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7)
불상과 옥판 그리고 불경을 그 목갑에 넣은 사람들은 바로 몽린의 부모였다.
여기서 대의왕은 대의왕불(大醫王佛) 즉, 약사불(藥師佛)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약사불은 병을 고쳐주는 부처였다.
몽주가 꿈속에서 아프고 다칠 때, 몽린의 부모들이 약사불상을 두고 절을 하며 기원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도금 불상도 약사불이었다. 왼손에 작은 항아리를 쥐고 있는 걸로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몽주가 묻은 오동목갑 안에 그가 넣지 않은 물건을 넣은 이들은 바로 몽린의 부모들이고, 몽주가 부처를 팔아 변명한 것을 믿어 자신들도 자식의 무병장수를 위해 그 목갑 안에 공물을 넣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부모란 이런 사람들인가.
옥판에 적혀 있듯 자신의 광명을 팔아서라도 자식을 위하고 싶은 것인가.
새삼 부모에게 자식이란 존재가 그 정도인지 궁금해졌다. 고려의 몽린을 위하는 그의 부모들이나, 현대의 고달픈 삶을 견디는 부모님들이나 모두 자식을 위해 희생을 당연하듯 감수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몽주 또한 아비였던 적이 있었다.
예전 꿈에서 수많은 처첩과 궁녀들로부터 몇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아이들을 낳았었으니까.
다만, 그저 신기한 꿈이라고만 생각해서일까. 그 꿈속 자식들에게 정을 주거나 뒷바라지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당시 몽주에게 꿈속의 자식들은 도구였다.
특히 정략결혼을 통해 수하들의 충성심을 높이거나 주변 부족, 속국들의 정사에 개입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중요한 자식들은 장성한 자녀들이었고, 그들이 얼마나 자랐고,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물론, 그가 관심을 갖지 않아도, 어차피 궁중에서 어미들과 함께 크며 그 시대에서는 가장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랐을 테지만, 그래도 그나 그의 자식들이나 부정(父情)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예전 꿈속에서는 정말 생각 없이 살았던 것 같았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건 그렇고, 언제 이것들을 넣어 둔 거지?”
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나 예전 꿈에 대한 또 다른 후회가 지나고 나자, 몽주는 오동목갑에 들어 있던 몽린의 부모가 넣은 부장물들이 언제 그 목갑 안에 들어가게 된 건지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잠에서 깨기 전의 고려 속 시간 동안 몽린의 부모들이 넣은 것일 수도 있고, 고려의 시점 기준으로 더 미래에 넣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후자라면, 굉장히 복잡해질 것이다. 아무리 물건의 변화에만 국한된다고 하더라도, 과거 속 미래가 몽주에 의해 변화무쌍해지는 셈인 것이다.
물론, 훗날 이번 꿈속 삶이 끝나면, 모든 과거가 없던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삶에…….
“그건 아닌 것 같군.”
다시 생각해 보니, 몽주가 천마산에서 내려온 후, 혼쭐이 나 집에서 근신하고 있을 때, 석삼이가 하루 동안 보이지 않은 적이 있었다.
어딜 갔다 왔느냐고 물어도 어물쩍이며 넘어가기도 했다. 또, 빨래하는 노비가 몽린의 아비 해민의 옷을 널며 풀물이 안 빠져서 고생했다고 투덜대던 걸 들은 기억도 있었다.
아마도 해민이 석삼을 앞세워 몽주가 묻은 오동목갑에 공물을 더 넣으러 갔던 게 틀림없었다.
비록 석삼이가 몽주가 목갑을 묻은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꺽정 바위 근처라는 정도는 알고 있고, 당시엔 땅을 파헤친 흔적 또한 남아 있었을 테니, 목갑을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목갑을 회수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해야 했다.
목갑 안에 들어간 추가적인 부장물에 대한 의문과 물건의 변화에 대한 추측을 대충 정리하자, 몽주는 그제야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들을 어디다 팔아야 하지?”
* * *
지하철 안국역 5번 출구로 나오자 이내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길 건너편에 운현궁이 있었고, 목적지 주변에 천도교 대교당이 있어 정신개벽이니, 대도중흥이니 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기에 금세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고미술 협회.
국내 유일의 국가 승인 감정 기관이라는 권위에 비하면 들어선 건물 자체는 다소 허름했다.
몽주는 매고 있던 백팩을 내려 손으로 더듬거렸다.
백팩 안에는 상자가 있었다. 오동목갑은 아니었고, 운동화 상자였다. 집에서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통으로 쓰던 것이었다.
지금 그 상자 안에는 기존의 잡동사니 대신 귀하디귀한 것이 들어 있었다.
청자연적.
오동목갑의 부장물들 중 연적을 골라 가져온 것이다.
물론, 몽주는 연적을 포함하여 모든 부장물들이 고려 시대의 것임에 확신했다. 그 자신이 직접 넣고, 해민이 또 넣은 것이니까.
하나, 무작정 아무 곳에, 예컨대 지금 몽주가 있는 곳과 가까운 인사동의 골동품점에 그것을 팔러 갈 수는 없었다.
고려 시대의 보물들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건지, 최소한의 기준은 있어야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공신력이 있는 기관의 인증까지 받는다면 판매가 더욱 순탄할 것이다.
