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6)
“후우, 죽는 줄 알았네.”
잠에서 깬 몽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왜구에게 죽는 줄 알았고, 후에 집에서 몽린의 어머니에게 죽는 줄 알았다.
집에 가기 전에 냇가에서 열심히 씻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고생한 흔적이 다 가실 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사이에 집안의 물건들이 사라진 것이 들통 났으니, 혼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아들 바보’ 해민 덕분에 종아리 몇 대 맞는 정도로 끝났고, 부처님 이름을 팔아 집안의 물건을 산에 묻은 것도 도로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말 고려 시대의 부처님은 문자 그대로 신이었다.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신.
무엇보다 몽주가 왜구에게 죽을 뻔했었다는 것 자체에 몽린의 부모들이 놀라고 다시 안도한 덕에 여러 파장을 잠재울 수도 있었다.
물론, 애초에 천마산에 가질 않았다면 그런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니, 몽주의 잘못이 다 지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제발 있어야 할 텐데.”
산행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왜구 때문에 진짜 목숨이 왔다 갔다 했다. 후에 몽린의 어미 주이에게 죽을 뻔했다.
이런 모든 위기(?)를 감당하고, 보물을 땅에 묻었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현대에서 그 보물들을 찾지 못한다면 너무나 아쉽고 억울할 것이다.
“그나저나 조영무라고 했지?”
몽주는 컴퓨터를 켜서 조영무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조영무라는 이름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흠, 변하진 않은 모양이네.”
한양 조씨의 조영무라는 자에 대한 설명을 보니, 예전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원래 조영무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정몽주를 척살했다고도 하고, 조선의 개국공신이기도 하다는 걸 보면, 꿈속에서 화살을 맞고 죽은 조영무와는 분명 다른 인생이 적혀 있었다.
사실 조영무에 대해 쉽게 검색해 낸 것이 몽주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았다.
꿈속에서 목숨을 구해 준 건 고마웠지만, 현대의 몽주 입장에서는 꿈속의 변화가 즉시 현대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며, 이는 물건의 변화도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물건의 변화가 바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추정의 유일한 근거는 오래전 기억 속의 청동검 도난 사건뿐이고, 그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 기대는 말자.”
몽주는 스스로를 향해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천몽으로 꿈속에서 사는 인생이 만드는 역사의 변화는 그 인생이 마감된 이후에 적용된다. 그것도 엄청난 두통과 함께.
그것은 천몽에 대해 몽주가 확신하는 유일한 진리였으니, 꿈속 과거에서 보물을 묻고 현대에서 바로 되찾을 수 있게 되는 건 여러모로 그 유일의 진리와 배척되는 현상일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몽주의 맘 한편에서는 기대감이 죽지 않고 있었고, 천마산 꺽정 바위에도 가 볼 생각이었다.
* * *
몽주가 천마산을 오르기 시작한 건 입산 금지 시간을 1시간 정도 남겼을 즈음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애초에 입산 금지 시간은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시간이 계산된 것이었으니까.
커다란 배낭을 멘 몽주는 천천히 산을 올랐다. 아직 산에 많은 등산객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내려오는 이들이었고, 그들 중 몇몇은 몽주에게 산에서는 금방 해가 저무니 조심하라고 충고도 던지곤 했다.
고의적으로 늑장을 부린 덕분에 꺽정 바위쯤에 이르자 등산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몽주는 꺽정 바위에서 쉬는 척하며 천천히 보물이 묻혔을 곳 주변을 탐색했다.
“대충 이쯤일 듯한데…….”
과거에 비해 훨씬 잘 보이는 꺽정 바위 덕분에 거리와 방향은 쉽게 잡을 수 있었다.
한데, 파묻은 곳을 정확히 짚는 건 불가능했다.
7백 년이 흘렀으니 파묻은 흔적이 남아 있을 리는 없고, 그저 그가 땅 위로 튀어나오게 만든 돌덩이를 발견하길 바랐지만, 불행히도 주변이 오래도록 쌓인 낙엽토로 온통 가득했다.
