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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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슈 삼국, 즉 비전국(히젠국), 축후국(지쿠고국), 비후국(히고국)의 변화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물론, 전쟁으로 지배층이 바뀌고, 호족들의 장남과 일족들이 도학생이라는 이름으로 제주에 가기도 했으며, 새로운 슈고 다의홍의 명에 따라 몇 가지 제도도 바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왜인들이 체감할 만큼의 큰 변화는 없었다.
그저 본격적인 농사철 전에 전쟁이 끝나서 다행이었고, 농사짓는 동안 별 다른 일이 없어 안도할 뿐이었다.
하나, 딱 한 곳만큼은 크게 바뀌었는데, 그곳은 비전국의 북서쪽에 위치한 ‘데카이(出海)’라는 곳이었다.
그곳은 제주와 대마도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물산이 집합하는 곳이었다.
본래는 히라도쿠(平戶口)라는 이름의 작은 어촌이었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규슈섬 북서쪽에 위치한 히라도(平戶)섬이 맞닿아 있어 천혜의 방파제 역할을 해 주었고, 그 어촌도 작은 만에 위치해 있어 해양 교역소로서 적합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히라도쿠의 고쿠진(國人)이 쇼니씨의 멸망과 함께 멸살당하였기에 ‘공적 수용’하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 땅주인이 누구든 어차피 별 반항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몽주의 요구에 따라 다의홍이 히라도쿠에 교역소를 설치하면서 그 교역소를 출해(出海) 교역소라 이름하였는데, 그 교역소의 규모와 위상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지명화된 것이다.
석상(昔商)의 기물로 유명한 제주의 물산이 들어오고, 대마도로부터는 고려의 물산이 전해지니 본디 200여 호에 불과한 작은 어촌이었던 데카이는 삽시간에 수천 명의 상주인구와 그에 몇 배에 이르는 유동 인구가 북적거리는 큰 고을로 바뀌었다.
반년에 걸쳐 몽주와 다의홍이 상당한 투자를 해 포구를 정비했고, 작은 산 너머의 후방 평야지대와 연결된 소로(小路)를 확장하니, 물산이 데카이를 통해 들어오고, 후방 평야지대의 창고에 잠시 보관된 후, 서규슈에 널리 퍼지고, 다시 왜국 전체로 보급되는 ‘교역 루트’가 형성되었다.
이 교역 경로를 한 번 거쳐 동국(東國)에까지 이르면, 데카이를 통해 들어온 물산의 가치가 2배 이상 뛰었으니, 그 가치의 폭등만큼 중간에 큰 이문이 남았다.
이 교역 경로의 이문을 나누어 가지는 비율을 따져 보면 가장 큰 몫의 주인은 다의홍이었다.
다의홍은 물산의 유통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몽주와의 협상, 실상은 몽주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대신, 다의홍은 제주에서 파견된 데카이의 관리들이 제공하는 거래 목록을 바탕으로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편리하게 세수를 확보할 수 있는 셈이었다.
세율은 일괄적으로 십분의 삼이었는데, 몽주는 딱히 그에 관여하지 않았다.
당대의 기준에서는 낮으면 낮았지 높은 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직 소득 수준에 따른 세율 변화 같은 걸 강요할 시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의홍 다음으로 이문을 얻는 자들은 데카이에서 거래하는 왜국 상인들이었고, 그들은 대부분 본디 서규슈의 호족들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아닐지라도, 지배층과 밀접한 그들은 세상의 변화에 무척 민감하게 대응하였는데, 당연히 석상으로 이름 높은 제주와 고려의 물산들을 거래할 수 있는 이 시기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각 율령국별로 보통 둘에서 넷 정도의 큰 호족 가문들이 상단을 운영하여 크게 거래하였으니, 그들 각각이 얻는 이문은 다의홍에 비해 적겠지만, 그들 모두의 이문은 다의홍이 걷는 세수보다 당연히 컸다.
물론, 제주와 고려의 물산이 유통되면서 이문을 얻는 왜국의 상인들이 비단 서규슈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견제하는 사이일지언정 오우치씨와 시마즈 및 오토모씨의 상인들도 데카이를 통해 들어오는 물산의 유통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여 유통 이익을 얻었던 것이다.
특히 오우치씨는 막부나 킨키(京畿) 지방으로의 유통을 담당하여 상당한 이문을 취할 수 있었다.
