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67)
* * *
홍무제 주원장이 태자를 제외한 4남까지의 황자들을 왕에 봉작함으로써 이미 명의 친왕제는 시작되었다.
참고로, 친왕(親王)의 본래 명칭은 그냥 ‘왕’으로, 다른 시기의 왕작과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왕들은 각자의 봉지에 왕부를 세웠으니, 그 규모는 주변 ‘오랑캐’ 나라의 국왕이 가진 것에 육박할 정도였다.
봉록이 1만석에 이르고, 군병도 최대 2만에 가까웠으며, 친왕과 친왕의 차남 이하에게 봉해지는 군왕은 대대손손 세습도 가능했으니, 문자 그대로 ‘왕’이었다.
이런 ‘대접’은 천자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황자들이 괜한 욕심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니, 확실히 어지간히 욕망이 강하지 않다면 친왕으로도 만족할 만했다.
물론, 반대로 강한 힘을 가진 친왕이 천자의 자리를 넘보거나, 천자를 위협하여 하극상을 저지를 수도 있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주원장의 4남 주표, 즉 본디 역사에서 연왕이었다가 천자의 위에 앉아 영락제라 불린 이였다.
다만, 당금의 주표는 역사에서도 그러하듯 어린 나이를 이유로 아직 응천부에 머물고 있었다.
“소태감이 고려의 상인을 직접 불러 만났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알아본 바로는 그 상인은 정기적인 교역을 원하여 여기저기 선을 대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정기적인 교역?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어차피 지금 명국이 사사로운 교역을 금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래도 올 때마다 관원들로부터 교역을 허락받는 수고로움을 피하고자 하는 모양입니다.”
태감의 보고에 주표는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
교역할 때마다 매번 포구와 고을의 관원을 대해야 하니, 거래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고, 매번 그럴 바에는 차라리 보다 높은 권력과 연을 맺고, 그 권력의 보호 아래에서 안정된 교역을 하고 싶을 것이다.
“하면, 소태감이 그 상인과 손을 잡고자 한 것인가?”
“그건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소태감이 상인을 부르기 전에는 그 상인이 소태감이나 그 휘하와 접촉한 적은 없는 듯합니다.”
“그래? 흐음.”
주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소태감의 행동이 의미하는 것을 추측해 보았지만, 쉽게 가늠할 수는 없었다.
아니, 구체적인 의미는 차치하고, 소태감이 고려의 상인과 만난 것이 과연 주목할 만한 일인지를 따지는 것도 어려웠다.
소태감이 하는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태자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개인적이고, 소소한 비위(非違)에 불과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속 조사하게 하시겠습니까?”
“혹시 모르니, 그 고려의 상인에 대해 알아보게.”
“알겠습니다.”
태감이 물러나자, 주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서성거렸다.
그의 마음은 서성이는 발걸음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일시적인 마음은 아니었다.
태자의 건강이 회복된 이후, 천자의 자리를 더는 노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머릿속에 선 이후 계속 그와 같았다.
이제는 차후를 노리자며 은근히 다가오던 권신들도 사라졌다. 천자의 무시무시하고 실체적인 경고 때문이기도 했지만, 태자의 후계가 그만큼 탄탄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분명 이성은 이제 그의 운명은 연왕으로서의 길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데, 그럼에도 여전히 주표는 태자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더 어린 시절엔 태자의 실책, 혹은 건강 악화를 포착하여 그에 반대되는 우위를 천자에게 선보이면서 차후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시작한 일이었다.
이제는 관성적으로 하는 일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스스로가 천자가 될 가능성이 전무하지마는 않다는 미련이 남아 그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라…….”
주표는 심란한 마음을 외면하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다가 문득 고려에 생각이 닿았다.
언젠가부터 이상하게 존재감이 커진 동이의 나라.
명국에도 많이 들어온 고려의 물산 때문이기도 했고, 고려의 정치에 명국이 끼어들면서 생긴 존재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이 커진 첫마디에는 한 인물이 있었다.