물론, 그건 과거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뒤로 7백 년 동안 더 쌓였을 테니…….
“하는 수 없지. 파 보는 수밖에…….”
인간의 감각이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는 몽주도 잘 알지만, 꺽정 바위의 모난 면이나 바로 근처에 두툼한 기둥처럼 서 있는 나무 등을 과거 속 모습과 비교해 보며 이곳이다 싶은 곳을 파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7백 년 동안 낙엽과 흙이 더 쌓였다고 해도 꺽정 바위가 보이는 각도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으니, 조금 파보면 목갑 위에 올려놓은 돌덩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몽주는 배낭을 열어, 먼저 공기가 빵빵하게 든 비닐봉지에서 공기를 뺐다.
그건 빈 배낭을 메고 올라가면 혹시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 시선을 피하기 위해 배낭을 부풀릴 용도로 넣어 둔 것이었다.
그렇게 비닐봉지를 치우고 나자, 배낭 바닥에 놓인 야전삽을 꺼내 들었다.
집 근처 할인 마트에서 9,900원 주고 사 온 야전삽은 꿈속에서 사용한 주철삽에 비하면 신기(神機)라 할 만하였다.
푹 파면 쑥 들어가는 게 삽질할 맛이 났으니.
게다가 꿈속 몽린의 몸에 비해, 그래도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몽주의 신체는 힘이 달랐다.
그래서 삽질을 쉽게, 계속할 수 있긴 했는데, 사실 그래서 문제였다.
아무리 파도 보물 상자 혹은 그 위에 올려 둔 돌이 보이지 않았다.
7백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렇게 많이 변한 것 같지는 않은데 이렇게나 많이 흙이 쌓였을 리는 없고…….
결국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위치를 잘못 짚었거나, 애초에 보물 상자가 없거나.
“역시 아닌가…….”
청동검 도난 사건과 예전 꿈에서 청동검을 없앤 건 역시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일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돈을 얻고 싶은 마음이 컸고, 그 때문에 망상을 하고 만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주는 이마에 튄 흙먼지를 털어 내곤 허리를 펴 주변을 살폈다. 아까 산을 내려가던 등산객들이 충고했듯 해가 성미 급하게 산등성이로 몸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그냥 포기하고 내려갈까…… 라는 생각을 스치듯한 몽주는 이내 삽을 들어 파던 곳에서 조금 더 아래쪽을 다시 파기 시작했다.
7백 년 동안 흙이 많이 쌓였다고 감안하여 위치를 다시 잡은 것이었다.
그보다 뒤쪽은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있어 그 뿌리의 범위를 가늠해 보면 보물 상자가 있어도 파내기 어려울 듯싶었다.
여기도 아니다 싶으면 포기하겠노라며 자신과 타협한 삽질이 시작되었고, 다시 조용한 산 중에 삽질 소리만이 주기적으로 흘러 다니게 되었다.
턱.
“어?”
그렇게 한참 팠을 때, 해가 진 산중이 어둑해지고 있을 때, 슬슬 포기하려 할 그때, 삽날 끝에 무언가가 박히며 으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무뿌리가 여기까지 뻗어 있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어둠 때문에 바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손으로 흙을 뒤적거리자 삽날에 걸린 게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다 삭아 버린 천에 쌓인 상자의 귀퉁이였다.
귀퉁이를 감싸고 있는 구리 장식이 삽날에 얻어맞아 쪼개지고 그 아래 목판마저 조금 쪼개 버린 것이었다.
“……오, 예.”
환호성을 지를 뻔하다가 목구멍에서 겨우 막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목갑이 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몽주였으니까.
그는 서둘러 야전삽으로 상자가 묻힌 쪽 흙을 걷어 내었다. 이상하게 그 상자 위로 올려놓은 돌들 중 제일 먼저 둔 큰 돌 외에 다른 돌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분명히 그가 묻은 오동목갑이 맞았다. 그 목갑을 싼 개경목은 너무 삭아서 슬쩍 힘을 줘도 부욱 찢겨 나갈 정도였지만, 그 또한 그가 목갑을 쌌던 천임을 의심할 수 없었다.