다만, 서규슈와 그 외 왜국 지방의 차이점이 있다면, 다른 지방에서는 제주와 고려의 물산 유통에 지방 권력이 직접 참여하여 그 이익이 오롯하게 지배 기반을 다지는 데 쓰인 것에 반해, 서규슈에서는 세수만 다의홍에게 갈 뿐, 나머지 이익은 상인들에게 고스란히 남는다는 점이었다.
유통에 참여하는 상인들의 수도 다른 지방에 비하면 훨씬 많았으니, 이는 서규슈의 대호족들이 운영하는 상단 외 소규모 상인들도 데카이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비율을 정해 준 덕이었다.
반년이 흐른 시점을 기준으로, 데카이로 들어오는 제주와 고려의 물산들 중 대략 삼분의 일은 대형 상단이 아닌 소상인들에게 분배되어 그들도 데카이의 물산을 통해 조금씩이나마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조치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불만을 가진 서규슈의 호족들이 데카이의 관리들을 구워삶으려 하거나, 소상인들을 압박하여 물산을 헐값에 되사려고 시도했다.
하나, 몽주가 먼저 만약 쓸데없는 짓거리를 한다면 데카이 출입을 못하게 하거나, 아예 다른 지역에 따로 교역소를 세우겠노라 으름장을 놓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부정과 부패가 스며들겠지만, 아직은 전후 처리의 공포가 남아있고, 제주의 기물이 워낙에 독보적인 터라 그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몽주가 일부러 소상인들이 데카이에서 거래할 수 있게 배려해 준 것은 당연히 소상인들을 키우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이는 공정 거래라든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존 같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한 일은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유산 계급의 수를 늘리고, 그 계층을 보다 두텁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더 속 깊은 속내를 따져보자면, 일종의 실험이기도 했다.
제주의 민간 경제를 키우기 위한 사전 테스트인 셈이었다.
정부 주도형 수준을 넘어 정부 독점형 경제 개발 단계인 제주의 산업 경제가 언제까지 그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경제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정부가, 제주의 경우 몽주와 교리들이 그것을 모두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차 민간 경제를 발전시켜 민간 자본을 성장시키고, 그를 통해 산업 발전의 중추가 되도록 만들어야 할 터인데, 역사에 남은 전근대 및 근대의 민간 자본 형성 과정은 세상 어느 곳이든 정말 시궁창이 따로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몽주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시궁창 냄새가 덜 나게 만들기를 원했으니, 그 때문에 왜국 서규슈에서 소상인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관찰해 볼 생각이었다.
대상인들이 소상인들을 정리하고 경쟁자를 제치기 위해 어떤 짓을 하는지, 소상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무슨 수단을 동원하는지, 권력과 관리들은 어떻게 부정에 개입되고, 부패하는지를 면밀히 살펴보고, 타산지석처럼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문화와 제도가 다른 곳인 만큼 부정과 부패 또한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기에, 왜국에서의 ‘관찰’이 모든 정답을 알게 해 주진 않겠지만, 적어도 모범 답안을 작성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
사실 왜국의 교역 경로에서 가장 큰 이문을 얻는 게 다의홍이고, 그 다음이 왜국의 상인들이라곤 하지만, 그건 데카이를 기점으로 따져, 오로지 왜국 내의 부가가치를 따졌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고, 만약 제주와 고려까지 따져 보자면, 가장 큰 이문을 얻는 건 당연히 몽주와 제주였다.
제주에서 생산되는 여러 물산들이 데카이에서 거래될 때는 이미 이익률을 가늠하기 민망할 정도로 가치가 폭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대마도를 통해 건너오는 물산들, 특히 인삼 같은 것도 엄청나게 가격이 폭등한 상태로 팔렸다.
대충 따져 보면, 제주와 고려의 물산이 왜국에서 유통되어 최종적으로 소비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총 부가가치의 6할 정도는 몽주와 제주의 이문으로 돌아오고 있었으니, 바로 그 이익이 제주의 급격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고, 새로운 시장을 요구할 정도로 결실을 맺게 한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슬아슬한 것은 대마도였다. 그건 대마도를 다스리고 있는 부씨 가문 출신의 부주(副主)가 너무 열심히, 신나게 일을 한 탓이었다.
고려와 왜국 사이 중계 무역을 통해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것에 열중하다 보니, 행정 체계가 빈민한 고려의 도당에서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낄 정도로 많은 고려의 물산을 사들였던 것이다.
