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65)
* * *
“이제야 다시 제대로 된 회의를 할 수 있게 되었군.”
“많이 기다렸나 보네?”
“솔직히 말해서 그렇지. 헛헛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언제는 믿을 수 없다고 난리치더니?”
“지금도 백 퍼센트 믿는 건 아니지. 그저 정말 변할 세상이라면, 그 변할 미래에 최대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고, 또 그렇게 되는 것 같으니 좀 더 달가워진 거지.”
재상과 두신은 어느 실내 포장마차 안에서 꼼장어 구이에 소주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난 요새 몽주 씨가 너무 잘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불안하던데.”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의 조언이 그다지 소용이 많은 것 같지 않다는 거지. 이제 혼자서도 잘 판단하고, 결정 잘하잖아. 이번 함포 외교도 그렇고.”
아직 한국에 입항하지 않은 몽주지만, 위성 전화를 통해 몽주의 지난 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뭐, 그런 면이 없진 않지. 사실 우리야 스페어타이어 같은 존재니까.”
“스페어타이어? 크크크.”
“어차피 판단과 결정의 최종 권한은 오로지 몽주 씨에게만 있잖아. 고려를 구전과 텍스트가 아닌 현실로 체감할 수 있는 사람은 몽주 씨뿐이니까. 우리는 몽주 씨가 당대의 정보만으로는 부족할 때를 대비하는 존재들이고.”
“음, 뭔가 자존감에 스크래치가 나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 애초에 몽주 씨가 바란 것도 그런 거였을 텐데. 전적으로 판단을 맡길 사람들을 원하는 거였다면, 우리 같이 어설픈 뜨내기 대신 진짜 전문가들을 잔뜩 골라 놨겠지. 우리는 뜨내기답게 괜히 설레발치는 대신 몽주 씨가 원하는 것을 공부하고, 연구해서 선보이면 되는 거야.”
“후후, 그렇겠지?”
재상은 웃음을 흘리며 빈 의자 위에 올려놓은 노트북 가방을 툭툭 손으로 쳤다.
어제 아침에 몽주로부터 전화를 받은 후, 두신과 더불어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가 담긴 노트북이었다.
고려, 아니 영산왕 신돈과의 ‘군사 동맹’의 세부 내용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박격포 형태의 보군 무기 개발에 쓸 만한 자료들이 담겨 있었다.
“그나저나 신돈이 그렇게 쉽게 손을 내밀지는 몰랐네.”
“결과적으로는 그렇지만, 신돈도 나름 고민 끝에 최선을 선택한 거지. 체면 차리겠다고 버텨 봐야 고려 해안만 박살 나는 거지. 잘은 모르지만, 몽주 씨는 개경을 공격하는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고. 물론, 그랬다면 몽주 씨도 좀 곤란해졌겠지. 그러니까, Loss-Loss 보다는 Win-Win을 택한 것이라고나 할까.”
“정말 Win-Win일까? 결국 몽주 씨가 고려를 잠식해 들어갈 텐데.”
“그야 신돈은 잘 모르니까. 당대 고려인의 시야로서는 판단 불능이지.”
위성 통화로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함포 외교와 군사 동맹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만으로도 대략 상황이 돌아가는 걸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신돈은 몽주의 함대가 가진 압도적인 화력에 저항해 봐야 패퇴와 도주 중 지방 세력들의 이탈 끝에 무너지는 결과만 가질 뿐이라는 걸 짐작하고, 차라리 몽주의 힘을 빌어 그의 권세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몽주의 입장에서도 아무리 승리를 확신한다고 해도, 막대한 인력과 자금의 낭비가 예상되는 길고긴 전쟁보다는 상업력으로 고려의 기반을 흡수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몽주 씨의 압승이지.”
재상과 두신이나 시간이 흐른 후에 고려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신돈과의 동맹이 체결된 건 아니었지만, 그 안에 고려 내 상행의 자유와 재산권의 보장 같은 조항은 반드시 들어갈 것이니, 화포만큼이나 압도적인 상업력을 가진 몽주의 제주가 고려를 잠식해 들어가는 건 정해진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
“요동도 마찬가지겠지?”
