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58)
“결국 푸른 하늘을 한 점도 못 보고 돌아가게 생겼네요.”
화면 속에 재상과 두신이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고, 그 화면을 몽주는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키나와에 도착한 지 삼 일째, 첫날부터 흐렸던 날씨는 이틀째에는 호우로 변했고, 삼 일째인 오늘까지도 하늘은 부슬비를 쉬지 않고 뿌리고 있었다.
“아, 파란 비키니…….”
몽주가 아쉬움이 진하게 묻은 한탄을 내뱉자, 화면 속 두 사내들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황진주가 파란 비키니를 샀다는 소중한 정보를 방지영 이사로부터 들은 이후로, 오키나와 해변에서 파란 비키니 차림의 황진주를 상상하곤 했는데, 상상으로만 끝나게 생겼던 것이다.
“열흘 동안의 힘든 항해를 오직 파란 비키니로 이겨 내었는데, 오키나와가 배신을 하네요.”
2주 전에 제주도 서귀포항을 출발하여 일본 고토(五島)섬에 잠시 기항했다가 정남으로 500여 킬로미터를 항해 하여 류큐 제도에 닿고, 다시 남서쪽으로 거의 200킬로미터를 항해 하여 오키나와섬이자 과거 유구 왕국의 나하섬에 도착하기까지 열흘이나 필요했다.
여름철 남동 계절풍을 거스르는 항해 구간이 많은 탓이었기에 범선인 양진이호가 무척이나 느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양진이호를 타고 시도한 첫 원양항해는 대단히 힘들었다.
몽린 재단 직원들과 바당보름 회원들로 이루어진 약 30명의 선원들은 1일 3교대로 양진이호의 운영을 담당하였는데, 아무리 기계식으로 운영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고 해도, 막상 범선을 운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GPS 장치나 GPS 연동 전자 나침판은 일부러 가려 놓고, 구식 사분의와 나침판으로 방향과 위치를 가늠하며 한 항해인 터라 정신적인 피로감까지 더했다.
주기적으로 어미새호에서 휴식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밤낮이 수시로 바뀌며 배를 몰아야 했으니, 다들 피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날씨가 좋았다는 점이었다. 한데, 막상 오키나와에 가까워질 무렵부터 하늘이 흐려지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예정된 휴식일이 다 지나도록 태양 한 번 보지 못했다.
“이 망할 팸플릿은 대체 뭔지 짜증이 나네요.”
몽주는 노트북 카메라에 오키나와 관광청에서 발행한 팸플릿을 흔들어 보이면서 입술을 삐죽였다.
팸플릿에는 작열하는 태양빛의 오키나와 해변이 나와 있건만, 실제 오키나와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던 것이다.
비단 몽주가 운이 나쁜 탓만은 아니었고, 원래 오키나와의 날씨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오기로라도, 맑은 하늘을 볼 때까지 오키나와에 머무를까 싶었지만, 이제 얼마 후면 오키나와의 태풍철이 시작되기에 그 전에 떠나야 했다.
안 그러면 건물이 굴러다니고, 차가 날아다닌다는 무시무시한 열대성 태풍의 위력을 직접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런 날씨를 가진 류큐 제도에서 어떻게 사탕수수를 재배했을지 궁금하네요.”
메이지 시대 시마즈씨의 돈줄이 되었던 오키나와의 사탕수수 재배 산업이 번창했던 게 신기할 노릇이었다.
-거기서 살면 또 다르겠죠. 그나저나 올 때는 갈 때보다 시간이 덜 걸리겠죠?
화면 속에서 재상이 묻자, 몽주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갈 때는 순풍을 받으며 갈 터이니, 올 때보다 배는 빠르게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다음 주 회의는 서울에서 할 수 있겠군요.
“그럴 겁니다. 특별한 사고만 없다면요. 사고가 있어서도 안 되지만.”
