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57)
* * *
부스럭.
천 뭉치를 집던 손이 멈칫하였다. 습관이 되었던 터라, 더는 할 필요가 없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천 뭉치를 펼치니 ‘死’라고 적힌 복면이었다.
1년 반 남짓 집밖에서는 늘 쓰고 다녀야 했었는데, 오늘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은승업…….”
문득 중얼거리니, 그것은 그에게 새롭게 내린 성과 이름이었다.
천오 은씨(川五 隱氏). 천오는 제주 홍로현에 있는 그의 집이 닿은 길인 천오로(川五路)에서 딴 것으로, 주소지 정도의 의미에 불과했고, 은씨 역시 숨길 은(隱)을 써서 그가 세상에 죄를 지어 숨었던 자였음을 은근히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름인 승업(承業) 또한 업을 잇는다는 의미이니,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뜻 정도였다.
성과 이름 모두 그에게 결코 스스로가 어떤 자였는지를 잊지 말라는 경고와 같았으니, 어떤 면에서는 씁쓸하기도 하였다.
하나, 그런 씁쓸함은 굳이 찾아 만들지 않는 이상 존재감도 없었고, 그는 그것이 그저 감읍할 따름이었다.
장사를 하다 학리에게 수탈당하였고, 어떻게든 회생해 보겠노라 왜국과 무역을 하려다가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버렸다.
고려를 배신한 짓이고, 고려인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짓이었으나, 이기와 독기에 마음이 물든 그는 마음속 일말의 죄책감마저 외면한 채 왜구들을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천벌을 받아 제주현백과 조우하였으니, 그는 사로잡혔고, 제주 관청 앞에 칠 일간 거꾸로 매달린 채 온갖 조롱과 해코지를 당했다.
죽지 않은 것이 신기했고, 그 스스로도 죽었다 여겼건만, 명줄은 길게 타고난 덕인지 다시 눈을 떠 목숨을 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것은 죽을 사(死) 자가 박힌 복면이었으니, 그 후 삼 년간 그는 죽은 사람으로 지내며 제주현백을 대신하여 왜인들과 말을 나누는 일을 해야 할 운명이었다.
처음에는 죽을 맛이었다.
복면을 쓴 자신을 모든 이들이 괄시하였고, 제주현백을 따르면서 그의 입을 대신함에도 누구도 그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였다.
하나, 제주에서 보고 들은 것들, 그리고 제주현백을 따라 왜국에서 경험한 것들은 서서히 자신이 얻은 행운에 비하면 타인의 경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저 고려에 또 누가 있어, 바다를 무대로 고려와 명국, 그리고 왜국을 마음껏 오가며 세력을 펼치고, 힘을 과시할 수 있겠는가.
제주현백이 때로 스스로를 책망하고, 아직 부족하다 한숨을 쉬는 것을 몇 번 지켜본 적도 있지만, 그가 보기에 제주현백은 이미 충분히 대국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제 겨우 스물셋에 불과했으니, 앞으로 창창한 그의 미래를 생각하면 후에 얼마나 큰 인물이 될 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인물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으니, 흥분과 전율에 몸서리칠 정도였다.
일개 고을 수령에게 수탈당했던 힘없는 장사치이자,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밖에 모르고 살던 소인배였던 그에게는 너무나 큰 행운인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얼굴 대신 ‘死’가 박힌 복면을 내밀고 살아도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한데, 어젯밤 히고국에서 축후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현백께서 그를 불렀으니, 그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말을 듣게 되었다.
“이제 복면을 쓰지 않아도 된다. 비록 삼 년을 채우지는 않았으나, 네가 성실히 임무에 임하는 것을 확인한 바, 더 이상 죽은 노비로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제주로 돌아가면 양인이 될 것이고, 성과 이름 또한 이미 새로 지어 두었다.”
제주현백이 한 장의 종이를 건네주었으니, 종이 위에 적힌 것이 바로 은승업이라는 성명이었던 것이다.
“네가 까막눈은 아니라 하니, 그 이름의 의미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지난날 지은 죄는 죽을 때까지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니, 이는 복면을 벗었다 하더라도 그 업보를 짊어지고 가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니, 너는 네 이름의 의미에 따라 평생을 속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현백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경계와 훈계로 가득 차 있었으나, 담담한 어조에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이제 너는 내 말을 통역하는 일은 그만둘 것이다. 대신 도학생들에게 고려의 말과 글을 가르치는 일을 할 것이다. 제주에 따로 교당을 지을 것이나, 아직 제주로 갈 때까지 며칠은 남아 있으니, 너는 내일부터 이곳에서 도학생들에게 고려말을 가르쳐라. 알겠느냐?”