“약속대로 채굴권을 보장받는다면, 요동도 제주에 종속되는 거지. 몽주 씨가 특별히 배려해 줘서 따로 산업을 일구게 해 주지 않는다면, 몽주 씨의 광산업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 요동의 밥줄이 될 테니까.”
“내 생각에는 고려든 요동이든 신돈과 이성계의 숨통을 어느 정도 틔게 해 줄 필요는 있어. 너무 압박하면 초장부터 반발할 수도 있고, 그러면 몽주 씨가 곤란…… 하기보다는 귀찮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것도 그렇겠네.”
두 사람은 잠시 더 제주 아래 고려와 요동이 묶이게 될 미래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술을 마셨고, 이야기는 흘러 무기 개발에 대해서도 말을 나누었다.
“몽주 씨는 당장 소총을 만들 생각은 없는 모양이야.”
“적어도 전장식 소총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라. 하기야 배틀 라인에서 인명을 갈아 넣는 짓을 제주가 할 수는 없겠지.”
“곧바로 후장식 소총부터 시작한다?”
“그것도 대량으로 양산할 기술이 축적된 후에야 시도할 생각인 것 같아. 단지 후장식 소총 자체를 만드는 것이야 지금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아직은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빚어내는 수준일 테고, 그렇게 만들어도 호환성에도 문제가 있겠지.
“하기야 지금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의 소총이라면 폭죽 달린 화살만도 못할 테니…….”
“그래서 박격포를 생각한 거겠지.”
두 사람은 박격포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면서 고려에서 몽주가 응용할 만한 여러 아이디어를 간추려 두었다.
고려에서 최무선이 잘해야 할 일이겠지만, 그들은 지금 제주에 있는 기술만으로도 얼마든지 위력적인 보병 지원 무기를 만들 수 있으리라 보았다.
애초에 박격포라는 무기가 간단한 구조로 어떤 환경에서도 쉽게 쓰고, 고칠 수 있는 장점을 가졌으니, 반대로 말하면 낮은 기술 수준에서도 현대의 박격포를 비슷하게나마 따라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위이이잉.
문득 재상의 핸드폰이 진동하였고, 화면에는 ‘진몽주’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나 보네.”
재상은 씨익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도착하셨습니까?”
* * *
신돈이 ‘군사 동맹’을 요구했고, 그에 몽주가 응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해도, 단박에 동맹이 체결될 수는 없었다.
엄연히 실무진 간의 협상이 필요했는데, 금번 출항에 주요 교리들 중 군무교리 탁기를 제외하곤 데려오지 않은 몽주로서는 몇몇 하급 관리들과 더불어 손수 협상에 임해야 했다.
사실 몽주가 함포로 고려를 압박하여 얻고자 의도하였던 것은 단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요동 정벌에 고려가 개입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제주가 고려의 일부이고, 그간에도 교역이 활발한 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개항을 요구한다는 게 이해 안 될 표현일 수도 있었지만, 그간의 교역은 신돈이 장악한 시전을 통한 것으로 제주의 물산을 통해 구현된 부가 가치 중 상당 부분이 신돈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왜국의 데카이(出海)가 그러하듯 고려에도 무간섭의 개항장을 얻어 자유롭게 교역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신돈이 한발 더 나아가 군사 동맹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보다 복잡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때마침 현대로 돌아갈 수 있어서 재상, 두신과 더불어 협상에서 얻고자 하는 바를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신돈이 군사 동맹을 통해 권력의 유지를 도모하고자 하니, 그걸 미끼 삼아 보다 많은 것을 얻어야 마땅했다.
영산왕 측의 협상 대표는 역시나 곡성현남 염흥방이었다. 자신과의 인연이 있는 탓에 어려운 일을 도맡게 된 그가 나름 측은하기도 했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 법, 몽주는 염흥방을 거칠게 몰아 세워서 협상의 우위를 점하고자 하였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삼자 동맹이었다.