우려를 표명하긴 했지만, 그리 걱정되진 않았다. 구식 항해를 하는 건 양진이호일 뿐, 호위함(?) 어미새호는 최신 장비를 통해 수시로 날씨 예보를 받고 있었고, 여차하면 모든 선원들을 어미새호로 사전에 이동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오키나와 비치와 파란 비키니를 즐기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아쉬워하진 마십시오. 언젠가 다시 찾을 날이 있지 않겠습니까. 현대에서든 고려에서든. 물론 고려에서 파란 비키니를 입은 여성은 찾기 어렵겠지만요. 하하하.
“예예, 해서 고려에서 비키니를 유행시켜 볼까 생각 중입니다.”
재상의 놀림에 몽주가 퉁명스레 대꾸하는 것으로 화상 회의라기에는 좀 짧았던 대화가 끝났다.
두 번의 화상 회의를 포함하여 최근 세 번의 회의는 솔직히 긴장감이 사라졌다.
화상 회의의 경우에는 몽주가 항해 중이거나 오키나와에 있어, 재상, 두신과 대면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보다는 고려와 제주의 상황이 비교적 여유롭기 때문이었다.
고려의 중란이 수시중 이인임의 죽음으로 일단락되고 요동에 대한 처분이 연기되면서, 그리고 다의홍을 통해 서규슈를 소유하게 되면서, 적어도 당장 급하게 상황에 대응해야 할 일은 사라지게 되었으니, 자연 현대의 회의 또한 느슨해진 것이다.
뭐, 인간적으로 계속 긴장할 수는 없는 법이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슬슬 달라질 때가 되었지.”
몽주는 샴페인 한 잔을 들고, 호텔 객실 테라스로 나서며 중얼거렸다.
고려에서는 영공이 경흥후를 설득하여 요동 침범을 미루었는데, 그 명분을 농사에 두었으니, 이제 추수가 끝나가는 중에 다시금 요동 정벌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이다.
영공이 경흥후를 위해 군사를 일으킬 것인지, 그 선택이 무엇이든 고려에서 다시금 전란, 혹은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요동을 범하기로 하면 전란이, 아니라면 경흥후가 영공과 대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규슈의 상황은 오히려 안정적이었다. 남부의 시마즈씨와 오토모씨는 웅크리고 있었고, 오우치씨나 다의홍이나 새로 얻은 율령국을 안정시키는 것에 골몰하고 있으니, 새로운 문제가 생길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제주에서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었는데, 이제 명국과 본격적으로 교역을 시도할 참이었다.
밤하늘 아래에서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먼 곳에 서 있는 등대의 불빛을 보며, 고려의 상황을 정리하는 중에 샴페인 한 모금을 마시는데, 문득 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한 잔 주세요.”
“……?”
살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황진주가 옆방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라스에 나와 있은 지 제법 되었는지 부슬비에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아, 잠시 만요.”
몽주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 새로 샴페인잔을 들고 나오는데, 갑자기 객실문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
출입용 단말기 화면에 황진주가 보였다. 샴페인을 달라더니, 그새 복도로 나온 모양이었다.
하기야 바로 옆방이니 금방 올 수 있긴 하다만.
“하하, 샴페인을 달라더니, 왜……?”
몽주가 문을 열며 말하니, 황진주가 미소를 보이며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샴페인 마시러 왔죠.”
“아…… 제 방에서 마시겠다는 소리였어요? 난 또 테라스에서 건네 달라는 소린 줄…….”
몽주는 약간 당황하며 주절대는 사이, 진주는 마치 자기 방인 양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몽주는 그제야 황진주가 자신과 단둘이 호텔방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내심 긴장하기 시작했다.
“테라스에 꽤 오래 나와 있었나 봐요.”
긴장감을 감출 겸해서, 몽주는 타월을 하나 가져다주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붙였다.
진주는 타월을 받아 비에 젖은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닦아 내며 입을 열었다.
“누굴 기다려 봤는데, 좀처럼 나오질 않더라고요.”
“……?”
설마…… 하는 시선으로 진주를 바라보니, 그녀가 그 시선을 느끼고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면, 몽주 씨도 참 순진하시네요.”
“내가요? 허…….”