어찌 거부할까. 양인으로 만들어 주고, 성과 이름까지 지어 주었으며, 이제 가르치는 자가 되어 도학생들을 거느리게 되었으니, 현백의 행사에 감동하여 견마지로를 마다치 않을 마음이었던 그는 당연히 따르고자 하였다.
그렇게 도학생들의 고려말 스승이 되었으니, 오늘 처음으로 도학생들이 모인 축후성 내 별채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곡우(穀雨; 4월20일경)에 다다른 봄날, 축후국의 햇볕은 따사로웠고, 그것이 그에게는 몹시도 낯설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복면을 쓰고 다닌 탓에 실로 오랜만에 얼굴에 햇볕을 쬐는 것이었다.
거리를 나서며 스치는 자들 중에도 그를 희한하게, 혹은 경멸하며 보는 자들도 없었다. 종종 그를 유심히 보는 자들도 있긴 했으나, 그것은 단지 못 보던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내성의 관문에서도 현백의 보위대 군병이 그를 잡아 누군지를 물었는데, 복면을 쓰고는 여러 번이나 만났던 자인 걸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났다.
그에게 제주현백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보여 신원을 확인하니, 그 군병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문득 그의 어깨를 툭 쳐주며 말하였다.
“드디어 새 삶을 살게 되었구려. 축하하오.”
“……고맙소.”
별것 아닌 짧은 대화임에도 그의 마음에 뭉클함이 맴돌았다.
하나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란 이 정도의 감동까지 선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딘가 숨어 한바탕 울고 싶기도 했지만, 그는 마음을 다잡고 별채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홍길도 교리가 서규슈 여러 곳에서 모인 도학생들을 모아 두고 장차 제주에 가게 되었을 때 지켜야 할 것 등을 다른 통역을 통해 설교하고 있었다.
은승업은 설교하는 홍 교리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하였는데, 어젯밤에 현백 앞에서 이미 복면을 벗고 마주한 적이 있어서인지 홍 교리는 곧바로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본 기색이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은승업은 도학생들을 훑어보았다.
서규슈 삼국에서 모인 그들 중 많은 이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했다.
하기야 그들의 심정에는 도학생이란 이름보다 볼모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특히 저들 중 절반 정도는 서규슈 호족의 장남일 테니, 훗날 자신들이 가문으로 돌아가 가주직을 물려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저들 또한 그가 처음 복면을 쓰고 제주현백을 따랐을 때와 비슷한 심정이리라.
그걸 생각하니, 그는 도학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여럿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보오, 승업. 이리 나와서 도학생들과 인사를 나누시오.”
문득 홍 교리의 목소리가 들려, 생각을 정리하느라 감고 있던 눈을 뜨니, 도학생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소 긴장되는 마음으로 홍 교리 곁에 서 도학생들을 바라보니, 결국 그들에게 해 줄 말은 하나뿐임을 알 수 있었다.
“만나서 반갑소. 나는 은승업이오. 앞으로 생도들에게 고려말을 가르칠 것이오. 부디 열심히 익혀 제주에서의 교육에 모자람이 없길 바라겠소. 그리고 조언 한마디만 하겠소.”
은승업은 도학생들을 한번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지금 생도들이 얼마나 큰 행운을 잡은 것인지 훗날 깨닫는 날이 올 것이오. 비록 지금은 실감하지 못할 수 있겠으나, 분명 그럴 것이오. 그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심성의껏 가르침에 임하시오.”
승업이 그 말과 함께 한 걸음 물러나자, 홍 교리가 다시 앞서 생도들에게 지시 사항에 대해 설명하였다.
여전히 대부분의 도학생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못마땅해하고 있었으나, 개중 몇몇은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도 저들이 후에 서규슈에서 현백의 뜻을 대리하게 되리라.
승업은 제주현백이 왜국의 호족들의 장남을 비롯한 일족들을 교육시켜 왜국의 관리로 만들 생각임을 전해 들었기에, 부디 그들이 그 행운을 깨닫고 열심히 공부해 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평생을 감당해야 할 업보를 조금이라도 씻는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상자 안에 든 것은 보기에 혐오스러우나, 나름 반가운 것이기도 했다.