“현백, 심양왕과의 맹약은 불가합니다. 필요하다면 어제의 적과도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나라의 일이라 저 또한 동의하는 바이나, 심양왕과 영산왕 사이에는 이미 신의가 깨진 상태입니다. 설령 억지로 현백께서 심양왕을 끌고 들어오신다고 해도, 두 분 사이에 진정 맹약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염흥방은 애달픈 표정으로 열심히 몽주에게 사정하였다. 협상을 재촉하는 압박이 심한 가운데, 몽주가 심양왕을 포함한 맹약을 강요하고 있으니, 다른 논의가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몽주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리고 절대 수용 불가한 조항이기에 일부러 강요하는 척한 것이기도 했다.
염 현남의 설명에 더해, 영산왕이 심양왕과의 맹약관계를 거부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권세 유지에 심양왕과의 동맹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협상에 나선 것도 그저 고려에 파다하게 소문난 몽주와 제주의 힘에 굴복하는 것을 피하고, 명목상 동등한 위치에서 맹약함으로써 그 힘을 자신의 권세 유지를 위해 빌리겠다는 의도일 뿐이었다.
그에 비해 심양왕은 본디 영산왕이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던 자이며, 당금에도 제주만 아니면 심양왕의 행보를 얼마든지 방해하고 되받아칠 수 있었으니, 만약 심양왕마저 맹약의 일원이 된다면 영산왕의 권위에 진정 큰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몽주는 그쯤에서 삼자 동맹을 강요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하였다. 영산왕 측이 충분히 애달팠으니, 다른 조건을 내세울 때가 된 것이었다.
“영산왕의 생각이 진정 그렇다면, 아쉬우나 본 백이 포기하도록 하겠소. 대신 다른 조건이 있으니, 이는 반드시 가납해야 할 것이오.”
몽주가 휘하 관리를 통해 작성하게 한 문권을 염 현남에게 제시하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확인하고 입술을 앙 다문 채 고심하였다.
일단 단박에 불가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받아들여질 만함을 알 수 있었지만, 염 현남으로서는 그의 향후 출세가 달린 이번 일에 만전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얼마 후, 염 현남이 마침내 입을 열었고, 몽주가 예상했던 질문이 흘러나왔다.
“안주와 정주를 잇는 선의 이북을 심양왕의 권역으로 하자고 하신 것은 안주와 정주는 고려의 권역으로 하자는 말씀이시겠지요?”
“물론이오.”
몽주가 단박에 인정하자, 염흥방의 안색이 다소 밝아졌다.
안주(安州)는 현대의 평안남도 안주시를 의미하고, 정주(定州)는 현대 원산의 북부 지역(정평읍)을 의미하니, 그 두 고을을 잇는 선을 그리면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입구를 잇는 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충분히 제주현백이 고려에 이익이 되는 경계를 제시했다고 여길 만한 것이었다.
안주는 몰라도, 정주는 심양왕의 본거지인 함주와 닿아 있고, 본래 심양왕의 거점인 화령에 사실상 속한 곳이었으니, 만약 제주현백이 심양왕을 지원하여 그가 득세한다면 정주는 물론 화령까지 심양왕의 권역이 될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게다가 당대 고려의 지도를 통해 안주와 정주의 연장선을 긋고, 그 이북만을 내준다고 판단한다면, 고려로서는 전혀 아쉬울 게 없었다.
그 북방은 나라 살림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은 지역인 데다가, 지도의 왜곡으로 그 면적이 크게 축소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본래 현대 한국의 영토를 기준으로 안주와 정주의 이북은 전체 영토 중 삼분지 일 이상이었으나, 당대의 지도는 삼한의 크기가 무척 과장되어 있고, 반대로 북방의 크기는 축소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근대 시대의 지도가 다 그러하듯 지역별로 작성된 지도를 규합하여 전체 지도를 완성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지도였으니, 아무래도 인구가 많은 곳의 지도가 사실보다 과장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염흥방은 장차 요동을 얻은 심양왕과의 마찰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제주현백의 중재를 통해 유리한 조건으로 그 경계를 확정할 수 있다면 매우 좋은 일이라 판단했다.