몽주도 아직 그 점을 깨닫지 못했는데, 워낙에 제주의 일이 바빠 대마도의 부주가 일을 아주 잘한다는 것에만 만족할 뿐, 그가 일을 잘하는 것의 여파가 어디까지 영향을 줄 지에는 생각이 닿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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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 대전 앞 조정에서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는 이는 당연히 고려의 국왕이었다.
다만, 어린 금상이 앉은 옥좌 뒤로 또 다른 자가 더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산왕(靈山王) 신돈이었다.
전 수문하시중 이인임과의 중란에서 승리한 영도첨의사사 신돈은 역적을 물리쳐 사직을 지켰다는 명분으로 왕작을 받게 되었고, 그의 고향인 경상도 영산군(靈山郡)에 3천호의 식읍을 받게 되었다.
그가 왕작을 받을 때, 더불어 왕작을 얻은 자가 또 있었으니, 바로 경흥현후 이성계였다.
백관이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크게 조아리는 조정 안에서 심양왕이자, 경흥현후인 이성계만이 가벼운 목례로 대신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가 군왕(郡王)의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조하를 올리며 왕좌를 바라보는 심양왕의 표정이 은근히 일그러져 있었는데, 이는 두 가지 연유에 의한 것으로, 첫째는 동위의 군왕을 향해 조하를 올리는 것이 다소 불쾌하였기 때문이었다.
조하의 대상이 공식적으로는 당연히 고려의 왕이었으나, 실상 이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조하의 실질적인 주인공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솔직한 답변은 거의 모두 영산왕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고려왕을 향해 조하를 한다고 하여도, 백관들에게는 심양왕 또한 영산왕을 향해 조하를 올리는 모습으로 비칠 것이니, 심양왕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다만, 심양왕 이성계는 보통 함주에서 경흥을 다스릴 뿐 개경에 좀처럼 오지 않는 데다가, 영산왕 신돈의 우위를 스스럼없이 인정하고 있던 터라 얼마 전까지는 크게 개의치 않았었다.
하나, 영산왕에게 불만을 가지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그 때문에 영산왕에게 조하를 올리는 것 같은 상황 자체에도 배알이 꼬였다.
그 또 다른 이유란, 영산왕이 지난 중란 직후 요동 정벌을 미루면서 금년 농사 후에 다시 군사를 일으키겠노라 약속하였는데, 이제 와 그 약속을 회피하려 하고 있고, 아예 식언하려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심양왕으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그의 왕작명인 심양이 지금 요동군공 하에 있기 때문이었다.
즉, 심양왕은 심양왕이되, 그 왕작은 허울뿐인 것으로, 이전 경흥현후일 때와 실질적으로는 달라진 게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여전히 심양왕이 다스릴 수 있는 지역은 함주에서 경흥에 이르는 척박한 땅이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통치할 수 있는 지역은 함주에서 단주에 이르는 해안 평야 지대뿐, 그 외의 지역은 호인들의 세상이었다.
다시 말해 경흥현후라는 봉작명 또한 사실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이었으니, 두 개의 ‘과장된’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심양왕이자 경흥후인 이성계의 현실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요동을 정벌하는 것을 유일한 타개책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영산왕이 자기가 얻을 건 다 얻어 놓고 약속을 어기려는 기미를 보이니, 심양왕으로서는 분노를 품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개경에 심양왕이 몸소 행차한 것 또한 영산왕과 담판을 짓기 위함이었다.
지리한 조례(朝禮)를 마치자, 심양왕은 영산왕에게 청하여 독대하고자 하였다.
얼마 후, 내관이 들어 심양왕을 모셔 가니, 그곳은 뜻밖에도 대전이었다.
당연히 영산왕과의 독대를 염두에 두었으나, 금상이 영산왕과 더불어 그를 찾고 있다는 말에 거부할 수 없어 대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심양왕 이성계는 다시 혼자만의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대전에 들어서니, 내관과 호위군관들 사이에 금상과 영산왕만이 있었는데, 영산왕은 금상의 아래에 있는 대신, 뒤에 수렴을 치고 앉아 심양왕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금상에게 예를 갖추려니, 자연 영산왕 신돈에게도 예를 올리는 것이 되었고, 앞서 조하에서 얻었던 굴욕감보다 더 큰 모욕이었다.
영산왕이 금상의 뒤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어린 금상을 대신하여 영산왕이 고려를 수렴청정(垂簾聽政)하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본래 수렴청정할 태후가 있었음에도, 영산왕의 위세에 밀려 나갔다.
