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66)
현백군이 의주에서 이성계의 심양군과 합류하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겨울철 날씨에 야루강(압록강)이 하류까지 얼어붙어 강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해안에 배를 대야 했는데, 딱히 제대로 된 포구가 없는 북방이라 정박할 만한 곳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의주에서 60길미 이상 떨어진 철주(鐵州 : 평북 철산군)까지 돌아갔는데, 작은 반도와 섬이 맞닿은 곳이 있어, 파도를 막을 만한 곳이었다.
물론, 그곳도 황해 특유의 넓은 갯벌 때문에 정박시키기 어려웠지만, 밀물 때 들어가 배를 서로 묶어 고정시키고, 키를 들어 올려 경함선의 평평한 후미저판으로 갯벌 위에 올라타게 하였다.
그렇게 고생 끝에 상륙한 현백군은 함대를 지킬 1천명을 제외하고 의주로 이동하였다.
현백군 2천 5백여, 청해백 이두란이 이끄는 심양군 5천이 의주에 닿은 것은 다음날 저녁에 이르러서였다.
직선거리로는 50길미에 못 미치지만, 돌아가는 길이라 훨씬 길었고, 화포를 끌고 가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제주의 화포가 작고 가볍다 해도, 그건 청동제 화포에 비해 그렇다는 거지, 사람이 끌고 밀어 움직이게 하는 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마른 땅이 아예 얼어붙어 진창이 없는 덕에 할 만 했지, 날씨가 풀려 진창이 생겼거나, 눈이라도 쌓였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모든 군병들이 기진맥진해졌는데, 그나마 현백군의 상태가 좀 더 나은 것은 무수당의와 무수당화 덕이었다.
좀 무겁긴 하지만, 비단 물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북방의 칼날 같은 바람으로부터 거의 온몸을 보호해 주니, 적어도 추위로 인한 고생은 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양군도 북방의 군대인 터라 나름 추위에 대비한 장구가 있긴 했지만, 그래 봐야 조끼 형태에 불과했으니 벌써 동상에 걸려 고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의주에서 이성계와 합류한 후, 몽주가 가장 반가웠던 것은 심양군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말들이었다.
3천여의 기마군이라곤 하지만, 실제 쓰이는 말의 수는 5천에 가까웠으니, 치중을 위한 말도 있고 여유분의 전마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들이 장차 심양까지 화포를 끌어 줄 것이라는 게 반가웠다.
“고생 많으셨소.”
군막 앞에 나와 현백군을 맞이한 심양왕은 초췌한 모습의 몽주를 보며 실소를 흘리곤 환영하였다.
몽주가 화포를 끄는 일을 한 건 아니지만, 군병들과 같이 도보로 이동했으니, 약한 체력에 크게 지칠 수밖에 없었다.
“예, 고생 좀 했습니다.”
“하하, 어서 들어가서 따뜻한 차부터 마십시다.”
웃는 낯의 심양왕을 보아하니, 그도 대략 고려에 있었던 일을 소문으로 들은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보름 이상 의주에서 기다렸던 것에 심기가 좋지 않았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군막 안에 들어간 후 이성계는 몽주가 따뜻한 찻물을 한 모금 마시자마자 긴장한 빛으로 물어 왔다.
“요성을 점한다면 정주와 안주의 이북은 내 영토가 되는 것이오?”
몽주는 찻물을 목 너머로 넘기며 고개를 끄덕이곤, 수하를 시켜 지도를 가져오게 하였다.
다시 펼쳐진 정밀한 지도 위로 몽주는 요동 반도와 심양, 그리고 함주와 단주를 아우르는 타원형을 손가락으로 그려 보였다.
“이것이 심양왕 저하의 영토가 되겠지요. 물론, 아직은 그저 이루어야 할 목표에 불과합니다만.”
“그야 그렇소. 하나, 요성 점령이야 시간문제 아니겠소?”
이성계는 믿음직한 표정으로 몽주를 보며 말하였다.
고려를 진동시킨 화포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터이니, 그 화포의 도움만 있다면 요성은 금세 떨어뜨릴 수 있다 믿고 있는 것이었다.
몽주 또한 그 의견에 달리 생각하는 바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나, 몽주가 심양왕의 영토를 두고 아직 목표에 불과하다고 말한 이유은 단지 요성 점령만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니었다.