“그자가 고려의 어느 섬을 다스리고 있다 했던가?”
태자와 자신에게 중공중상의 경세론(經世論)을 설파하여 내심 감탄하게 했던 고려의 하급 관리.
지금 명국의 사정에서는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주표는 만약 그가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그자의 경세론을 바탕으로 천지의 물산을 크게 일으켜 보고 싶기도 했다.
피식.
문득 주표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으니, 자조 섞인 비웃음이었다.
계획한들 무엇할까.
그의 앞날은 연왕일 뿐이고, 연나라만으로는 따로 경세할 수 없지 않은가. 만약 명국의 기초와 다른 법으로 나라를 경영하고자 한다면,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결과만을 낳을 게 뻔했다.
주표는 다시 고개를 흔들면서 고려에 대한 생각마저 떨쳐 내었다. 그러곤 술상을 내오라는 명을 내려 술과 함께 모든 것을 잊고자 하였다.
하나, 그가 고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으니, 소태감과 만난 고려의 상인이 단지 상인일 뿐만 아니라, 고려의 제주라는 섬의 관리이기도 하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즈음에 고려에서의 급변에 대한 소식도 전해지면서 지난날 명국에서 여러모로 활약했던 고려의 하급 관리가 고려의 주역으로 떠올랐다는 것 또한 알려졌으니, 다시 주표의 머릿속에 들어온 고려는 조금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 * *
고신걸은 자신의 처지가 믿기지 않았다.
그가 있는 곳은 남직례 어느 관청의 하옥(下獄)이었으니, 일종의 지하 감옥이었다.
그리 깊은 지하는 아니나, 힘껏 뛰어도 닿지 않는 곳에 촘촘하게 창살이 박힌 작은 창이 나 있을 뿐이었으니, 그 갑갑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갑갑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신걸을 비롯하여 함께 소태감을 만나러 온 고려의 관리들은 제대로 앉아 있을 기력도 없어 지푸라기가 듬성듬성 깔린 습기 찬 차가운 돌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물을 제외하곤, 벌써 닷새째 굶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갇혔을 때만 해도, 적어도 멀건 식은 죽 정도는 주더니, 닷새 전부터는 물만 주었던 것이다.
“고 교리…… 이제 그만 원하는 걸 말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숨 쉬는 것도 힘이 든 와중에 들려온 수하의 메마른 목소리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같은 말을 들었다면 화를 내며 타박했을 테지만, 지금은 고신걸도 큰소리를 칠 기력이 없어 그저 눈만 감은 채 묵묵할 뿐이었다.
그의 속내에서는 수하의 말처럼 저들이 원하는 것을 증언해 주면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도 분명히 있었다.
다만, 제주현백 아래에서 그와 그의 가문이 영달하기를 고대하는 마음 때문에 그 유혹에 애써 저항하고 있었다.
더구나 저들이 원하는 말을 해 준다고 해도 자신들이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야반도주라도 했을 것인데…….”
바로 옆에서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중얼거림이 고신걸의 입술 사이에서 미약하게 새어 나왔다.
그의 말처럼 분명 도망칠 겨를이 있었다.
태자의 태감이라는 자를 따라 소태감, 즉 명국 태자를 보시하는 태감들의 수장을 만났을 때만 해도, 환대를 받았으면 받았지, 이렇게 갇히리라곤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태감이 은근히 캐묻는 것들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만약 그 불편함이 만들어 낼 결과가 이와 같은 것임을 알았다면 그때 야밤에 월담을 해서라도 도망을 쳤을 것이다.
“버텨야 하네, 버텨야 해. 안 그러면 모두가 위태로울 것이야.”
고신걸이 지친 중에 애써 조금 더 크게 말하였으니, 수하들을 향한 경고이자, 약해져 가는 스스로에 대한 경계였다.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기 위해 황해를 도해 하던 명군의 실종 사건.
그 사건의 범인이 고려이고, 제주현백임을 토설하라는 압박에 고신걸은 죽음을 감수하고 버티고 있었다.