고려 측이 하나를 얻었다는 분위기가 생기자, 다른 조건에서는 고려 측이 하나 정도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조성되었다.
“자유로운 상행과 채굴의 권한, 그리고 재산을 소유할 권리는 충분히 가납될 것입니다. 다만, 이에 대해 영산왕께서 한 가지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개경을 비롯하여 경기 지방에서의 상행은 시전을 통해 주실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
그에 몽주는 실소가 입가에 드리우는 것을 애써 막았다.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신돈이 참으로 애를 쓰는 것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확실히 신돈의 권세를 지탱하는 것이 시전을 통해 얻는 이문이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일견 일리가 있었다.
서경과 동경은 몰라도, 자신에게 큰 이문을 남기고 있는 개경과 한양부의 시전만큼은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경시감 휘하 3경 1부의 시전이 큰 이문을 남길 수 있던 것은 고려 전역의 상업 경로가 그 네 개의 시전에 집중된 덕이었음을 생각하면 그건 얕은 수에 불과했다.
항아리에 네 개의 구멍만 있다면 그 네 구멍을 막아 항아리에 물을 채울 수 있지만, 수많은 구멍이 있는 중에 두 개의 구멍만 막는다고 항아리에 물을 채울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신돈은 두 개의 시전을 얻어 시전의 이문을 최대한 유지하고자 했겠지만, 머지않아 그 두 시전은 몽주가 신돈에게 주는 모이를 받아먹는 모이통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언제든 걷어차 버릴 수도 있는 모이통임이 분명했다.
“그 정도야 내가 양보할 수도 있을 것 같군.”
몽주는 아쉬운 것처럼 표정 연기를 하며 영산왕의 같잖은 요구 조건을 받아들였다.
“현백의 너그러움에 진심으로 감…….”
쿵, 쿵!
염 현남이 감사를 표하다가 문득 울리는 폭음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아하하, 오늘도 현백군은 단련 중인 모양이군요.”
“본디 군병이라면 훈련을 쉬지 말아야 하지 않겠소. 근데 이제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소?”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심약한 구석이 있나 봅니다.”
염 현남은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협상이 진행된 지난 오 일 동안 현백군은 수시로 화포를 방포하며 훈련하였으니, 염 현남을 비롯하여 고려의 관리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사실 그러라고 지시한 일이긴 했다.
“하면, 저희는 이만 물러나, 영산왕께 합의의 내용을 고하겠습니다.”
도망치듯 염 현남은 서둘러 물러났고, 개경으로 달려가 합의한 것을 고하였다. 그 합의의 내용 자체는 금세 영산왕의 동의를 얻었다.
다만, 그것으로 맹약의 협상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다른 여러 조건들이 남아 있었다.
동맹의 성격과 지위에 대한 논의도 해야 했고, 몽주가 다스리는 영토를 인정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었다.
또, 군사 동맹의 성격도 있는 만큼, 군사적 조력의 조건과 규모에 대해서도 합의가 필요했다.
이런 협상이 마무리된 건 협상이 시작된 지 열흘하고도 이틀이 더 지난 후였다.
“좌제우휴의 결의라…… 이름은 그럴싸하군.”
논의의 연속 끝에 영산왕이 최종적으로 동의하여 회신한 문권의 이름이 그러했다.
동맹의 성격이 나라와 나라 간의 동맹이 아닌, 영산왕과 제주현백 간의 동맹인 터라, 정확히 ‘동맹’이라는 단어 대신 ‘좌제우휴의 결의’라는 이상한 제목이 붙게 된 것이었다.
좌제우휴(左提右攜)는 곧 상부상조이니, 서로 돕기로 결의했다는 말이었다.