지도상으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동해 방면의 함주와 단주는 황해 방면의 요동 반도 및 심양과는 분리된 세상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사이에 백두대간이 북남으로 흘러내려 가고, 개마고원이 자리 잡고 있으니 양방 간의 소통이 몹시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성계가 3천여의 기마군과 더불어 의주로 온 것으로 알 수 있듯 아주 오가기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군력이 아닌 일반 백성들 간에는 서로 왕래가 없는 세상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다가 크게 타원의 영토를 그려 보았으나, 실상 심양왕이 요성을 점령한다 하더라도 한동안 그의 다스림이 유효한 곳은 요동 반도 쪽 일부와 함주 쪽 일부에 불과할 것이니, 그사이는 여전히 호인들이 활개를 칠 게 분명했다.
이성계 또한 그 점을 모르진 않겠지만, 지금 당장은 요성 점령의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 데다가 그의 꿈인 심왕 등극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에 기뻐하느라 장차 그가 맞닥뜨릴 고난은 아직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요동공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고려에서 몽주가 영산왕 신돈과 맺은 결의의 내용을 두고 잠시 논하다가 물었으니, 이성계는 문득 자신의 갑주 가슴 부분을 주먹 쥔 손으로 툭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
“나라고 어찌 놀고만 있었겠소? 세작을 보내 요성의 분위기를 살피는 한편, 과거 요동군 상장군 시절에 우호를 나누었던 토호들과 긴밀히 이야기를 나누었소.”
이성계의 전언에 의하면, 요성에도 이미 심양왕과 제주현백이 힘을 합쳐 요동공을 축출하기 위해 출군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했다.
게다가 최근에 세작이 알아 온 바로는 요성에도 제주의 화포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요동공의 군병들이 크게 불안해하고 있다고도 하였다.
“토호들 중에서도 은밀히 내응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이들도 있었소. 다만, 혹시 요동공의 간계일 수 있어 확신할 수 없고, 굳이 그들이 필요한지도 의문이기에 호응하진 않았소.”
“잘하셨습니다.”
“그래도 요동공의 치세에 토호들이 불만이 많은 모양이더이다. 최 장군이 본디 융통성이 부족한 분이라, 자신의 명에 무조건 따르길 강요한 모양이오.”
심양왕은 그 말을 전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져 있었으니, 요동공의 곤란이 그에게는 이득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당장은 그런 판단이 틀리다 할 수는 없겠지만, 차후 요동을 다스려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사실 마냥 좋아라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요동공 최영에게 불만이 생기자, 외부의 세력과 결탁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토호들이므로 이성계의 치하에서도 언제든 비슷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원이 무너지기 시작한 이래로 몇몇의 군벌들이 약육강식의 세력 다툼만을 일삼던 요동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부와 권력을 조금이라도 쥐고 있는 토호들이라면 처세에도 능할 것이고, 그 처세의 한계는 없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배반과 역성을 포함해서.
몽주와 이성계가 얼마간 요성 공격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도중 몽주에게는 늦은 저녁상이자, 술상이 들어왔고, 온갖 이야기로 대화를 이었다.
그러다 문득 술을 몇 잔 마신 이성계가 말하였다.
“이보시오, 현백. 아직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니겠지만, 내 솔직한 마음을 밝히자면, 나는 지난날 현백과 더불어 요성을 지킬 때부터 오늘과 같은 날을 꿈꾸었소.”
“그렇습니까?”
“왜 아니 그렇겠소? 어린 현백을 처음 만났을 때, 부처의 보우하심을 받고 있는 것에서 큰 인상을 받았고, 요성에서는 부처의 안배를 통해 난국을 이겨 내게 만든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니, 현백과 함께한다면 내 작은 꿈도 능히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소. 하여, 현백이 요성에서 고려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도 현백의 행보를 주시하였고, 그 인연을 놓고 싶지 않았기에, 포은에게 일러 그대와 인연을 맺으라 청하기도 하였소. 물론, 세상이 마음과 같지 않아, 내가 경흥의 현후라는 허울 좋은 작위를 얻어 함주로 밀려나고, 포은이 신돈의 박해 아래 고생하였으며, 현백이 살기 위해 제주로 가야 했으니, 사실 한때는 오늘과 같은 날은 오지 못할 수도 있다 낙담하기도 했었소. 한데, 현백은 그 척박한 제주에서 세력을 크게 일구었고, 왜국에서 죽을 뻔했던 포은과 여러 유자들을 내게 선사하기도 하였으니, 우리의 인연이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음을 느꼈소. 이 모든 게 부처님의 보우하심이겠지만, 현백의 현능이 특출한 덕이 아닌가 하오. 아직 이른 말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현백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오.”