여기서는 7백 년이나 흐른 것이지만, 몽주에게는 불과 하룻밤 전의 일이었으니.
개경목을 다 찢어 내니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오동목갑. 그는 흥분된 마음을 달래며 서둘러 목갑을 열었다.
“어라?”
몽주는 자신이 보고 있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오동목갑은 분명 그의 것이 맞는데…….
어두워서 잘못 본 것일까.
그는 배낭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내 들고 목갑을 비추었다. 아무리 봐도 그 오동목갑은 자신이 시전에서 산 그것이었다.
“그런데 왜……?”
몽주가 목갑 안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곰곰이 이유를 따져 볼 순 없었다. 이미 해가 저물었으니 서둘러 하산해야 했고, 또 누군가에게 지금 모습을 들키는 건 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몽주는 큰 의문을 머릿속에 가둔 채 서둘러 목갑을 배낭에 챙겨 넣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그런데, 대체 이것들은 뭐지?”
집에 돌아와, 부모님이 주무시는 시간에 다시 오동목갑을 꺼내 연 몽주는 목갑 안에 든 것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가 목갑에 넣은 것들, 분명 목갑 안에 모두 있었다.
하나, 목갑 안에는 그가 넣지 않은 것들도 들어 있었다. 그것도 몽주가 넣은 것들보다 더 귀중품들이었다.
일단, 손바닥만 한 도금 불상.
처음에는 순금덩이인줄 알고 눈이 휘둥그레 했지만, 아래쪽을 보니 살짝 벗겨진 부분이 있어 도금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록 순금은 아니지만, 그 도금 불상은 상당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몽주가 넣은 여래입상보다도 더 정밀해 보였고, 도금도 아래 아래쪽과 뒤쪽만 조금 벗겨졌을 뿐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앞에서 보면 정말 화려했다. 7백 년 가까운 시간을 담고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또 하나 대단한 건 옥판(으로 추정되는 것)이었다. 손바닥만 한 연록색의 판에 한자로 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본래 색 있는 무언가가 글에 박혀 있었던 것 같은데 거의 다 지워져서 정확히 무슨 글자인지는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그것이 정말 옥이라면, 그것도 7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대단한 보물일 것이다.
그 외에도 책자도 하나 들어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불경인 듯했다.
내용은 알아보기 어려워도, ‘大方廣佛華嚴經(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표지에 흐릿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몽린의 몸으로 봤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몽주로선 표지에서 알아보기 어려운 ‘(儼)’자를 옥편으로 확인하고서 그것이 대방광불화엄경이고 화엄종의 교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 불교 관련된 거네. 이것도 마찬가지인가.”
몽주는 옥판을 다시 들어 형광등 불빛에 비스듬히 비추며 그 한자들을 알아보고 싶었다.
몇 자는 얼핏 알 수 있을 듯싶기는 했지만, 그 문장의 의미를 알기는 어려웠다.
“아, 그러면 되겠군.”
그는 옥판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A4용지를 옥판 위에 대고 연필로 슬슬 문질렀다.
어릴 적 동전 같은 것을 대고 문질러 양각된 모양을 종이에 본뜨곤 했던 게 기억난 것이었다.
이번엔 양각이 아닌 음각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종이 위에 글자가 드러났다.
그렇게 드러난 한자들 중에 몽주가 모르는 자들을 옥편에서 찾아 하나씩 따져 보았다. 아무래도 한자를 대대로 정체자(正體字)로 고수했던 한국 문화 덕에 오래된 표기임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자로 이뤄진 문장을 해석한 결과, 누가 그것들을 집어넣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대의왕(大醫王)이시여, 내 몸의 광명을 바치어, 내 자식의 장수를 기원합니다.
“후, 부모님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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