“분명히 절 보는 시선에서는 따끈따끈한 열기가 느껴지는데, 그 이상의 대시가 없잖아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앵도와 겹쳐 보이면서 때때로 자기 여자인 것처럼 진주를 바라볼 때가 있었으니, 아주 눈치가 없지 않고서야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 진주가 자신에게 그걸 밝히면서 자신을 한심하게 본다는 건데…….
“내가 대시하길 기다렸어요?”
“아니라곤 할 수 없죠. 사실 대시를 안 해서 제가 오히려 끌린 면도 있긴 하고요.”
“……끌렸어요? 나한테?”
“고백을 기다리긴 했죠.”
‘헐.’
몽주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좋아서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고백을 기다리다 못해 먼저 접근한 진주가 귀엽기 때문이기도 했다.
“말해 봐요. 대체 왜죠? 저 솔직히 남자들에게 고백 많이 받아 봤거든요. 고백하겠다 싶으면 적어도 일주일 안에 다들 쭈뼛거리거나, 반대로 되지도 않은 허세를 부리며 고백하던데, 몽주 씨는 좀처럼 다가오질 않았어요. 이유가 뭐예요? 쑥스러워서?”
쑥스러운 것도 이유겠지만, 몽주가 진주에게 마음을 보이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확신이 없어서요.”
입가에 웃음기를 지운 몽주가 그렇게 대답하니, 진주가 눈을 흘기며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무슨 뜻이냐면, 진주 씨가 좋긴 한데, 내가 정말 진주 씨를 좋아하는 건지 확신이 없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좋은데 내가 좋은지 확신이 없다니?”
몽주는 다시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이상한 소리였다. 하나, 고려에서 맞이한 부인 최앵도의 존재를 안다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황진주라는 여자에게 끌리는 것이 그녀 자체에 대한 매력을 느낀 탓인지, 아니면 최앵도와 꼭 닮은 탓에 착각하는 건지 몽주도 아직은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말은 좀 이상해도, 분명 내 마음의 상태가 그래요.”
몽주도 설명하기 어려워 대충 얼버무리니, 황진주의 표정이 조금 불편해졌다. 나름 그녀도 용기를 내서 먼저 마음을 연 것인데, 이해할 수 없는 반응만 보여 주니, 편한 마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주는 샴페인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맞은편에 앉은 몽주를 내려다보았다.
“확신을 가지게 해 드릴까요?”
“……?”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싶은 표정을 몽주가 짓는 순간, 진주의 손가락이 그녀가 입고 있는 반팔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몽주는 깜짝 놀랐지만, 다음 순간에는 풀린 단추 사이로 벌어지는 셔츠 안으로 시선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셔츠 안에는 속옷 대신 파란 비키니가 있었던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한번 유혹해 볼까 해서 나름 큰맘 먹고 산 건데, 선보일 겨를이 없었네요.”
셔츠 단추를 다 푼 진주는 반바지 지퍼도 내리면서 말하였고, 몽주의 시선은 그곳으로 옮겨 갔다.
물론, 벌어진 지퍼 안으로 위와 동일한 색의 비키니 팬티가 비쳤다.
그쯤에서 더 이상 옷을 벗지 않은 채 진주는 양손으로 잘록한 허리를 짚곤 서서히 몸을 돌렸다.
마치 모델이 노출은 삼가면서 몸매를 자랑하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니, 이제 마음이 급해진 건 몽주였다.
‘화, 확실히 선 거 같…… 아니, 확신이 선 같아요!’라는 말을 표정으로 소리치며 몽주가 천천히 일어나 진주에게 다가가려는데, 갑자기 진주가 몽주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어어…….”
세게 걷어찬 건 아니고, 발바닥으로 몽주의 가슴을 밀어 도로 소파에 앉게 한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진짜 확신이 서면 그때 말해요. 신사답고, 정중하게.”
진주는 다시 셔츠와 바지를 여미곤 그 말과 함께 몽주의 방을 도로 나갔다.
“허…….”
냉온탕에 오간 듯한 심정으로 홀로 남은 몽주는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황진주도 그에게 마음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어 좋긴 한데, 어쩌다 보니 더 접근하기가 애매해진 것이다.
진주가 앵도와 닮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방지영에게 그랬듯 아예 마음도 없었을까? 아니면, 오히려 대시하기 편했을까?