* * *
심양군과 현백군은 요동공의 시신을 앞세워 요성의 동문으로 입성하였다.
분명 공성이 아닌 입성이었으니, 요동공이 단기로 문을 열고 나온 이후 그 문은 다시 닫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요성 앞에 고려의 군병이 몰려왔을 때부터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있던 요성의 장령과 군병들은, 요동공이 심양왕의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간, 더 이상 저항할 의지와 이유를 잃었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니고, 요동공 최영 이전에 요동을 경략했던 심양왕 이성계가 복귀하는 것이었기에 요동군이든 요동의 토호들이든, 반기면 반겼지 배타할 이유도 없었다.
심양왕 또한 새로 요성을 점령하였다고 해서, 그곳의 장령과 군병, 그리고 관리와 토호들을 항적(降敵)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요성의 장령과 군병들을 쉬게 하고, 부상당한 자들이 치료받을 수 있게 하였고, 관리들과 토호들을 불러 위무하는 한편, 요성의 백성들에게도 군량미를 일부 풀어 환심을 샀다.
몽주도 심양왕의 곁에서 그가 요성을 접수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개경과 제주에 할 일이 많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심양왕으로부터 약조받은 채굴권을 명문화하기 위해 시간이 나기를 기다려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요성 안팎의 사정을 조금 더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고, 요동을 아래에서 다스리는 자들의 면면도 살펴볼 수 있었다.
그중 몽주의 눈에 띈 자가 한 명 있었는데, 본디 요동 출신이 아니라 황해도 장연군에서 얼마 전에 이주한 자로 장연 노씨 노숙진이라고 하였다.
사실 처음부터 눈에 들어온 자는 전혀 아니었다.
관리들이 저마다 심양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교언영색하는 중에도 그는 딱히 이름을 알리려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관리들이 심양왕에게 인사를 올리는 중에 그가 지난 중란에서 수시중을 속여 요동공에게 바친 자라는 것이 밝혀져 잠시 주목 받은 정도였다.
그 공이 크다면 클 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수시중이 몰락하여 도망치던 상황이었기에 그저 수시중이 요동공에게 죽은 정황을 알게 되었다 정도의 반응만 있었을 뿐이고, 노숙진도 굳이 그것을 공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하나, 요성의 행정을 파악하는 중에 그의 진면모가 드러났고, 심양왕은 물론 몽주도 그를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요동공에게 귀의한 이후, 그는 마군위(馬軍衛)라는 직책을 얻었는데, 마군위는 요동군과 요동의 관리들이 쓰는 말을 관리하는 벼슬이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말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보기보다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높은 직위도 아닌 수준이었다.
어쨌든 마군위로서 노숙진은 심양왕에게 그가 말들을 관리하며 작성한 녹계를 바쳤는데, 이는 심양왕이 요성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관리들에게 각자의 임무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노숙진의 녹계를 확인한 심양왕은 크게 흡족하였는데, 노숙진이 요성의 말을 관리한 이래로 딱히 들인 비용이 늘지 않았음에도 말들의 수가 늘고, 병에 걸린 말이 줄었던 것이다.
거기에 그가 올린 녹계만 봐도 요성에 속한 말들의 상황을 상당히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었으니, 몽주도 그것을 빌려 봐서 노숙진이 보유한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제주의 교리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준비 중인 복식 부기 회계 장부 기록법을 그에게 가르친다면 얼마나 뛰어날까 무심코 상상하게 만들 정도였다.
참고로, 15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 처음 등장하여 도입되기 시작한 복식 부기 회계 장부 기록법을 두고, 동양에서는 더 먼저 등장했다는 주장을 현대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몽주는 고려에서든 명국에서든 왜국에서든 복식 부기 형태의 장부를 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가계부 수준의 단식 부기식 장부라도 제대로 정리하고 있는 경우도 찾기 힘든 게 이 당시 회계 관리들의 수준이었고, 망조가 들었던 고려에서는 아예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꼼꼼하게 예산의 출납을 기록하고, 누락되는 돈을 줄여 말의 관리에 쓰이게 한 노숙진이 자연히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하여, 몽주는 내심 심양왕과 논의하면서 노숙진을 제주로 데려갈 작정을 하였는데, 뜻밖에도 노숙진이 어느새 ‘적’으로 등장해 버리고 말았다.