“감정료만 안 비쌌어도 다 가져오는 건데…….”
몽주는 투덜거리며 고미술 협회가 입주한 수운회관이라는 건물로 들어갔다.
그가 연적만 가져온 건, 1점당 33만 원이나 하는 감정료 때문이었다.
군대에서 짠돌이 소리 들으며 모아 온 돈도, 학비에 조금 보태고 용돈으로 쓰다 보니, 이제 채 40만 원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즉, 오늘 감정을 받고 나면, 몽주는 부모님께 다시 손을 벌려야 할 처지였다.
“꼭 좋은 가격을 받아야 하는데…….”
4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몽주는 간절히 바랐다.
* * *
“어디 가져오신 물품을 꺼내 보게.”
반백의 머리에 개량 한복을 입고, 뿔테 돋보기를 쓴 노인이 점잖게 말문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때, 받은 명함에는 어디 대학 명예 교수이고 고미술 협회 선정 검정위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미술 협회가 매주 화요일에만 감정을 하는 이유가 고미술 권위자가 직접 감정하기 때문이라고 협회 홈페이지에서 본 걸 기억하며, 몽주는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운동화 상자를 꺼내었다.
부스럭부스럭.
상자 뚜껑을 열자 구겨진 신문지들이 먼저 모습을 보였다.
“허허, 깨질까 염려한 모양……!”
너털웃음을 짓던 감정위원이 구겨진 신문지를 치우자 모습을 드러낸 청자연적을 발견하고 웃음을 지웠다.
그는 연적을 보자마자 성급하게, 그리고 동시에 신중하게 그것을 양손으로 들어 올리고는 이리저리 돌리며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몽주로선 상당히 반가운 반응이었다.
그 반응이란 당연히 진품 고려청자를 봤을 때 보일 법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호오, 이거 참…….”
연적을 한참이나, 돋보기안경으로 봤다가 다시 안경을 코끝으로 내려 맨눈으로 봤다 하던 감정위원이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다른 감정위원도 불러도 되겠나.”
진지한 요청에 몽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노인 감정위원이 수화기로 다른 감정위원들을 다 불러왔고, 실제로 금세 감정실로 네 명의 위원들이 들이닥쳤다.
“선배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중 비교적 젊어 보이는 남자가 노인을 향해 물었고, 노인은 대답 없이 턱짓으로 청자연적을 가리켰다.
이내 청자연적은 하얀 장갑을 낀 감정위원들에 의해 관찰되기 시작했다.
“어머, 세상에, 이 정도 물건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중 중년의 여성이 놀란 속내를 내보이며 감정에 대한 소감을 드러내었다.
그쯤 되자 감정 결과가 어떨지는 분명해졌다. 몽주는 절로 의기양양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중 아까 노인을 보며 선배님이라 칭한 젊은 남성이 몽주를 향해 물었다.
“묻기에 죄송합니다만, 이 청자를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입니다.”
예상되었던 질문이기에 몽주는 미리 준비한 대로 대답했다.
“허허, 조상의 은덕을 자네가 보겠구먼.”
노인 감정위원이 너털웃음을 잠시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보이는 반응을 보고도 별말이 없는 걸 보니, 자네는 이 물건이 어떤 물건인지 어느 정도 짐작을 한 듯하군.”
“네, 고려청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 연적은 최고네. 간송 미술관에 보관된 국보 74호 청자 오리 연적에 버금갈 정도야. 내 나름으로는 확신하고 있네만, 같은 곳에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네.”
“국보급…….”
“그래, 국보급이고, 심사를 거쳐 실제로 등록이 될 수도 있을 정도야. 게다가 보관 상태도 상당히 좋군. 이 정도라면 자네 집안에서도 상당히 애지중지하며 물려 내려왔을 듯하네만…….”
말꼬리를 늘리는 것을 볼 때, 몽주를 향해 네가 집안의 허락은 받고 가져온 거냐는 듯했다.
역시나 예상했던 물음이었다.
“이건 제겁니다. 제가 처분할 수 없는 거라면 가져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몽주는 노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였다. 쓸데없는 상상이나 질문은 거부한다는 표현이었다.
“허허, 그런가. 그렇다면 그런 게겠지. 한데 말을 들어 보니, 적당한 곳이 있으면 이 연적을 팔 생각도 있는 듯하군.”
몽주는 어찌 대답할까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도 그럴 줄 알았다는 양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일단 감정 결과는 고려 청자연적으로 진품이네. 그리고 원래 감정가를 받는 건 따로 수수료가 붙지만, 내가 특별히 무료로 해 주지.”
노인의 말에 주변에 있던 다른 감정위원들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게 몽주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나, 노인은 다른 감정위원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감정가는 오천만 원일세.”
“오천만 원…….”
몽주가 담담히 감정가를 중얼거릴 때, 다른 감정위원들의 인상은 한결 더 일그러졌다. 그제야 노인도 다른 감정위원들의 표정을 알아챈 양 그들을 향해 말하였다.
“왜 내가 너무 적게 불렀나?”
“……아닙니다, 선배님.”
“우리가 감정가를 보수적으로 정하긴 하지만, 이 물건이 그 정도 가치는 있다고 난 생각하네. 자네들은 아닌가?”
대답은 없었지만, 감정위원들의 입에서 반대의 말도 나오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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