소금이 가득한 중에 수급(首級)이 하나 묻혀 있었으니, 채 빠지지 않은 핏물로 인해 그 주변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잘린 목의 정체를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막상 이리 보니, 씁쓸하기 그지없군.”
영당각 앞마당에서 바닥에 놓인 상자를 힐끗 본 영공 신돈이 혀를 차며 말하니, 지난날 함께 음모를 성사시킨 동지였다가 적이 되어 싸웠던 자에 대한 씁쓸함이 감돌았다.
장산곶에서 배로 도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으면서도 혹여 천운이 닿아 명국에서 입지를 얻고, 후에 고려에 후환이 되어 돌아오진 않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수시중 이인임 앞에 놓인 운명은 냉정한 것이었다.
정확히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인임이 요동공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그것으로 그의 인생은 종지부를 찍었다.
한때, 고려를 양분하여 세도를 부리던 자가 알려지지도 않은 사이에 북방의 외딴 곳에서 목이 잘려 죽은 것이 권세의 허망함을 비추는 것만 같았다.
물론, 이인임을 죽게 한 것도 또 다른 권세였으니, 요동공이 그와 분란하여 원수가 되다시피한 이인임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의 권세였고, 또 그 권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인임의 머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요동공의 청은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문득 기현이 물어 오니, 영공은 문득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동공은 이인임의 수급을 보내면서 한 가지 청이자 제안을 하였으니, 이인임을 죽여 고려를 얻었으니, 굳이 요동까지 범할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자신이 고려의 입구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 줄 터이니, 이만 화해를 하자 청한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이길, 굳이 괜한 왕작을 만들어 영공의 오롯한 권세에 흠을 낼 필요가 있느냐고도 하였다.
이는 경흥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니, 경흥후를 심양왕에 봉하면, 아무래도 신돈의 권위에 경쟁자가 생기는 셈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영공 또한 따로 왕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경흥후와 동등한 격에 불과하니, 고려국왕 아래 홀로 통치하는 것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이는 이미 경흥후와 손을 잡을 때부터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다만, 경흥후가 오직 심왕위만을 노릴 뿐 고려 본토에 아무런 욕심이 없음을 지속적으로 비쳤기에 그에게 심양왕을 주는 것을 대가로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하나, 급한 시기에 생각한 것과 달리, 이제 중란에서 이겨 고려를 손에 쥐게 되니, 솔직히 다른 마음이 살짝 들기도 하였다.
세력 구도만 놓고 보자면, 경흥후가 요동공을 무너뜨리고, 북방을 심양왕에게 모두 다스리게 하는 것보다는, 요동공과 경흥후를 나란히 놓고 서로 견제하게 하는 편이 영공에게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경흥후는 아니라고 하고, 또 실제로 의심스러운 부분은 찾기 어려우나, 금상께서 경흥후를 각별히 친근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인 만큼, 경흥후 또한 조심해야 할 인물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기현이 다시 은근히 요동공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는 쪽으로 이끌고자, 근자에 이르러 경흥후와 금상이 가까운 사이가 되었음을 알렸다.
“아무래도 피랍되셨을 때, 경흥후에게 의지한 바가 컸을 터이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금상의 보령이 아직 어리시니까 말이야.”
“그럼에도 분명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맞다 여기기에 말씀드린 것일 뿐입니다.”
영공이 다소 퉁명스레 기현의 말을 받으니, 그는 얼른 말을 삼가여 영공의 기분에 거슬리지 않고자 하였다.
그러자 다시 상자 안의 수급을 힐끗 본 영공이 말하였다.
“일단 경흥후를 명목상으로나마 심양왕에 봉하기는 해야 할 것이야. 만약 처음부터 요동을 치지 않을 것임을 알린다면 경흥후가 크게 분개할 것이니, 그자가 혹여 수단을 부려 요동공과 손을 잡고 우리에게 대항할 수도 있겠지. 그러면 고려는 다시 전란에 휩싸일 것이니, 그것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하오시면…….”