“약속한 대로 현백에게 요동에서 자유로이 채굴할 수 있는 권한을 줄 것이오. 다만, 한 가지 사안은 변경하고자 하니, 현백께서 양해해 주시오.”
몽주가 요성에 입성한 지 5일 만에 심양왕과 독대하여, 약조한 것에 대해 다시 논의하기 시작하자, 심양왕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었다.
몽주는 일단 바꾸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는데, 심양왕이 변경하길 바라는 것을 듣고는 그가 채굴권을 자신에게 무한정 허락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음을 알 수 있었다.
“현백이 요동에서 채굴하고자 할 때, 인부를 고용함에 있어, 요동의 백성들을 직접 구하는 대신 왕부를 통해 인부를 구하길 바라는 바이오. 물론, 임금 역시 백성들에게 직접 주는 대신 왕부에 한꺼번에 지급해 주시오. 백성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왕부에서 행할 것이니, 현백도 일일이 인부들에게 임금을 나눠 주는 번거로움이 없어질 것이오.”
“…….”
이성계의 말인즉슨, 심양왕부가 일종의 인력파견회사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몽주는 솔직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심양왕의 영토에서의 채굴권을 원한 것은 지하자원을 수급하기 위한 목적도 있으나, 고려와 마찬가지로 경제 기반을 잠식하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다.
인부로 고용된 심양왕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호구지책을 쥔 몽주를 경제적인 왕으로 섬길 수밖에 없을 터이니.
채굴 사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몽주의 위상은 심양왕 못지 않게, 아니 아마도 능가하게 될 것이니, 언젠가 때가 되면 그 힘을 통해 요동의 실권을 장악할 의도였다.
한데, 몽주와 요동의 백성들 사이에 심양왕부, 즉 심양왕 이성계가 끼어들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아무리 임금(賃金)의 원천이 몽주의 채굴 사업이라고 하더라도, 인부들의 주인은 심양왕이고, 임금을 직접 지급하는 대상도 심양왕이니, 오히려 심양왕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다.
게다가 심양왕부가 인력을 수급하는 것을 독점할 것이니, 그를 통해 몽주의 채굴 사업에 제약을 걸 수도 있다.
아무리 몽주가 채굴지를 늘리고 싶다 하더라도, 인부가 부족하다면 불가한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만에 하나 왕부에서 ‘횡령’이 있고, 그것을 ‘착복’할 수 있다면, 심양왕이 보다 강력해질 수도 있었다.
“다른 할 일도 많으실 터인데, 굳이 왕부에서 그런 하찮은 일까지 맡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몽주는 애써 웃는 낯을 보이며, 말을 돌려 거부하고자 하였으나, 이성계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보시오, 현백. 현백이 바란 것은 내 영토에서 채굴할 수 있는 권한이었지, 백성들을 직접 부리는 것은 아니었지 않소. 그럼에도 만약 현백이 계속 직접 백성들을 인부로 부리고자 한다면, 나로서는 현백이 다른 뜻을 가지고 채굴권을 노린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소.”
심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냉랭한 어조가 묻은 이성계의 발언에 몽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하여, 일단 그날은 채굴권에 대한 논쟁은 뒤로 미루고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다시 채굴권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은 이틀 후였는데, 이번에는 심양왕 쪽에서 먼저 청한 것이었다.
다만, 논의의 상대는 심양왕이 아니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심양왕 저하의 은혜로 호부승지직을 맡게 된 노숙진입니다.”
“…….”