취중진담과 같은 것인가.
몽주는 문득 전해 들은 이성계의 마음에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며 겸양하였는데, 사실 속으로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
몽주가 심양왕을 도와 요성을 점령하고자 한 것은 오직 다루기 어려운 요동을 그에게 맡기고자 함이었고, 신돈을 끌어내리는 대신 명목상 고려를 그에게 맡긴 것과 같은 취지였다.
당장은 제주의 힘만으로는 고려든, 요동이든 다룰 수가 없기에 범 고려의 영역으로 지키면서 천천히 속부터 갉아먹어 성장하고자 유도한 것이다.
작은 거미가 큰 나방을 거미줄에 묶어 놓고 조금씩 잡아먹는다고나 할까.
몽주가 겉과 다른 속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심양왕이 난데없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포은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대관절 그가 제주에서 보았다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아시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주가 생각보다 살만 하니, 나라의 경영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포은이 그에 대해 알아보고픈 바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몽주의 대답에 심양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날 몽주와 손을 잡기 위해 서찰을 보냈을 때 함께 온 심양왕의 신하는 포은을 만나기를 청하였었다.
몽주는 그에 허락하였는데, 포은이 쉽게 제주를 떠나거나 여러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 어느 정도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포은은 그가 잊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몽주는 간간이 화극을 통해 그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으니, 그가 과거 ‘엘리트 유학자’다운 모습을 많이 버렸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는 법은 아닌 터라, 몽주는 포은이 진정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만약 포은이 함주로 떠나고, 제주의 비밀을 토설한다면 그 또한 감당할 일이라고 여겼을 따름이었다.
어차피 제주의 진면목을 서서히 밝힐 때가 다가왔기도 했기에.
한데, 포은은 심양왕의 신하에게 짧은 말만 남기고 돌아갔는데, ‘제주에서 깨달음을 엿보았으니, 그것을 알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사실 포은이 말한 깨달음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몽주도 궁금했다.
단지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산다는 것만으로는 포은 같은 엘리트 코스의 유학 근본주의자의 자세를 바꿀 수는 없었을 테니, 정말 그의 사상에 변화가 생길 만한 깨달음을 엿본 것일까?
포은에 대한 생각을 짧게 하던 몽주는 이성계가 포은에 대해 너무 깊이 파고들기 전에 화제를 바꾸고자 하였다.
“저도 내심 궁금했던 것을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런 것이 있었소? 물어보시오.”
“지금 요동공은 저하의 정적이나, 사적으로는 오래전부터 인연이 깊어 아버지처럼 따르던 분이라 들었습니다.”
“……그렇게 따르고 모시던 분을 적대하고 공격하는 데 괜찮으냐고 묻는 것이오?”
몽주가 요동공 최영을 언급하니, 심양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양 대신 자문하였다.
“분명 최영 장군께서는 고려의 큰 장군이셨소. 나는 고려의 군관으로 입문하던 시기부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고, 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장군을 내 아버지라 여기기도 했소. 어디 나만 그렇겠소? 고려의 크고 작은 장수들이 모두 최영 장군을 높이 여기며 따랐으니, 고려 군관의 으뜸은 언제나 그분이셨소. 하나, 그런 평은 장군께서 그저 무관의 길을 걸었을 때나 통용되는 것이라 생각하오.”
“하면, 요동공 최영과 지난날의 고려 무장 최영 장군과는 다르다 여기시는 겁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소? 장군께서는 평생을 군인으로 사신 분이오. 본래 성품 또한 그렇지만, 군관은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소. 적이 쳐들어오면 막고, 적을 쳐부수라 하면 공격하면 되는 것이오. 하나, 정치에 한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는 더는 그 단순한 판단은 도움이 되지 않소. 아니, 도움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에 죄를 짓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무도한 말이겠으나, 최영 장군께서 요동공에 봉작되신 이후 그분이 행하신 일은 정상배에게 놀아난 것에 불과하오. 그분은 계속 군관이셔야만 했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오.”