모를 일이었다.
* * *
“종옥 하사! 그래서야 자네가 부하들을 제대로 지휘할 수 있겠나?! 여자라서 봐주길 바라는 것인가?!”
탁기 장군이 크게 소리쳐 혼을 내니, 커다란 봇짐을 짊어진 종옥이 부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이를 악문 그녀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녀보다는 그녀의 시험을 구경하는 자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져 있었다.
다들 똑같은 생각으로 보고 있었으니, 탁기 장군이 너무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종옥이 무인이라곤 하나, 여인에게 남자와 똑같은 기준을 강요하는 건 너무했다.
게다가 같은 기준의 남자들이란 평범한 사내들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탁가 출신 무인들이었으니, 그 굉장한 체력과 힘을 가진 남자와 경쟁해야 하는 종옥이 불쌍했던 것이다.
“당장 일어나라! 다시 쓰러진다면 그때는 낙방일 것이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움직이는 여인이 가엽지도 않은 것인지, 탁기 장군은 연신 불호령을 뿜으며 재촉하였다.
종옥은 기어이 걸음을 움직였다.
쌀 반 가마니에 해당하는 무게를 지닌 봇짐을 짊어지고, 산과 계곡, 그리고 해안 모래밭으로 이루어진 10길미의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시험에 통과하기까지 이제 채 100미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그 남은 100미의 거리가 실로 100리처럼 느껴질 정도였지만, 종옥은 시야가 가물가물한 와중에도 한 걸음 한 걸음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걸었다.
그렇게 반 식경 가까이 지나자, 비틀거리는 종옥은 도착점 앞에 섰고, 바로 거기서 쓰러지고 말았다.
쿵.
그것을 보자, 구경하고 있던 현백군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그녀를 들것에 옮겨 의원에게로 실어 갔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탁기 장군은 그저 서류만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종옥 하사, 합격.”
그것이 그가 뱉은 유일한 말이었고, 그 또한 그녀가 쓰러지면 도착점의 선을 넘어섰기에 그런 것이지, 두 걸음만 더 뒤에서 쓰러졌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 것이다.
구경꾼들이 탁 장군이 참으로 냉정하다고 혀를 차는 이곳은 현백군 내에 새로 꾸리게 된 해병대 사급 군병 시험장이었다.
* * *
종옥이 그녀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늦은 밤이었다.
시험장에서 쓰러져 의원에게 실려 간 그녀는 기맥을 통하게 한다는 침술을 받고, 사탕을 녹인 물을 한 사발 마시자마자 두 시진 동안 기절한 듯 잠에 빠져들었다.
물론, 집에 돌아왔을 때도 그녀의 상태는 그리 좋진 않았다. 물에 젖은 솜이불을 짊어진 사람처럼 온몸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무인으로서 오랫동안 단련하였지만, 그녀는 여인답게 날래고 경쾌한 무예를 연마한 것이지, 근력이 탁월한 건 아니었으니, 오늘 해병대 시험은 실로 버거운 일이었다.
종옥은 아직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호롱불을 밝혔는데, 그다음 순간 그녀의 집에 그녀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와 계셨습니까?”
멈칫한 종옥이 조곤이 말하니, 그녀의 말을 들은 자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잘했소.”
“…….”
종옥의 어깨를 짚은 자가 나름 다정히 말하였으나, 종옥은 대꾸가 없었다.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있었다.
“정말 장하시오.”
“……오늘은 더 다정한 말을 듣고 싶습니다.”
종옥이 마침내 속 앓던 말을 하니, 그녀의 어깨를 짚은 자가 잠시 머뭇거렸다.
하나, 결국 다정한 말은 없었고, 대신 그녀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잘하셨소.”
또 같은 소리만 반복되어 들리니, 종옥은 몸을 비틀며 그녀를 안은 품 안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하나, 워낙에 그녀를 안은 힘이 강한 터라, 그녀의 반항은 작은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놓으세요, 놓으란 말이에요. 더는…….”
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에 반해, 그녀를 안은 손길은 더욱 힘을 줄 뿐이었고, 종옥도 잠시의 반항 후에는 몸부림치는 것도 포기하였다.