몽주는 군막 안에 홀로 앉아 그 ‘결의문’의 세부를 차근히 읽어 내려갔다.
의례적인 부분을 생략하고, 주된 조항들 중 첫 번째 것은 동맹의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영산왕 영도첨의사사 신돈과 제주를 다스리는 남양 석씨 석몽린은 고려 국왕의 윤허 아래에서 좌제우휴의 결의를 맹세한다.]영산왕과 제주현백이 서로 돕기로 하되, 두 사람 모두 고려왕의 신하임을 강조한 것으로, 별첨으로 개경과 제주의 대촌현에 서로 10명 이하의 관원을 파견하기로 한 것과 서로 돕기로 하는 것에 대한 범위가 규정되어 있었다.
그 범위는 기본적으로 외적은 물론, 내란 또한 조력의 범위에 속해 있었는데, 그 외적의 예외 조건으로 심양왕이 거론되어 있었다.
다만 안주와 정주를 심양왕이 범하는 것을 예외의 예외로 인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심양왕과 영산왕 간 권역의 경계를 규정하였다.
마찬가지로 제주현백의 경우에도 외적과 내란이 있을 경우 영산왕이 돕기로 하였는데, 그 범위를 제주도에 국한하였다.
이는 대마도를 비롯한 왜국 내의 영토에 대해 고려의 간섭을 철저히 차단하고자 함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갈수록 좌제우휴의 결의는 제주현백이 영산왕을 일방적으로 돕는 것으로 좁혀질 가능성이 큰 바, 몽주는 과감히 조력받는 범위를 축소시키는 대신 혹여나 있을지도 모르는 간섭의 빌미를 주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몽주가 왜국에서 얻은 영토에 대한 인정은 세부 사항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명백히 몽주가 왜국에서 얻은 영토를 고려의 땅이라고는 명시하지 않는 대신, 왜국 영토나 왜국인에게 고려식으로 명명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몽주의 획토(獲土)를 지지했다.
좌제우휴의 결의에 남긴 가장 중요한 조항은 역시나 상행과 채굴의 자유 및 재산권의 보장이었다.
몽주는 개경을 포함한 경기 지역 외 고려 어느 곳이든 상선을 입항할 수 있고, 상업 행위를 할 수 있으며, 매매하는 모든 동산 및 부동산의 권리를 보장받았다.
여기에 슬쩍 (신돈의 입장에서는) 독소 조항을 끼워 넣었으니, 몽주의 상행을 돕는 고려의 상인 및 상단 또한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고려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넘어, 정치적으로도 고려의 지방 세력을 잡아먹고, 나아가 제주의 권역으로 만드는 결과로 충분히 이어질 수 있음에도, 개경과 경기 지방을 지키는 데에 혈안이 된 영산왕 측은 속뜻을 제대로 짚지 못하였다.
사실 독소 조항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몽주는 왜국의 경우를 명분으로 제주가 고려 도당의 허락이 없이도 따로 외국과 교역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는데, 그 대상을 왜국으로 국한하지 않아 세상 모든 외국과 독립적으로 교역할 수 있는 단서적 조항으로 탈바꿈시켜 버렸다.
당연히 이는 단기적으로는 명국과의 독자적인 교역을 노린 것이었다.
신돈 측의 ‘아마추어리즘’ 협상 수준과 권세 유지에 대한 혈안을 틈타 몽주가 안 보이는 미래의 이익을 열심히 챙긴 ‘좌제우휴의 결의’는 그렇게 합의에 이르렀지만, 곧바로 시행되진 않았다.
고려왕 휘하의 제후 간의 협정인 형태라, 고려왕 아래에서 예법을 갖춰서 조인식(調印式)을 진행해야 했으니, 그를 위해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몽주도 그사이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의주에서 심양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몽주가 예성강 하구에서 영산왕을 대신한 염 현남과 동맹에 대한 합의를 마무리할 쯤, 상무교리 고신걸은 남직례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일시적인 상행을 넘어 정기적인 상행의 권한을 얻기 위해 온갖 명국 높고 낮은 관리들을 만났는데, 결과가 그리 신통치 않았다.