심양왕이 이를 악물며 예를 갖추고 나니, 어린 금상이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심양왕의 모습을 보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이옵니다. 강녕하신 용안을 뵈오니 신 또한 기쁠 따름이옵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지난봄에 군막 안에서 봤을 때만 해도, 참으로 초라하다 싶은 어린아이였던 금상이 지금은 옥좌에 앉아 나름 위엄 있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니, 개경에서 어린 왕으로서의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잠시 사적인 대화를 나누던 중 짧은 헛기침이 들려오자, 금상이 문득 대화를 멈추었다.
대신 수렴 뒤에서 영산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금상과 도타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흐뭇하나, 국정이 망극한 만큼 이쯤에서 정리해야 할 것이오.”
“…….”
영산왕의 목소리에 심양왕이 허리를 살짝 펴서 금상 위 흐릿한 신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감히 임금과 자신의 대화를 막은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비례라고는 해도, 영산왕 신돈에게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금상의 섭정이며, 실질적인 고려의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심양왕이 내게 독대를 청하였으나, 먼 곳에서 몸소 찾아온 것을 보아, 결코 나라와 무관한 일이 아님을 짐작하였기에 금상 앞에서 논의하고자 하였으니, 심양왕은 그 연유를 이 자리에서 밝히시오.”
이성계는 이를 조금 더 세게 악물었다. 금상 앞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쳐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고려와 경흥이 힘을 합하여 요동을 친다면 분명 이길 것이나, 그렇다고 나라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을 수는 없을 터였으니, 자신과 신돈이 약조한 바를 모를 수도 있는 금상에게 자신의 왕위를 위해 요동을 쳐 달라고 요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는 금상이 그의 욕심을 두고 탓할 것이라는 문제가 아니었다. 심양왕이 그 점을 지적할 때, 금상이 그에 동의할 것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무리 힘없는 왕이라고는 하나, 실질적인 권세를 가진 심양왕에게 국왕의 결정이라는 명분을 내려 주기에는 충분하였으니, 섣불리 용건을 꺼내었다가 다시 언급하기 어려운 지경이 될 수도 있었다.
이성계가 머뭇거리니, 다시 신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하시오? 말을 올리기가 그처럼 어려운 일이오? 하면, 혹시 요동을 정벌하자는 청을 하기 위해 온 것이오?”
‘저자가……!’
신돈이 먼저 사안을 밝혀 버리자, 이성계는 고개를 숙인 채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심 이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독대를 요구할 생각도 있었는데, 기어이 금상 앞에서 요동 정벌을 논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짐은 요동을 정벌하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정말 신돈과 이성계 사이의 약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것인지 금상이 나름 진중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하는 수 없이 심양왕은 중란에 있어 영산왕과 약속한 것에 대해 차근히 설명하였다. 최대한 심양왕위에 대한 욕심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자 하였으나,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이미 왕작을 받은 만큼, 요동을 얻는 것은 이 나라가 조금 더 안정된 이후에 도모하여도 되지 않습니까? 짐이 알기로, 지금 요동공은 이 나라의 관문을 지키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니, 그를 몰아낼 명분 또한 부족하지 않습니까? 만약 심양왕이 요동공을 치려한다면 고려의 백성들이 심양왕의 욕심을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이성계는 결국 듣고 만 욕심 소리에 발끈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곤, 이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요구하였다.
“하오시면, 금상께서 약조하여 주시옵소서. 당장은 아니나, 머지않은 시기에 요동을 정벌하여 제가 심양에 머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말이옵니다. 이는 비단 제 욕심만이 아닙니다. 금상께서 내려 주신 왕작이 지금 요동공으로 인해 유명무실해지고 있으니, 이는 금상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문제입니다. 하루빨리 왕명이 가볍지 않음을 세상에 일깨워 주십시오.”
“…….”
심양왕이 고하면서 슬쩍 옥좌를 올려다보니, 금상이 조금 당황한 안색으로 뒤를 슬쩍 돌아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전에 금상과 영산왕 사이에 모종의 모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아무리 중란 시기에 왕을 구명한 공이 있다곤 하나, 금상이 지금 자신의 안위를 쥐고 있는 영산왕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수렴 너머에 있어 영산왕의 표정을 제대로 살피기 어려웠으나, 못마땅함이 묻은 옅은 한숨 소리 이후 영산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과연, 나라의 안정만큼이나 금상의 권위 또한 중한 것이니, 심양왕의 말에 틀림이 없소. 그런 만큼 가급적 빠른 시기에 요동공을 물러나게 하고 심양왕이 제 자리에 설 수 있게 할 것이오.”