그러자 문득 그녀를 안은 손길의 힘이 약해지더니, 한 손이 올라와 그녀의 턱을 올려 세웠고, 이내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입술이 다가왔다.
작은 입맞춤에서 시작한 그 두 사람은 점점 진하게 입술을 탐하니, 종옥도 조금 전 몸부림친 것과 다르게 그 자를 극렬히 끌어안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종옥을 안은 자의 다른 손이 호롱불을 움켜쥐어 꺼뜨렸으니, 어두운 방 안에 이내 열락의 소리만 적막함을 깨뜨렸다.
한식경이 지나, 종옥은 두툼한 사내의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사내를 등지고 웅크린 자세로 누워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시는 것이오?”
“…….”
문득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니, 종옥은 입술을 악물어 울음을 멈추려 했으나, 이상하게 눈물이 더 흘러내렸다.
그러자 다시 사내가 몸을 붙이며 그녀를 뒤에서 앉으니, 종옥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자신의 몸을 탐하려 한다고 여긴 것인데, 정작 사내는 그녀를 가벼이 안을 뿐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내일 현백께 청할 것이오.”
“……무엇을 말입니까.”
“자네와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청할 것이오.”
“……!”
예기치 못한 발언에 종옥은 등 돌리고 있던 몸을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없지만, 그녀의 손이 사내의 얼굴을 어루만지니,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사내의 얼굴을 눈에 보듯 떠올릴 수 있었다.
“진심이세요?”
“물론이오.”
“저, 저는 그저…… 절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만 여겼는데…….”
“내가 그렇게나 못 미더웠소?”
종옥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 한양부에서 현백을 강상한 대가로 사내와 대련을 빌미로 한 벌을 받다가 우연히 몸을 섞게 되며 시작된 관계였다.
강제로 당한 것은 아니었다.
워낙에 모시던 현백 부인으로부터 남녀 간의 애정에 대해 많이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사내의 품이 궁금했었고, 사내와 대련하면서 땀을 흘리고 살갗을 대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이 통하였던 것이다.
하나, 그 이후 틈틈이 서로를 탐하는 사이가 되었음에도, 사내는 종옥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으니, 제주에 온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다른 이들의 시선 아래에서는 오히려 냉정했으니, 오늘 시험장에서 보인 것과 같았다.
“탁 장군…….”
“장군이라 부를 것 없소. 이제는 서방이라 부르시오.”
“서방님…….”
“부인, 그동안 마음고생이 참 많으셨소.”
탁기가 종옥을 부르며 다시 품에 안으니, 이번에는 종옥이 먼저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다시 방안은 후끈한 운우지락의 열기가 달아올랐으니, 두 사람 모두 무인답게 범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서로를 탐하였다.
* * *
을묘년 입동 즈음.
제주는 약 반년 전 현백이 왜국에서 돌아왔을 때와는 제법 크게 달라져 있었다.
고작 반년, 7개월에 불과한 시간이었으나, 서규슈를 통해 왜국과의 교역이 안정적으로 크게 늘어나자, 제주의 산업 또한 외연이 확장하고 내실이 다져졌으니, 이제 10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제주는 비단 홍로현뿐만 아니라, 각 주요 고을마다 산업이 융성하기 시작했다.
해안 뱃길로 고을 간 사람과 상품을 운반하는 배들이 숱하게 오가고, 아침저녁으로 저마다 일거리를 가진 남녀의 일꾼들이 작업장으로 출퇴근하느라 북적대었다.
온 내천마다 수를 세기 어려울 만큼 수차들이 놓여 있고, 바람이 거센 언덕에는 숱한 풍차들이 연신 바람개비질을 하고 있었다.
홍로현의 포구는 더욱 정비되어 홍로급 경함선 20척을 한 번에 댈 수 있을 만큼 커졌고, 그만큼 경함선의 수도 늘어 제주에서 운영하는 것만 40척에 이르렀다.
현백군의 수는 3천 5백에 이르렀으니, 그중 삼분지 일은 여성 군병들이었다. 비단 현백군 내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작업소마다 여성 일꾼들이 크게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그만큼 제주의 생활 문화 또한 달라졌다.