몽주는 이성계의 최영에 대한 품평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긴 했다.
역사에서 장수로서의 최영과 고려의 권세를 쥔 최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처럼, 당금의 변해 버린 고려에서도 최영은 비슷한 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몽주의 머릿속에 또 하나 남은 생각은 이성계가 최영에 대해 평한 말들은 실상 그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할 말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역사에서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조선이라는 업적을 세운 이성계이긴 했지만, 많은 이들이 평하듯, 조선 건국은 정도전이 주역이었던 바, 이성계가 정치라는 무대에서 성공한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지금도 일단 시작은 비슷하였다.
이성계는 자신의 도움으로 요동을 얻어 심양왕의 품위를 제대로 얻을 것이다.
하나, 말년에 조선을 세웠던 역사와 달리 이번에는 그 스스로 다스려야 할 시간이 꽤 길게 남았으니, 그의 정치적 역량은 이제부터 평가받게 될 것이었다.
몽주는 정치인으로서의 이성계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높지 않길 바랐다.
그것이 몽주에게는 유리하였고, 나아가 범 고려에 사는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더 나은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요성 점령은 물론, 심양왕 저하의 승승장구를 바랍니다.”
몽주는 술잔을 들어 이성계에게 축원하였다.
* * *
심양군 8천여 명과 현백군 2천 5백 명으로 이뤄진 요동 정벌군이 요성 앞에 당도한 것은 대략 팔 일 후였다.
얼어붙은 야루강 위에 거적때기를 깔아 도하하고, 요동 동쪽 산악 지대를 계곡길을 따라 통과하여, 대략 150길미의 거리를 이동한 것이니, 좋지 못한 도로 사정과 무거운 화포를 생각하면 제법 빠르게 이동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두 번의 전투가 있었으니, 한 번은 산중에 요동군이 매복하였다 습격하였고, 다른 한 번은 산악 지대를 벗어나자마자 요격을 받았다.
요동군의 매복은 용병에 탁월한 이성계가 첨병을 잘 활용한 덕에 미리 알고 오히려 역습을 노렸다.
이때는 현백군이 그다지 활약할 겨를이 없었는데, 화포를 운용할 환경도 아니었고, 화포 운용 외에는 수군 성향의 현백군이 야전에서 선봉에 설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탁기가 직접 해병대를 이끌고 심양군과 어울려 역습에 참여하여 체면을 세웠다.
반면 산악 지대를 벗어나 야지에서 요동군의 요격을 받았을 때는 현백군이 크게 활약했으니, 가리는 것이 없이 넓은 대지 위에 있는 요동군은 화포의 좋은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요동군도 화포를 의식한 듯 기마를 앞세워 급히 쇄도함으로써 방포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려 하였으나, 일격에 화포를 운영하는 군병을 해치우지 못하는 이상, 기마를 뒤따르는 요동군 보군이 화포의 공격에 휩쓸리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현백군이 단지 화포만을 쓰는 것도 아니었으니, 해병대가 선두에서 폭죽이 달린 화살을 날려 방포의 간격을 매웠고, 요동군은 연신 터지는 크고 작은 폭발 속에서 비명만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죽은 요동군의 말들을 확인해 본 바, 모든 말들의 고막이 뚫려 귀가 멀었고, 눈도 가려져 있어, 여러모로 폭음에 대비하긴 했지만, 지난날 중란에서 보았던 어설픈 폭죽과는 차원이 다른 열병기 앞에서는 그다지 유효한 조치는 아니었다.
대략 2만으로 추산되는 요동군의 요격군 중 요성으로 돌아간 수는 1만 미만이었다.
사실 요동군의 요격은 초반 기세가 꺾이자마자 이내 퇴군의 영이 떨어졌기에 운이 좋았다면 더 많은 이들이 돌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심양왕의 기마군이 눈만 뜨고 서 있었을 리가 없었고, 도주하는 요동군들 중 상당수가 심양군 기마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이성계는 요동공의 실책이라 평하였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름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게 몽주의 생각이었다.