“……그게 언제쯤이면 가능하겠소?”
심양왕은 다시 허리를 피고, 영산왕을 향해 물었다. 이미 여러 번 요동 정벌에 대해 논의하자 청할 때마다 곧 할 것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린 적이 많았기에 이참에 금상 앞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약속을 얻어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수렴 너머에서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하여 심양왕은 그를 압박하기 위해 다시 물었다.
“올해가 어렵다면 내년 농번기 이후에는 가능하겠소? 아니면 그 다음 해? 혹은 또 그 다음 해? 나는 금상의 권위가 그처럼 뒤로 미룰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라 알고 있소.”
“허허, 이제 보니 심양왕께서 심기가 많이 불편하셨던 모양이오?”
다소 날선 목소리가 오고 가자, 그 목소리들 사이에 앉아 있는 금상의 표정이 시무룩해졌지만, 두 권력자들의 안중에 이미 금상은 보이지 않았다.
“내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영산왕께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그러니 이제 말해 보시오. 대체 언제 요동을 칠 수 있을 것 같소?”
영산왕의 입지를 생각하면, 상당한 압박이긴 했다. 금상의 앞이기 때문에, 자칫 망신을 샀다고 여긴다면, 영산왕이 오히려 심양왕에게 억하심정을 가질 정도였지만, 심양왕도 믿는 구석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만약 영산왕이 오히려 자신과 다투려 한다면, 심양왕은 차라리 요동공과 손을 잡고 고려를 칠 생각마저 품고 있었다.
그리 된다면 심왕에 대한 꿈은 버려야겠지만 말이다. 이는 왕좌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자신을 배신하려는 신돈에 대한 이성계의 분노와 복수심도 커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신돈이 차지한 자리까지는 넘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속으로 마음을 다지며 신돈의 대답을 기다렸는데, 수렴 너머에서 마침내 들려온 대답은 이성계의 예상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한 가지만 확실하다면 내년이 아니라 올 겨울이라도 군사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오.”
“한 가지? 그게 무엇이오?”
“내 병법에는 능하지 못하나, 적어도 싸움에 나서기에 앞서 후방이 튼튼해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소. 지금 고려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으로 나감에 앞서 후방이 튼실하지 못하니, 이를 먼저 해결해야 하지 않겠소?”
이성계는 무슨 되도 않는 변명이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요동으로의 진군에서 후방이라 해 봐야 결국 남쪽 고려의 본토였고, 고려의 본토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음을 세 살짜리 어린 아이도 알고 있었다.
왜구 또한 이미 등장한 지 오래되어, 이제는 걱정거리가 아니었으니, 후방이 지금보다 안정적인 때가 과연 언제인지 따지기도 어려울 정도이지 않은가.
하나, 영산왕 신돈의 생각은 달랐다.
“그대가 북방에 있어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근래에 제주현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
“제주현백? 지금 후방의 불안 운운한 것이 제주현백을 두고 한 말이었소?”
심양왕은 기가 막히다는 듯 말하였다.
“제주현백은 어려운 중에도 고려에 많은 말을 계속 바친 충신이 아니오? 나로서는 도저히 영산왕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소. 설령 제주현백이 헛된 마음을 품었다 한들, 그 한 줌의 섬을 다스리는 제주현백이 도대체 무슨 위협이 될 수 있겠소?”
“나 또한 그리 생각하였으나, 근자에 확인해 본 바 제주현백이 실로 엉뚱한 짓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소.”
“엉뚱한 짓?”
제주현백이 해 봐야 얼마나 엉뚱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코웃음을 쳤는데, 심양왕의 귀에 정말 엉뚱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제주현백이 대마도를 정벌하였소. 은밀히 사람을 보내 이미 확인한 사실이오.”
“……!”
“이는 사사로이 외국의 영토를 침략한 것이며, 이제 왜구의 침략이 잦아든 중에 다시 왜국과 갈등을 빚게 될지도 모르는 문제이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오. 만약 고려의 군사들이 요동에 집중된 사이, 왜국이 대마도를 빌미로 쳐들어온다면, 실로 사직이 위태로워지지 않겠소?”
말도 안 된다는 말이 심양왕의 입술 사이에서 맴돌았지만, 어린 금상마저 사실을 확인해 주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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