여인들이 전담하던 대부분의 일들이 각각 산업화되어 구매로 대체되기 시작했으니, 처음 식당이 생긴 것처럼 의류점이 생겨 집에서 바느질을 하는 대신 기성복을 구매하게 된 것이 그 대표적인 변화였다.
현백의 명으로 탁아소가 곳곳에 생겨 여인들이 일자리를 가지는 것이 큰일이 되지 않게 되었으니, 각 가정마다 얻게 되는 수입의 크기는 커지고, 그만큼 상업 거래도 폭증하였다.
그 상업 거래를 담당할 시장에 들어서는 상점의 수와 종류도 날로 늘어났고, 그것이 다시 산업 수요와 일자리를 늘리게 되는 산업 경제의 선순환이 일어났다.
당연히 미찰의 거래량도 폭증하여, 이제는 홍로현의 전포(은행)는 들락날락거리는 인파로 문턱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고, 덕분에 전포를 담당하는 인력들은 바빠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다.
늘어나는 관리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이제는 교무교리(敎務敎吏)로 따로 임명된 홍길도의 청으로, ‘인묘 남방백하 만행지론’을 교과서로 하는 고학교(高學校)가 홍로현에 세워져, 15세 이상의 제주 청년들과 왜국에서 건너온 도학생들이 공부하게 되었다.
홍길도가 바쁜 중에도 고학교에서 공부할 15세 이상의 청년들을 150명가량 선발하였으니, 왜국에서 건너온 도학생들까지 합하여 대략 200명 정도가 관리로서의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을 본 화극이 질투가 났는지, 손재주가 좋은 아이들도 교육을 시켜 달라 청하니, 기술 학교 또한 홍로현에 세우는 중이었는데, 장차 제주의 모든 고을마다 세워 기초적인 학습은 물론, 제주의 여러 작업소에서 견학과 실습하게 하여 고급 기술자들을 양성할 예정이었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변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제주 현백 본인이었다.
현대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변화에 적응을 잘하고, 오히려 그 변화를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제주 백성들이 너무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다만, 고작 반년여 간의 변화라곤 하나, 실상 몽주가 제주에 닿은 지 거의 4년간 축적된 현백에 대한 신망과 그가 추구하는 변화에 대한 신뢰가 폭발한 덕이기도 했고, 조금씩 갖추어 온 산업과 제도의 바탕을 기반으로 제주 전체가 한 꺼풀 탈피할 때가 온 것이기도 했다.
물론, 덕분에 그 폭증한 변화를 감당해야 하는 몽주와 기존의 교리들은 정말 분신술이라도 익히고 싶을 만큼 바빠졌다.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나날이 성장하는 제주의 산업을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총무회의에서 상무교리 고신걸이 고하니, 다들 수척한 가운데에서도 동의하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몽주도 동의하는 바였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제주의 산업을 위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지 않는다면, 공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장은 당장은 명국만이 대안이었다.
다만, 몽주는 명국과의 교역에 대해 논하는 대신, 먼저 고려의 상황을 물었다.
“세작이 전하기를, 심양왕이 요동 정벌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합니다.”
고려의 사정을 파악하는 것을 전담한 범무교리 차현유가 예전과 달리 차분하게 대답하니, 몽주는 고개를 끄덕여 상황이 뜻대로 흘러감을 피력하였다.
“이제 고려의 사정이 다시 혼란스러울 터이니, 그 사이에 우리는 명국과의 교역을 개척하는 데에 힘을 쓰기로 하겠소.”
여전히 제주에서의 움직임에 앞서 고려의 상황을 파악해 두는 건 필수였다.
예전만큼 고려의 간섭이 두렵지는 않으나, 만약 고려의 도당에서 제주를 주목한다면 귀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주의 변화를 고려 전체로 파급시키기 위해 언젠가는 크게 충돌해야겠지만, 몽주와 제주로서는 그때를 미루면 미룰수록 좋았다.
시간은 이제 제주의 편이기 때문이었으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주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보적인 세상으로 변할 것임에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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