반영구적이고, 정기적인 교역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높은 지위의 권력가와 만나야 했고, 최종적으로는 왕실과도 연이 닿아야 하는데, 명국의 관리들이 받아먹을 건 받아먹으면서도 좀처럼 선을 이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성급해하지 마십시오. 현백께서도 성과에 목매지 말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다시 시도하면 될 것이니, 지금은 그저 명국의 현황에 대해 충분히 알아 가는 것만으로도 현백께서는 만족하실 것입니다.”
“알고 있네.”
고씨 가문의 일족이자, 그의 휘하 관원이 위로를 겸한 조언을 해 주었지만, 고 교리의 마음은 퉁명스런 대꾸처럼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의 성미에 명국의 반응이나 명국 관리의 행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가타부타 그 대답을 듣는 것 자체가 너무나 느렸던 탓이다.
실상 고신걸은 고씨 가문의 후계자로서 성장했고, 관리로서 일한 것도 현백 휘하에서 경험한 것이 전부였으니, 어느 쪽에서나 빠릿빠릿한 반응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러다 명국에서 느려터진 일 처리에 직면했으니, 일이 되든 아니 되든,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잘 진행되었다면 조금 다를 수도 있었겠지만, 길게 기다려서 얻은 대답이 모두 부정적인 것뿐이었으니, 그의 조급증과 답답함이 한결 커진 것은 당연했다.
수하의 말대로 이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책망 받을 이유는 없었다. 또, 명국의 사정을 관찰하였으니, 그에 대해 보고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공은 세웠다 할 만했다.
당금 명국은 평안한 중에 위태로움이 있었으니, 북원의 반격이 거센 것에 대한 불안함이 백성들 사이에 감돌았고, 명국의 귀족들 사이에는 천자에 대한 불만이 오가고 있었다.
특히 지난 명군의 실종 사건으로 인해, 천자가 승상 이선장을 축출한 후, 그 권한을 쥔 채 독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권력의 움직임에 민감한 명국의 귀족들이 한층 천자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나아가 그 대응책을 강구하려고 애썼다.
이는 이미 제주에서도 어느 정도 파악한 부분이긴 하지만, 직접 명국의 관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것이기에 정보의 가치가 남달랐다.
하나, 고신걸은 그가 명국에 온 궁극적인 목적을 반드시 달성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기에 그런 작은 공에 만족할 수 없었다.
곧바로 교역의 권한을 얻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관문’ 하나 정도는 만들어 두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내 듣자 하니, 명 태자의 태감이 남직례를 순방하곤 한다는데, 그 태감에게 접근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고신걸이 수하들에게 그의 생각을 밝히니, 수하들이 놀란 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현백께서 명 황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말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명국의 황실은 겉에서는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온갖 정치적인 다툼이 가득한 곳이기에 유리와 불리를 가늠하기 어렵다 말씀하신 것을 상기하십시오.”
“…….”
수하들이 현백의 조언을 떠올리게 하자, 고신걸도 더는 자신의 생각을 앞세울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공명심을 가지고 있고, 그의 가문을 크게 세우리라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해도, 현백의 조언이자 경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모든 것이 현백의 인정 아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현백께서 명의 태자와 인연이 있다 하니, 자리를 잘 만들기만 하면 충분히 좋은 대화가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 크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고신걸의 방도는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질 뻔하였는데, 갑자기 의외의 일이 생겨 상황이 바뀌었다.
명국 태자가 먼저 태감을 보내 만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수하들 사이에서도 이번에는 의견이 엇갈렸다.
태자가 먼저 제안한 것이니, 마냥 거부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고심 끝에 고신걸은 두 명의 수하와 더불어 태자가 보낸 마차에 올라탔다.
그것이 행운인지 불운인지는 마차가 멈추고도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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