산악 지대를 벗어나느라 지친 적을 보다 많은 군력으로 크게 치는 것은 분명 시도할 만한 전략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최영 또한 소문만 들었지, 제대로 그 위력을 본 적이 없는 화포와 폭죽의 성능을 과소평가한 것이 실수였다.
요동군의 요격 또한 요동공이 직접 이끈 것이 분명하지만, 이성계든 몽주든 최영의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다.
아무래도 빠른 퇴각의 명이 떨어진 만큼, 요동공 또한 공격이 실수였음을 판단하자마자 군병들과 더불어 요성으로 후퇴한 모양이었다.
성과는커녕 피해만 크게 입은 채 요성으로 돌아가고, 요격군 절반가량이 돌아오지 못한 걸 확인한 요동공의 심정은 어떠할까.
좌절감에 빠졌을지,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을지 몽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요성 앞에 당도하여 성에서 전해지는 분위기를 느끼니, 요동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요성에 전반적으로 패배감이 감돌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요성에서 2길미가량 떨어진 곳에 진을 쳐서 하루를 쉬고 만전하여 요성 공략에 나선 정벌군은 현백군의 화포로 공성을 시작했다.
쿵쿵!
방포음이 천지에 가득하니, 그 튼튼한 요성의 성벽에서 부서진 파편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고, 성벽을 넘어 들어간 천뢰탄은 성 안을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얼마간 화포로 요성을 두들기고, 항복을 종용하기 위해 준비하던 참에 문득 요성의 동문이 열리더니 기마 한 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요성으로부터 1길미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이성계와 몽주는 얼마 후, 그 기마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투구도 없이, 풀어 헤친 휜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긴 창을 겨드랑이에 낀 채 비교적 단출한 무장으로 천천히 정벌군 쪽으로 다가오니, 그것을 본 심양왕이 말을 대령하라 하였다.
“직접 가실 겁니까?”
심양왕의 수하들이 만류하던 중에 몽주도 말리는 느낌으로 물었다.
“비록 적이라 하나, 지금 저곳에 계신 분은 요동공이기 전에, 고려의 장수 최영 만호이시오. 장수로서 찾아오셨으니, 나 또한 장수로서 마중해야 하지 않겠소?”
“만약 요동공이 공격한다면 어쩌실 것입니까.”
“싸워야 하지 않겠소? 혹시 내가 질 것이라 걱정하시는 것이오?”
이성계가 입가에 실소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는 최영의 장수다운 최후를 위해 직접 나서려는 듯했다.
“요동공을 직접 베실 것입니까?”
“…….”
몽주가 다시 물으니, 이성계는 말 위에 올라타곤 잠시 요동공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최영 장군께서도 그것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겠소.”
심양왕이 등채로 말을 쳐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남긴 한마디였다.
그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최영과 이성계는 서로 가까워졌으니, 두 사람이 말머리를 앞에 두고 선 것은 정벌군의 진지로부터 200미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요성의 성벽 위에서, 그리고 정벌군의 진지에서 모든 장령들과 군병들이 두 거인(巨人)의 만남을 주목하였다.
당연히 두 사람 간의 대화는 그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었다.
다만, 몽주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 것을 얼핏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시작부터 적장 간의 만남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마 고려의 선후배 장수이자, 사적으로 의부의자(義父義子)로서 만난 것이었으리라.
하나,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리고 서로를 향해 고개를 젓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사적인 인연에서 정적으로서의 현실적인 관계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최영 장군이 창을 들어 심양왕을 겨누는 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종지부를 찍었다.
이성계는 요동공을 직시한 채, 천천히 말을 뒤로 물렸으니,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스무 마리쯤 일렬로 세울 만큼 거리가 멀어지자, 그 또한 창을 들어 올렸다.
몽주는 실로 판타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고려에도 군협(軍俠)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이 많이 떠돌았고, 그 이야기 중에 일기로 겨루는 내용이 흔히 들어 있기는 하지만, 실전에서 장수들 간에 일대일의 겨루기는 당대에도 성립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지금 심양왕과 요동공처럼 한 세력의 수장들 간의 다툼은 그야말로 판타지일 수밖에 없었다.