“다만, 당장 요동을 치기에는 시일이 좋지 않다. 곡우에 요동은 온통 진창이라 행군하기 어렵고, 양초의 운반도 힘들 것이다. 게다가 이제 농사철이 시작될 때가 아닌가? 안 그래도 중란으로 대맥(大麥 : 보리)을 거두지 못해 굶주리는 자들이 많으니, 금년 농사는 더욱 신경을 써야 마땅하겠지.”
영공의 말에 기현이 고개를 숙이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 말인즉슨, 적어도 가을 이후까지 요동을 도모하는 것을 피하겠다는 뜻이니, 경흥후를 명목상 심양왕으로 봉하여 그의 의심을 사는 것을 피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요동을 주지 않아 권세가 커지는 것을 막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피력한 것이다.
물론, 단지 시일을 미룬 것일 수도 있었고, 반년 후에 상황이 어찌 될 지는 누구도 모르는 법이었다.
* * *
“이보시오, 포은 선생.”
앉아서 쉬고 있던 포은은 그를 부르는 소리에 얼른 일어나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다가갔다.
그는 철공소의 반장들 중 하나로, 포은을 직접 관리하게 된 자였다.
그가 포은을 불러 펼쳐 보인 손바닥에는 몇 개의 쇠바늘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포은은 다소 긴장하였다.
“딱 이것뿐이오.”
반장의 말에 포은의 표정이 급히 어두워졌고, 그 반응을 본 반장이 다음 순간 폭소하며 말하였다.
“하하, 통(通)이 아닌 것이 이것뿐이라는 말이오. 아하하!”
반장이 웃음을 터뜨리니 주변에서 별로 관심도 없는 척하던 다른 바치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포은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곤 함박웃음을 지었다.
반장이 앉은 곳 앞에 놓인 상에는 한 다발의 바늘이 있었는데, 모두 2백 개였다. 그중에서 제대로 만들지 못하였다고 뽑혀 나온 것이 반장의 손바닥에 놓인 몇 개였던 것이다.
“하면, 다른 것은 모두 통한 것이오?”
“그렇소. 아직 미흡한 부분이 없진 않으나, 여염집 아낙들이 이불과 옷을 꿰매는 데에는 충분할 정도요.”
포은은 솔직히 기뻤다. 마주잡은 양손에 절로 힘이 쥐어질 정도였으니, 마침내 한 사람의 몫을 해내게 되었다 싶었던 것이다.
그걸 본 반장은 폭소를 멈추고는 문득 진중히 말했다.
“너무 좋아하진 마시오. 팔아도 욕을 먹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지, 잘했다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어지간한 사내라면 선반 익히는 데에 하루, 숫돌 잡는 데에 하루, 그렇게 이틀이면 이 정도는 뽑아내지 않소?”
그 정도 뽑아내는 데에 칠 일이나 걸린 몽주로서는 멋쩍은 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기분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제주에 온 이래로 숱한 자괴감에 파묻혀 있었는데, 처음으로 자신감을 얻을 일이 생긴 것이니, 쉽게 감흥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거, 반장님. 너무 짓궂게만 굴지 마시오. 평생을 책장이나 넘기고, 붓이나 쥐던 유자가 이만큼이나 해내는 게 오히려 대단한 것 아니겠소?”
“맞소.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해 보시오. 거푸집을 제대로 못 만들어서 쇳물이 새고 아주 난리가 났었잖소.”
“크크, 하기야 낫날 좀 갈라고 했더니, 한 자루를 하루 종일 갈고 있었지.”
누군가 포은이 철공소에 처음 왔을 때, 일이 서툴러 저지른 실수를 말하니,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면서 낄낄거렸다.
그런 말들에 포은은 얼굴을 붉혔는데, 솔직히 창피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제철소였는데, 도가니를 옮기다가 쇳물을 엎지르는 사고를 쳐서 철공소로 옮겼고, 철공소에서도 한참이나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실수만 연발했다.
조금 전에도 어느 바치가 그러했듯, 다들 책만 읽던 유자라서 그런 것이라 여겼는데, 사실 포은은 그 때문만은 아니라 생각했다.
비록 자신이 유학과 문필로 이름을 떨쳤으나, 군무에도 이력이 있고, 궁술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니, 적어도 힘이 없고, 몸이 약하진 않았다.
경흥후처럼 기골이 장대한 건 아니었지만, 어지간한 사내보다는 튼튼했고, 전장을 경험하면서 나름 인내력도 충분하다 자부하였었다.
