게 맞아죽게 내버리시려는 겝니까?!”
“이것이 오랫동안 충성한 대가인 것이오? 말을 좀 해 보시오, 수시중!”
그들은 급박하게 소리치며 대들었으나, 이인임의 심복과 사병들이 그들을 막아서니, 가복들도 거의 데려오지 못한 당여들로서는 더는 대설 수 없었다.
그렇게 소란한 가운데 이인임이 마침내 배에 올라 포구를 떠나니, 포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그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고함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신돈이라 한들 저들의 집안을 모조리 도륙하겠습니까? 훗날 고려에 돌아오셔서 저들의 자손을 다시 중용하시면 지금의 일은 잊힐 게 분명합니다.”
노숙진이 뱃전에 선 이인임을 위로하였으나, 이인임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오히려 거슬렸다.
당여들을 골라 살리기로 결정한 것은 자신이었으나, 그것을 조언한 자는 노숙진이었으니, 괜히 그에게 책임을 돌리고픈 마음이 든 것이다.
사실 노숙진은 배에 탈 만큼 이인임과 가깝고, 중요한 당여는 아니었으나, 노숙진이 그 배를 마련하였고, 배를 움직이는 사공들도 모두 노숙진을 따르기에 어쩔 수 없이 태운 것이었다.
그러니 이인임이 속으로 노숙진에게 얄미운 감정을 더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런 마음을 겉으로 표현할 만큼 이인임이 우둔한 자는 아니었다.
그저 걱정인 것은 다시 고려로 돌아올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명국이 언젠가 고려에 크게 관심을 둘 것이니, 그때를 기다리시면 될 것입니다.”
“하여, 명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 다 아는 것이니, 굳이 말해 줄 것 없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노숙진에게 대꾸하니, 그가 잠시 이인임을 곁눈으로 보다가 사공들에게로 물러났다.
홀로 남은 이인임의 입에서는 한숨이 연거푸 새어 나왔다. 일단 목숨을 구한 듯한데, 그렇다고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는 막막했다.
그저 명국의 사정이 이인임 자신의 운명에 이익이 되길 바랄 따름이었다.
하나, 고려 중란이 일단락되는 흐름은 이인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배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밤에 식사를 한 후,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잠에 빠진 이인임이 모르는 사이, 뱃머리는 서쪽이 아닌 북쪽으로 돌아갔다.
누군가 흔드는 통에 이인임이 겨우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한참 전에 밝아 있었고, 그의 가물가물한 시야에는 낯익은 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꼴이 참으로 우습게 되셨소이다, 수시중.”
“…….”
흰 수염이 인상적인 노장이 콧웃음을 치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다름 아닌 요동공 최영이었다.
이인임은 멍하니 시선을 돌리다가 요동공의 곁에 있는 노숙진을 발견했다.
“저도 그저 살 길을 선택하였을 뿐입니다.”
그가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담담히 변명하니, 이인임의 멍한 머리도 슬슬 상황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운명의 종막을 직감하곤, 벌벌 떨리는 입술을 애써 움직인 이인임이 요동공에게 물으니, 그 말투부터가 참으로 처연했다.
“이, 이제 완전히 끝난 것이오?”
“그렇소. 적어도 수시중은 이제 끝이오.”
요동공이 나직한 목소리에 단호함을 담아 선언하였고, 곧바로 수하들로 하여금 이인임을 포박하라 명하였다.
건장한 군병들에게 묶여 선실에서 끌려 나오니, 중천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이상할 정도로 심하게 눈이 부셨다.
아직 그에게 살 날이 며칠은 더 남아 있었으나, 아마도 그것이 사실상 마지막으로 맛본 이승의 태양이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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