한쪽이 죽으면 그 세력이 와해될 수밖에 없는 정치 체계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 최영이고 이성계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두 사람의 인연이 깊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몽주가 은근히 긴장에 휩싸여 두 사람의 인연을 떠올릴 때, 마침내 요동공이 먼저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뒤로 휘날리며 돌진하는 그의 모습은, 역사에서 ‘백수 최만호(白首 崔萬戶)’라는 이름으로 왜구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것을 떠올리게 하였다.
이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지금의 장면이 역사에 기록된다면, 최영은 요동의 백수라는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챙!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가 사방을 울리며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가니, 직후에 이미 두 사람 모두 창을 쥔 채 달리던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첫 접전이었기에 대부분 그저 손에 땀을 쥐고 있을 뿐이었지만, 탁기의 눈에는 이미 승패가 보인 듯 몽주에게 한마디 하였다.
“최영 장군께서 늙으셨군요.”
늙음은 피할 길이 없는 법이고, 최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생각해 보면, 당년에 환갑인 최영이 그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이성계와의 싸움에서 단번에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세월을 이기는 기적을, 다른 이도 아니고, 한국사의 대표적인 장수 중 하나인 이성계를 상대로 이룰 수는 없었다.
몇 합의 부딪침이 연이으니, 무예를 모르는 몽주의 눈에도 최영이 밀리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다시 몇 합의 접전 후 최영이 비틀거리며 말고삐를 낚아챘다가 앞발을 크게 든 말 위에서 낙마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래도 최영은 다시 일어섰다.
저런 것을 두고 노익장(老益壯)이라 평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흐트러진 백수에 땅 위를 굴러 너저분해진 갑옷 차림의 최영은 검을 뽑아 들고, 다시 이성계를 향해 겨눴으니, 이성계 또한 하마하여 창을 버리고 검을 뽑으며 최영에게 다가갔다.
서로를 향해 다가가던 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급해졌고, 격돌의 순간에는 힘껏 달려온 기세로 서로를 베고자 하였다.
그들이 휘두르는 검의 충돌은 무협과 달리 쉴 틈 없이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그 위력은 범인이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컸다.
검날이 충돌할 때마다 터져 나오는 소성은 폭음인 양 먼 곳에 있던 몽주의 귀를 울리게 할 정도였으니, 그 충격을 양손과 온몸으로 지탱하는 두 무인의 엄청난 용력을 능히 깨달을 수 있었다.
몇 합의 겨룸이 지나가자, 또다시 나이 든 육체가 최영의 발목을 잡고야 말았다. 이성계의 검을 막은 직후 최영의 무릎이 휘청거리더니, 다음 번 이성계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가슴을 내준 것이다.
촤아악!
먼 곳에서도 두껍지 않은 찰갑이 갈라지며 붉은 핏방울이 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최영은 몇 걸음을 비틀거리며 물러나면서도 검을 애써 들고자 노력하다가 기어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는 무릎 꿇은 것이 수치스러웠는지 곧바로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으나, 이미 그의 몸을 타고 쏟아지는 검붉은 핏물이 그가 더 이상 싸울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버티고 선 그의 앞으로 이성계가 검을 겨눈 채 다가가니, 사방에 수만의 인명이 있음에도 일대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 몽주는 크게 고민하였다. 지금이라도 달려가 최후의 장면이 보이는 것을 막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건 감정적인 고민이었으니, 여기서 최영을 살린다고 해도 그 후에 그를 어찌 처분해야 할지는 몽주로서도 생각한 바가 없었던 탓이다.
그저 요동에서 요동공 최영은 끝이라고만 여겼을 뿐이었다.
한데, 막상 최영이 스스로 고려를 대표하는 무장이었음을 상기시키니, 몽주조차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이대로 죽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스각!
하나, 몽주의 고민은 더 길어질 수 없었다.
이성계가 검을 휘두르자, 최영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툭.
내내 불던 겨울바람이 잠시 멎은 탓일까. 최영의 수급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소리마저 명확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일세를 풍미한 장수의 최후에는 환호도 없었고, 절규도 없었다.
이성계는 말을 타고 진지로 돌아왔고, 오자마자 최영 장군의 시신을 거두라는 명만 내렸다.
감각과 이성이 불분명함을 느끼며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요성은 이미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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