하나, 노동의 현장에서 필요한 힘과 정신은 그가 익힌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연신 활을 당겨 연습해 손이 아려 오는 고통은 익숙한 것이었으나, 뜨거운 가마 앞에서 출렁이는 쇳물을 다룰 때 견뎌야 하는 열기를 참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쇠를 다루는 중에 발로 밟는 풀무질을 할 때 필요한 다리 힘은 말을 타며 단련한 다리 힘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하나, 무엇보다 포은이 실수를 연발하게 만든 것은 육체보다는 정신 때문이었으니, 자신이 어쩌다 이런 노역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억울함과 원망스러움을 떨쳐 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보시오, 포은 선생. 대체 현백께서 포은 선생을 왜 이런 일에 쓰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 깊은 뜻이 계실 것이오. 나 같은 무지렁이들이야 백날이 지나도 깨닫지 못하겠지만, 포은 선생이시라면 언젠가는 그 뜻을 깨우치지 않겠소? 그리고 아마 그때가 되면 현백께서도 포은 선생을 쓰일 만한 곳에 중히 쓰실 것이니, 그때까지는 한번 잘해 봅시다.”
문득 반장이 포은에게 그리 위로하니, 걸걸한 목소리에 나름 정이 묻어 있어, 포은의 마음을 토닥이기에 충분했다.
포은이 괜히 코끝을 훔치며 감정을 감추고 있자, 반장이 다시 말하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쉬시구려. 모르긴 몰라도, 그 실력에 이만큼 바늘을 깎아 내었다면 밤새 연습했을 게 뻔하니, 무척 피곤할 것 아니오?”
“……고맙소.”
아닌 게 아니라, 지난밤에 거처에서도 간이 선반을 두고 숫돌로 바늘 끝을 깎는 연습을 했었다.
덕분에 손에 감이 익어 오늘 작업이 성공적일 수 있었지만, 슬슬 피로가 몰려올 때가 되었다.
반장의 배려 덕에 한 시진은 일찍 먼저 철공소를 나오게 된 포은은 발걸음을 거처로 향하다가 문득 개천의 물소리에 낚여 강가에 바로 섰다.
그 개천에도 작은 수차들이 물줄기를 따라 놓여 있었다. 고려땅, 아니 세상 어느 땅, 어느 강에서도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포은은 잠시 흐르는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멍한 사이에 시 한수를 읊고자 하였는데 발상이 되지 않았고, 대신 경전이라도 암송해 보려 했는데 머릿속에 떠오르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건 다소 충격적인 일이었다.
제주에 닿은 이후 시를 짓거나 경전을 읽을 시간이 없긴 했다. 하나, 평생을 갈고닦은 것이 유학과 문예이거늘, 기억이 어렴풋하거나 실력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아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으니, 자신이 왜 이러나 싶을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그만큼 이곳 자체가 충격적이었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홍로현 일대를 훑으니, 이곳이 정녕 현세인가 싶었다.
흙벽과 지푸라기 지붕 대신 어지간한 돌보다 단단하다는 세망으로 집이 지어져 있었고, 오가며 보는 백성들은 뺨에 살이 올라 배고픔을 걱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입고 있는 옷 또한 깨끗했고, 그저 하얗거나 누런 옷 천지인 고려와 달리 여러 색으로 물든 옷을 입고 있었다.
명국의 비단처럼 화려하고 선명한 색은 아니지만, 염색을 한 옷을 일반 백성들이 입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 제주에 닿은 이래 그가 본 것을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태평성대’였다.
각각의 집안을 세밀히 살피면, 우환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런 것이야 사람이 이승을 떠나기 전에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치세의 영역에 국한하자면, 제주는 전설의 요순시대에나 비교해야 마땅할 것이었다.
“이것이 현백이 비친 자신감인 것인가?”
포은은 현백을 떠올리며 중얼거렸으니, 그의 머릿속에 처음 제주에 닿았을 때의 기억부터 하나씩 떠올랐다.
그는 현백이 자신을 제주에 데려가 함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할 때, 내심 현백이 자신을 관리로 쓰고자 한다고 여겼다.
경흥후에게 스승 이색 휘하의 유자들이 귀의하고, 그 소문을 듣고 다른 여러 유자들이 더 모여 많은 인재들이 있는 것이 비해, 남방백에게는 유자가 없으니, 아무리 작은 섬이라곤 하나, 치정(治定)에 모자람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명목이야 명군을 몰살시킨 것을 감추기 위함이라곤 해도, 결국 자신으로 하여금 정치를 돕게 하고, 후학을 키우게 할 속셈이라 여겼었다.