호부승지(戶副承旨)는 현대로 치자면 재정부 차관쯤 되는 자리였으니, 심양왕하에서 상당히 높은 벼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자리에 항복한 관원이라 할 수 있는 노숙진이 임하였다는 것은 몽주에게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심양왕이 채굴권에 대해 갑자기 까다롭게 나온 배후가 바로 노숙진임에 틀림없었다.
“그대가 심양왕 저하께 채굴권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한 모양이군.”
“소인은 그저 현백께서 채굴하시는 것이 단지 땅에 묻힌 쇠와 금을 캐내는 일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음을 고하였을 뿐입니다.”
그게 그 말 아닌가.
몽주는 마주한 노숙진을 응시하였다.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니, 노숙진은 훌륭한 행정가의 재목이기도 했지만, 처세술의 대가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살고자 했을 뿐이오?”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노숙진이 살짝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처음 노숙진을 알게 된 자리에서 그가 수시중 이인임을 요동공에게 가져다 바친 이유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그저 살고자 했을 뿐이라며 겸양했던 것이 떠올라 물은 말이었다.
그의 대답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요동공의 신하로서 아무리 그가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하더라도 심양왕 아래에서는 크게 쓰일 가능성은 높지 않았을 것이다.
노숙진은 살길 바랐고, 기왕이면 잘 살길 바랐으니, 모시는 주군이 바뀌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다 제주현백이 요동공을 지원한 배경에 대해 들으면서 채굴권을 요구한 것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에 대해 심양왕에게 고함으로써 신임을 샀을 터였다.
“덕분에 내가 못 살게 되었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곳부터 함주에 이르기까지 심양왕 저하의 광대한 영토에서 마음껏 채굴하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이득이라 할 것입니다.”
노숙진은 말을 잠시 끊고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몽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만약 심양왕 저하께서 현백께 채굴의 권한을 명백히 약조하지 않으셨다면, 아니 심양왕 저하께서 현백께 조금 더 냉정하실 수만 있었다면, 저는 채굴권도 그냥 넘기지 말라고 간하였을 것입니다.”
“……말이 심하군.”
몽주가 딱딱해진 표정으로 말하니, 노 호부승지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만큼 현백께 넘어가는 이권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부디 현백께서도 한 걸음만 물러나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몽주는 노숙진의 숙인 고개를 바라보며, 아쉬움을 곱씹었다.
그 아쉬움은 두 가지였으니, 채굴권을 통해 ‘꿩 먹고 알 먹기’를 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노숙진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결국 몽주는 심양왕으로부터 문자 그대로 ‘채굴권’만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애초에 약속받은 것이 그것이었으니, 그 외의 ‘부가적 이득’은 협상의 대상일 수가 없었다.
억지로 그것을 강요했다가는 심양왕과의 관계가 파탄날 수도 있었으니, 그는 몽주의 입장에서 당장은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제주의 산업 육성을 위해서라도 요동의 지하 자원은 가급적 빨리 얻어야 한다는 것도 길게 논쟁할 수 없고, 강하게 요구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항상 무명의 인재가 문제로구나.”
요동을 떠나는 몽주가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다가 피식 실소하였다.
노숙진은 분명 그가 잘 사는 선택을 하였다.
단기적으로는.
하나, 그는 자신의 경계심을 사는 최악의 선택을 한 셈이기도 했으니, 이는 심양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숙진이든 심양왕이든, 아니 세상의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자원이 부족한 중에도 급격히 발전했던 제주가 왜국과 고려, 그리고 요동으로부터 수많은 자원들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몽주는 노숙진과 협상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그에게 사탕을 한 상자 선물해 주었다.
“요동의 환경이 이 사탕을 만드는 작물을 키우기 적합하다 알고 있었소만, 이제 보니 아무래도 아닌 듯하오.”
사실 심양왕의 숨통을 틔게 만들어 줄 생각으로, 장차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하면 요동에 사탕무 재배 사업을 이전시킬 생각이었는데, 그 계획이 철회되었음을 넌지시 알린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노숙진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은 것을 쉬이 알아챌 수 있었으니, 그도 몽주가 한 말의 의미를 못 알아듣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버스’는 이미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