하나, 제주에 도착한 후에 그는 공무교리 화극의 손에 떨어졌으니, 그에게 천한 바치의 일을 도우라 명하였다.
포은은 그것이 자신을 길들이려는 수작이라 여겨, 거세게 저항하였고, 강제로 제철소로 간 후에도 일절 노역을 거부하였었다.
처음 제철소의 바치들은 그들도 들은 바 있는 포은의 명성에 몹시도 어려워하였고,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공손히 대해 주며 식사도 챙겨 주었는데, 그것을 본 현백이 따로 명을 내려 일하지 않으면 밥도 주지 못하게 하면서 슬슬 바치들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에게 현백은 하늘처럼 따르는 이였으니, 아무리 포은의 명성을 안다 하더라도 그들이 할 선택은 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포은 역시 굽히지 않았다. 밥을 주지 않으면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 경전을 암송하였으니, 오기로라도 이겨 낼 요량이었고, 차라리 굶어 죽겠노라 다짐하였던 것이다.
하나, 딱 나흘이었다.
목마름과 굶주림을 못 이겨 일할 터이니, 밥을 달라 청하기까지 딱 그만큼 필요했다.
그때부터 혼란스러운 중에 일을 하여 밥값을 하려 하였는데, 웬걸? 실수만 연발하였고, 큰 사고를 쳐서 결국 조금 더 일이 쉽고, 큰 사고를 칠 염려도 없다는 철공소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때까지도 그저 굶지 않기 위해 일할 뿐, 지금의 수모에 억울해했는데, 어느 순간 제주의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의 맘속에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유학이 아니면 성세가 불가능하다 여겼건만, 유학이 없는 제주가 그 어느 곳보다 평안한 것은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성리의 이치를 가르치지 않음에도, 제주의 인심이 도탑고, 백성들이 타락하기는커녕 오히려 예를 갖출 줄 아니, 이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제주의 태평성대는 분명 현백과 교리라 불리는 관리들의 정치 덕일 것이고, 아무렇게나 다스려서 지금 제주의 평안을 이룰 수는 없을 테니, 분명 치세의 기준으로 잡은 것이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포은은 그것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 그의 입장에서 곧바로 현백이나 교리들에게 물을 수는 없었으므로, 제주의 현실을 몸소 익혀 그 맥을 짚고자 하였고, 그런 마음으로 자신이 맡은 일부터 하나씩 익히고자 하였다.
그래서일까, 고려의 아낙들이 쓰는 바늘보다 더 가늘면서도 더 튼튼한 바늘을 만드는 임무부터 제대로 하고 싶어져, 거처에서도 연습을 하게 되었고, 오늘은 나름 잘했다며 칭찬까지 받았다.
물론, 여전히 제주의 치세를 이루는 근원은 짐작할 수 없었다.
강가에서 한참이나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포은은 어느 순간 정말 피곤함을 느끼곤 다시 발걸음을 옮겨 그의 집으로 향했다.
한데, 집에 닿을 무렵, 어린아이들이 우르르 떠들썩하게 몰려가니, 그 아이들의 입에서 제주현백이 귀항하였다는 말을 엿들을 수 있었다.
그에 포은 또한 피곤함을 무릅쓰고, 포구가 내려다 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오르니, 수많은 백성들이 그 언덕부터 포구까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바라보는 앞바다에 거대한 배 수십 척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실로 장관이었다.
쾅!
그때, 앞선 배들 중 한 척이 화포를 쏘아 큰 소리를 내자, 백성들이 깜짝 놀란 중에도 박수를 치고 환호하였다.
포은도 이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현백군이 승전을 하고 돌아오면 자축의 포성을 터뜨린다고 했었다. 실제로 그가 제주에 도착하였을 때도 축포를 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사이에도 포은의 귓가에는 백성들이 현백을 칭송하고, 제주의 백성임을 자부하는 목소리가 연신 스며들었다.
그 또한 얼결에 박수를 치다가 멈칫했으니, 눈앞의 장관에 마음을 빼앗겼던 탓이고, 왜국에서 현백이 당당히 개선하였다는 것에 감탄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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